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힘을 더 얻어" 2015년 3월 8일 주일 설교

2015-03-0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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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8 사순절 세 번째 주 ----------------------------------------- 사도행전 9장 19b~22절, 힘을 더 얻어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308.mp3 사순절 세 번째 주일 말씀으로 ‘힘을 더 얻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옛말이 있지요. 사람이 참 희한해서 죽을 때가 되면 그게 갑작스러운 죽음이든 아니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죽음이든 간에, 주변을 정리하고 과거를 뉘우치고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은근히 사람이 변하는 걸 막는 데 쓰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기껏 좋은 변화를 결심하고 새롭게 뭔가를 하려고 하면 주변에서 꼭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니가 무슨 바람이 나서 그러냐.”는 둥, ‘작심삼일 할 거다’라는 둥, 방금 전에 말씀드린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둥, 사람의 결의를 꺾는 그런 말만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특히나 그런 말을 주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보통 하게 되는 것이 더 사람을 속상하게 만들곤 하지요. 그래서 사람이 변하려면 주변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그 변화를 믿어주고 격려해주며 잘 안 될 때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게 꼭 필요합니다. 사실 사람의 결단이 참 유약하지 않습니까? 혼자 다 결단하고 변하고 할 것 같지만, 사람은 늘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격려가 꼭 필요합니다. 그냥 마음만으로는 부족해요. 말로 직접 해야 합니다. [고백] 누군가 옆에서 작은 격려만 해 줘도 없던 힘이 나고 용기가 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사울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참 복이다, 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다메섹 공동체를 만난 겁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나눴지만 그들은 사울의 변화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사울이 짧은 시간 안에, 단 며칠 만에 주님의 제자로서 새로워질 수 있도록, 그들은 기꺼이 협력하고 도와주며 조용히 지켜봐 주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을 타도의 대상으로 처음에 생각했겠지만, 실상 그곳은 하나님이 사울을 위해 예비하신 안전하고 따뜻한 요람이요 인큐베이터였습니다. 저는 우리 고백교회 지체들이 서로에게 그런 관계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누군가의 변화와 결단 앞에서 그 사람보다 더 그 사람을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주님의 공동체이면 좋겠습니다. 하다가 잘 안 되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해보라고, 그래서 오는 불편과 그 사람의 가시도 품어주고, 받아주는, 기다려주는, 그런 진정한 주님의 몸이 되기를 원합니다. 몸의 지체 하나가 불편하다고 그걸 누가 잘라 버립니까? 다 나을 때까지 나머지 모든 지체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기다려줍니다. 그게 몸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고백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다들 우리는 청년 아닙니까? 완성된 모습보다, 아직 변할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그 일을 함께 해낼 수 있습니다. 내 연약함을 기꺼이 오픈하고, 늘 변화에 도전할 수 있는 진정한 젊음이 우리 공동체의 힘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디 우리 공동체가 오늘 다메섹 공동체의 제자들 같아서, 사울과 같은 변화하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온전한 주님의 몸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공동체의 따뜻한 요람을 통해서 사울은 급속히 주님의 제자로 새로워집니다. 하지만 다메섹의 제자들이야 그걸 함께 지켜봤으니 그나마 덜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울의 모습에 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21절 말씀처럼, 여기 온 목적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가는 거였던 사람이, 오히려 그 예수를 전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놀란 이유, 그리고 우리도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는 이유, 그 결정적인 단서가 본문 20절에 있습니다. 본문은, 사울이 복음을 전하되 ‘즉시로’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천천히, 몸 추스르고, 마음 추스르고, 그런 게 아니라, 사울은 진리를 만나고, 배우고, 즉시로 행합니다. 변화의 폭도 큰데, 변화의 속도도 너무 빠른 거에요. 그러니 이게 사람들에게는 너무 급작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여유를 두고, 서서히,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변해야 하는데, 그가 너무 쉽게, 너무나 갑자기 변해버리니까, 사람들은 그 진의를 의심했습니다. 이렇게도 사람이 변할 수 있나, 여기에 뭔가 더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당연히 생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걸 보고 있는 성도라면, 이런 모습을 기이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가 되는 건, 어떤 인간적인 구도의 시간이 축적되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시체를 아무리 흔들고 깨워도 살아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역사하는 권능으로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고는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변화, 그것은 매순간 즉각적인 반응과 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것임을 여러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복음을 통해 성화가 되는 것 물론 대단히 긴 호흡으로 이뤄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긴 과정 속에는, 매우 급박하고 다급한 매순간의 반응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천천히 오랜 시간을 두고 변하니까 차차 해야지, 이렇게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도 바울과 같이, 매우 즉각적인 순간의 변화들이 만들어내는 시간과의 변주 속에서,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긴 호흡으로는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는 겁니다. 사실상 여러분, 즉시로 하는 회개와 결단만이, 진정한 회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왜 잘 변하지 않느냐?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결단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걸 늘 다음으로 미루니까, 즉시로 행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요? 우리가 여름에 수련회 같은 데 가서 은혜 받고도 왜 안 변하죠? 눈물 흘리고 진정으로 돌이켜서 오는데도 안 되요, 왜 그래요? 거기서 결단을 하고 아예 삶을 바꾸고 올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수련회 마지막 날 적당히 대충 보내고 집에 와서, 피곤하니까 또 한 숨 자고, 그간 못 먹은 거 먹고, 미뤄둔 일 하고, 이러니까, 말씀 앞에 즉시로 하는 순종이 없는 거에요. 그러면 절대로 삶의 변화가 없어요. 사람들이 놀라든 뭐든 당장 바꾸고 결단을 시작해야 하는 거에요. 당연히 사람들은 놀라고 비웃지요. 뭐 그렇게 서두르냐. 천만에요. 그때가 유일한 말씀의 골든타임이에요. 말씀 듣고 즉시로 움직이는 사람만이 말씀 앞에 변화 되요. 예수님이 제자들 부를 때,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 듣고 머뭇거리며 천천히 반응하나요? 아니에요. 그 자리에서 모든 하던 걸 멈추고 그거 내려놓고 예수를 따랐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죠. 그거 못하면 주님 못 따라가요. 예수님이 복음 앞에서 밍기적 거리는 사람들을 비유로 하신 표현이 있어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그거에요. 농부가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야 하는데, 뒤를 돌아보면 밭을 어떻게 갈아요? 무슨 농사의 달인도 아니고. 앞을 내다봐야 그 쟁기가 쓸모가 있는 거에요. 누가복음 9장 마지막 단락에 보면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님이 길을 가다가 누군가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주소서.” 주님이 뭐라 하시죠? 그거 정말 중요한 일인데 그래라, 얼른 장례 치르고 나를 따라와라, 이렇게 하시나요? 아닙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말씀하세요. 바로 이어서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변명해요.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주님이 뭐라 하시죠? 그 사람에게 가타부타 말씀 없이, 그냥 이렇게 대답하세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 주님을 따라 가는 사람은, 부르심의 소명을 받았을 때, 바로 그때, 즉시로 떠나야만 그 길을 갈 수 있음을 강조하시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를 따르는 제자는 말씀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이거 하고 저거 하고 그러다 잊어 먹고 뭐 이런 식으로는 순종은커녕 귀만 즐거울 뿐입니다. 제가 지난 Talk Bible 시간에 그런 말씀 드린 적 있지요?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 (마태복음 13장)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여러분 이 사람이 그 보화를 숨겨 두고 집에 가서 느긋하게 살았을까요? 그 밭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그가 천천히 여유 부리며 모았을까요? 있는 돈 없는 돈 사채고 뭐고 다 끌어다가 그 돈을 마련했을 겁니다. 그 마음, 그 부지런함, 그 즉각적인 반응, 그게 진리를 발견한 제자의 실체인 겁니다. 여러분이 발견한 말씀의 보화가 그렇습니다. 그러한 다급함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누군가 반드시 그 말씀을 먼저 낚아 채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것도 막으려고 하지만, 말씀이 일단 떨어지면 사탄도 똑같이 시간과의 싸움을 합니다. 천국에 관한 또 다른 비유인 씨 뿌리는 비유, 다 아시지요? 첫 번째 뿌려진 씨앗, 길가에 뿌려지지요.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바로 새들이 와서 그 씨앗을 다 먹어버린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직접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시지요. 그 새가 누구라구요? 악한 자, 곧 사탄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말씀이 심겨지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게 다름 아닌 사탄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것과 동시에, 여러분은 사탄과의 경주를 한다고 생각하면 되요. 사탄은 그 말씀을 빼앗아가기 위해 달려들고, 여러분은 그것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기 위해 달려드는 거에요. 우리가 그 싸움에서 패하기 때문에 말씀의 열매가 없는 거에요. 받긴 받았는데 홀랑 다 사탄만 배부르게 먹어요. 여러분의 영혼은 말씀을 넉넉히 먹어도 늘 배고프고, 메마른 모습으로 그러고 있는 거구요. 여러분 단 한 가지 말씀을 품더라도 그걸 머리로, 가슴으로만 품지 말고, 여러분의 몸으로, 행동으로 품으세요. 움직이세요. 그래야만 그게 열매로 맺힙니다. 미루지 말고, 즉시로 행하세요. 뒤로 미루지 말고, 말씀을 듣다가 깨달아지면 적잖아요. 적는 걸로 안 되면 아예 예배 중에 나가서 행하고 오세요. 예배 중간에라도 그 일을 실행하세요. 그게 안 되면 지체들 안에서 말로 공언하고, 함께 그것을 결단하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늘 제자리에서 맴돌게 됩니다. 여러분, 정신 차리세요. 언제까지 귀만 즐거운 성도가 될 거에요? 변해야죠. 새로워져야죠. 사순절, 뭐가 달라졌어요? 여러분 정말 보화를 발견하고 있기는 해요? 금요일 오후면 저는 반드시 하는 일이 하나 있어요. 주일 준비와 설교 때문에 정말 정신이 없어도 이건 빼먹지 않고 해요. 지난 주간 동안 여러분과 나눈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돌아보는 거에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슨 말씀을 하셨나. 나는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고, 그 말씀 앞에서 작은 결단이라도 한 게 있는가?” 가끔 놀라요, 제가 한 설교인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읽다 보면 제가 졸아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참 감사하게 되지요. 말씀을 직접 전한 목사도 그런데 여러분은 오죽 하겠어요? 기억 안나요. 아무 영향력도 없어요. 사탄이 다 먹어 가버리니까요. 여러분 사단 배불리는 '사단의 빵 Shuttle' 노릇 그만 하세요. 오늘 사울과 같이 즉시로 순종하고 반응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배불리 먹고, 여러분의 삶이 진실로 새로워지는, 그런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울이 그렇게 곧바로 반응하여 복음을 전했지만, 오늘 본문은 그 결과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의심만 할 뿐이지 정작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놀라고 당혹할 따름입니다. 21절에 사람들이 다 놀랐다고 기록합니다. 사울이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더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한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2절 마지막에 보면,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믿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울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니까, 그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 표현, ‘힘을 더 얻어’라는 것은, ‘힘을 증가하다’라는 강조형 동사에 ‘the more’의 부사가 추가로 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급격하고 충분하게 강해졌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또 영어 성경 NASB가 “Saul kept increasing in strength”라고 옮기는 것처럼, 그 힘의 증가는, 일시적인 게 아니라, 계속적인 상태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지속적으로 힘이 더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변화는 없고, 그저 놀라고 의심스러워하는데 사울이 왜 힘을 더 얻습니까? 그래서 헬라어 원문에는 22절에 ‘그러나’라는 역접 접속사 ‘de’가 들어있습니다. 왜 사울의 마음에 힘이 더 생겼는가, 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복음에는 정작 마음이 없고 전하는 사울의 모습에만 주목하는 상황에서 왜 사울이 힘이 더 붙었을까? 어떤 힘이었을까?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이 직접 사울처럼 복음을 전해보면 압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전해 보면 알아요.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아요. 그럼 힘이 빠질까요? 물론 처음에는 그렇죠. 그치만 그게 조금 지나고 나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사울이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요? 근데 왜 나는 믿어지는가? 이게 무슨 조화인가, 주님이 나도 이럴 걸 아시고, 직접 찾아오셔서 나를 부르신 거구나,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전할수록, 사람들이 외면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그 은혜의 파워가 붙는 것에요. 사울은 지금 아마 감격하며 복음을 전했을 거에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저 사람들보다 내가 더 악하고, 더 의심 많고, 더더욱 견고한데, 나를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셔서 구원하신 거구나.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크고 특별한 은혜를 주셨구나,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힘을 더 얻는 거에요. 목사들은 그 감격으로 버텨요. 나 같은 존재를 하나님이 뭘 보시고 목사로 부르셔서 이렇게 귀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나. 내가 뭐라고. 목사 아니었으면 완전히 어디 양아치 같이 뺀질거리며 살았을 사람, 주님이 은혜 주셔서 이러고 사는구나, 늘 생각합니다. 지금 사울이 느끼는 감격이 그것이에요. 자신을 향한 복음의 주도적인 사랑 앞에 지금 사울은 감격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만 그 감격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들, 그게 어디 사람의 일이에요? 사람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그냥 돈 버는 수단이에요. 그치만 성도는 그게 돈벌이가 아니에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서른 세 해를 사시면서 나머지 서른 해 뭐 하셨게요? 늘 기도만 했어요? 아니에요. 사람들 보기엔 똑같이 밥 벌어 먹으셨지요. 하지만 그때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어요.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일을 하는 거에요. 내 몸을 위해 먹지만, 내 몸 사랑하듯 다른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그 힘든 세월을 견디고 수고하고 애쓰는 거에요. 지난 Talk Bible 시간에 나눈 대로 기도하다 휴거되고, 기도하다 주님 만나는 게 아니라, 똑같이 밭 갈고 돈 벌다가 성도만 하나님께 들리워지는 거에요. 그가 하는 일이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목사만 주의 종이라고 누가 그래요. 아니죠? 그럼 그 감격을 회복하셔야 해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해서, 여러분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겠다는데, 그게 어떻게 감격이 없냐구요. 대통령이 총리로 부르는 것 그거 하나 가지고도 온 집안이 다 난리인데, 그래도 그걸 하겠다고 그 모든 수모와 억울함을 다 참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는 게 그렇게 우습고 별 거 아닌가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아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게 여러분, 별 볼 일 없죠? [교회에서 하는 일도 마찬가지에요. 안내 위원, 대표기도, 무슨 준비, 하다못해 꽃 병 하나 챙기는 게 그게 사람의 일이냐구요. 그걸 기뻐하고 감격하며 감당하는 거, 그게 은혜란 말이에요. 무슨 일 하나 맡고 섬기고 하는 거,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감동이 있으세요? 그게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에요? 여러분의 친구나, 회사 상사가 그 일을 시켜도 그렇게는 안 할 거에요. 그게 무슨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렇게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딱 그만큼의 은혜만 있어요. 종이 하나를 자르고 붙여도, 그게 주님의 일이면, ‘어떻게 나 같은 죄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시는가’ 그 마음이 있는 성도, 그게 진정한 성도인 거 아닌가요?] 시편 84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죠.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세요? 정말 하나님의 문지기로 사는 게 세상 좋아라 하는 그 일보다 더 귀하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가요? 저는 그래요. 주님 문지기가 아니라 내시 9, 상궁 25, 이런 거여도 세상 정승하고도 안 바꿔요.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나오잖아요? 이름도 없는, 상궁 몇, 지나가는 행인 몇, 이런 거요. 그분이 이 좁아터진 한반도의 왕이 아니라, 지구 온 천하,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리고 나를 위해 대신 죽어서, 나를 구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 삼아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져야 할 모든 영광을 함께 기업으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요. 주중에 눈이 너무 시리고 아파서 기어이 안과에 가서 검진을 받고, 안경도 7년 만인가, 새로 했어요. 근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그러는 거에요. “눈 관리를 참 잘 한 거 같다고. 눈이 아주 정상이라고. 지금 쓰고 있는 안경 시력에서 하나도 안 떨어졌다고. 이러기 쉽지 않은데, 참 다행이시라고. 걱정 말고, 그냥 가시라고. 너무 눈을 많이 쓰면 그러기도 하니까 걱정 말고, 눈물 처방해 드릴 테니 시릴 때 가끔 넣어주시라고.” 여러분 제가 그 처방전을 들고 나오면서,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이 눈이 참 고맙네요. 어찌 보면 제 몸에서 제일 고생하는 지체인데, 늘 깨어 있고, 늘 수고하는데, 어디 하나 탈도 안 나고 잘 버티고 일하네요. 주님, 저도 주님께 눈과 같은 종이 되고 싶어요. 주님이 늘 편하게 쓰실 수 있는, 항상 쉬지 않고 일하고, 그러면서도 실력이 줄지 않는, 그런 종이고 싶어요.” 여러분, 주님의 일 감당할 때,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안에 채워져서, 힘을 더 얻고, 더 감격 가운데 일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주의 자녀들이 은혜 가운데 더 힘을 얻으면, 세상을 압도하는 능력이 나타나요. 오늘 사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계속 놀라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지만, 그건 겉만 그래요. 속은 다릅니다. 내면적으로는 분명히 달라집니다. 21절에 놀랐다는 말, ‘엨시크테미’는 그냥 말 그대로 예상과 다른 모습에 신기해했다는 것이지만, 22절의 당혹함, ‘아욱크세오’는 힘으로 압도하여 굴복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주도권을 확보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그들을 결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우리의 믿음이 이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처음엔 그저 놀라고 당황하던 세상의 사람들을 압도하며 거꾸러뜨려야 하는 거에요. 그게 진리를 가진 자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오래 전 지하철 같은 데 맨발로 다니면서 막 이상한 소리로 외치고 다닌 할아버지 기억하세요? 맨발의 최춘선 할아버지. 한참 회자되곤 했지요. 그때 그분이 외치신 한 마디가 뭐였어요? 진리는 고독하지만 날로 담대하다. 그거에요. 진리는요, 담대해요. 진리는 압도한다구요. 사울은 오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예수가 메시야라고 외치고 있어요.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지금 내가 전하는 이 예수만이 진리이고, 이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거에요. 다른 길은 없어요.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그걸 외치고 있는 거에요. 저는 이 대목에서 먼저 여러분에게 정말 이와 같은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가진 담대함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요즘은 예수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이하게 생각하지요. 그래서 기독교가 비난 받는 거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한 게 최근의 일이에요? 아니에요. 계속 그렇게 전해왔어요. 지금 와서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걸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시시해지고 싸구려가 되었기 때문이지,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서가 아니에요. 여러분 혹시 기독교인인 것이 부끄러우세요? 다른 종교처럼 관용과 너그러움이 없는 종교라 창피하세요? 학문을 배우고, 깊은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이제 복음은 너무 과격하고 너무 고루하게 느껴지세요? 며칠 전에 한 지체가 개신교, 천주교, 불교의 종교 간 대화 세미나가 열린다고 저한테 연락을 해서 관심 있으면 꼭 보셨으면 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 거 하면 좀 세련 되 보이고 쿨해 보이고 그런가요? 여러분 관용은 누가 언제 베풀 수 있는 건지 아세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아세요? 그게 자기에게 별 문제가 아닐 때, 그게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 게 아닌 문제일 때, 관용이 나오고, 또 자기도 답을 모르면 관용이 나오는 거에요. 내가 답이 아니니까 남도 답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거에요. 물론 대화는 해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상대방의 신앙도 존중하고 무시할 수는 없죠. 그러나 그 관용이 진리에 대한 타협이 되면 안 되는 거에요. 시험 보고 쉬는 시간에 답을 맞춰 봐요. 답은 없고 자기들끼리 하는 말의 결과가 답이 되는 거지요. 쉬운 거는 다 그렇게 해결이 되요. 그런데 꼭 어려운 문제 몇 개가 말썽이 되죠. 의견으로는 답이 나오질 않아요. 1번이 답이라는 아이도 있고, 3번이 답이라는 아이도 생겨요. 아니다, 4번도 답일 수 있다, 의견이 나오죠. 아이들끼리 의견이 분분해져요. 그때 정말 공부 많이 한 학생, 그래서 진짜 답을 알고 있는 애는 그 이야기에서 답답해 죽을라고 하지요. 답은 2번인데, 이거 문제집에서 분명히 내가 풀어봤는데. 다른 건 절대 답이 아니라고 목청을 높여요. 근데 반대로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되죠? 다 답이 되는 것처럼 서로 관용을 베풀어요. 이것도 답이 되고, 저것도 답이 될 수 있겠대요. 그게 가능해요? 모르니까, 답이 아니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진리 앞에 너그러워지는 거에요.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뭐라고 할 건 없어요. 실력이 없는 건데. 2번이 답임을 알고 있는 학생이 거기서 뭐라고 하겠어요. 그냥 듣고 그렇게 생각해라, 그럴 뿐이에요. 그런데 그 답을 알고 있는 학생에게 변화가 생기죠. 시험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요. 나만 맞았다, 니들이 아무리 그래도 답은 하나다. 그리고 다음 시간 공부에 몰입하죠. 그래 저 아이보다 하나 내가 더 맞았다, 저런 거 이야기하고 있을 시간에 다음 시간 공부나 더 하자. 진리는 고독하지만, 날로 더욱 담대해지는 겁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요. 한 열차에 무임승차를 즐겨하는 한 남자가 탔습니다. 그 남자의 전략은 당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언론사의 기자라고 말하는 거였는데요, …] 여러분, 내 가족이 죽음 앞에서 영생이냐, 영벌이냐 그 차가운 경계선 앞에서 흔들릴 때, 여러분 관용이 나와요? 내 아내가, 남편이,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앞에 놓여 있는데, 이 약도 되고, 저 약도 되고, 이 수술도 되고, 저 수술도 되고, 이게 되요? 관용은 그런 데 사용하는 게 아닌 거에요. 진리를 믿고, 진리를 전하는 여러분이 오히려 힘이 빠지면 어떻게 해요? 그게 진리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에, 더 힘이 들어가고, 더 담대해져야 해요. 그게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진리로 압도해야 해요. 아무 것도 모르기에 그저 관용과 타협을 즐기는 사람들 앞에서, 성도는 더욱 담대하게, 선포하며 스스로를 구별해야 하는 겁니다. 복음으로 설득하는 게 아니에요. 비위를 잘 맞춰서 꼬시는 게 아니에요. 말씀을 선포하는 거에요. 전도는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구요. 직구도 그냥 직구가 아니라 돌직구에요. 그 말이 아름답고 듣기 좋아서 사람들을 살리고 믿게 하는 게 아니라, 그게 진리이며,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거에요. 여러분 믿으십니까? 부디 여러분이 진리로 담대한, 믿음의 청년들 다 되시기를, 그래서 세상의 지혜를 압도하는 능력의 성도가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더 얻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감격하며 힘을 얻고, 내게 주신 이 진리의 말씀과 생명의 능력으로 힘을 얻고, 즉시로 반응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말씀을 능력이 삶으로 나타나서 힘을 얻는, 그게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삶 가운데 지쳐 있고, 힘이 자꾸 빠져나간다면, 다시 진리로 돌아오세요. 그리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세요. 여러분의 지혜로 맞서려 하지 말고, 여러분을 구원하신 생명의 말씀 앞에 엎드리세요. 부디 이 사순절 기간, 여러분의 삶이 진리로 더욱 힘을 얻는 능력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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