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우상 문화와의 혼합" 2014년 1월 27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1-27 · 첨부 설교 원고 · 약 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첨부 설교 원고
20140127 월요일 새벽 설교 (이사야 강해 29)
고백교회
이사야 2장 5~11절, 우상 문화와의 혼합
이사야서 스물아홉 번째 말씀으로, ‘우상 문화와의 혼합’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매해 연초가 되면 각 교회에서는 송구영신예배를 비롯한 기타 특별한 예배의 시간을 통해 한 해의 신앙을 결단하는 여러 이벤트들을 하게 됩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기도 하고 부흥 사경회를 하기도 합니다. 모든 노력이 다 지난해와는 다른 모습으로 올 한 해를 신앙 가운데 살아보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이제 새해의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가는 1월 마지막 주를 보내며, 그리고 우리나라의 큰 명절인 설, 곧 음력 새해를 앞두고 한 번 되돌아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작년과 비교하여 어떤 변화와 어떤 진보로 채워져 있습니까? 아마 우리의 삶이 기대만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임을 곧 깨닫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삶은 이벤트로 규정되거나 설명되거나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이벤트를 다시 삶으로 이어 살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은혜와 그 은혜에 응답하는 우리의 지속적인 영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바울이 했던 고백처럼, 날다마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진보를 경험한다는 것은 결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가 결단을 하듯, 사탄도 나름의 새 전략을 세워 각오를 다지기 때문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비켜 갔습니다만, 새해 첫 한 달의 마지막 주를 보내며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보다 본질적인 변화를 향해 정진해 나아가길 바라며 여러분의 오늘 하루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설교 처음에 새해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런 변화와 진보라는 주제를 말씀드리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새해가 되어서 교회마다 하는 행사들 중에, 말씀 카드를 뽑는 것과 같은 종류의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문화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새해가 되면 담임목사가 뽑은 여러 가지의 말씀 구절들을 카드 형식으로 만들어 성도가 뽑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며 한 해 동안의 신앙의 지표로 삼도록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한 줄로 적어 옮겨 제대로 묵상이 되고 이해가 되는지도 저로서는 의문이지만, 그런 류의 이벤트가 과연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매우 우려가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로만 한정되어 누려지고 묵상되던 성경을 모든 성도들에게로 되돌려 주기 위해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의 희생과 피 흘림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성도 스스로 얼마든지 말씀을 읽고 선택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한 해의 신앙적 목표를 세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백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개혁교회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음도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더 속상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러한 이벤트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너무나 미신적이고 무속적인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치 미국, 유럽 등지의 중국 음식점에서 후식으로 나누어 주는 과자인 포춘 쿠키(Fortune cookie)와 같은 일종의 점치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락시켜버린 꼴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해보셨겠지만, 그 포춘 쿠키(Fortune cookie) 과자 안을 깨보면 보통 운세가 적힌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좋은 경구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중국어 낱말을 배울 수 있는 단어가 적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신적인 점술이 주목적입니다. 중국 못지않게 우리나라도 워낙 복에 대한 강조가 많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샤머니즘적 문화가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데요, 문제는 이러한 무속적 문화가 기독교 안에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스며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 족속을 버리신 이유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 안에 동방의 풍속이 가득하고,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점을 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모습들이 모두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리고 이후의 말씀에서 그러한 이방 풍습의 도입은 결국 인간이 조금 더 부요하고 조금 더 잘 살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우상들과 혼합되어 흐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빛과 어둠이 섞여 적당히 존재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단 하나의 진리로 선포된 하나님 자신이시며, 어떤 경우에도 우상의 문화와 뒤섞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차라리 레스토랑이나 어떤 사교 모임에서 그냥 재미 삼아 포춘 쿠키를 깨뜨려 함께 웃고 즐기고 마는 것이 교회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그와 같은 비루한 짓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는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점을 치는 것과 같은 무속적 관습을 따르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부지불식간에 뿌리를 내린 그와 같은 혼합주의가 그만큼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의 유다 백성들도 처음엔 다 그러했을 것입니다. 우상을 따르고 숭배한다고 생각해서 이방 민족들의 문화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겠지요. 그저 재미 삼아, 또 삶의 소소한 기쁨과 평안을 위해 마음을 조금 더 넓게 열어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문화를 함께 영위한다고 해서 유다 백성들이 그런 우상들을 하나님보다 더 간절히 섬기거나 믿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틈이 사탄에게는 너무나 좋은 영적 부패의 빌미가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은, “27.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라고 보다 더 실질적으로 옮깁니다. 발붙일 기회, 참으로 적절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의 말씀 속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누가복음 21:34)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조심, 마음을 붙들어 매라는 것입니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 절박한 상황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문화, 너무나 은밀하고 당연하여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도 힘든 그런 문화들은 너무나 좋은 먹이가 될 것임은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팽배한 기복적 분위기, 유교적 권위주의에 물든 상명하복적 윤리, 대화와 소통에 의한 사귐의 문화가 아닌 묻지마 식의 순종과 같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그리고 결코 쉽게 고쳐지지 않는 교회의 문제들이 다 어디서 온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되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아주 작은 부분들로,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이미 교회 문화의 너무 많은 부분들이 이방 풍속에 물들고, 병들었습니다. 곧 설 명절입니다. 아마 많은 교회에서 제사를 비롯한 우상 문제에 대한 타협 없는 결단을 강조하였을 것입니다만, 그렇게 눈에 보이는 적보다는 보이지 않는 우리 안의 적들이 훨씬 무섭고 치명적이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눈에 잘 보이는 부분들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조금 수정하고 개선하게 된다면 훨씬 더 좋은 문화적 정착을 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본래 이 땅에 있던 모든 문화를 다 버리는 것이 성경의 정신도 아닐뿐더러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우리가 밥과 김치를 버리고 밀빵과 양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나라는,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를 수천 년 전 저 팔레스타인 한 지역의 문화로 다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새겨진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이 땅의 문화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쉽지 않은 과제를 풀어가는 것 또한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의 교회의 사명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회가 될 때마다 앞서 말씀드린 예와 같은 이방의 풍속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되새기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인 유다 백성들이 범한 또 하나의 치명적인 실수는 이방 민족, 곧 사람을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우상을 섬기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처한 고난과 어려움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인간의 도움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이,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에게 마음을 열게 한 본질적인 문제였던 것이지요. 세상이 가진 부와 퐁요, 그들이 누리는 힘과 권세를 바라보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도움을 은연중에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눈에 보이는 그들과 그들이 가진 힘을 더 깊이 갈망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어렵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2장 마지막 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어 다시 11절 말씀입니다. “11.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교만하고 높아진 것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가 심판으로 바뀌는 그날이 속히 옵니다. 그때에 우상들과 함께, 또 교만한 자들과 함께 망하지 않도록 속히 주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돌아가면, 다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를 복으로 부르시기 위해 모든 저주와 고난을 친히 감당해주신 주님을 다시금 기억하며, 오직 그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순결한 신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이방의 풍속과 우상의 습관들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로 그러한 모습을 깨닫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이 땅의 문화와 전통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고, 그 문화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다스림을 새겨 넣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새해 새달의 마지막 주간을 보냅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향해 더욱 매진하는 한 주가 되게 하옵소서.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예배를 드릴 고백교회 식구들, 또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주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