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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2015년 7월 12일 주일 설교

2015-07-1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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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2 성령강림 여덟째 주일 ---------------------------------------- 사도행전 11장 1~18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 설교 음성파일 : 이번주는 설교 음성이 없습니다. 성령강림 여덟째 주일 말씀으로,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예배는 평소와는 참 다른 느낌입니다. 항상 예배를 같이 드리던 분들 몇 분은 부재중이시고, 평소 함께 하지 못한 지체들이 여기 같이 계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시는 대로 저희는 사도행전을 계속 묵상하고 있어서 내용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본문의 전체적인 얼개를 여러분께서 충분히 알고 계신지가 우선 좀 걱정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소요가 되더라도 전반적인 내용을 한 번 정리를 하고 오늘 본문을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평소 말씀을 함께 해 오신 우리 지체들도 이런 정리를 통해서 나름의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중요한 두 사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입니다. 베드로는 다 아시는 주님의 제자이고, 지금 초대교회의 실질적인 리더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다가, 주변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 성도들을 돌아보고 위로도 하고, 여러 신앙적 도움을 주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인근 지역을 순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가이사랴라는 먼 지역에 있는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인에게로 보내셔서 만나게 하십니다. 2천년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한 그런 만남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의 백부장입니다. 백 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교, 여기 있는 종성이와 같은 정도 계급의 간부 군인입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 중의 하나였으니까, 본국 로마에서 유다로 파송되어 주둔하고 있는 지배국의 군인인 셈입니다. 고넬료가 착하고 의로워서 당시 유대인들과 여러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로마 군인은 로마 군인입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적국의 군인이었고, 종교적으로는 가까워질 수 없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오작교가 되어 주십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을 조금씩,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게 하십니다. 군인으로서 이동에 제한이 있던 고넬료에게로, 이동 중인 베드로가 다가가게끔, 아직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고넬료에게,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가 먼저 찾아가게끔 인도해 가십니다. 먼저 고넬료가 머물고 있는 가이사랴 근처 욥바라는 곳에 베드로를 보내신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하셔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찾아내도록,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방문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렇게 겨우 고넬료를 찾아가 만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과 친구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고,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이 죄 사함을 얻게 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성령이 고넬료를 비롯한 그곳의 사람들에게 강하게 임재함을 경험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120명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위에서 받았던 그 성령이 그때와 똑같이 고넬료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그래서 제2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만을 향해 부어지시는 것으로 생각했던 그 성령 하나님이, 자신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진 것입니다. 복음이 드디어 이스라엘의 경계를 뚫고 나아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베드로가 경험한 똑같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방인으로서 방언으로 말을 하고, (어떤 방언이었을지 궁금한데요, 혹시 유대인들의 언어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그 순간, 당황한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아마 베드로는 거의 멘붕에 가까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지다니, 이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율법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않은 채로, 성령이 임하시다니.’ 복음도 전하고 세례도 베풀었지만, 베드로는 궁금하고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어떻게 이방인과 같이 밥을 먹고 교제할 수 있느냐, 그것도 로마군의 장교와 더불어, 더구나 그에게 세례까지 베풀고 오다니, 제정신이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일단 유대교에 입문해야 하고, 그러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건데, 그런 것도 없이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증해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격하게 항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가 그간의 일들을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째서 자신이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그간 자신이 경험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4절부터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명 중에서 앞서 실제 베드로가 경험한 것과는 다른 내용의 설명, 그리고 추가적인 내용이 몇 가지 눈에 들어옵니다. 앞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아시겠는지요? 먼저 이 설명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본 베드로의 속마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세례를 베풀었느냐, 성령이 베드로더러, 너 세례를 베풀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음에도,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 끝에 보면 ‘생각났노라’고 되어 있는데, 그 생각으로 인해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 생각’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하셨던 말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하는 그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상황에서, 요한의 세례를 대체하는 성령의 세례. 그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유대인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이제 물로 하는 세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에게 성령의 세례가 베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이미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을 확증하는 물로 하는 세례를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17절에 보면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렇게 베드로가 말하는데,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그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증거인데, 그에게 다시 깨끗하게 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그 일을 막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주시는 것, 그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너는 이미 깨끗하여졌다. 너는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다시 정결케 할 필요가 없다. 그 어떤 인간적인 노력이나 과정이 필요 없이, 이미 너는 하나님께 용납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거하실 수 있을 만큼, 너의 몸과 마음과 삶은 충분히 거룩해졌다, 네 안에 이미 하나님이 부어졌다, 이미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었고 이루어졌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방이이든 유대인이든 성령 안에 평등하며, 같은 성령으로 구원에 이른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 것이다, 사람의 행위나, 종교적인 의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으로 성령이 부어진다. 그것을 막을 어떤 인간의 제약도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부어진다.] 이것이 생각나고 깨달아진 베드로였기에, 당연히 세례를 베풀어 교회의 한 지체로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했을 때, 베드로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본문 18절과 같이 반응합니다. 18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지금까지 했던 베드로의 이야기에 대한 요약이라 할 수 있는데요, 베드로가 했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빠져 있고, 앞에서는 없던 말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두 가지가 무엇인가요? 네, 빠진 것은 ‘성령의 세례’이고, 새롭게 추가된 것은 ‘생명 얻는 회개’라는 말입니다. 왜 이러한 말이 왜 나오게 되었을까요? 생명 얻는 회개와 성령의 관계는 말 그대로 하나의 다른 표현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태양과 햇빛, 이 정도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햇빛의 존재는 태양을 전제로만 가능한 말이듯, 생명 얻는 회개는 오직 성령을 전제로만 가능한 말입니다. 성령에 대해 말하면서 이들이 ‘생명 얻는 회개’를 말한 것은, 이 둘이 당시 성도들에게는 하나처럼, 거의 동어반복처럼 여겨질 만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런 대체가 친숙한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하시는 가장 중요하고 최우선적인 사역이 바로 생명 얻는 회개인 것입니다. 생명 얻는 회개, 여기서 여러분이 모르는 단어는 없을 겁니다. 생명, 얻는, 회개,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익숙한 말입니다. 조금씩만 설명을 보태면, 우선 생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 있네,’ 할 때의 그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영생을 의미합니다. 헬라어에서 ‘생명’은 두 단어가 있습니다. ‘프쉬케’와 ‘조에’인데, 육체적인 생명, 목숨은 ‘프쉬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하고 참된 생명은 ‘조에’입니다. 그럼 퀴즈, 사도 바울이 주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사도행전 20:24)고 할 때, 생명은 프쉬케인가요, 조에인가요? 그럼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하실 때의 생명은 프쉬케일까요, 조에일까요. 네, 이제 이해가 되셨으리라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회개, 이런 뜻이 되는데, 여기 ‘얻는’이라는 말은 사실 헬라어에서 전치사로 되어 있습니다. ‘메타노이안 에이스 조엔’에서 ‘에이스’를 번역한 것인데, 영어로는 ‘into’ 정도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에 이르는, 생명을 향한, 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생명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럼 회개에 대해서 마저 살펴봅시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한자로는 뉘우칠 ‘회’에 고칠 ‘개’ 이렇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고치다, 이런 뜻입니다. 사실 이 말은 꼭 예수 믿는 사람만 쓰는 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종종 회개를 하고 살아갑니다. 누구에게 잘못한 걸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것도 회개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사전적인 회개는 더 안 합니다. 말로는 잘못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고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그런 개별적인 잘못에 대한 고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회개와 생명 얻는 회개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 얻는 회개가 있다는 것은, 생명을 얻지 못하는, 조에로 이어지지 못하는 회개도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하는 회개는, 아무리 반복하고 아무리 깊은 성찰 가운데 행한다고 해도, 조에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조에가 아닌 조에 반대편, 곧 죽음으로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의 말씀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새번역,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일반적인 회개가 왜 조에가 아닌 죽음, 곧 ‘타나토스’로 이어집니까? 똑같은 회개인데도 성도와 세상의 회개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깨닫고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을 고쳐먹고 상대방과 화해를 청합니다. 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그럴 때 성도와 세상은 어떤 마음의 결론에 이릅니까? 아마 세상은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그래, 내가 조금 더 인격적으로 온전해졌구나. 예전에는 끝까지 미워하고 말았을 텐데, 그래 내가 좀 성숙해졌어. 그래, 앞으론 좀 더 잘하자.’ 뭐 이런 결론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 놓고서도 정반대 결론으로 갑니다. ‘그래, 역시 나는 안 돼. 나라는 인간은 뼛속부터 죄인이구나. 절대로 내 인격으로는 남을 용서할 수가 없구나. 천 번을 넘게 다시 태어나도, 나는 여전히 죄만 짓고 살겠구나. 예수가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지옥 아랫목에 누워 있을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비판은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같은 회개인데, 결론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생명으로 향하는 회개의 실체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향한 회개와 죽음을 향한 회개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얼핏 반대 같습니다. 내가 살고, 그래도 내가 뭔가 소망이 있는 것 같은 회개는 결국 죽음으로 가고, 아무리 괜찮은 모습 같아도, 결국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회개는 오히려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이 말도 안 되는 회개가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가능해집니까?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누가 내 안에 그 회개를 심어주지 않으면, 누가 내 안에 그 회개를 일으켜주지 않으면, 결코 우리 내면 안에 없는 회개, 그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엄밀히 말해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18절을 이야기하는 성도들이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하는 말, ‘주셨다’는 말에 주목해 주십시오. 사실 이 ‘주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미’ 자체가 받을 자격 없는 이에게 은혜로 주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 회개도 주셔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넬료에게 임하셨던 것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우리를 회개케 하시기 전에는, 세상 그 누구도 이 회개를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생명 얻는 회개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이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그 둘은 여기서 갈라집니다. 생명을 향한 회개가 있느냐, 없느냐, 성령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 여기에서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남들보다 인격적으로 모자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착하고 순하고 겸손한데도, 스스로 나야말로 죄인이며, 나야말로 주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저 죄 많은 사람들, 저 흉악범들,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그래도 나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 생명 얻는 회개를 고백하지 못한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세례의 순서가 잘못된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지도 못했는데, 물로 하는 징표의 세례는 먼저 받은 경우도 있겠습니다. 물론 순서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 세례를 받은 그것이 성령의 세례로 무조건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 예수를 믿고서도 죽기 직전에 가서야, 비로소 “나는 천국 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성도, 목사가 많은 것을 여러분 남의 이야기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며칠 전 대화중에 아내에게 크게 꾸중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요한복음 학교 강의 중에 했던 말 때문인데, 그 날은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아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지체들은 다 구원을 받았으니 상관이 없습니다만,’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겁니다. “모든 우리 지체들이 다 성령의 세례를 이미 받은 것으로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느냐, 그리고 그것이 성도들에게 구원에 대한 얼마나 잘못된 관점을 가지게 하는지 아느냐?” 하는 그런 말을 아내가 한 겁니다. 제가 아무 대꾸도 못하게 되었는데요, 맞습니다, 여러분. 교회 다닌다고 모두 생명을 얻는 회개를,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죄인이며, 아들 예수를 대신 죽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마귀의 자식임을 인정하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없다면, 여러분은 구원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안심하면 안 됩니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와서 아예 머릿속에 이 말들이 새겨져 있는, 모태신앙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은 절대로 그런 마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외워왔기에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하다고 하는데, 실제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 고백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후회하는 분들이 이런 케이스입니다. 평생 교회의 언어를 배워 그런 느낌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내 믿음이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받은 믿음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합니까? 그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면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 태어나는 것이기에, 그 믿음이 있는 성도는, 자연스럽게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나도 가겠노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성도는 그 길을 가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별 볼 일 없이 살게 되어도, 비록 내가 가진 많은 기득권들을 내려놓게 된다고 하여도, 생명 얻는 참 된 회개를 얻은 이들은, 주님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이기적인 몸을 가지고서도 그런 마음이 듭니다. 너무나 기묘한 일입니다. 매번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넘어지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바라봐주지 않아도, 여전히 나는 세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도, 아직 내 마음은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소리에 더 예민하다고 해도, 그런데도 주님의 길을 가겠다는 고백이 포기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러한 그 고백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어도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 내가 뭘 따라 살아야 하는지 관심도 없다면, 그는 정말 내 안에 성령이 있는지, 진정으로 심각하게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정말 여러분은 모두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경험하셨습니까? 그 회개를 주시는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상황이 이러하지만 그렇다고 여러분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시고,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 부어주시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요약하는 이 표현들 속에 그러한 주님의 간절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 중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베드로와 고넬료의 대화를 묘사하는 내용과 조금 달라진 표현이 있는 것인데요, 성령이 임하던 시점에 대한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10장에 가서 보면 언제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까? 44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앞의 43절, 42절의 이야기일 텐데, 그때는 이미 베드로가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시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11장에서는 베드로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11장 15절에 보면,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말을 한참 하고 있었을 때가 아니라, 말을 시작할 때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까? 물리적 시간으로 보면 베드로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성령이 임한 것은 아닐 겁니다. 앞에 여러 이야기들이 먼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느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으로, 그렇게 느껴진 겁니다. 고넬료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주님의 성령이 부어지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시고, 또 얼마나 힘들게 준비해 오셨는지, 베드로는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기에, 성령의 임재가 그렇게 급박하고 즉각적으로 나타났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은 그렇게 부어지는 은혜입니다. 누구에게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모하는 모든 심령 가운데, 우리 인간의 소망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으로 부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럴 만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아니면 구제가 불가능해서 성령을 주십니다. 따지고 달아보고 계산해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넉넉하게 받아 누릴 수 있도록, 부어주실 만반의 준비가 된 은혜가 바로 생명 얻는 회개인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기다려야, 내가 뭔가를 주님께 해야 받는 성령이 아닙니다. 이미 주시기로 마음먹고, 주실 준비를 마친 성령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사모하는 자에게 반드시 성령은 주십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더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주의 성령이 베드로의 말씀이 증언될 때 임하셨듯이, 오늘 이 복음이 선포될 때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성령의 은혜가 부어진 지체들에게는 더욱 풍성히 부어지기를 원하고, 그래서 주의 십자가의 길, 나도 가겠노라고 고백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혹시 아직 그와 같은 회개에 이르지 못한 지체들이 혹 있다면, 오늘 이 말씀과 함께 성령의 임재가 부어지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혹시 하나님과 그간 소원해진 분이 계시다면 다시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의 불꽃이 불일 듯 타오르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부부 싸움이, 칼로 물 베기라 하지만, 하나님과의 서먹해진 관계는 칼로 공기 베기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돌아서고 다시 아바 아버지, 부르기만 하면, 모든 막힌 관계가 소멸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미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수고만 있으면 족합니다. 생명 얻는 회개를 위한 모든 주님의 준비는 이미 다 마쳐졌습니다. 부디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는 자리에 나아가, 풍성히 그 생명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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