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십팔만 오천' 2015년 6월 23일 새벽 설교
2015-06-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50623 화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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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7장 36~38절, 이사야 강해295 십팔만 오천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623.mp3
이사야서 이백아흔다섯 번째 말씀으로, ‘십팔만 오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통계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총 7년간 이어졌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에 침입했던 왜군의 사망자 수는, 모두 합해 10만이 조금 넘는다고 전해옵니다. 이보다 이천삼백 년 전에 일어난 앗수르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 거기서 산헤립은 임진란의 사망자 수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희생자를 내고 쓸쓸히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이사야보다 대략 한 세대 전에 사역했던 요나 선지자에 의해 기록된 요나서를 보면, 당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인구가 약 12만 명이니, 산헤립의 이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38절이 말씀하듯,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 그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도 이러한 대대적인 원정의 실패가 이유가 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36절은, 이러한 참혹한 죽음이 여호와의 사자가 나아가 행한 것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들은 당시 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쥐에 의한 ‘급성 전염병’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성경은 그런 부분에는 침묵한 채,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혹자는 이에 대해, 어떻게 사랑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요나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본심은 결코 재앙이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원수의 나라인 앗수르를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요나 선지자는 아예 하나님을 외면해버립니다. 어떻게 우리의 하나님인 여호와가 우리의 원수를 구원하신다는 말인가,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더 이상 선지자 못하겠다고 버티는 요나.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그 반응 앞에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요나의 코에 코뚜레를 꿰어 니느웨로 보내시지요. 결국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앗수르가 심판을 피하게 되자, 요나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항변합니다. 요나서를 잠깐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나서 4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1289쪽입니다.
4장 1절부터 4절입니다.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반문은 이제 다음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그 의미가 드러나는데요, 요나가 니느웨 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고자, 초막을 짓고 거기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장면이 5절에 나옵니다. 그때 그 그늘이 박넝쿨이었다고 6절은 말씀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요나가 더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은혜였습니다. 이것을 요나가 너무나 기뻐했다고 6절 마지막은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음날 새벽 벌레를 보내셔서 그 박넝쿨을 다 갉아먹게 하셨고, 결국 넝쿨은 모두 시들어버렸습니다. 해가 뜨고 뜨거운 태양빛이 요나에게 내리쬐니, 요나는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차라리 죽겠노라’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도 한 성질 하는 사람입니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고 싶으셨던 마지막 한 마디를 하십니다. 다같이 10절과 11절, 함께 읽습니다.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여기서 하나님이 죽어버린 박넝쿨을 통해 요나에게 하시고자 하셨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너는 심지도, 기르지도 아니하고, 그저 하룻밤에 나서 다음날 죽어버린 이 식물 하나도 그토록 아끼는데, 이 앗수르의 백성들, 하나님이 그 긴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리시며, 그렇게 친히 심고 자라게 하신 이 백성들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거기 있는 십이만여 명의 백성은 물론, 수많은 짐승들까지도 모두 그 하나님의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이사야서는, 요나의 이 이야기가 있은 후 약 두 세대, 약 60년 정도 후에 일어난 일의 기록입니다. 결국 앗수르는 스스로의 교만과 죄악으로 인하여 다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고, 그때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 채, 오늘 말씀처럼 처참한 결말을 보게 됩니다. 물론 60년 전 요나와 항변하신 하나님과 오늘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어떤 깨달음, 어떤 생각에 이르게 되십니까? 단지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이렇게 규정해버리기에는, 이곳에 담긴 하나님의 고뇌와 슬픔이 너무나 크고 깊습니다. 저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단 한 번도 적들을 궤멸시켜 달라고 직접적으로 기도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적어도 그 기도를 드린 히스기야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려고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쉽게 비난하고 욕하고 정죄할 수 있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든 그렇지 않든, 예수를 잘 믿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다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설사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하여도, 그래도 우리의 기도는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여야 하지 않을까, 오늘 히스기야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울러 과연 우리의 증인으로서의 이 삶은 얼마나 요나로부터 많이 자라고 성숙해져 있나, 과연 이 땅,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헤아리는 종들인가, 또 한 번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내일 계속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잠깐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