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믿고 가더니

2025-11-23 · 설교 원고 · 9쪽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원고 1쪽

- 1 - 오순절 후 스물네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16] 요한복음 4:43~54 (신약 149쪽) 믿고 가더니 본문 50절의 ‘믿고 가더니’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 기를 바랍니다. …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머무신 주님께서, 사역의 중심지가 되는 갈릴리로 이동 해 가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중간 길목에 있는 나사렛, 예수님의 고향은 건너뛰고 가신 걸로 보 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친히 증언하셨음을 44절이 이야기하기 때문 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당시 널리 퍼진 유대인 속담입니다. 물론 유대인들 만의 이야기는 아니었고, 그리스 문헌에도 비슷한 말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고향 사람들은 서로를 존귀하게 보지 않는다든가, 의사는 아는 사람을 치료하기 어렵다든가 하는 말들이 회자하 곤 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 이들이 다 우리랑 같이 살고 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의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수군거렸고, 결국 주님께 등을 돌린 이야기가 누가복음 4장에 나옵니다. 아울러 이런 반응이 꽤 자주, 오래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이 말씀이 사복음서 모두 에 기록되어 있고, 그 말씀을 하신 시기도 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인정을 못 받는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가 아기 때 울고 떼쓰는 것도 봤고,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지나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상한 행동을 했던 것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른거리는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그 익숙함이 누군가의 특별함에 둔감하게 만들기도 합니 다. 경탄과 존경의 감정은 신비감과 비례할 때가 많지요. 가까워지고 익숙해지면 아무리 특별한 존재도 평범하게 느껴지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마음이 우리의 신앙에는 위험한 독이 될 수 있음을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사마 리아에서 갈릴리로 가는데, 고향 나사렛은 애써 외면하고 가십니다. 배척하고 믿지 않으니, 주님 도 그곳을 피하시는 것이지요. 밭이 희어져 추수할 일이 시급한데, 고향이라고 해서 굳이 거기 매일 여유가 없습니다.

원고 2쪽

- 2 - 엘리야 시대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시돈, 이방인의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만 기적이 일어났고, 엘리사 시대에 많은 나병환자가 이스라엘에 있었 지만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역시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 고침을 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우리는 익숙함으로 인해 경외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무뎌진 마음은 하나님이 주실 은총마저 스스로 외면해 버리게 만든다 고,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친밀함을 가장한 익숙함이 우리 신앙에 독이 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 음을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친밀하지는 않으면서 익숙하기만 할 수도 있습니 다. 매주 반복되는 이 예배도, 늘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가깝고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 에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더욱 기대하며 바라 보는, 그런 겸비한 마음 부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우리 서로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서, 익숙함 속에서도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 우리 교회 안에도 보면, 고향이 같지는 않아도, 어릴 때 혹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의 모습을 공유하는 분들이 꽤 계시지요. 중학교 때 제가 처음 봤던 집사님도 계시 고, 대학생 때 만난 성도님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때도 다 훌륭했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셨는데요, 함께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마음 깊이 서로 인정해 주는 모습들이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친밀하기에 그 존귀함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남들은 잘 모르는 변화와 성장까지도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면서, 주님의 모습에까지 함께 자라가길 바랍니다. 고향에서 위로받지 못하고, 공동체에서 인정 못 받으면 어디 가서 그런 걸 받겠습니까? … 예수 님도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가서 마음 편히 쉬고 싶고, ‘나사렛의 자랑, 요셉의 아들 예수’ 뭐 이런 현수막까지는 아니어도, 때론 격려와 지지도 받고 싶으셨을 겁니다. 우리들 마음 이 다 그렇지요. 세상에서 치이고 무시당하고 상처받고, 그러다 여기 모였습니다. 보냄 받은 자 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아는 만큼, 여기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 히 훌륭하다는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보실 때, 늘 지금 너머의 모습으로, 소망의 관점으로 그를 바라보시고 인정해 주시지요. 시몬을 향해 베드로라, ‘반석’이라 부르시고, 훗날 그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거라고 하 십니다. 지금은 비록 부족하지만, 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할 것도 아시지만, 주님 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진짜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고, 지금 여기서 인정 하십니다.

원고 3쪽

- 3 - 세상은 그렇지 않지요. 미래는커녕 현재의 모습도 제대로 봐 주지 않습니다. 과거에 잘못했던 것, 실수했던 것, 그 틀 안에서 오늘의 나를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린 나 자신도 그렇 게 볼 때가 많지요. ‘그래, 나는 원래 그런 존재인가 보다. 나는 결국 안 바뀌나 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만, 여러분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완성하실 온전한 모습으로 우릴 보시고 또 그렇게 인도해 가십니다. 제가 최근에 안경을 교체하면서, 다초점 렌즈로 바꿨는데요, 아래쪽에는 가까운 걸 보는 렌즈가 있고, 중간부터 위로는 멀리 있는 걸 보는 렌즈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너무 이상했는데 지금 은 좀 적응이 돼서 아주 잘 사용하고 있는데요, 신앙도 그러면 좋겠다, 가까운 건 감사의 렌즈로 보고, 또 멀리 있는 건 소망의 렌즈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됐습니다만, … 저와 여러분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 다. 그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누군가를 그렇게 세워가는 저와 여 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사렛을 지나쳐 갈릴리로 가신 주님을 사람들이 영접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거나 주 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도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예수님이 행 하신 모든 일, 표적과 기사를 봤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영접은 했지만, 관심의 방 향이 어긋나 있는데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복음의 이 두 번째 표적은, 이렇게 환영과 오해 가 뒤엉킨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갈릴리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어떤 이 유에서인지, 주님이 주로 머무시던 가버나움으로 가시질 않고, 거기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가 나로 향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표적을 행하셨던 곳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식을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사람이 듣게 됐습니다. 서로 길이 엇갈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왕의 신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의 ‘왕’은, 갈릴리의 분봉왕이자,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을 참수한 왕으로 유명하지요. ‘그의 신하’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한 단어 [바실리코스]는, 직역하면 ‘왕에게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 왕족이나 귀족, 혹은 왕궁에서 일하는 관리나 근위병 같은 고위 관리를 가리킵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닌 안티파스의 측근이라면, 그 또한 이방인일 가능성도 높아 보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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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그런데 그의 아들이 많이 아픕니다.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다는 구절의 원문도, 실제로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영어 성경이,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고, ‘at the point of death’ 라고 옮겼습니다. … 왕의 고관이니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겠지요. 의사라는 의사는 다 만 나보고, 가능한 방법은 모두 찾아봤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여기 아니면 정말 끝 이라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종을 보낸 것도 아니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거의 하룻길이 되는 길을 본인이 직접 왔습니다. 왔다가 돌아가는 그 이틀 동안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예수님이었고, 반드시 그분을 모셔 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간절히 주님께 청합니 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 애절한 부탁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너무나 뜻밖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 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믿지 않을 것이다.” 말씀합니다. 거절입니까, 승낙입 니까? 네, 승낙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표적과 기사 없이는 도무지 믿지 못하니, 내가 표적을 보여줘서 기어이 믿게 해주겠다, 이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책망의 뉘앙스가 담긴 탄식이고, 표 면적으로 보면 거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주님의 이 말씀을 거절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 시 요청하지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앞에서는 없었던 ‘주여’라는 호칭이 더 해져서, 더 겸비하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 주님이 말씀하는 그 ‘믿음’이라는 게 뭔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러나 모든 걸 내려놓고 주님 앞에 엎드려 있는 이것이 그에게는 믿음이라면 믿음 이었고,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온 마당에,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 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요청에 응답해 주신 경우가 성경에 꽤 많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거절하시는 것처럼 하시면서도, 오히려 그 거절을 통 해 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결국은 응답해 주신 경우가 꽤 있습니다. 당장 앞의 첫 번째 표적에서도 그러셨지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 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2:4) 명백히 거절로 들리는 말로 대답하십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괘념치 않았지요. 그걸 거절로 여기지도 않았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당부하여 놀라운 일을 봤습니다. 딸이 귀신 들린 수로보니게 여인, 이방 여인에게도 그러셨지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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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너무나 잔인하게 들리는 말씀이지 만, 이 여인은 거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을 딛고 일어서서, 주님이 원하 시는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이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는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 왕의 신하가 그런 믿음이니까 그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시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이 아버 지에게는 그런 뜻이 아니었지요. 세상에 가득한 그런 잘못된 믿음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 러한 불신에 갇혀 있지 말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오라는 주님의 격려이고, 도전이었던 것입니 다. 만약 이 신하도 그런 믿음에 머물러 있었다면, 거기서 그냥 뒤돌아섰겠지요.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고, 주님의 그 말씀을 기회로 삼아, 주님께로 한 걸음 더 다가갔습니다. … ‘표적과 기사 를 보지 못하면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한다고 책망하시는 분이시라면, 어찌 됐든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실 수는 있는 분이 분명하구나! 뭐라고 말씀하시든 이분을 꼭 붙잡아야겠다!’ 오히려 확신 이 더해지면서, 더욱 담대하게 주님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지요. ‘어쩌면 주님은 단지 이 아버지의 아들 만을 살리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 아버지를 진정으로 살리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청대로 함께 가셔서 그 아들의 육체만 고쳐주실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주님 은 그 아버지의 영혼도 함께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죽어가는 그 아들이 이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듯이, 주님께는 지금 이 왕의 신하가 너무나 귀한 아들이지요. 믿음 없는 세상에서 이 아 들을 건져내어 온전한 신앙으로 이끄시고, 그를 통하여 온 가족이 구원 얻게 되기를, 주님은 간 절하게 바라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때도 아마 마찬가질 겁니다. 때로는 응답이 더디고 심지어 거절과도 같은 상황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과 삶 을 참으로 살리는 더 깊은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 니다. 표적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기회, 우리를 온전히 살리실 수 있는 기회가 바로 그때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CBS 라디오 방송의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의 인터뷰를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을 진두지휘했던 분이지요. 트럼프 대통령이 아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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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프한 협상가라고 칭찬했던 바로 그분입니다. … APEC이 임박했지만 협상에 진전이 없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책임자로서 깊은 갈등과 어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한미 정상회담이 코앞으 로 다가온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일어나서 성경을 읽는데, 그날 주신 말씀이 로마서 10장 11절 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는 말씀을 묵상하고, 용기를 내어 미국 러트닉 장관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습니다. 비록 이번 APEC 에서 협상이 타결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동안 협상을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잘해보자고, 그 러니 APEC 기간에는 서로 오해가 될 만한 얘기는 내지 말자는, 그런 내용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로부터 1시간 뒤에 러트닉 장관으로부터 뜻밖의 답장이 왔습니다. 한국 측의 의견대로 협상을 체결하자는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메시지여서 재차 확인했다고 하 지요. 나중에 내막을 알아보니, 김정관 장관이 보낸 그 문자를 러트닉 장관이 오해한 거였습니 다. 당장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계속 잘해보자는 얘기를, 합의가 어렵다는 뜻의 최후통첩으 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서둘러 협상을 타결하게 됐다는 거였습니다. 협상 체결 소식만큼이나 놀 라운, 어찌 보면 참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그 힘들도 답답한 상황에서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다는 그분도 참 대단하지만, 또 그 말씀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도저히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우리 하나 님도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 으면 열 자가 없는 하나님이시고, … 그분의 사랑받는 아들, 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여 러분, 믿으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정말로 귀히 여기셔서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우리가 표적이 아니라 말씀에 먼저 반응하는 믿음으로 우릴 온전하게 하셔서, 지금도 그 믿음을 통해 세상에 놀라운 일 을 이루시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 여러분, 저를 한번 따라 해보실까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한번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 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아멘. 결국 오늘 이 아버지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지요.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는 ‘말 씀’을 주께 들었고, 그는 그 ‘말씀’을 믿고 돌아가다 아들이 살아난 소식을 듣게 됐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셔서 그를 고쳐 달라고 했던 ‘자기 믿음’을 내려놓고, 이미 아들이 살았으니 가라는 ‘주님 말씀’에 순종했고, 표적과 기사를 봐야만 믿는다고 하신 그 믿음 에서도 구별됐지요. 보지 않았지만 믿었고, 믿었기에 순종하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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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그가 이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던 데는, 앞에서 주님이 그에게 하셨던 그 말씀이 중요한 역할 을 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이것은 그가 지금 어떤 믿음에 속해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것과 동시에, 이제 그가 어떤 믿음으로 나아가 야 할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결정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믿음이 아 니라, 보지 않고도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이지요. 주님이 친히 가지 않으셔도, 아들의 병이 무엇 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으셔도, 능히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참으 로 귀하고 담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이 그렇지, 여러분 이게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 “가라, 네 아들이 살 았다.” 그 말씀만 의지해서 혼자 집으로 되돌아간다는 건, 정말로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 로, 또한 생명의 주인으로 신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돌아가는 그 하룻길 내내 얼 마나 떨리고 무서웠을지,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소망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교차하 는 걸 느꼈겠지요. 아마 저 같았으면, “주님, 제가 믿습니다만, 그런데 혹시 모르니까, 주님 저랑 같이 가시지요. 주님 집도 가버나움에 있다고 하던데, 어차피 가시는 길이니, 저랑 같이 가시면 안 될까요?” 저라면 그랬을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이것은 아마도 그가 ‘왕의 신하’였기에 가능했던 믿음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왕의 말 이 가진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반응입니다. … 왕은 그런 존재지요. 그의 말이 곧 그의 권세이고 능력이고, 그래서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왕의 말이 선포되 면 모든 백성이 복종하고, 그래서 그 말은 즉시 현실이 됩니다. 이 아버지는 그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예수님이 지금 자신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시는지, 예수님을 누구라 고 여기길 바라시는지, 그래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시며, 그의 말씀이 곧 그분의 권세요 능력이 됨 을 참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세상의 참된 왕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씀이 선포될 때 모든 만물이 복종하 고,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 말씀이 이미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 니다. 이걸 단지 우리의 머리로만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정말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 저와 여러 분 모두가 풍성히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을 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성경이 단순히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표적으로 기록하 는 이유를 우리는 이제 충분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주님이 이 세상에 어떤 일을 행하러 오셨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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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누구신지, 명확히 드러나지요. “네 아들이 살았다.” 하는 그 말씀이 곧 창조의 능력이 되는 전능 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고백한 대로, 그는 세상의 [소테르], ‘구주’가 되셔서, 그 말씀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마다, 그와 그의 가정이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표적이 다름이 아닌 헤롯 안티파스의 신하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세례 요한을 죽이고, 또 예수님을 환생한 세례요한으로 여겨 두려워했던 게 안티파스인데, 바로 그의 신하가,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그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하 고,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보여줬지요. 표적을 보지 않았지만, 말씀을 의지하는 삶이야말로, 주 님을 가장 온전히 영접하고 높이는 참된 예배임을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이러한 예배가 이곳에 서, 또 우리의 삶에서도 늘 드려지길 소망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인데요,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왜 집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지 않으시고, 굳이 가나로 향하셔야 했는지, 우리는 작은 실마리 하나를 얻게 됐습니다. 표적과 기 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않는 그 세대 속에서, 또 표적을 보고 믿는 것도 잠시뿐 여전히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 오랜 불신의 역사 속에서, … 말씀을 믿고 가서, 그리고 표적을 보는 그 믿음의 한 사람을 찾고 세우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믿음을 갈릴리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여정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만약 그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이러한 믿음에 얼마나 목말라하시고 그 모습 을 귀히 여기시는지, 또 표적을 보고 믿겠다는 신앙을 하나님이 얼마나 원치 않으시는지도 충분 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결정되고, 또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은혜도 너무나 달라질 것입니다. 분주한 일상에도 말씀을 찾고 믿어서, 여전히 상황은 막막하지만, 다시 한번 그 어둠 속으로 순 종의 발걸음을 내딛는 삶이 있는 반면에, 늘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인해 일희일비하며 주님의 말씀 을 향하여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삶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삶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주님이 왕으 로 계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것이고, 또 누군가는 헤롯의 세상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갈 수밖 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 분 되기를 바랍니다. …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단지 우리의 상황만을 바꾸시고 우리의 필 요만을 채우는 분이 아니심을 우리 모두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

원고 9쪽

- 9 - 을 먼저 바꾸셔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참으로 살아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삶을 통해 그의 가정은 물론 이 세상 질서와 현실의 문제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도약할 수 있도록, 그분은 때때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길로 우릴 인도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고, 그 말씀과 함 께 홀로 되돌아갈 것을 명령하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때로 캄캄한 영혼의 밤을 지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됐고 이미 응답 됐지만, 그것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는 데까지 걸리는, 그 고독한 시간을 견뎌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또 한 번 믿음의 옛 껍질을 깨는 고통도 경험하게 됩니다. 혹시 지금 그 영혼의 밤을 지나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조금만 더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난 아들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종들을 곧 만나게 될 겁니다. 우리의 두 려움과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 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 말씀을 정말 믿는다면 오늘 우리는 어디로, 또 어떤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까요? … 분명한 건, 눈에 보이는 상황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늘 말씀을 의지하여 상황보다 먼저 발걸음을 내디디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대, 참 좋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믿고 가더니!’ 그 담대한 순종의 행위가 뒤따라야 하겠지요. 주님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먼 저 귀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무슨 말씀을 듣게 되든,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과 바램을 놓치 지 않고, 표적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자라가면 좋겠습니다. 이 두 번째 표적의 말 씀도 꼭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