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25-08-10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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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아홉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4]
요한복음 1:14~18 (신약 142쪽)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문 14절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
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과 함께 계신 로고스, 그 안에 생명의 빛이 있고, 그 빛
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오늘 14절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익숙해져 버린 이야
기일 수 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이 한 문장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담고 있고, 또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응축된 구절이기도 합니다. 만물을 창
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서 절정을 이루지요. 그런 하나님의 섭리
를 조금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경륜(經綸)’이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을
뜻합니다. 그 경륜의 핵심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 영원에 계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시공간 속에 오셔서, 친히 우리와 함께 머무신 사건이고, 간단히는 ‘성육신’,
‘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 ‘성육신’은 참 특별한 표현이지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만 해도 될 텐데, 굳이 ‘몸’
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in-humanization’이 아니라 ‘in-carnation’입니다.
‘incarnation’의 ‘car’는 육체, 살을 뜻하는 라틴어 ‘caro/carnis’에서 왔습니다. ‘사람’보다 훨
씬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느낌입니다. … 본문에서 ‘육신’이라고 번역된 단어 ‘사르코스’는 바로
앞의 13절에서도 사용됐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
로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때 ‘육정’이 바로 14절의 ‘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나는 방법
이 될 수 없다고 한 그 ‘육정’, 죄와 욕망의 자리로 여겨진 ‘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친히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육체를 영혼에 비해 열등하게 여기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자유와 구원이라고 여긴 것을 기억하면, 너무나 놀랍고 신비로운 말씀입니
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요. 육체는 정신이나 이성에 비해 뭔가 부족한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
고, 심지어 불교 같은 경우는, 눈에 보이는 이 육체는 실체가 아니라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닙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새로운 몸으
로 부활하여, 그 생명을 완성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구원의 중심에 있고, 또 구원의 신비
가 바로 이 몸의 신비에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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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할 때, 여기 ‘거하시매’로 번역된 동사 ‘스케노오’
역시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의 뜻으로 나
오고, 그대로 직역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주하셨다.”가 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 안에 장막을 치고 머물기 위해서란 뜻입니다.
지난 목요일 묵상했던 스가랴 말씀에도 보면,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슥 2:10) 그랬습니다. 내가 네 안에 머물 것이다,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의 이 육체를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몸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요. 우리와 함께 머물 새 장막을
준비하여 다시 오시겠노라, 말씀하세요(계 21:3). 창조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처음 에덴동산에도 아담과 하와만 있었던 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도 그 동산을 함께 거닐고 계
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창 3:8). 거기서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다시 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광
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장막(성막)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셨고, 그들을 애굽에 인도하신 목적도 그들 중에 ‘거하기 위해서’라
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출 29:45~46).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장막을 치며 생활할 때, 하나
님은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성막에 거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켜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합니다. 이 단어도 ‘거하다’, ‘살
다’라는 뜻의 동사 ‘샤칸’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일관되게 느껴지지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고, 그 친밀한 사귐 안에
서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같이 있고, 같이 살
고 싶으신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의 몸과 삶
속에 머물러 사시기 위함이지요. 하나님의 관심이 온통 거기에 있습니다. 껌딱지처럼 우리와 꼭
붙어 계시길 원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먹고 더불어 살길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이 오늘 우리의 이 예배 가운데, 우리 육체와 삶 가운데 거하고 계심을 우리가 믿을 수 있길 바
라고, 단지 그 믿음이 막연한 이해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경험하고, 또 그런 하나님과 매 순간 동행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
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가리켜, 성경은 ‘영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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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완성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충만했지요.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났는지, 여러분 혹시 기억나십니까? 네, 구름이 성막
위에 가득 덮였습니다. 그 구름의 모습이 얼마나 압도적이었으면, 모세가 감히 성막에 들어갈 엄
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원래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카보드’의 뜻이 ‘무겁다’ 이거든요. 영광의
무게에 모세가 완전히 짓눌려 버린 겁니다. … 이처럼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구름’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도, 빽빽한 구
름, 무거운 구름이 산 위에 머물러 있어서, 눈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님이 다시 오실 때도 어떻게 오신다고 하시지요? 네, 구름을 타고 오신다, 그럽니다. 손오공처럼
근두운을 타고 오시겠다는 게 아니라, 누구나 메시아가 오심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 가
운데 오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럼 왜 구름으로 나타날까, 생각해 보면, 구름은 그 영광의 빛을 드러내면서도
가리는 독특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구름을 볼 때 구름 너머의 태양도
지각합니다. 완전히 캄캄한 밤에는 구름도 보이질 않지요. 구름을 볼 수 있다는 건 빛이 있다는
증거이고, 그러면서도 구름은 그 빛을 가려 우리가 태양의 존재를 인식하고, 때로는 눈으로 직접
태양을 바라볼 수 있게도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인간이 직접 마주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
께 요청했을 때,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그러니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든 보여주시지요. 내 영광이 네 앞으로 다 지나갈
때까지, 내 손바닥으로 너를 덮었다가 나중에 거두겠다. 그래서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등이 있고, 얼굴이 있고, 손바닥이 있는 건 아니지요. 하나
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마주하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의 등은 뭔가로 인해 가려진 간
접적인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알게 하면서도 그 빛을 어느 정도 가려
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역할을 구름이 했다는 것, 그렇게 하나님
의 영광은 한편으론 우리에게 나타나면서도 동시에 은폐되고 가려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신비롭
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모세나, 그 청을 받아들여 주시고 또 세심하
게 모세를 보호하시는 하나님도 너무 인상적입니다. 마치 친구처럼 서로 친밀하게 대화하는 모습
이 부럽기도 하고,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누리고 싶다는 소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
도 점점 더 그렇게 자라가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영광이 있고, 반대로 사람은 그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을 통해서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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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영광’을 보았다고 14절은 말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늘 구름이 머물렀던 것도 아니고, 어떻
게 영광을 ‘봤을까요?’ … 우선 예수님의 몸이 구름의 역할을 했겠지요. 빛 되신 로고스를 가리
면서도, 거기 빛이 있음을 드러내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 그렇다면
그분의 몸에서, 그분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영광을 보게 됐을까
요? 우리도 예배드릴 때마다 늘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 말하고, 또 그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오늘 요한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보았다는 그 영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우선 16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보면
서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일이 없었겠지요.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
다.” 청하자,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주님 답하십니다(요 14:8). 예수님
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은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서는, 먼저는 제대로 봐야 하고, 두 번째는 증인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먼저 14절, “말씀
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보다’라
는 동사는, 그냥 일상적으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 말도 그렇지만 헬라어에도 ‘보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참 많은데요, 눈만 뜨면 되는 그런 ‘보다’의 동사[블레포]도 있고, 감각적
으로 보는 것[호라오]도 있고, 응시하여 보는 것[테오레오]도 있고, 의도를 가지고 주목하여 보는
것[테아오마이]도 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동사 [테아오마이]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관찰하
다’, ‘주의 깊게 보다’라는 뜻이에요. 그냥 대충 보기만 해도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고 성
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주목하여 보니, 비로소 그 영광이 보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다 아시지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
다. 너도 그렇다.” 들에 핀 꽃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도, 대충 보면 예쁜 줄 모릅니다. 마
음을 열고 자세히 보아야, 오래 봐야, 그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광도 그
렇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대충 본 사람들, 자기 생각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그 영광
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선입관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 재밌는 것은 그 말을 했던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 했던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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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주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던, 제자 빌립이었습니다. “와서 보라.” 할 때의 ‘보라’[이
데] 역시 주의 깊게 보는 걸 의미하는데요, 재밌지요. 나다나엘에게 주목해서 보라고 하지만, 빌
립 자신도 나중에 그 함정에 빠집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게 되기 쉽지요. 남에게는 보라고 하는
데 정작 자기는 못 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고 주님은
경고하세요. 예수라는 빛을 온전히 바라보고, 또 남에게 보라고 하기 전에 지금 나는 제대로 보
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은 생각하며 보고, 주목해서 보는 게 참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가볍게, 짧게 보는
걸 좋아하고, 거기에 다들 익숙해졌습니다. ‘쇼츠’ 같이 짧은 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서
봅니다. 책이나 인터넷을 볼 때도, 주목해서 봐야 하는 건 잘 안 보게 되지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비슷합니다. 생각 없이 볼 때가 많고, 그러다 보니 보이는 대로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
는 것도, 예수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좀처럼 주목하여 보길 어려워하고, 조금만 깊이 보
려고 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성경을 많이 읽어도 예수님의 영광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지 모릅니다. 자세히, 주목해서 볼 때, ‘깊이’ 생각하며(히 3:1) 볼 때,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
고, 그 영광을 보게 된다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입니다. 대충 보면 구름만 보이고, 예수님의 육체
만 보일 뿐, 그 너머의 영광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지만, 저 아
래 물이 있는 곳까지 충분히 내리지 않고, 중간 어디쯤 허공에서 맴돌다 빈 두레박만 건져 올리
는 것처럼, 말씀의 우물에서 생수를 경험하지 못하는 건 그만큼 주목하여 깊이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서 증인과 증언이 필요합니다. 오늘 15절에 세례 요한의 증언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
가 거기 있습니다. 제대로 보려는 사람이 없고, 보아도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자
꾸 보기 때문에, 증인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것이 이분이다. 내 뒤에 오시지
만 나보다 앞선 분이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다시 제대로 보라고 소리칩니다.
세례 요한은 주목하여 봤고, 그래서 누군가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건 그가 특별해
서가 아니라, 그가 받은 사명 때문입니다. 예수를 증언해야 하는 사명이 있으니, 대충 볼 수가
없습니다. 과연 저분이 메시아인지, 정말 영광을 가졌는지, 제대로 봐야만 증언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 사명이 그렇게나 무섭습니다. 원래부터 탁월한 안목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명이 있어
서 다르게 보는 것뿐입니다. 나 자신만 생각해서는 온전히 보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정말 증인이
라고 생각한다면, 누군가에게 주님을 증언할 부르심이 나에게 있다고 정말로 믿고 산다면,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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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볼 수 없을 겁니다. 증언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지요. 설교해야 하는데 어떻게 적당히 보
겠습니까? 주님은 그런데 저와 여러분을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세상이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먼
저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너희 삶으로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그 귀한 부르심을 인정하고 꼭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목하여 바라본 사람들은, 그러면 그분에게서 어떤 영광을 봤느냐,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봤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어떤 역사적 위인이나 신앙적 거인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영
광,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뿐인 아들의 영광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게 과연 무엇
이었을까요? 그들은 어떻게 그 영광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엄청난 기적과 표적을 봤기 때문
일까요? 그분의 놀라운 말씀을 들었기 때문일까요? 아마 그런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
영광의 핵심에 관해 오늘 요한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무엇이 충만하더라? 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가득한 걸 봤고, 그것이 독생자의 영광임을
알아봤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고 16절은 말하지요. 은혜 위에 은혜, 은혜 너
머의 은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서는 맛보지 못한 은혜, … 마치 물이 변하여 된 포도주인
데 맛은 더 좋고, 항아리 아귀까지 가득 채워져 부족함이 없는 그런 충만한 은혜를 우리가 예수
를 통해 맛보았고, 어떤 율법과 선지자도 드러내 보여주지 못한 진리,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
생자만이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아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구나’, 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참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났다
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을 통해 드러난 독생자의 영광,
그것은 다름 아닌 ‘충만한 은혜와 진리’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은혜와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이 조
금 더 필요하겠지요? … 다 아시는 것처럼,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받을 자격이 없는 분은 아니지만, 그만큼 하나님 아
버지께서 나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원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알고 누리셨다는 뜻이고, 그렇
게 알고 누린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은혜가 흘러넘쳐서 다른 누군가에게도 값없이 베풀어졌다는
뜻입니다. 삶에 가득한 하나님의 선물을 예수님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풍성히 누리고, 그 은혜
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거기서 말씀이 육신이 된 독생자의 영광
을 경험한 것입니다.
‘진리’는 말로 표현하기 조금 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진리를 언어에 담는 순간 그 진리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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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노자의 말도 있습니다만, 예수님도 진리가 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헬라어의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진리’라는 헬라어가 [알레테이아]인데요, 부정 접두사 ‘아’와 ‘숨김’, ‘망각’, ‘은폐’라는
단어 ‘레테’의 합성어입니다. … 여러분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레테의 강물’이라고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섯 개의 강 중의 하나가 ‘레
테’의 강인데요, 강을 건너는 모든 망자가 그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는데, 강물을 마신 사
람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고 하지요. ‘레테’가 그런 뜻입니다. 숨겨지고, 잊혀지고, 가
려진 진실입니다. … 그러니 그 ‘레테’ 앞에 부정 접두사 ‘아’가 더해진 ‘진리’는 그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걸 의미합니다. 감춰진 진실과 실체가 드러나는 것,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그 아래 은폐되어 있던 모든 세상의 전모가 밝히 드러나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들을수록 더
어려운가요?
이런 비유가 어떨까 합니다. 여러분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 아시지요? 여러 명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본 뒤에, 각자 자신이 만진 부분을 가지고, 그게 코끼리라고 주장합니다. 코를 만
진 사람은 코끼리가 뱀이랑 비슷하다 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나무 기둥처럼 생겼다고 하고,
코끼리 귀를 만진 사람은 물컹한 보자기 같다고 얘기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밧줄같
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다 자기가 보고 깨달은 부분적인 내용을 가지고 ‘코끼리의 코끼리 됨’을
주장하게 되는데요, … 진리는 갑자기 그 모든 사람의 눈이 떠져서 전체 코끼리를 온전히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무지로 인해 감춰진 세상의 실체가 밝히 드러나는 거지요.
우리의 눈에 덮인 비늘 같은 것들이 다 벗겨져서, 온 우주 만물과 그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마
치 눈이 떠진 장님이 코끼리 전체를 바라보듯, 온전히 보게 되는 것, 그걸 진리라고 말할 수 있
습니다.
요한은 그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는 걸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주목하
여 바라보니, 그동안 볼 수 없던 세상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
지도 온전히 알게 된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까지 보고 만졌으니, 정말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보고 깨달았겠지요. 말 그대로 ‘진리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나중에, 아직 모든 것이 드러난 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고린도전서 13장
에서 했던 이런 얘기를 여러분 기억하실 거예요.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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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모든 감춰진 것이 다 드러난 것은 아직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린 여전히 진리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언제 진리를 다 알게 된다고요? 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오셔서
감추인 모든 것을 친히 드러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
실 때까지는, 우린 여전히 부분적으로만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예수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주님은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육신이 되신 그 로고스를 말
씀 안에서 더 온전히 볼 수 있다고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
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말씀을 풀어 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듯, 우리의 몸과 삶이 말씀 가운데 거하도록 힘쓸 때, 우리도 예수님 안에 충만했던 진리
를 보게 되고 증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영광 또한 결국 충만한 은혜와 진리입
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우리는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은혜
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또 나를 원하신다는 것을 온전히 알고 누리는 거라고
했고, 진리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감춰졌던 실체가 드러나고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알아가는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은혜 경험’과 ‘진리 경험’은 상호적입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를 깨달으면 새로운 은혜를 맛보게 되어, 서로를 풍성하게 합니
다. 은혜와 진리가 가장 풍성하게 경험되는 곳이 바로 예배겠지요. 성령 충만이 곧 은혜와 진리
충만이기도 합니다.
이런 은혜와 진리가 성도의 삶에서 차고 넘칠 때, 세상이 비로소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은
혜로 충만한 성도의 삶에서 나오는 관용과 용서와 친절을 통해 세상도 은혜라는 걸 맛보게 되고,
진짜 세상을 경험한 성도의 구별된 삶을 통해서, 세상은 그나마 진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
다. 증언하는 자 없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 수 없지요. 세상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라는 사실을 성도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부르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지는 삶을
사모해야겠지요. 흘러넘쳐야 누군가 우리를 통해 은혜와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우리도 어떻게
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의 삶은 정말 흘러넘치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되는 일
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고 오늘 요한은 말합니다. 예수님도 충만하셔서 주
신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받아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세상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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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랍니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진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본인은 어느 정도 느낄 겁니다. ‘아,
내가 지금 충만하지 못하구나. 흘러넘치는 게 아니라, 뭔가 억지로 짜내고 있구나.’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다만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충만한 사람은 계속해서 충만함을 사모한다는 것입니
다.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경험한 사람은,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잘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충만의 충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지혜를 구하고 건강한 사람이 더 건강에 관심이 많고 그 일에 물질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본 사람이 돈의 귀함을 알고 더 간절히 갈망하지요. 신앙도 마찬가집
니다. 충만한 사람이 충만을 갈망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성령을 구해요. 참 모순이고 역설인데
요, 충만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충만하지 않다는 증거일 때가 많습니다. 있는 자는 받
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주님은 여러 번 경고하시지요(마 13:12,
25:29). 충만하지 않으면, 충만을 사모하지도 않기에, 그나마 있는 은혜도 곧 소멸해 버립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만족을 주시고, 주린 영혼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
다(시 107:9). 찔끔찔끔 줄 듯 말 듯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아낌없이, 기쁘게 은혜와 진
리를 부어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
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주님 약속하시지요. 우리가 다가오
기를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로 오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
나님이십니다. … 우리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은혜와 진리를 진지하게 구할 수 있
다면, 내 영광을 위해 분주한 인생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증언하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다
면, 우리의 몸과 삶에 가득한 은혜와 진리를, 우리도 반드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기를 진정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우리의 몸
과 삶에 장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셨습니다. 그런 하
나님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날마다 은혜와 진리를 사모합시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
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매 순간 경험하고 감사하며, … 하나님의 말씀 깊이 영혼의 두레박을 내
려서 진리의 생수를 때마다 건져 올리고, … 그렇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져서, 세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영광을 보고, 그들도 함께 은혜와 진리를 누리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