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2026-10-18 · 설교 원고 · 8쪽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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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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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스물한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50]
요한복음 14:1~11 (신약 171쪽)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본문 6절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제자들과 나누는 주님의 마지막 대화가 조금씩 더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
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봤고, 주님은 대답 대신에 주님 가시는 곳에
지금은 베드로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주님이 떠나시는 건,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고, 다 예비하면 다시 제자들에게 와서 주님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로서는 잘 와닿지 않는, 너무 먼 얘깁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where’에
대해 여쭸는데, 주님은 ‘왜’ 가시는지, ‘why’로 답하신 것도 답답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술 더 떠서,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
가 아느니라.” 이번엔 갑자기 ‘길’에 대해서 얘기하세요. …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 참 아리송한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거지요?
목적지를 안다는 건가요, 길을 안다는 건가요? 둘 다 안다는 건가요?
둘 다인 것 같긴 한데 표현이 참 심오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 일단
제자들이 길을 안다고는 명확히 말씀하셨고, 가는 길을 알기 때문에, 주님이 가시는 곳도 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도마는 5절에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가시는 곳을 알아야 가는 길을 알든가 할 텐데, 목적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거기로 가는 길을 알겠냐는 항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알 거라고 하시
지만, 제자들은 모른답니다.
정리를 좀 해 보면, 주님은 제자들이 길을 알고 있고, 그래서 주님이 가는 곳도 안다고 하십니
다. 반면 제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곳을 모르니 길도 모른다고 얘기합니다. 주님은 길에 초점이
있고, 제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목적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초점이 서로 엇갈리고, 그래서인지 계
속 대화가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보통 목적지를 먼저 정하고, 그 후에 거기로 가는 길을 찾게 됩니다. 목적지를 알아야 길
이 정해집니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워낙 발달해서 목적지만 정확히 입력하면, 가장 빠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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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편한 길을 알아서 알려 줍니다. 가는 길을 전혀 몰라도 누구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지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위치를 설명할 때도, 이제는 거기로 가는 길이나 경로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냥 목적지의 이름이나 주소를 공유하면 그만입니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에게 어떤 맛집을 소개하면서, 가게 이름은 말 안 하고 자꾸 거기로 가는 길
만 설명하면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교회에서 나가서 우측으로 바로 빠지면 노들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조금 가다가 올림픽대로로 합류해서, 동작대교 밑을 지나 한남대교 빠지는 길로 내려가
서, 첫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한 다음, 빨간 벽돌 건물을 끼고 좌회전하면 나오는 세 번째 집이,
진짜 맛있는 돈가스집입니다.” 아마 다들 짜증 내실 겁니다. “아니요, 목사님. 그냥 가게 이름이
랑 주소만 알려 주세요. 길은 우리가 알아서 찾아갈게요.”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만약 우리에게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네, 그땐 목적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길이 더 중요해지겠지요. 가는 길을 얼마나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려 주느냐, 그것이 목
적지에 도착하느냐 못 하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 우리나라에 내비게이션이 대중화된 건
2000년대부터인데요, 그전에는 다 그런 방식으로 찾아갔습니다. 길을 그려서 알려 주기도 하고,
경로를 일일이 다 적어주면 그걸 보면서 찾아갔어요. 차에 지도 하나씩은 다 있었지요. 얼마나
길을 잘 아는가, 그게 운전 실력의 하나였고, 그래서 택시 기사님들은 서울의 구석구석까지 길을
다 외우고 계셨습니다. 지금은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시는 기사님을 보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때
만 해도 길을 모르면 아예 택시 영업을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목적지 자체보다 길에 대해 자꾸 말씀하시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지금 주
님이 가시는 곳에는 무슨 주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 목적지의 명칭도 하나가 아닙니다. 누구는 ‘천국’이라고 하고, 누구는 ‘하나님의 나라’
라고 하고, 오늘 주님은 ‘아버지의 집’이라고도 하시고, 그냥 ‘아버지’라고도 하시고, 또 나중엔
‘낙원’이라고도 하세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도 부르지요. 그러니까 이름만
알아서는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는 그런 곳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뭐라고요? 네, 길입니다. 길을 아는 것이 목적지를 아는 것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결국 그 길의 끝에서 목적지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길만 정확히
안다면 목적지를 잘 몰라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제자
들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묻지만, 주님은 자꾸 ‘길’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아도 길을 모르면, 거기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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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것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누구라고요? 네, 예
수님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고,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그 길을 알고, 선택하고, 그
길로 걸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길을 걸어간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라는 길을 걸어
갈 수 있을까요? 바로 앞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힌트지요. 네,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지요. 여러분, ‘예수’라는 길을 걷는다는 건 결국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
거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곧 주님이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따름으
로써 우리는 예수라는 길을 걷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 말
씀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건 분명 다른 것입니다. 길을 머릿속으로 다 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길은,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만 진짜 ‘길’입니다. 산티아
고 순례길이 좋다는 걸 알고 있고, 또 그 길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어도, 직접 거길 걸어 본 적이
없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겁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직접 걸어본 사람만이, 그 길의 가
치를 알고, 그 길이 주는 깊은 행복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라는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예수님은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라는
길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 길을 알고 신뢰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
는 것이고,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을 착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만, 신앙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내가 예수라는 길을 아는 것으로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
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 말씀합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길을 아는 데 그치지 말고, 그 길 위
에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정말로 그 길을 걸어오라고, 그러면 그 길 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진리
와 생명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걸어가지 않는 것,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길 위에 들어섰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것, 그러면서 길에 대해 생각하고 고
민만 하는 것, 참으로 위험한 신앙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진리와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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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지만 진리에 대한 깨달음도 없고, 생명의 충만함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자꾸만 세상
소리에 휘둘리고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있다면, 열심히 바쁘게 사는데도 왠지 인생의 길을 잃어
버린 것 같다면, 우리는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정말로 예
수라는 길 위를 걸어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말에는 ‘산다’라는 말이 있고 ‘살아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둘 다 살아 있다는 뜻이지만,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산다는 것은 그냥 살아있는 상태에 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건 어떤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애쓰면서 살아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네, 성도는
살아감으로써 사는 존재입니다. 길을 걸어감으로써, 주님을 따라감으로써 진리와 생명을 누리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진리와 생명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한다면, 진리는 참된 것(을 아는 것)이고, 생명은
거기서 주어지는 충만함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거라고 했습니다(요 17:3). 그렇게 영생, 생명은 진리와 통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된 것을 알
때, 진리를 알 때 누려지는 충만함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와 생명이 예수라는 길 위에 있다고 주
님은 말씀합니다. 천국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진리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길 위에 진리와 생명이 있고,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누리는 천국이 바로 진리와 생명입니
다.
여러분, 주님은 지금 천국으로 가는 길, 진리와 생명을 얻는 어떤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게 아니
지요. 그분 자신이 곧 ‘그 길’입니다. 원문에 보면, 길, 진리, 생명에 다 정관사가 붙어 있어요.
그냥 길이 아니라, ‘그 길’, ‘the Way’, ‘the Truth’, ‘the Life’입니다. 정관사가 붙으면 그것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강조하지요. 아버지께로 가는 여러 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참되고 유일한 길
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에게서 자꾸만 다른 뭔가를 찾고 구하려 하지만, 주님의 답은 한
결같습니다. 나를 봤으니 하나님을 봤고, 나를 알았으니 하나님을 알았고, 그러니 나를 믿는 것
이 하나님을 믿는 거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주님을 통해서 뭔가를 얻는 것이 아니지요. 다른 뭔
가를 버리고서라도 주님을 얻는 것,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 말씀에는, 사실 두 가지의 다른 층위가 함께 서술되고
있습니다. 말이 좀 어려운데요, 길은 진리와도 다르고 생명과도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와 생
명은 길과 다른 차원이에요. 길은 어떤 과정인데, 진리와 생명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 진리
는 이미 완전히 참된 것입니다. 70%는 참이고, 30%는 거짓이면 여러분 그것은 진리일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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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완결된 상태로서,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온전한 참을 가리킵
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있거나 없거나,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70%만 살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살아 있으면 생명이 있는 것이고, 방금 숨을
거뒀어도 죽으면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와 생명은 어떤 중간 단계가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상태, 곧 결과이고, 목적지에 도달해서 누리는 어떤 온전함과 충만함입니다.
하지만 길은 다릅니다. 길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전제로 합니다. 목적지로 가는 과
정이 길이고, 도착하면 그 길은 끝납니다. 어느 정도 갔느냐와 상관 없이 가고 있으면 다 길이예
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여정에서, 수원까지 갔어도 부산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고, 대
전에 있어도, 대구에 있어도, 다 똑같이 부산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방금
출발했어도 부산으로 가고 있는 길이에요. 길은 목적지에 도달했느냐의 문제도 아니고, 어디까지
갔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 그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시작이 반이 아니
라 시작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길은 진리나 생명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길은 어딘가를 향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지만, 진리와 생명은 그 과정의 끝에서 누리는 어떤 완전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지요? 네, 주님은 길이면서,
동시에 진리와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놀라운 메시지인데요, 여기서의 초
점은 물론 ‘길’입니다만, 주님은 내가 길이면서도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과정과 결과 모
두가 주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길이면서도 진리이고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과정이시면
서도 결과이고, 결과이면서도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과정에서,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누리는 일이 이미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길을 걸어가면 결국 천국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건 반쪽만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자 진리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길을 걸으면 그 길 위에서 이미 하나
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부산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그 여정에서 이미 부산 여행의 행
복감을 누릴 수 있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주님 안에서 일
어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되고, 생명을 누리게 될 거라
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는 이
유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성도의 삶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만 집중하는 세상의 삶이나, 신앙을
통해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종교적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통해 누리고자 하는 그 무엇이, 이미 예수라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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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적지에 다다랐기 때문에
행복한 게 아니에요. 거기로 가는 길이 곧 생명이고 진리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끝에 뭐가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듯이, 오히려 그 길을 걸어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 길 위에서 충
만한 진리와 생명을 누리게 되듯이, 예수라는 길을 걷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한평생 인생인 것입니다.
예전에 가수 신해철 씨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런 얘기 하는 걸 들었습니다. 아마 그때
가 신해철 씨 노래가 처음으로 방송에서 1, 2위 하던 때였던 거 같은데,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좋으냐 이렇게 누가 질문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신해철 씨가 그렇게 대답하지요. 방송에서 1등
하니까 그 기쁜 게 1, 2주 가더랍니다. 연말에 큰 상을 받으니까 그 감동이 한 달쯤 가더래요.
하지만 그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기쁨, 또 함께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과 누린 그 감동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라는 거예요. 결과로 얻을 행복을 이미 과정 속에서 더 깊
이, 더 오래 누리는 것이지요. 남이 인정해 주는 어떤 결과만 삶의 행복인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보다 더 깊고 진한 행복을 그 길 위에서 이미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그 ‘길’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결과를 얻느냐보다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
거기에 삶의 가치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
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깁니다. ‘뭐로 가도’의 그 ‘길’이 우리에겐 전부거든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예요. 당연히 뭐로 가도 서울에 갈 수가 없지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
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라는 길이여야만 하고, 예수를 따르는 그 과정이 우리
에겐 곧 목적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길은 그저 수단이나 과정에 불과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 명제의 핵심은 로마, 곧 목적지지요. 길은 단지 로마로 가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
나 예수님이 길이라고 하실 때에는, 길이 그저 수단이 아닙니다. 그 길 안에 이미 진리와 생명이
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그 길이 아무리 잘 닦여 있어도 로마가 아니지
만, 예수라는 길은, 그 길을 걷는 순간 진리가 드러나고 생명이 경험됩니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
지나가는 수단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일 자체가 이미 목적과 닿아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결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어떤 과정이었든 ‘그러려니’ 하게 되
고, 결과가 안 좋으면 최선을 다했던 그 과정도 색이 바래고 맙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합리
화되지요. 결과가 나쁘면 과정도 부정당합니다.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말입니다. 길은 그저 목적지로 가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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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내가 ‘길’이라고 하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결과를 핑계로 과정을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예수의 뜻
과 말씀이 아닌 다른 길로 얻은 뭔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리라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아이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고 예의의 가르치면서, 부모가 무
례한 방법을 쓴다면, 여러분 과연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예수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예수를 증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성도는 과정이 곧 결과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결과를 길
이 되신 주님이 결정하시고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너무 결과나 성과에 집착하지
않는 삶의 자세가 정말로 필요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가는 것도 좋고, 그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너무 거기에만 몰두하고 살면 진정한 기쁨을 놓치게 되고, 목표를 이루고도
결국은 길을 잃어버립니다.
지난 한글날 연휴에 영화 ‘오디세이’를 봤는데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딱 그렇지요. 목적을 이루
고 승리했는데도, 그 후에 길을 잃어버립니다. 길은 그런 거예요. 나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합
니다. 길 위에서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 아님을 발견하게 돼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여정을 통
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집으로 돌아오는 그 10년의 여정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끊임없이
고뇌합니다. 승리의 ‘과정’이 잘못됐다고 괴로워하고, 그 과정의 대가를 치르지요. 트로이를 무너
뜨리기 위해 사용한 잘못된 방법들, 속임수와 파괴와 수많은 무고한 희생이 오디세우스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영화 곳곳
에 담았습니다. 마치 오늘 이 시대의 결과주의, 성공주의 문명을 향한 준엄한 경고처럼 느껴집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한 인생, 성공한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이 애쓰
고 노력하는 그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 죄송하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해, 또 그 목
적을 이루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님을 따라가고,
거기서 주님을 누리는 일에 조금만 더 마음을 두고 사시길 바랍니다.
단지 길을 잘 아는 걸로 그치지 않고, 그저 길에 관해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그런 신앙에 머물지 않고, 단 한 걸음이라도 직접 내 발로 그 길을 걸어가 보는, 그래서 예
수라는 길 위에 놓인 그 진리와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면 좋겠습니다. 습
관대로 살아가는 삶을 주님 말씀 앞에서 잠시 돌아보고, 매일의 작은 선택 속에서 예수님께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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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넘어 단 하나의 말씀이라도 그것에 순종하며 사
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주님이 ‘길’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입니다. ‘순례자들’이지요. 그 말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결코 우리의 ‘거처’가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
를 예비하러 간다, 주님 말씀하시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땅은 그런 거처가 아
니라는 거예요. 그냥 잠시 머물다 가는 임시 숙소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여기에 너무 많은 시간
과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지 마세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빌 3:20), 이 땅에서는 그저 외
국인이며 나그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히 11:12). 외국인과 나그네, NIV 성경에 보니까, ‘aliens
and strangers’라고 되어 있어요. ‘alien’[헬, 크세노스], ‘외계인’이라고도 번역하잖아요. 이 세
상에서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이왕 잠시 머물다 가는 거 이 땅에서도 편한 숙소, 좋은 숙소에서 있다가 가면 더 좋겠지
요. 우리 성도님들도 가능하면 그러기를 바랍니다만, 여기가 너무 좋으면 나그네처럼 살기가 더
어려워지겠지요. 결국 주님을 따를 수 없게 될 겁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잖아요. 세상 짐이 많으면 예수라는 길을 걷기가 그만큼 힘들어집니
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이 짐을 바리바리 싸서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네, 얼마 못 가서
포기할 거예요. 큰 캐리어 끌면서 그 길 걷는 사람은 없지요. 그렇게는 갈 수가 없는 길이기 때
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빨리 가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그런
욕심으로는 예수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그런 짐을 잔뜩 지고 주님을 따르려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따르며 가는 이 길, 분명 쉽지는 않습니다. 가다가 멈추고 싶을 때도 있고, 또 다른 길을
두리번거리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다른 길도 힘들긴 마찬가집니다. 예수 아닌
다른 길이라고 쉬운 게 아닙니다. 더구나 길을 찾느라 일평생 헤매는 인생도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길을 찾았고, 그 길에 들어와 있습니다. 방황하는 나그네가 아니라 한 길 가는 순례
자예요. 다윗은 그걸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시 39:12)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여러분, 그게 얼마나 귀한 복인지,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 부디 길 되신 주님을 따르며, 이 땅에서 그 나라를 꼭 누리며 살아가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