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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죄를 더하도다" 2015년 3월 19일 새벽 설교

2015-03-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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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목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30장 1~5절,  이사야 강해237  죄에 죄를 더하도다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319.mp3 이사야서 이백서른일곱 번째 말씀으로, ‘죄에 죄를 더하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죄는 사람이 짓는 것 같지만, 그래서 죄를 사람이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대상으로 여기기 쉽지만, 거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놓여 있음을, 우리는 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깨닫게 됩니다. 비근한 예가 거짓말과 같은 문제이지요. 거짓말을 하냐, 안 하냐, 그 결정은 전적으로 우리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일단 거짓말 속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한 여러 다른 거짓말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선택의 주도권은 내가 아닌 거짓말이 잡았다고 봐야 하지요. 우리가 죄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시점은 어쩌면 처음 죄를 대할 때, 그래서 그 죄를 지을 것이냐, 아니냐를 최초로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바로 그 순간일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미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죄에 죄를 더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 스스로 죄에 죄를 더한다기보다는, 죄가 스스로 증식하기 위해 유다를 한갓 숙주로 이용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여겨집니다. 죄는 간과하면 간과할수록 더욱 무서운 존재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힘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의 밧세바 간음 사건일 겁니다.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 다윗의 그 범죄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요, 사무엘하 10장까지 정말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생각이나 했을까 싶은 그런 삶을 살았던 다윗이, 여기서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나타납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부하의 아내를 강제로 범하고, 그 사실을 덮기 위해 치졸한 일들을 계속 꾸미게 됩니다. 그러한 계획들이 잇달아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만드는, 사실상의 살인이나 다름없는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래놓고도 죽은 우리아의 장례를 치른 후 다윗은 대놓고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리지요. 그리고 그렇게 한 가정을 처참히 짓밟은 자리에서 다윗의 아들이 태어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미 그 본문을 읽어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다윗은 단 한 번도 주저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말도 안 되는 범죄 앞에서 다윗이 작은 고민도 없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성경의 기록에서는, 다윗의 평소 그 섬세한 영적 감각과 총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지은 많은 시편 속에 녹아있는 그 높은 신앙의 자기 기준이나, 날 선 양심의 고뇌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과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였는지, 사무엘하 12장에 가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밧세바에게서 아들이 태어나고, 이제 모든 것이 평안을 되찾았다고 여기던 그 순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 다윗의 소멸된 죄의식을 다시 일깨웁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다윗은 나단이 전해주는 비유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것이 자신인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나단이 답답하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의 실체를 직시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고 무너지게 하는지, 이보다 더 분명한 예가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섰던 소년의 모습 그때부터 사울의 그 긴 세월의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실망시킨 적이 없던 다윗 앞에 우리는 늘 부러움과 놀라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열정 앞에, 감히 다윗과 견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 다윗이 오늘 그와 같은 모습이라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정말이지 얼마나 큰 죄의 늪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또 거기서 얼마나 무감각하게, 내가 죄인인 줄도 모른 채, 죄에 죄를 더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훗날 그날의 자신의 과오에 대해 아마도 수천 번 다시 생각하고, 또 다시 기억을 떠올렸을 겁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 것일까? 그 밤, 왜 나는 평소와 달리, 그토록 죄에 대해 무기력해졌을까, 그날의 그 사건을 수도 없이 복기하고 또 복기했을 겁니다. 내일 다시 말씀을 이어가겠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모든 문제의 시발점, 그것은 죄의 힘을 너무나 만만하게 본 다윗의 방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죄 앞에서 마음을 놓아버리는 일, 죄가 내 삶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도, 내가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그 판단 착오, 거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갈 제자들과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눅21:36). 그리고 사도들도 그 말씀을 받아 동일하게 성도들에게 말하고 가르쳤습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 쉬지 말고 기도해라,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 과도한 권면으로 우리를 무겁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처한 현실이 치열함을 우리가 인식하고 반응하게 하시기 위해서 일겁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용서이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치명적인 실수와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고 덮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까지 자세히 기록해서, 두고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말하도록 하신 이유 또한 같은 목적일 겁니다. ‘다윗이 그 정도라면, 너희는 어떠한 모습이겠느냐. 다윗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다면, 너희는 어떻게 되겠느냐?’ 이렇게라도 경고하시고 싶지 않으셨을까,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이 땅의 삶, 결코 봄나들이 한가한 소풍의 삶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보고 먹이를 챙겨주는 사육사까지 물어 죽이는 그 사나운 맹수들과 같이, 악한 영들의 으르렁거림이 일상의 평범한 삶들 속에 은밀히 감춰져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죄는 반드시 죄를 더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냄을 기억하고, 늘 깨어 기도하는, 그리고 연약한 나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늘 간구하는, 그래서 아예 죄의 그늘도 밟지 않는,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십시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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