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러 날이 지나매" 2015년 3월 15일 주일 설교
2015-03-1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50315 사순절 네 번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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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 23~25절, 여러 날이 지나매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315.mp3
사순절 네 번째 주일 말씀으로 ‘여러 날이 지나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이 시대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예측이 불가능한 변화의 시대입니다. 한 젊은 CEO가 자신이 멘토로 삼고 있는 대기업의 은퇴한 CEO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업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무엇이 앞으로 잘 되고 흥할지 묻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구상한 10년의 계획서를 들고 멘토에게 내밀자, 그 멘토가 이렇게 책망했다고 합니다. “자네, 아직 멀었구만.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10년짜리 계획서를 들고 다닌다는 말인가. 이제 예측이란 의미가 없네. 매순간이 변화인 이 시대에, 장기적인 계획은 아예 생각도 말게.” 이렇게 말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이 다음 step을 어디로 밟아 나갈 것인가, 늘 고민하며 머뭇거리게 됩니다. 특히 아직 인생의 전반전 중에서도 극초반부를 살고 있는 여러분과 같은 청년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한 고민이 깊을 겁니다.
방향이 어느 정도는 정해진 사람도 고민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길이 나름대로 정해지면 생기는 고민이, 이 뻔한 일과 삶이 과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나라의 의미 있는 소명이 될까, 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이 길을 끝까지 가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가, 갈등과 고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럼 여러분과는 아주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저는 어떨까요? 목사라는 길을 아예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걸어가는 저 같은 사람은 어떤 고민을 할까요? 여러분과 같은 고민은 없을까요? 그냥 매번 설교 고민만 하면 되니까, 여러분보다 훨씬 더 쉬울까요? 목사로서 여러 선택의 길을 고민하면서 느끼는 가장 어려운 점은, 다음 step을 위한 선택이 단지 저 하나, 저희 가정에게만 영향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은 저와 동역하는 여러분에게도 동시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데서 오는 중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소소한 선택 앞에서도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곤 합니다. 다음의 발걸음은 어디로 내딛어야 하나. 이 길이 맞는가, 늘 머뭇거리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사울의 마음, 그러고 보면 참 복잡하고 어렵겠다, 싶습니다. 다메섹에 머물며 그곳의 제자들과 말씀도 나누고, 복음도 전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여러분 사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득할까요? 다메섹에는 사울이 왜 온 것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 다 잡아가려고 왔는데, 정작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아니 상상조차 못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건 그냥 큰 변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삶의 방향이 정반대로 전환된 상황이니까요. 그렇다고 본래의 목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의미가 된 이 다메섹에 사울은 그냥 내내 거기 머물러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입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고 살면 되는 거 아니냐, 어차피 다메섹도 이방인의 땅인데 거기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살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에게는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9장 15절과 16절 우리 한 번 더 읽겠습니다.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여기 아나니아에게 사울의 향후 삶과 사역의 방향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이 나오는데요, 뭐라고 나옵니까? “이방인, 임금들, 이스라엘 자손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처음부터 사울이 이방인만을 대상으로, 정확히 결정된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정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16절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을 보여주시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사울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사울은 지금 너무 막연한 상태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 지, 이제 새로운 삶의 첫 발을 어떻게 내딛어야 할지, 너무나 고민되는 상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그것이 아무리 놀라운 경험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빛 가운데 음성을 들은 게 전부인 사울에게 그러한 경험은 조금씩 색 바랜 기억이 되어 갑니다. 방언을 받고 하는 여러 영적인 신비한 경험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신비함이 삶을 지배할 순 없는 겁니다. [방언, 지금은 언제 받았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다메섹을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힘든 고민이었을 겁니다. 다메섹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그냥 놀라고 당혹스러워 할 뿐, 별 다른 열매가 있었다는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후반부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눈부신 활약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이 오늘 다메섹의 사울입니다.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는 애매한 상황입니다.
사울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향 다소에 있습니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자신의 변화와 회심을 사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도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아시는 대로 사울의 가족은 아주 엄격한 유대인 집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알려야 할 대상이 사울의 가족이었을 것이고, 또 예수님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사람도 아마 자신의 가족이었을 겁니다.
여러분이 사울이라면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여러분은 어떻게 다음 step을 밟아 나가시겠는지요? 선택이 어렵다면 그럼 누구를 찾아가 만나 조언을 구해야 할까요? 다시 예수님은 나타나 주시지 않고, 이제 사울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23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 안에는 그렇게 단정할 수 없게 만드는 어려운 부분이 이 질문들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해답이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난데없이 사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밤낮 성문을 지켜서 사울이 다메섹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사울의 제자들, 이 제자들도 사실은 누구인지 모호한데요, 그 제자들이 사울을 큰 바구니에 넣어 성벽을 통해 달아 내렸다는 그래서 무사히 다메섹을 탈출하게 만들었다는, 정말 영화 같은 그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결국 사울이 그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이어지는 26절에 보면 사울이 어디에 있는지가 나오는 겁니다. 26절을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다메섹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본문이 시작되는 23절의 첫 부분의 ‘여러 날’이라는 단어에 주목을 하게 됩니다. 우리말로는 ‘며칠’ 이렇게 바꿀 수 있어 보이는데,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After a while’과 같이 ‘짧은 시간 후에’라고 옮기기도 했지만, 실은 좀 애매합니다. 다른 영어 성경은, “When many days had elapsed(경과)”[NASB]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또 어떤 우리말 성경은, “긴 시간이 흐른 후에”라고 옮기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러다가 많은 날들이 가득 채워진 후에”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많은 날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그 자체가 조금 힘든 문제인데요, 그리고 그 시간이 흐른 뒤가 아니라 가득 채워진 후에, 이렇게 되어 있는 것도 어렵습니다. 만약 이 ‘여러 날’이 정말 긴 ‘많은 날들’이라면 그가 계속 다메섹에 머물다가 제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갔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의 어려움을 예상했는지, 이 부분에 대한 사울 자신의 답이 다른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잠깐 갈라디아서로 가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절부터 24절까지[신약성경 302쪽]인데요, 저와 한 절씩 교독하시겠습니다.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라운 이야기이지요. 다메섹의 제자들이, 베드로가, 요한이, 바나바가 그에게 전해 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박해했던 일, 그리고 그 이유가, 유대교를 강하게 신봉했던 까닭이라고 사울 스스로가 밝힙니다. 여기 ‘조상의 전통’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지난 금요일 새벽에 설명을 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자, 여기가 중요한 대목인데요, 주의를 집중해 주십시오.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의 전도자로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에, 그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또 사도들이나 다른 제자들과 상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뭔가 앞서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사도행전의 기록과는 어긋나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18절입니다.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여기 3년이라는 시간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게바는 베드로지요. 그러니까 앞서 사도행전의 그 이야기가 바로 이어진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바울이 그렇게 아라비아와 다메섹을 오가는 동안, 시간은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하여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것이 그가 다메섹에서 회심한 지 3년이 지났을 때인 겁니다.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여기 수리아는 다메섹이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수리아의 수도가 다메섹이니까요. 길리기아는 사울의 고향 다소가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후 사울은 다시 다메섹으로 왔다가, 결국 자신의 고향 다소로 이동해 간 것입니다.
자, 여기서 다시 사도행전 9장으로 가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뒷부분인데요, 26절에 보면 말씀드린 대로 사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갔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 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절부터 30절까지의 내용은 앞서 갈라디아서에서 했던 이야기의 세부적인 내용입니다.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오래 있지 못하고, 앞서 갈라디아서에서는 15일이었지요, 보름 만에 다시 다메섹 근처로 가게 된 이유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여기서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사울을 다메섹으로 피신시켰지만, 거기도 아시는 대로 사울의 대적이 있어, 다시 피신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이어진 끝에, 결국 사울은 고향 다소에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조금 복잡해 보이지만, 바로 이 내용들이 사울이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다시 다메섹으로 왔다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가 고향으로 가는 3년 조금 넘는 기간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23절의 ‘여러 날이 지나매’라는 표현의 그 여러 날은, 앞의 22절과 단 몇 일 어간의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3년이라는 긴 여러 날이 지난 후, 그리고 보다 정확히는 그 긴 시간이 다 채워진 후, 일어난 사건이 바로 23절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3년의 시간 동안 사울은 주로 아라비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잠깐 고린도후서 11장 32절에서 33절을 보십시다. 신약성경 298쪽입니다. “32.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아멘. 여기 보면 다메섹에서 자신을 잡으려고 했던 사람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나오는데요, ‘아레다 왕의 고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아레다 왕이 누구입니까? 당시 [나바티안 왕국의 왕 아레타스 4세] 지금 사울이 내려간 그 아라비아 전체를 다스리던 통치자였습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헤롯 안디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여 결국 로마 황제가 다메섹까지 다스리게 허락하는 그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습니다. 그 왕의 고위 관리가 지금 다메섹까지 쫓아와서 사울을 잡으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비단 유대인들만 사울을 잡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먼 아라비아의 왕까지도 사울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아라비아에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지도를 보시면 알 수 있지만, 다메섹에서 아라비아까지는 정말 먼 거리입니다. 더구나 아라비아 자체가 정말 넓은 지역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40년 간 헤매던 광야는 물론 그것의 몇 배가 되는 넓은 지역을 다 커버하는 이름이 아라비아입니다.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다 광야입니다. 왜 사울은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 말고, 갑자기 아라비아로 내려갔을까, 거기서 그 3년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또 왜 그 일을 해야 했을까? 우리는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우리는 사울의 다음 step의 결정이 참으로 어렵고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결정의 끝이 바로 아라비아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라비아였을까? 광야는 거기 말고도 여럿인데, 사울은 왜 아라비아의 광야를 택했을까?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5절인데요, 함께 찾습니다. 신약성경 307쪽입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여기 보면 사울은 아라비아를 이렇게 정의내립니다. ‘시내 산이 있는 아라비아’ 그러면서 그곳을 가리켜 ‘지금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규정합니다. 예루살렘이 생기기 전 광야의 예루살렘, 거기가 바로 시내 산이고, 그 시내 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내산이 어디입니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자리입니다. 당시 모세는 산 아래에 백성들을 남겨놓고 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요. 바로 그 독대의 장소. 하나님과 인간이 처음으로 마주한 그곳, 하나님의 말씀이 최초로 인간에게 내려진 그 땅으로 사울이 향한 것입니다. 사울의 결정과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사람에게서 떠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기. 오직 하나님만을 만날 목적으로 사울은 지금 시내 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보내실지. 과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나를 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는지, 내가 열세 번째 사도가 맞는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께 기쁨인지, 그는 그 언약의 땅 아라비아에서 하나님을 독대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사울이 향한 곳은 결코 사람이 많은 곳,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있을 가족의 품, 다소 땅도 아니었고, 함께 미래를 의논하고 상의할 지체들이 있는 곳도 아니었고, 교회의 리더들이 모인 예루살렘도 아니었습니다. 거리로 보면 다소가 아라비아보다 훨씬 가깝지만, 예루살렘은 아라비아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장소이지만, 사울은 그 곳들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홀로 만날 수 있는 그 길로 곧장 내려갔습니다. 정처 없이 헤매다 보니 다다른 곳이 아라비아가 아닙니다. 앞서 갈라디아서의 말씀에서 사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 받는 그 일을 결정하기 위해 결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명확한 목적과 결단을 가지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찾아 간 땅이 바로 아라비아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물론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해야 할 일을 바르게 결정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독대가 가능한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하루나 이틀도 아니고, 자그마치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사울은 하나님과의 독대로 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걸 낭비라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본문에서 뭐라고 그 시간을 정의했었습니까? “그 많은 날들이 가득 채워진 후에”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fulfill’ 정해진 시간이 가득 채워진 것을 의미하고, 필요한 일들이 온전히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여러 날의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채워진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보낸 3년의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울은 혼란스러웠고, 어떤 의미에서는 다급했고, 막막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예수님과 거의 같은 연배이니, 아마 여러분 또래였을 겁니다. 비슷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인생의 급격한 터닝 포인트 앞에서 그는 그 여러 옵션들 가운데 결국 하나님과의 독대를 결정했습니다. 사울을 만들고, 사울을 부르셔서, 사울을 주님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분, 하나님 앞에 그는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각한 그 충분한 시간을 거기서 채웠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결정하고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삶을 이제 시작하게 됩니다.
자 여러분, 이런 사울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어떤 도전이 여러분 안에 생깁니까? 무엇보다 저는 여러분이 정말 사울과 같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한 그 택함과 부르심이 정말 중요하고 의미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하나님과 홀로 만나며 보냈던 사울은, 그가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분명 하나님의 큰 부르심 앞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사울은 사울이고 나는 별 것 아닌 삶이라 여깁니까? 그럴 줄 알고 사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1)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2)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3)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스스로를 제한하고 무시하는 이들을 향해 사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부어지기를, 그래서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를 간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의 영광의 풍성함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 깨닫고 계시며, 경험하고 계십니까? 부디 여러분에게 사울의 눈을 뜨게 했던 그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지기를 원합니다.
목사나 선교사만 소명을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넓은 세상의 더 많은 선택지들 앞에서 결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더 많은 기도와 씨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길을 목사의 길만큼 귀하게 여기고 계시는지부터 묻고 싶습니다. 그냥 필요한 돈이나 벌면서 살다가 죽을 생각이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여러분의 고민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게 행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한 그 시간이 온전히 채워지고 있습니까? 조금 힘들면 다시 생각을 멈추고, 조금 지치면 다시 기도를 멈추는 그런 가볍고 얕은 고민이 여러분의 고민 아닙니까?
그 고민은 누구와 행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찾아가 구하는 멘토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찾는 자리는 늘 복잡하고 혼잡한, 사람들이 넘치는 그런 자리 아닙니까? 자기 코가 석자인 사람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소리에 여러분의 귀와 마음이 쏠려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만들고 구원하신 하나님과 진정 독대하며 여러분의 인생을 그려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주변에는 온통 혈육과 사도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만 난무하지 않습니까?
그걸로는 하나님의 시간이 채워져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걸로는 여러분의 삶이 조금도 그 지경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소리를 사람들을 통해 전해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사울을 독대하시기를 원했고,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구하는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울을 그렇게 만나시기를 원하시고, 만나셔서 그의 소명을 전해주고자 하시던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동일하게 만나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사울과 같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가운데, 진실로 하나님의 기쁨이요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깊은 고독 속에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을 이 땅에 창조하시고 젊음의 때에, 사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나이에,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을, 이 땅에 이루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라비아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시간이 충분히 채워질 때까지 담대하게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소리에 일희일비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거쳐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홀로 대하는, 그 자리를 귀히 여기고 사모하십시오. 사람들의 잡음과 세상의 소음들 속에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하나님의 독대, 그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혹시 지금 아라비아의 깊은 고독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채워짐을 믿고, 끝까지 그 씨름을 멈추지 마십시오. 부디 여러분 모두의 젊음이, 주님을 바라보는 그 시간으로 온전히 채워져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주님의 그 소망들을 온전히 발견하고 이뤄갈 수 있기를, 그래서 훗날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사울과 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듣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