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우상숭배는 교만의 아들입니다." 2014년 1월 28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1-28 · 첨부 설교 원고 · 약 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첨부 설교 원고
20140128 화요일 새벽 설교 (이사야 강해 30)
고백교회
이사야 2장 12~22절, 우상숭배는 교만의 아들입니다.
이사야서 서른 번째 말씀으로, ‘우상숭배는 교만의 아들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어제까지 우리는 우상을 섬기며, 우상의 풍습을 따라 살아가고 있던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함께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와 동일한 메시지가 구체적인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우선 주목해 볼 것은, 이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한 단어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본문은 교만에 관련된 단어들이 무척 다양하게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12절에 교만한 자, 거만한 자, 자고한 자, 13절의 높고 높은 모든 나무들, 14절의 높은 산, 솟아 오른 언덕, 15절의 높은 망대, 17절의 자고한 자, 교만한 자 등, 거의 모든 절의 내용이 교만, 곧 높아짐과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그러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본문 13절부터 보시면,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 바산의 상수리나무가 등장합니다. 하늘로 60m 이상 자라는 레바논의 백향목은 잘 아시는 것처럼 성전이나 궁전과 같은 크고 화려한 건물의 기둥 역할을 했던 당시의 최고급 목재였습니다. 당시 최고 상류층들만이 백향목으로 지은 집에 살았습니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도 같은 맥락이지요. 최고의 건축 자재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나안 지역에 존재하던 토착 종교의 제단에 사용되는 나무였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우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말씀은 이러한 백향목이나 상수리나무들과 같은 자연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이기 이전에 이러한 부와 권력, 그리고 종교적인 타락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교만하고 부패한 상류층에 대한 말씀임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15절에 기록된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은 당시의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구절입니다. 5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가장 많은 망대를 세운 이가 바로 이사야서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웃시야왕입니다. 그는 외침에 대비한 전쟁을 위해 군사적 요충지가 아니었던 곳들에까지 이러한 망대를 세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가 자신의 안전을 위한 자구적 방책, 그것이 망대로 대변되고 있습니다. 16절에 기록된 다시스의 모든 배는 당시의 경제적인 힘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스페인 지역에 있던 다시스는 우리에게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났던 지명으로 익숙한데요, 그곳은 아프리카와 이집트, 그리고 근동 지역을 오가는 모든 국제 무역선의 근거지입니다. 그러니까 다시스의 배라는 것은 당시의 부와 풍요를 일차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절의 아름다운 조각 역시 그 같은 부를 누리던 상류층이 좋아했던, 그래서 다시스의 많은 배들을 통해 실어 나르던 예술품들이로, 이 역시 인간의 교만을 묘사하는 상징물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가 인간의 힘과 능력,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교만에 기초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하고 높아진 우리의 모습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임을 하나님은 선언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질문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그토록 교만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까.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의 우상들을 사랑하는 것이니 교만보다는 배신이나, 부정과 더 깊이 연관된 것이 아닐까 질문하게 됩니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눈에 보이는 신을 섬기겠다는 것이 우상의 한 측면임을 고려해 볼 때, 우상숭배는 또한 믿음 없음에 근거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우상숭배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주 주일 예배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함께 나눈 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calling의 호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 ‘에노스’로서의 인간,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이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어 그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겠다는 고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이처럼 철저히 인간 자신에 대한 자각과 그로 인한 실존적 겸손의 모습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실존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행위의 끝에는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목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행을 베풀고 인격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덕스러운 일이자 존경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 궁극적 목적이 나의 영광과 나의 행복일 때, 그 모든 행위들은 다 인간의 교만이 투영된 자기 복제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 인간의 모든 우상은 본질적으로 교만이 낳은 아들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자애로운 주인의 은혜로 풍요롭고 복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악한 종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며 오직 자신의 유익과 영광만을 위해 주인의 은혜와 축복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악하고 뻔뻔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상을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에게 빼앗긴 당신의 영광을 되찾아 오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한갓 코의 호흡에 그의 인생이 달린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한 우상, 그 우상이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질 수 없기에,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위험을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다. 유일한 피난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 다시 돌아설 수 있도록 하나님은 본문 12절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한 자에게 가장 좋은 특효약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많은 유익이 있는 좋은 치료제입니다만, 그 많은 효능 가운데 첫째가 바로 교만의 치료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몸이 병들면 겸손해집니다. 세상에 부족한 것이 없었던 이방인 장군 나아만을 떠올려봅니다. 그가 한갓 어린 노예에 불과했던 한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엘리사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의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연약함을 가장 쉽고 가장 빠르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 외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관계적인 문제들 역시 다 우리의 무능과 한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들인데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만한 자녀들을 교훈하시고 책망하시고 또 고쳐나가실 때, 그리고 도저히 자애로운 방법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할 때, 불가피하게 그러한 고난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이 스스로 겸비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낮아질 수 있도록 자신을 늘 관리하고 조율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의 승부는 거기서 판가름 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교만에서 나온 모든 것들은, 설사 그것이 덕이요, 아름다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하고, 멀리 피정을 가고 하는 모든 노력들이 실상은 인간의 고질적인 교만을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이었던 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교만을 직시하고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높고 높은 백향목가 상수리나무들을 우리 스스로 베어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 싼 망대,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의 전부로 고백되기 일쑤인 다시스에 정박한 배, 거기 담긴 금은보화를 스스로 바다에 빠뜨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말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다시 예배 받으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받으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우상과 함께 모든 우상의 숭배자들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서게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1절에서 이사야가 냉소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그 진노를 피하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어디로 숨고 어디로 피하든 하나님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겸비해지십시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으로 섬기던 모습을 이제 그만 포기하십시오.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심판 속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겸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만이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영광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오늘 이 하루를 가장 온전하게 살아낼 수 있는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교만한 저희의 마음과 삶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호흡이 고작 이 작은 코에 놓인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미약한 존재가 세상의 모든 권세와 부를 누리겠다고 자고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그와 같은 교만을 주님 깨닫게 하시고, 그로 인해 생긴 삶의 우상들을 밝히 보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