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리워야단" 2015년 2월 9일 새벽 설교
2015-02-0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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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50209 월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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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6장 20절 ~ 27장 1절, 이사야 강해216 리워야단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209.mp3
이사야서 이백열여섯 번째 말씀으로, ‘리워야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26장이 21절로 마무리되고 27장이 새롭게 시작되지만, 27장 1절까지는 하나의 연결된 본문으로 보는 것이 더 바른 이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7장 2절부터는 이른바 ‘포도원에 관한 새 노래’라는 이름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핵심적인 구절은,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리워야단’입니다. 히브리어 원음 그대로 읽으면 ‘르비야탄’이고, 영어로는 ‘Leviathan’입니다. 철학자 홉스의 유명한 책 제목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거대한 세력, 곧 리워야단으로 비유되는 그 세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리워야단, 그 뜻은 본래 ‘비틀다’, ‘꼬다’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리워야단’ 바로 뒤에 ‘꼬불꼬불한 뱀’이라고 동격으로 설명이 되어 있지요. 이것은 본래 아랍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기원이 되는 생물이 악어 혹은 고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1절 끝에 바다에 있는 용이라는 표현, 그리고 그 아래 관주에 보면 ‘악어’(히브리어 ‘탄닌’인데요)라고 추가적인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르비야탄, 탄닌, 모두 같은 대상을 향한 다른 표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이러한 표현이 구약은 물론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신약 성경에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땅의 권세 혹은 사탄을 비유하는 모습으로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앞서 언급해 드린 토마스 홉스와 같은 철학자가 그려내는 리워야단은, 인간이 자신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제도나 권력 체제를 가리킵니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불의한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낸, 국가나 정부와 같은 존재를 뜻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거대 권력은 결국 역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존재로 뒤바뀌게 되어, 다시 자유로운 인간의 전복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이 리워야단은 다시 앞서 성경이 지적하는 의미, 곧 거대한 악의 의미와 만나게 됩니다.
작년 프랑스 깐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러시아 영화, ‘리바이어던’에 보면 바로 이런 국가, 정부 체제의 비정함과 사악함이 잘 나타납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것이 푸틴 정권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라는 이유로 많은 논쟁을 낳기도 했는데요, 사실 서방 사회나 우리 대한민국 역시도 이러한 비판의 직접적인 대상이라는 데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더욱 중요하고 심각한 이유는, 오늘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리워야단은 다름 아닌 종교 그 자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요르단은 물론 비이슬람권 국가에서조차 연일 비인간적인 테러와 살인을 반복하고 있는 IS, ‘이슬람국가’의 예에서 보듯, 종교가 자기를 부인하는 종교 본질의 가치를 잃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악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역시 얼마든지 리워야단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가장 큰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당시의 유대교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신앙으로 사람을 살리고 공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 굳어진 종교 체제로서, 제도로서만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석처럼 굳어진 그와 같은 죽은 종교 안에 갇힌 성전, 예배를 향해 예수님은 뒤엎으시기 위해 오셨고, 그 결과 죽임을 당하신 것이지요.
오늘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만, 바로 이 이사야와 같은,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했던 역할이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제사장을 정점으로 한 제도로서의 신앙이 점점 굳어져 갈 때, 거기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회개하며 삶을 고치도록,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도 같은 도전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와 기독교가 하나의 제도로서, 힘 있는 종교로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사람을 고치고 회개케 하며 자기를 부인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능력이 나타나는 대신, 신앙을 매개로 수많은 인간적인 욕망이 생산, 거래, 소비되는, 또 다른 리워야단으로 변질되어 감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정해진 틀과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종교인으로 타락해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하게 회개하며 돌이켜 여러분의 삶을 고친 것이 언제입니까? 혹시 여러분도 주일 예배, Talk Bible, 심지어 오늘 이 새벽기도라는 종교적인 행위 뒤에 숨어, 점점 죽은 종교인이 되어가는 것은 아닙니까? 정말 여러분의 신앙이 살아 움직이며,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낮아지게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그저 위로이며, 핑계이며, 교만의 이유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실제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될 확률은 현저하게 떨어져, 10년 이상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말씀으로 변화가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미국 윌로우크릭 교회의 연구 보고서가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교회와 제도 안에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그의 삶 속에서 소멸되고 사라지는 모순적인 일이 실제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어찌 그 일이 우리와 무관하며, 어찌 우리만 예외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세월에 비례하여 더 악해지고, 더 추해지며, 더 뻔뻔해져만 가는 것입니까? 이미 우리 자신이 또 하나의 리워야단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신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십시오.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님을 주님이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지금 주를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또 한 번의 예배를 드리고, 이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말씀이 정말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깨뜨리고 여러분을 고치고 새롭게 하고 있는지, 깨어 살펴야 할 때입니다. 결국은 썩어질 것들을 거두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삶을 버리십시오. 이 땅의 것들로 헬렐레, 좋아서 웃고 떠들지 말고, 영원한 그 땅의 삶을 바라보며, 거기 보물을 쌓기 위해 수고하고, 거기 여러분의 본향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는, 진짜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 반드시 이 땅에서, 오직 바람을 잉태하고, 바람을 낳는 부활의 삶을 부디 살아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