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에돔(3)" 2015년 5월 11일 새벽 설교
2015-05-1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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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50511 월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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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4장 8~15절, 이사야 강해267 에돔(3)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511.mp3
이사야서 이백예순일곱 번째 말씀으로, ‘에돔(3)’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계속해서) 전하겠습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읽었던 본문인데요, 다시 읽어보아도 역시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 앞에, 읽는 우리에게도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 듯 합니다. 먼저 본문 9절, 10절은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연상시킵니다. 강한 인화성 물질인 유황과 역청이 에돔의 물과 땅을 다 태워 없앨 것을 예언하는 것도 모자라, 10절에 보면 ‘세세에’ ‘영영히’라고 기록하여, 그 파괴가, 되돌려지지 않는, 회복 불가능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11절부터 15절까지는, 에돔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한 땅, 오직 야생의 짐승이나 거할 수 있는 혼돈의 땅이 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11절 후반부에 보면,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라는 말이 등장하는데요, 여기 혼란이라는 단어 ‘토후’나 공허라는 단어 ‘보후’는 모두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대목,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에서 사용된 단어들이라는 점에서, 창조 사역 자체의 폐기와 취소를 뜻하는 정도까지 그 심판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1절부터 이어지는 여러 동물들의 이름은, 말씀드린 대로 광야나 사막, 야생에서 주로 서식하는 동물들입니다. 11절에 당아새는, 사막에 사는 큰 새를 의미하고, 13절에 “엉겅퀴와 새품”이라는 말에서 ‘새품’은 억새와 같이, 가시가 많은 야생 식물을 뜻합니다. 특별히 14절에 나오는 ‘올빼미’라는 말은 본래는 밤에 나타난다고 알려진 여자 귀신을 뜻하는 히브리어 ‘릴리트’를 옮긴 것인데요, 14절의 ‘들짐승’ ‘이리’ ‘숫염소’ 모두 실은, 귀신이나 유령을 뜻하기도 하는 그런 말들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의 경우에는 이 14절을 “들귀신과 물귀신이 만나는 곳, … 도깨비가 안식처를 찾아 서성거리는 곳이 되리라.”고 옮긴 것입니다. 야생의 동물들이 처소를 삼아 살아가는 땅이라는 것보다도 훨씬 더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뉘앙스를 풍깁니다.
이렇게 에돔에 대한 하나님 심판이 심각함한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난 새벽에 말씀을 나눈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심각한 고난과 하나님의 징계 아래 놓였을 때, 그들을 돕기는커녕 이방 바벨론과 한패가 되어 유다를 공격하고, 유다의 땅을 유린하고, 전리품 취하는 일에 정신이 팔렸던 그것을 하나님은 패역한 행위로 규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처참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사실 훨씬 더 사사롭고 소소한 갈등으로부터 출발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선조였던 야곱과 에서, 형제 간의 갈등이 온전히 해소되지 못한 데서 이 모든 사단이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두 사람의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두 사람의 재회와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 창세기 32장과 33장에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결국 야곱은 사백 명의 군사들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던 형 에서를 만나고, 그 앞에 일곱 번 절을 하지요. 그리고 형 에서는 그런 동생에게 달려와서 안고 목을 어긋맞춘 채 입맞추고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누가 봐도 오랜 앙금이 다 해소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화해인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감정적인 화해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과거에 행한 잘못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두려움에 휩싸인 채, 당장의 보복을 피할 생각일 뿐, 형의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요. 형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이 화해의 징표로 많은 짐승과 예물을 에서에게 선물하지만, 에서는 받지 않지요. 얼핏 호의와 넓은 아량의 제스처 같지만, 실제 에서의 마음도 그러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당장의 감정과 형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야곱의 선물을 받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화해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뭔가가 계속 남아있는 상태인 것은, 그런 에서의 사양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실제로 야곱과 에서는, 그 감격적인 화해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에서는 야곱과 함께 가자고 하지만 야곱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지요. 오랜 이별의 시간이 지난 후 이루어진 첫 만남이었지만, 밥 한 끼로 함께 먹지 않고, 만난 그날 둘은 각자의 길로 헤어집니다. 한 가족이요, 한 형제인데도, 서로 그렇게 서먹하게 헤어집니다. 야곱은 오직 에서의 복수를 피할 생각뿐이고, 에서는 형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겨우 형식적인 화해를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이루지 못한 채 두 사람의 갈등은 더 큰 불신과 미움으로 잠시 그렇게 불안하게 봉해져 있었을 따름인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의 불편한 화해가 실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두 민족의 아픈 역사, 처절한 고통의 역사의 시발점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을 바로잡고 온전히 용서하는 과정, 그래서 진심어린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겁니다. 그게 중요한 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다 자신만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이유로 인해, 적당한 화해에 머물려고 하기에, 가정도 교회도 공동체도 온전히 하나 되는 그 일에 실패하는 것이겠지요.
살다 보면 우리는 때로는 야곱의 자리에도, 때로는 에서의 자리에도 서게 됩니다. 그때마다 중요한 것이 서로 감정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 온전한 화목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지금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에 더 주의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잘못을 바로잡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때에는 오늘 야곱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해야 할 때에는 오늘 에서의 삶을 교훈으로 삼아, 부디 오늘 본문에서와 같은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혹 그런 관계가 남아 있다면, 속히 바른 과정을 통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잠깐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