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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2015년 6월 28일 주일 설교
2015-06-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50628 성령강림 여섯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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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0장 44~48절,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628.mp3
성령강림 여섯째 주일 말씀으로,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도 질문으로 설교를 열고자 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말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 사도행전 10장이 지금처럼 48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9절까지 있어 거기서 끝났다고 한다면, 여러분 49절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좀 더 분명하게 다시 질문을 드리면, 오늘 마지막 절 말씀처럼, 고넬료의 가족들이 베드로와 여섯 형제들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한 그 요청에 대해, 과연 베드로는 거기에 며칠 더 머물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요, 아니면 그 청을 거절하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갔을까요?
지난 5월 초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는 주일 설교를 하면서, 저는 오늘 이 베드로의 여정이 오래 전 요나 선지자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고, 또 과거의 그 일에 대해 베드로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요나에게 욥바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기 위한 도피의 장소였지만, 베드로에게 욥바는 지금 이방인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로 가기 위한 일종의 순종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넬료를 향한 베드로의 사역을 오래도록 묵상하면 할수록, 저는 왠지 베드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이 사역을 감당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설교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는 뼛속까지 주님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집에서도 그는 여전히 충성된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여섯 명의 든든한 동료 증인, co-witness 역시 동행하고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오늘 베드로의 모습에서 증인 그 이상의 마음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순종하긴 했는데, 정말 기쁘고 감사한 순종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때, 성령이 그곳의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45절을 계속 보면, 이것을 목도한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부어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다’라는 헬라어 ‘엑시스테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놀랄 때 쓰는 그런 표현이 아닙니다. 단어 앞에 ‘엑시’ 뭐 이런 표현이 붙은 걸 보면 눈치를 채시겠지만, 정신이 좀 나가는 정도의 매우 강한 뉘앙스를 가진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또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를 보면, 그 정확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한두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고린도후서 5장 13절(신약성경 291쪽)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아멘. 여기 어떤 단어이겠습니까? 맞습니다, ‘미치다’라고 나오는 이 말이 바로 ‘엑시스테미’입니다. 보통은 미쳤다, insane, 이런 의미인 겁니다. 한 곳만 더 찾아보면, 마가복음 5장 41~42절(신약성경 62쪽)입니다. “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지금 이 장면은 당시 유대인들의 예배를 책임지는 사람,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소녀를 주님이 살려주신 상황입니다. 이 때 죽은 소녀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 그것이 바로 ‘엑시스테미’였던 것이지요.
이제 다시 사도행전 10장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을 받은 이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충격과 놀라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우리는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고, 물론 앞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또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고친 베드로였기에, 사실 이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이 놀랍지 여러 번 반복되면 그 놀라움은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놀랐다는 것은, 고넬료의 집에 와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베드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베드로의 눈앞에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 자신의 모든 사고 체계를 뒤흔드는 그런 천지개벽의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신을 조금 차렸을까요, 이제 베드로는 그곳의 이방인들에게 차례로 세례를 베풉니다. 47절, 48절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히는 본인이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함께 간 여섯 명의 형제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한 것입니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고넬료와 그 가정엔 정말 큰 영광이고 기쁨이었을 텐데, 베드로는 그러지 않습니다. 아울러 베드로 입장에서도 이처럼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의 현장에서 당연히 직접 세례를 베푸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성령을 베푸는 데 쓰임 받는 사람 따로, 세례를 베푸는 사람 따로 입니다. 마치 뭔가 머뭇거리는 듯한 그런 모습입니다.
그렇게 세례를 받은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며칠 더 묵었다가 가기를 청합니다. 우리말 성경이 그렇게 청한 주체가 고넬료 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라는 복수형인 것은 원문을 정확하게 옮긴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 전부가 베드로에게 부탁한 것이었고, 며칠 더 함께 있으며 말씀을 듣고, 교제를 나누고 싶어한 그런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0장은 이렇게 여기서 끝납니다. 베드로가 그 청을 받아들여 함께 머물렀는지, 밥만 먹고 곧바로 나와 돌아왔는지, 세밀한 기록으로 유명한 누가는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앞서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과 함께 있던 베드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힘든 그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는 여러 날 함께 먹고 잠을 잤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곳을 잠깐 다시 가봅니다. 9장 43절, 함께 읽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보시는 대로 이 말씀으로 사도행전 9장이 끝납니다. 앞의 여러 은혜로운 과정들을 기록한 후 결론이 이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10장 역시 이와 매우 비슷한 구조로 끝납니다. 베드로가 여러 과정을 통해 증인의 사역을 은혜롭게 마치고 결국 10장은 48절, 베드로에게 함께 묵기를 청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에 대한 답이 열려진 채 그렇게 본문이 끝납니다. 누가는 분명 그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것을 기록하지를 않습니다. (*) 여러분, 과연 베드로는 거기 머물렀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왜 그렇게 놀라고 왜 그렇게 머뭇거렸을까? 또 누가는 왜 그 이야기를 굳이 기록하지 않은 채 이 이야기를 마무리했을까?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다른 상상을 해 보게 됩니다. 만약 고넬료가 신임과 명망이 두터운 로마의 장교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가난하고 이름 없는, 그런 존재였다면, 차라리 무두장이 시몬처럼, 누가 봐도 안쓰럽고 안타까운 사람이라면, 그래도 과연 베드로가 그렇게 머뭇거렸을까? 만약 고넬료가 정말 가난한 이방인이었다면, 그가 몸이 불편한 이방인이었다면, 그가 노예로 살아가는 그런 민족의 백성이었다면, 그랬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고넬료가 여기 단지 여행을 온 이방인이었다면, 그가 예수님 태어나실 때 동방에서 온 점술가들 같은 그런 방문객으로서의 이방인이었다면, 그랬다면 어떠했을까?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에 가서 보면,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믿은 분들은 아주 잘 알고 있는 한 이방인 장군의 이름이 나옵니다. 바로 수리아[아람]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이라는 장군입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위험한 적국인 수리아라는 나라의 당시 국가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문둥병, 한센병에 걸려 있었는데, 그 장군의 아내의 여종 중에, 이스라엘을 약탈할 때 납치해 온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나라에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다. 장군이 선지자 앞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아만의 평소 집안에서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말이 나아만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아만은 자신의 왕에게 찾아가, 자신이 그 선지자에게 가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수리아의 왕이 이스라엘의 왕, 당시 여호람이라는 왕에게 친서와 함께 엄청난 보물들을 실어 보내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두 나라는 전시 상황에 버금가는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에, 이 글을 읽은 여호람 왕은 난리가 납니다. ‘이게 또 다른 전쟁의 빌미인가 보다. 이제 우리 큰일 났다. 이를 어쩌냐.’ 신하들을 닦달합니다.
그 말을 들은 선지자 엘리사가 왕에게 말합니다. “걱정 말고 그 장군을 내게로 보내십시오,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해서,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결국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에 찾아가게 되고, 나아만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병을 치료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얼마 있지 않아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또 벌어집니다. 5장에 치료 이야기가 나오는데 6장에 전쟁입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몇 번의 전투를 이스라엘이 이기지만, 결국 나중에는 사마리아 성이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얼마나 수리아의 공격이 치열했는지, 성경은 당시 사마리아 성에 갇힌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기들을 먹는 일까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그런 관계인 것이지요. 그러니, 나아만이 그런 적국의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해서는 안 되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나아만 장군을 예수님이 언급하신 장면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신약성경 94쪽입니다. 4장 14~15절,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그래서 주님이 고향인 나사렛으로 이제 이동해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16절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이때 주님이 읽으신 성경이 이사야 61장인데요, 아래 18절, 19절을 읽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22절부터 24절입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정작 주님이 태어나신 곳에서는 아무도 주님을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는 것을 보며 하시는 주님의 탄식이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이상한 예시를 몇 개 추가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25절부터 27절인데요,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정작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것을 보시며,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잘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은혜 밖에 있던 이방인에게로 전파될 것을, 시돈의 과부, 또 앞서 살펴 본 나아만 장군의 예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모욕이요, 충격이었는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적국 장군에게 은혜가 미치고, 그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바로 나아만을 예를 들어 설명하셨는데, 사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오늘 베드로가 복음을 증언하고 이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이 고넬료라는 사람, 그의 정체성이 바로 그 나아만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됩니다. 고넬료 역시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든 적국의 장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고넬료의 구원이 일어난 연대는 대략적으로 주후 40년 정도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때부터 30년 후, AD70년에는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의 예언 그대로(눅21:6), 오늘날 우리가 통곡의 벽으로 알고 있는 성전의 서쪽 벽 하나를 제외한 모든 성전이 다 무너집니다. 당시 이 부분을 남겨둔 이유는, 그들이 얼마나 커다란 성전을 파괴한 것인지를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처참한 파괴였습니다.
당시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는 이렇게 당시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모든 출구가 막혀 성 밖으로 도망칠 수 있는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기근이 점점 더 심해저 가족과식구들이 죽어갔다. 옥상에는 못 먹어서 완전히 탈진한 여자와 간난아이들로 북적거렸고, 길에는 노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아이들과 어른, 청년들은, 못 먹어서 부은 얼굴로 시장거리를 유령처럼 돌아다녔으며, 아무 데나, 쓰러져 죽었다. … 마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너무 못 먹어서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고는 남은 부분을 숨겨 두었다. 강도들이 구운 구수한 냄새를 맡고는 음식을 달라고 협박했다. 나중에 사람 고기라는 것을 알고는 강도들은 기겁을 하고는 그 집을 도망쳐 나왔다.”
제가 오늘 고넬료의 이야기를 하면서, 구약의 수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를 이제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넬료라는 로마의 장교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수리아의 나아만, 그런 존재였습니다. 비록 그가 착하고 좋은 일들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나고 상황이 바뀌면,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인 로마를 위해 이쪽을 향해 창을 겨누고 칼을 겨눠야 할 적의 장수입니다. 말 그대로 국가의 원수요, 이 민족의 원수, 그가 바로 고넬료인 것입니다. 최초의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놀라운 순간에 있어서, 하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일, 복음의 역사를 써 내려가신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유독 민족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나라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다닐 때도 늘 검을 들고 다녔고, 주님이 언제 독립투쟁에 나서시나 늘 궁금하게 여기며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결국 주님의 방법이 십자가임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그들은 완전하게 그런 과거의 마음들을 버릴 수 없었을 겁니다. 여전히 그들은 고통스러운 속국의 삶을 살고 있었고, 언제일지 모르는 전쟁과 죽음 앞에 늘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의 장교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경험했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면, 그리고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어야 한다면, 왜 굳이 로마여야 하고, 왜 굳이 그들의 장수여야 하는가, 어째서 우리의 원수에게 우리의 적에게 가장 먼저 주의 성령이 내려야 하는가? 왜 하필 고넬료인가, 차라리 저 이방 노예나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타국의 종이나 무두장이여도 좋았을 것을, 무력으로 자신들을 정복하고, 자신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신 같지도 않은 신들을 죄다 섬기고 있는 로마의 고넬료인가. 그들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며 몸서리를 쳤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 다시 한 번 오늘 우리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과연 베드로는 그 집에 머물렀을까요, 아니면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을까요?
오늘은 성령강림 여섯 번째 주일이자, 순교자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으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여러 생각이 나는 순교자들이 있지만 오늘은 여러분과 엘리엇이라는 이름의 부부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그분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도 보고, 또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도 읽으신 분이 계실 겁니다. 남편 짐 엘리엇의 삶과 죽음을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기록한 책입니다. 그녀는 “휘튼 칼리지 재학 시절 짐 엘리엇을 만난 그녀는 결혼 후,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 선교를 떠납니다. 1956년 그의 남편 짐 엘리엇이 쿠라라이 강에서 처참하게 순교했을 때, 그녀는 30살이었고 딸 발레리는 생후 10개월의 갓난아기였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순교하자, 엘리엇 여사는 간호사 훈련을 받았고 1년 후 남편이 순교한 그 아우카 족에게로 돌아가, 남편을 죽인 부족 속에 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아우카 족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0년 후엔 짐 엘리엇을 살해한 장본인 ‘키모’가 그 부족 최초의 목사가 됐습니다. 아울러 생후 10개월이던 딸 발레리도 그 아우카 족과 함께 살았는데요,”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그 책에는 딸에게 엄마가 보내는 헌사가 있습니다.
“발레리에게. 아버지의 글을 통해 언젠가 너는 네 기억에 없는 아버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내 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되면서 너 또한 아버지가 사랑했던 분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따르게 되기를 기도한다.” 바로 이 엘리자베스 엘리엇 여사가 지난 주 월요일, 6월 15일, 긴 치매와의 투병을 끝내고, 향년 88세로 별세했습니다. * 그녀가 아우카 족 사역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녀는 방송을 늘 같은 말, 이 말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지금 영원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You are loved with an everlasting love.”
며칠 전 신문에서 우리는 참 놀라운 이야기 하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에서 “흑인들이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며 권총을 쏘아 신자 9명을 숨지게 한 스물한 살의 딜런 로프라는 청년. 그의 보석 심사 재판에서, 그 피해 가족들이 그에게 한 말들입니다. “우리는 두 팔을 벌려 너를 성경모임에 받아들였지만 너는 내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였다.” “너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다. 엄마를 다시 안을 수 없고 함께 얘기를 할 수도 없으며, 많은 이들이 너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너를 용서할 것이고 나도 너를 용서한다.” “이는 우리가 사랑으로 살아왔으며 이번 사건도 사랑을 유산으로 남길 것이며 증오는 결코 사랑을 이길 수 없을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네가 우리의 용서를 참회의 기회로 삼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 몸에 있는 살 오라기 하나하나가 모두 아프고, 나는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기도하겠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신 궁극적인 이유,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증인으로 이 땅을 살 때, 고넬료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그들과 함께 하나의 성령 안에 머물게 하시기 위함임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 전 우리의 상태에 대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원수, 그것이 죄의 실존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통해 자녀로 삼아주셨고, 이제 그 ‘사랑’의 증인으로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나아만이나 고넬료와 같은 사람도 없고, 아우카 족도 없습니다. 그리고 딜런 로프와 같은 그런 청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없을 뿐, 우리는 여전히 이 말씀으로 도전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원수를 만들지 않는, 원수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고 그 원수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끝까지 소통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진정한 십자가의 삶을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의 의미입니다.
저는 엘리자베스 엘리엇 여사가, 그리고 미국의 그 교회의 성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사랑의 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던 것도 아닐 겁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가 가진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그 경계를 허물 수도 없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보여주는 충격이 그것을 반증합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주시기를, 그리고 그 성령이 더욱 충만히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며, 주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겠노라고 고백하게 하시기를 기다리며 사모할 뿐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더 충만히 부어지면, 우리의 언어가 바뀔 것이고,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과 보복의 욕구가 잠잠해질 것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원수를 만들지 않는 삶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를 채우면,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는 길을 배우게 될 것이고, 주의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면, 원수들의 곁에 주의 복음을 들고 나아갈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의 잠정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갈 시점입니다. 여러분, 과연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베드로였다면, 그와 함께 간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는 머물 것인가, 말 것인가. 머물 수 있다면 며칠이나 머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제 오늘 이 본문의 마지막을 우리의 신앙으로 대답해 볼 차례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믿음으로 여기 빠져 있는 사도행전 10장 49절을 기록해 보십시오. 9장 마지막 절처럼,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여러 날 있어 고넬료라 하는 로마의 백부장의 집에서 머무니라.” 이렇게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사라진 49절의 이야기를, 그렇게 써 나가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