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2015년 4월 19일 주일 설교

2015-04-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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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9 부활절 세 번째 주 ----------------------------------------- 사도행전 9장 21절 ~ 10장 1절,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419.mp3 * 설교 중 나오는 지도는 첨부 파일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활절 세 번째 주일 말씀으로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사도행전 안에는 결정적인 장면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장면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 사도행전 10장일 겁니다. 초대교회의 리더였던 베드로가 로마의 군인이었던 고넬료를 만나 그와 그 가정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장면. 초대교회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왜 결정적인가,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차차 말씀을 나누겠습니다만, 간단히 정리하면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최초로 성령이 임하시고, 세례가 부어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인 베드로에 의해서, 그것도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닌, 교회 최고 리더였던 베드로에 의해서, 그 일이 주도된다는 점에서, 그 사건은 실로 교회 역사 전체의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공동체나 리더가 변해야 공동체가 변합니다. 리더만 변해서도 안 되지만, 리더가 변하지 않는 한, 공동체는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리더를 위한 기도, 그래서 늘 교회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변화, 베드로의 변신은 실로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이 경험 하나가 교회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내용을 머릿속에 기억하시고, 오늘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다소 뜬금이 없습니다. 지난주까지 사울의 회심과 피난에 대해 우리가 살펴봤는데요, 그러다 갑자기 베드로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내용은 베드로가 여러 도시로 복음을 전하러 간 일에 대한 기록들인데, 룻다와 욥바라는 지역에 갔다가 그곳의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일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는, 평범한, 그러나 놀라운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서 말씀드린 10장의 결정적인 사건을 염두해 두고 본문을 살펴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집니다. 우선 여러분께 나눠드린 지도를 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지도에 보면 빌립, 바울, 베드로 세 사람의 초기 사역의 중심지역들에 대한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심적인 곳들을 제가 형광색으로 표시해 두었는데요, 중앙 부근의 예루살렘이 있고, 사도 바울이 회심한 다메섹이 저 위쪽에 보입니다. 그 왼편으로는 8번이라고 된 ‘To Tarsus’라는 표기가 보이는데, 바로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가는 뱃길을 의미합니다. 지난 주 설교가 기억나시지요? 사울이 핍박을 피해 고향으로 보내지는 장면인데, 다소로 가는 배를 어디서 탔었나요? 맞습니다. 바로 가이사랴입니다. 아래쪽 7번이 표시된 도시가 바로 가이사랴입니다. 그 가이사랴에 누가 지금 있다구요? 네,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이름의 로마 장교가 거기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보실까요? 지도 오른쪽 맨 아래에 보시면 베드로의 초기 사역을 표시하는 점자 화살표가 있는데요, 먼저는 예루살렘에 있었겠지요. 그러다 오늘 순서대로, 일단 룻다로 향합니다. 지도에는 영어 지명으로 ‘Lydda’라고 되어 있지요. 거기서 누구를 만나지요? 네 바로 애니아라는 이름의 남자를 만나 그가 앓고 있던 중풍병을 고치게 됩니다. 그 다음에 향하는 곳이 욥바이지요. 항구도시임이 지도에서도 드러나는데요, 룻다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입니다. 그 욥바에 누가 있었다고 기록합니까? 네 다비다라는 이름의 여자제가 있었고, 죽은 그녀를 베드로가 다시 살리는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위 가이사랴에는 지금 고넬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10장 1절이 그 이야기의 시작인데요, 여러분 지도에 보시면, 욥바 바로 위로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그어져 요단강에서 끝나는 녹색 선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선이 무슨 선일까요? 네, 바로 사마리아와 유다를 구별하는 일종의 경계선입니다. 실제 이 경계선은 이렇게 직선은 아니구요, 구불구불하게 되어 있지만 편의를 위해 직선으로 표시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일종의 38선과 같은 경계선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둘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그런 사이였으니까요. 그렇게 놓고 보면 베드로가 지금 있는 곳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더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최종적 포지션이 욥바로 지금 나오는데요, 왜 욥바에 머물렀는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사실 욥바에 머물렀다기보다는 거기에서 일단 멈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인데, 그 사방이라는 범위는 일단, 욥바까지인 겁니다. 이 ‘사방’이라는 말이 원문에는 ‘판톤’이라는 형용사인데, ‘판’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지역’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은 결국 ‘유다’라는 범위 안의 ‘모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당시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복음의 경계선, 그것이 바로 오늘 그어진 녹색 선임을 우리는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나중에 10장에 가서 살펴보겠지만, 결국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나는 장면은, 어떻게 성사됩니까? 가이사랴에 있던 고넬료가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가이사랴로 불러 모셔가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그 일이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았음을, 긴 이야기를 통해 10장에 기록해두고 있는데요, 베드로가 이 녹색선을 넘어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도적인 강력한 섭리 가운데 가능했음을 우리는 나중에 알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오늘 9장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이야기는, 결코 뜬금없이 쓰여진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지만, 결국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리, 가서 머물며 기다려야 하는 자리는 바로 욥바입니다. 그리고 그 욥바로 가기 위해 준비된 중간 기착지가 바로 중풍에 걸린 애니아가 누워 있는 룻다라고 하는 지역이지요.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 혹은 발길 닿는 대로 나아간 자리가 룻다요, 욥바라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그건 결코 베드로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발걸음에 우연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두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의 인생은 아닌 거 같은데, 우리의 삶은 왠지 다 우연인 것 같고, 또 내 의지의 산물인 것 같이 느껴집니까? 여러분 아마 베드로도 욥바까지는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사방을 두루 다니다가, 욥바에 내려가, 잠시 머무는 동안 벌어진 그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녹색선을 어떤 이유로든 넘어가게 되면서, 마치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와 같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복음의 역사의 결정적인 문을 열어젖히게 되면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명명백백하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발걸음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시지요. “성도의 발걸음에는,” “우연이란 없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삶의 위치, 물론 우리 자신의 노력과 의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운이 결합된 결과가 맞습니다. 오늘 베드로도 그랬듯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이 포지션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영적 진실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신비인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베드로의 삶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고넬료를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 그 길로 가기 위한 여정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겁니다. 베드로가 사방으로 복음을 들고 가지 않았다면, 복음 들고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들은 벌어질 수 없었거나, 훨씬 더 늦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도의 삶이 나의 의지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거하여 함께 빚어져가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큰 부르심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우리는 성도의 평안은, 사명에서 시작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쫓을 때, 성도는 진정한 평강에 거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게 주신 부르심의 뜻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내 삶의 여정을 주님의 여정 안으로 흡수(?)하시게 됩니다. 내 인생의 큰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고 가느냐, 이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정확히 둘로 구분됩니다. 내 삶이 그저 나를 위한 삶이냐, 아니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냐, 이 둘로 나뉩니다. 거시적인 부르심 안에 거하면, 그 안에서 미시적으로 조금 부족해도 그 부족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주실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의 믿음과 신앙으로는 지도 속의 그 녹색선을 넘어설 수 없지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 선 너머로 베드로를 업고라도 가십니다. 베드로처럼 직접 그 선을 넘어가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베드로처럼 결정적으로 쓰임 받지 않아도, 비록 작은 흔적을 남기는 삶이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방문한 룻다. 본문 32절을 보면 거기 이미 베드로가 가기 전에, 룻다에는 성도들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이 언제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되었겠습니까? 오늘 지도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빌립이 가이사랴로 가기 전에 들렀던 도시가 바로 이 룻다였습니다. 8장 40절이 이 사실을 대변해 줍니다. 비록 베드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일은 베드로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빌립에 의해 그 땅에 복음의 흔적이 남겨졌고, 또 빌립 이전에도 이름 없는 누군가가 룻다를 섬겼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베드로의 여정은 엄밀히 말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보다도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둘러보고 상황을 확인함과 동시에, 복음의 터가 더 단단해지도록 만들기 위한 행보였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리더로서, 곳곳에 세워지는 교회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것은 당시엔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빌립이 룻다에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세워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베드로는 굳이 룻다로 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빌립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의 여정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주님의 일이었듯이, 빌립의 여정 역시 그러했던 것이지요. 빌립은 지금 내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해 매진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더 먼 미래의 일까지 계획하시고 이미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도 각 사람의 삶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고 서로 준비되면서, 그렇게 함께 주님의 일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더 중요하고 누가 더 크다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역할들을 다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나를 거기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거기로 가는 모든 과정 또한 단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목적으로 다뤄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이사랴로 가기 위한 중간지인 룻다, 그리고 욥바 모두 그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룻다에서는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에서는 다비다를 살립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35절 함께 읽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42절도 읽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어떻습니까? 의도적인 같은 결말의 내용입니다. 베드로에게 욥바와 룻다의 그 모든 여정은 단지 수단이나 과정만이 아니라 명백한 하나님의 목적으로 다가왔음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이와 같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각자의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누구는 천안 어디에, 누구는 인천 어디에, 누구는 서울 어디에, 누구는 일산 어디에. 다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지금은 다 과정이라 여길 거에요. 이것 너머에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삶의 자리가 있겠지, 그래 이것이 전부는 아닐 거야, 생각할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과정이 과정으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 뭔가를 얻고 뭔가를 깨닫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다음에 하지 않을 실수를 발견하고 다음에 더 잘할 뭔가를 배우는 것, 중요합니다. 가이사랴에서 만날 고넬료를 위해,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위해 준비되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그 과정이 또 다른 목적임을 여러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 애니아도 있고, 다비다도 있기 때문입니다. 애니아, 다비다, 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 기록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한 사람은 오래도록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였고 [아마도 성도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정말 신실한 여제자였습니다.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뭡니까? 바로 본인의 힘으로 베드로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가지 않으면, 그리고 가서, 그들을 위해 섬기지 않으면, 결코 회복될 수 없는, 멈춰져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중풍은 심각한 질병이지만 당시는 더 심했습니다. 일단 걸리면 회복이 불가능했고, 평생을 누워 지내야만 했습니다. 룻다의 사람들이 애니아의 회복을 보고 다 주께로 돌아온 이유도 그만큼 중풍이 그들에게는 무서운 질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복음서에서도 주님은 여러 중풍병자를 고치십니다. 그것이 다른 질병들보다 더 도드라지게 성경에 기록되어 나타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들고 가서 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받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가야만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욥바의 죽은 다비다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중풍이나 죽음이나 복음 안에서는 같은 겁니다. 내가 가서 들을 수 없고, 믿을 수 없기에 둘 다 복음 안에 완전한 어둠인 겁니다. 반면에 고넬료는 아닙니다. 거리로는 더 멀고, 영적으로는 더 더 먼 곳이지만, 그는 사람을 보낼 수 있고, 찾아올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둘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오늘 룻다와 욥바가, 애니아와 다비다가 결코 과정이요, 수단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아나설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친히 베드로를 보내시어 주님의 뜻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그 땅도 여러분 결코 우연이 아니며, 과정도 아닙니다. 거기엔 오늘 애니아나 다비다와 같은 사람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음을 여러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중에는 애니아처럼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있겠고, 다비다처럼 주님을 알고 믿는 신실한 제자이지만 해결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여러분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갈 수 있는 사람, 순종할 수 있는 사람, 깨어 있는 사람, 살아 있는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그 애니아, 다비다를 여러분은 발견하셨습니까? 움직일 수 없는 그들에게 왜 주님이 여러분을 보내셨는지, 혹시 그 뜻을 발견하셨습니까? 혹시 이런 반문이 여러분 안에 생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에요. 나에게는 그럴 힘도 능력도 없어요. 나는 단지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거라구요. 내가 베드로처럼 누군가를 고치고 살리는 일을 지금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지금 나는, 애니아이고, 지금 내가 다비다란 말이에요. 나에게 누군가 찾아와줘야 하고, 나를 일으켜줘야 한다구요.”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도 처음부터 베드로였던 것은 아닙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받고자 하고 더 누리고자 하고 더 위로를 얻고자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넘어지고 실족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누가복음 22장 31~32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연약할 때, 주님 모른다고 배반하기 직전에, 그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때도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너가 돌이킨 후에, 너가 일어난 후에, 그땐 네가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은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 기도를 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기를,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받고 누리는 데만 머물러 있지 않기를, 이젠 내가 일어나서 누군가를 위로하고 일으키고 다시 살리는 일에 쓰임받기를 주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그 기도에,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있는 여러분의 그 자리를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봐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을 거기 보내신 주님의 이유가 담긴 애니나와 다비다를 찾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힘들지만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분명 거기가 여러분의 목적지는 아닐 겁니다. 더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뤄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 거하고 있음을 여러분이 믿고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비록 과정이라 할지라도 거기엔 또 다른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여러분을 하나님이 거기로 친히 보내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을 지체하고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길고, 우리의 연수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가이사랴, 거기에 이를 데까지, 부디 열심히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길 원합니다. 지금 어디쯤 와 계십니까? 주님의 귀하신 부르심의 종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부르심 기억하며 그 길로 달려갈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그 뜻이 여러분을 통해 이 땅 가운데서 이뤄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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