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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다라 하는 여제자" 2015년 5월 3일 주일 설교
2015-05-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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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3 부활절 다섯 번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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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 36~42절,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503.mp3
[1]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말씀으로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 그가 죽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죽음이 삶을 보여줍니다. 참 역설적이지요. 그의 장례식에 누가 찾아와, 어떤 말을 하며, 어떤 눈물을 흘리는지를 보면, 망자의 삶이 어떠했는가, 여실히 밝혀집니다.
[2] 몇 해 전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를 배경으로 한 영화, ‘울지마 톤즈’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국인 신부로는 최초로, 내전 중인 남수단에 삶을 바친, 故(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죽음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였지요. 십남매를 홀어머니가 키워낸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끝내 그가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가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스물아홉의 나이에 그는 신부가 되었고, 오랜 내전과 가난, 질병으로 얼룩진 남수단 땅에서 짧은 삶을 폭풍처럼 살았습니다.
[3] 톤즈에서 그는, 나환자를 비롯한 많은 주민들을 일일이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치료해 주었고,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도 세웠습니다. 발가락이 몇 개씩 떨어져나간 주민들의 발에, 처음으로 신발을 신겨주었고,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외로운 아이들의 마음을 희망으로 보듬어주었습니다. 마흔 여덟, 대장암으로 너무나 짧은 생을 마치게 되었을 때, 톤즈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로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3] 영화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톤즈에서도 가장 강인하고 용맹한 부족 가운데 하나인 ‘딩카족’ 마을 사람들이 신부님의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부족이라는 딩카족. 그런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한센병으로 이미 뭉툭해져버린 손으로 그의 사진을 부여잡은 채, 연신 입을 맞추며 통곡하는데요, 그가 그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눈물이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4]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 속의 한 여인 역시도, 그녀의 죽음이 그 삶을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같은 감동을 전해줍니다. 본문 36절에는 그녀의 이름이 두 가지로 소개되어 있는데요, 당시 유대인들의 통용어였던 아람어로는 ‘다비다’, 또 당시 로마의 문자였던 헬라어로는 ‘도르가’라고 불렸습니다. 그녀의 삶이, 비단 히브리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5] 그 이름 둘의 의미는 비슷합니다. ‘다비다’는 ‘영양’, ‘가젤’이라는 의미이고, ‘도르가’도 ‘야생 염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들은 당시에 여성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었습니다. 둘 다 억센 환경과 고단한 인생을 의미하는 말이었기 때문인데요, 그러고 보면 지난 주 본문의 ‘애니아’도 그러했고, 오늘 ‘도르가’까지, 그 이름이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애니아나 도르가나 모두, 순탄치 않은 인생, 고단하고 비루한 삶을 살았음을, 그들의 이름이 보여줍니다.
[6] 그런데 오늘 본문이 그려내는 도르가의 죽음은, 그녀의 삶이 결코 그 이름과는 같지 않았음을 반증해줍니다. 39절에 보니, 욥바의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 서서 울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과부’라는 하나의 그룹이 강조되는 것에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과부는 당시 고아와 함께 가장 힘없고 낮은 계층이었습니다. 여성의 인권이라든가 존엄, 이런 것이 전무했던 시기였고, 경제 활동 자체에서도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란, 오직 공동체의 배려와 구제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부터, 이미 과부들에 대한 철저한 배려와 도움을 율법으로 정해놓으시기까지 했는데요, 아래의 말씀들을 함께 차례로 읽겠습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명기 10:17~18)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 27: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명기 24:19)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아멘. (신명기 14:28~29)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서 1:27)
[7] 상황이 이러했기에,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이 과부들을 섬기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요, 사도행전 6장에서 스데반과 빌립을 포함한 일곱 명의 집사가 세워지게 된 것도 과부들을 구제하고 섬기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오늘 도르가는 바로 그런 일에 있어서 헌신을 다한 성도였습니다. 39절을 계속 살펴보면,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했을 때, 과부들이 다비다의 시신 앞에서 베드로에게 보여준 것은, 다비다가 손수 지어준 그녀들의 속옷과 겉옷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바느질 솜씨가 누구보다 탁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8]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시 누군가가 직접 지어 준 옷을 입고 계신 분이 계신지요? 저는 아버님이 양복점 사장님이셨던 관계로, 어릴 적엔 아버지가 직접 해 주신 옷을 늘 입고 다녔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시 동네에선 나름 유명한 디자이너셨던 관계로, 저는 늘 시대를 앞서 가는 ‘키즈룩’을 공짜로 입을 수 있었는데요, 처음엔 창피해서 안 입겠다고 하다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걸 보고는 곧 그것이 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습니다.
[9] 무엇보다 옷에 담긴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과 살뜰한 배려가 저의 기를 더욱 살려주곤 했습니다. 아들의 신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기에, 약점은 보완해 주고 강점은 도드라져 보이도록 섬세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요즘은 제 아내를 통해서 그런 마음을 새삼 느끼곤 하는데요, 장모님께서 직접 뜨개질을 하셔서, 원피스나 니트를 만들어 아내에게 선물을 해 주시곤 하십니다. 제가 옆에서 봐도 다른 기성 제품들에 전혀 밀리지 않는 높은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물론 장모님 역시 아내의 체형과 스타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거기서 오는 편안함과 정서적인 만족은 다른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요.
[10]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다비다는 겉옷은 물론, 과부들의 속옷까지도 다 직접 만들어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의 속옷을 직접 지어 입힌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일 겁니다. 보통의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다비다가 어떤 마음으로 그녀들을 섬겼는지가 그대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단지 선행을 위한 ‘일’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 자체를 돌보는, 깊은 보살핌이 다비다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살갗과 살갗이 마주치고, 삶과 삶이 겹치는 그런 돌봄. 그것이 바로 다비다의 선행이요, 구제였습니다.
[11] 비록 그녀 자신도 대단할 것 없는 삶이었지만, 아니 어떤 면에서는 ‘평범’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그런 험한 삶이었지만, 다비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과 능력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본문 36절 마지막에 보면, 그녀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본문의 원래 의미는, 선행과 구제를 아주 많이 했다는 것보다는, 그녀의 그런 삶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요. 그래서 헬라어 본문을 최대한 그대로 직역하면, “이 여인은 그녀가 행한 선한 행위들과 선한 구제들로 가득했다.” 정도가 됩니다. 그녀의 삶의 방향 자체가, 친절하고 따뜻한 배려와 섬김으로 향해져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말에는 ‘선행’이라고만 되어 있지만, 실제 헬라어에서는 ‘선한’이라는 의미의 ‘아가도스’라는 형용사가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요, 이 또한 같은 의도였을 겁니다.
[12] 그래서일까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다비다를 소개하는 본문 36절에서, 성경에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표현으로 다비다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제자’라는 단어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 ‘마데트리아’는, 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만 딱 한 번 등장하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여자로서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수없이 많음에도, 오직 다비다에게만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비다가 당시 초대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에게 어떤 귀감과 본이 되는 삶을 살았는지, 이 단어 하나가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았던, 참 제자였던 것이지요.
[13] 그런데 그런 그녀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나이가 다 차서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게 아니라, 몹쓸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했지만, 주님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녀를 먼저 불러 가셨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남들보다 오래 사는 게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는데, 본문은 성도에게 복된 삶이 무엇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복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14] 그 생각, 그 도전을 당시의 사람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신을 바로 장례하지 못하고, 씻어서 다락에 올려두었다고, 본문 37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비다가 병들어 죽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비다가 이렇게 가다니….” 도저히 그녀를 이대로 떠나보내기 어려운 마음에, 그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장례를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15] 그러다 성도들이 교회의 리더인 베드로가 근처 룻다에 와 있음을 듣게 됩니다. 욥바에서 룻다까지는 대략 20km가 조금 못 되는 거리입니다. 아무리 성인 남자가 서둘러도 하룻길은 족히 되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지체 말고 베드로가 와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베드로도 즉시 일어나 욥바로 향했고, 도착하여 다비다의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사람들을 모두 다락에서 내보낸 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6] 우리는 여기서 욥바의 성도들이 베드로를 부른 이유가, 다비다를 살리기 위함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도들이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어떤 마음의 동요로 인해, 자원하여 다비다를 살리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성도들은 그저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에, 베드로를 통해, 그녀의 장례가 바르게, 그리고 교회적으로 후하게 치러지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마음, 다른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을 그 다락에서 모두 내보낸 후 기도하고 있음에, 그리고 다비다의 시체 반대편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처음부터 다비다를 살리는 기적을 성도들이 함께 목격하고 놀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이 감동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진실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8] 그렇게 기도를 마친 후 다비다의 시체를 향하여 베드로는 돌아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몸을 향하여 선포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비타, 아니스테미!” 여러분 다같이 한 번 따라서 읽어보실까요? “다비타, 아니스테미!” (따라서 봉독)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함께 읽도록 한 이유는, 단지 이 장면이 너무나 놀랍고 드라마틱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가 사용한, 그리고 누가가 기록한 이 말에 담긴 표현이 실로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9] 본문 40절에서 41절까지에는 ‘일어난다’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합니다. 40절에 두 번, 41절에 한 번 나오지요. “다비다야, 일어나라.”에서 한 번, 그리고 눈을 뜬 다비다가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다고 할 때, 또 한 번, 그리고 41절에,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일으키는 장면에서 한 번 더 사용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단어, 그러니까 다비다가 직접 일어나 앉을 때 사용된 말과 나머지 두 경우의 말은 본래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40절에서 다비다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고 할 때 동사는 ‘아나카디조’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누워 있다가 앉는 것으로, 그 자세를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경우에는 전혀 다른 동사 ‘아니스테미’를 사용했습니다. 영어로는 그냥 자세를 바꿔 일어서는 게 아니라, ‘다시 일어서다’는 의미로 ‘rise again’입니다.
[20] 여러분, 혹시 이 단어 ‘아니스테미’가 언제 사용되었던 단어일지 느낌이 오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할 때 특별히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이것은 단지 아픈 사람이 치유되거나,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주님이 죽은 소녀에게 일어나라고 하실 때에도 이 단어는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아닌 다른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 이 단어를 쓴 경우는, 다비다 외에는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21]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가 다비다에게 사용된 것은, 말 그대로 충격 그 자체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아니스테미’는 단지 생명이 소생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새 몸을 덧입을 때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분명 그녀의 소생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녀는 언젠가 다시 더 나이가 들어 죽었을 것이고, 그녀의 참 부활은 훗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뤄질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녀의 이 ‘일어남’을, 유독 주님의 부활 사건을 묘사한 동사를 사용하여 기록합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22]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이 사도행전을 본문으로 한, 이 계속되는 설교들의 큰 제목이, ‘부활의 현실 살기’임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늘 이 말씀이, ‘부활의 현실 살기’ 예순한 번째 설교입니다. 물론 부활은 죽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그 부활을, 그 영생을, 천국에서가 아닌 지금 여기서도 살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셨고, 우리는 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오늘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3] 우리의 육체는, 이 땅의 이 생명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조금만 힘들고 조금만 배가 고파도, 몸은 강하고 지속적인 자극으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몸은, 어디가 편한 곳인지, 누구와 함께 있어야 좋은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자기에게 유익한 자리에 한 번 더 마음이 가고,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한 번 더 우리의 시선은 머물게 됩니다. 나보다 약한 이에게는 강해지고, 나보다 강한 이에게는 약해지는, 그것이 우리의 몸이 가진, 생존을 향한 본성입니다.
[24] 그런 면에서 보면, 다비다는 그런 이익과는 거리가 먼 이들과 어울린 사람입니다. 어떤 영향력도 없고 힘도 없는, 심지어 속옷까지도 도움을 받아서 해결해야 하는, 말 그대로 가장 낮은 자리의 사람들과 늘 함께였습니다. 특별한 존재감도 없이 그저 ‘과부’라고 불리는 사람들. 아무리 돕고 선행을 베풀어도, 나에게 어떤 갚음도 돌아올 수 없는, 그렇게 철저하게 연약한 사람들. Give and Take가 될 수 없고, 끝까지 주고 또 줘야 하는 그런 관계를 위해, 오늘 다비다는 자신의 삶을 헌신한 것입니다.
[25]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그 기준으로 누구는 영생에, 누구는 영벌에 들어간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그가 누구입니까? 왜 그들에게 하는 우리의 행위가 그토록 중요합니까? 왜 주님은 그들과 당신을 같다고까지 하십니까?
[26]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시면서,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마11:11). 그만큼 이 땅에서 세례요한의 삶과 사역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삶이란 이 땅의 모든 차이와 차등의 관계가 역전되어, 위가 아래를,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삶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7] 다비다는 그 천국의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냈습니다. 내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닌, 내가 힘이 되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녀는 죽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서 천국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부활을 바라보고 산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부활을 살아냈습니다. 그런 그녀를 주님은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신 것이지만,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다비다는 천국의 부활에서, 이 땅의 부활로 일으켜진 것입니다. 그녀의 일어남이 부활의 일어남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8] 성도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이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부활을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어떤 대단한 헌신과 특별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살피고 섬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비다가 잘하는 바느질, 뜨개질, 이런 것들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녀 역시 누군가를 도울만한 입장도 아닙니다. 넉넉한 삶도 아니고, 탁월한 무언가를 가지지도 못했습니다. 그녀 자신이 극히 작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통해 부활이 무엇인지, 성도가 누구인지,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래부터 부활의 삶이란 크고 작음이 중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서로 이어지고 연결되어 ‘함께’ 자라고 ‘함께’ 존귀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9] 오늘 베드로는 결국 다비다로 인해 욥바까지 와 있습니다. 지지난주에 우리는 베드로가 왜 이 욥바에 와 있어야 했는지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가이사랴에 가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다비다로 인해 여기까지 ‘자라’ 온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본문의 겉은,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리는 것이지만, 본문의 속은, 다비다가 베드로를 구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지극히 크고 존귀한 자를 살리고 구해냅니다. 그렇게 성도는 서로 얽히고 연결되어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함께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30] 저와 여러분, 우리 공동체도 그렇게 함께 자라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많은 능력으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작은 섬김으로, 서로를 돌보며 위로하며, 그렇게 함께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전하고 듣는 이 설교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런 고백교회를 세워 가십시다. 우리 그런 부활을 여기서 살아내십시다. 서로의 옷을 지어주고, 밥을 지어주며, 머리를 다듬어주고, 발을 씻겨주며, 서로의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쳐주고, 서로의 부모를 따뜻하게 섬기며, 그렇게 서로의 삶이 얽히고설킨 채로, 천국을 살아내는 우리가 되십시다.
[31] 서두에 말씀드린, 영화 ‘울지마 톤즈’는 이런 자막과 함께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오늘 본문의 다비다 이야기 역시,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하게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사방에 만발한 꽃이 주인공이 되는 이 계절에,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꿈꾸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부활이 되길, 우리의 모습이 작은 섬김이 되길, 우리의 이 짧은 삶이, 부디 주님 나라의 봄이 올 때,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상의 작은이들을 큰마음으로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결단하면서, 이 시간 다같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잠시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조용히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