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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2015년 7월 23일 새벽 설교
2015-07-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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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50723 목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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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9장 5~8절, 이사야 강해 310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723.mp3
이사야서 삼백열 번째 말씀으로,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어제 살펴본 대로, 히스기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도 충격적이지만, 그러나 오늘 그 말씀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은 더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 나라의 모든 소유가 다 바벨론으로 옮겨가고, 나라의 왕위를 이어갈 후손들이 바벨론의 내시로 전락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히스기야는 “당신이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왕이며, 이게 무슨 신앙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이런 혼란이 더욱 가중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좋습니다, 하는 말과 뒤의 내 생전에는 평안합니다, 하는 문장이 ‘왜냐하면’이라는 이유의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직역하면, 주님 말씀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나 살아갈 동안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다고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됩니다. 참 난감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왕이라 평가되는 히스기야였기에,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서든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보려고 애써 봄직도 합니다. 그래도 히스기야는 우리보다 나은 신앙을 가졌다고 믿어지기에, 그래도 15년이나 생명이 연장되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존재이기에, 이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의심해보게 됩니다.
우선은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는 히스기야의 말 속에 있는 ‘좋다’는 형용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좋다’라고 할 때 가장 일반적인 단어가 바로 여기 쓰인 ‘토브’인데요, 이것은 대단히 넓은 의미,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가진 그런 단어입니다. 영어 ‘good’의 뜻도 그저 ‘좋다’라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기쁘다, 타당하다, 능하다, 친절하다, 적절하다 등 여러 의미가 있듯이, 이 ‘토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이 듣기에 좋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씀이 합당하며, 적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말씀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실수와 잘못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백 번, 천 번 지당하다, 그런 마음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라는 말 뒤의 반응 역시 히스기야의 입장을 헤아려봄직 합니다. 히스기야가 살아가던 당시 주전 8세기는, 말 그대로 전쟁과 재난으로 점철된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저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해서 상상으로만 말씀드릴 뿐이지만,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고통스러운 날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비록 15년의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평화와 안정이 이어진다고 한다면, 당장은 안심이요, 기쁜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각한 잘못을 행했다고 인정된다면, 그럼에도 시간의 유예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일면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일지, 비교적 유다의 왕들에 대한 평가가 너그럽고 후한 기록에 해당하는 역대하의 말씀에는 이 대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5.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26.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히스기야의 생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은 이유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뉘우쳤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히스기야의 이런 행동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가 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두고 다시 한 번 기도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끝났다는 하나님의 선언 앞에서도, 벽을 마주하고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울부짖던 히스기야가, 어째서 나라와 후손들의 문제 앞에서는, 이토록 순응하고 침묵하고 있는가, 하는 실망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분명히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말씀하신 그것이 지당하며 옳습니다. 하오나 그 반대로 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저의 잘못과 허물로 인한 징계, 내 생전에 전쟁과 혼란이 임하더라도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평안과 견고함으로 갚아주시기를 간구드리나이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지 않았을런지요.
한 인간이 자신의 생애 너머, 역사 앞에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라의 왕이든, 아니면 그저 필부에 불과한 백성이든, 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후손과 나라의 문제 앞에 기도와 삶으로 책임지려 하는 것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 문제를 위해 오늘의 내 삶이 피해를 받거나 짐을 나눠져야 한다고 하면, 더 더욱 역사에 대한 우리의 참여는 제한되게 됩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한계이며 연약함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에,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믿고 살아가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의 삶이 더욱 중요한 것이겠지요.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로마서 8:18)고 고백하는 성도만이, 지금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내하며, 오고 있는 주님의 나라를 예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생명 15년이 후대의 처참한 역사보다 소중하다고 여기고 사는 한, 교회에겐 어떤 소망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히스기야의 인생과 신앙이 내리막길에 접어든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오늘 이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현재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던 히스기야의 손이, 후손과 역사 앞에 감추어지고, 뒷짐 지는 모습으로 변질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주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삶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남 이야기 할 것 없이, 오늘 우리의 기도와 삶을 한 번 더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 삶에 무엇이 진정 ‘좋은’ 일이며, 어떤 말씀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하나님의 말씀인지, 이 젊은 시절의 고민들이, 조금 더 살고 싶은 그런 노년에까지 이를 수만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부디 그렇게 살고, 그렇게 늙어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