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근심하지 말라
2026-10-04 · 설교 원고 · 8쪽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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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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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열아홉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49]
요한복음 14:1~14 (신약 171쪽) 근심하지 말라
본문 1절의 ‘근심하지 말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베드로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기
전에는 닭이 울지 않는다,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을 권면하십니다. “너희는 마음
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앞의 주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근심했
다는 뜻이지요. 다가올 주님과의 이별도 그렇고, 그로 인해 드러날 자신들의 연약함도 그렇고,
제자들이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주님도 그걸 잘 알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같이 한번 해 보실까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네,
여기 보면 근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근심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고,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근거를 뒤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 여러분, 우리가 근
심하면 주님이 위로해 주시는 게 아닙니다. “많이 걱정되고 힘들지?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줄게.” 이런 게 아닙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명령하십니다. 권면이
나 부탁이 아니에요. 명령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런 계명들
과 똑같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명령’하십니다.
성도는 근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걸 우리에게 명
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사람이 근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둑질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게 아니지요. 똑같습니
다. 주님이 명령하세요. 너는 그만 근심을 멈추라고, 근심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꾸만 근심에 빠지는 이유는, 우리가 이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마치 권면이나 위로인 것처럼 여기고, 근심할지 말지를 내 기분과 환경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근심에 빠집니다. 물론 살다 보면 우리에게도 언
제든 근심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새가 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걸 어떻게 막겠습니까? 하지만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트는 건 나에게 달렸습니다. 꾸짖어 내쫓아야지요. 근심하
지 말라는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근심은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에요. 주님 말씀에 순종하
여 근심하지 않기로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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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문장을 최대한 원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너희 마음이
근심하지 말게 하라.”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와 “너희 마음이 근심하지 말게 하
라.” 조금 뉘앙스가 다르지요. 영어 성경에서는 그 차이가 더 명확한데요, “Do not let your
heart be troubled.”(NASB) 즉 “네 마음이 근심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라고 해서, 이것이 우
리의 마음에 대한 명령이기보다, 그 마음을 향한 우리의 반응에 대한 명령임을 보여줍니다.
“근심하지 말라.”라고 하면 단순히 근심하는 어떤 마음의 상태에 대한 금지처럼 들립니다. 근심
이 생기는 순간 이미 명령을 어긴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너희 마음이 근심하지 말게 하라,
내버려 두지 말라.”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근심한 마음, 그다음에 초점이 있습니다. … 무엇보다
‘나’와 ‘내 마음’이 분리되지요. 내 마음이 객관화되면서, 내가 지금 근심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아차리고, 그다음을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더는 내 마음을 근심에 빼앗기지
않도록, 주도권을 쥐고 믿음의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라는 명령이 자주 나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
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신명
기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조심하여)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신
4:9) 그랬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있지요. 돈도 지켜야 하고 건강도 지켜야
하고 명예도 지켜야 하지만, 그중에 가장 힘써 지켜야 할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성경은 말합
니다. 그 마음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마음이 무너지면 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한 번 근심에 빼앗
기고 나면, 아무리 좋은 게 옆에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감사할 일이 수없이 많아도
원망거리, 한숨거리만 보입니다. 근심이 근심을 부르지요. 하나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것과 관련
된 또 다른 걱정이 생겨나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걱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마치 작은 눈덩이
가 구르면서 점점 더 커지듯이, 근심도 계속 불어나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맙니다.
요즘 현대인들에 대한 신조어 중에 ‘램프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램프의 요정 지니를 불
러내서 자기 소원을 이야기하듯이, ‘근심의 램프’를 문지르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온갖 걱정
거리를 스스로 불러내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현상을 뜻합니다.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진 세상에서, 미디어와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소식
을 접하면서, 마음속 불안이 증폭된 것이, 그 원인으로 꼽힙니다.
혹시 여러분도 종종 그렇게 램프를 문지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마음에 근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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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말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 걱정도 열심히 하면 실력이 는다고 합
니다. 자꾸 문지르다 보면 램프는 점점 더 반질반질해지고, 살짝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걱정거리
가 튀어나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당장 멈추라고 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고, 마음이 근심하지 말
게 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문제로 근심하고 있는데,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내가 명령
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하는 순간,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을 정말로 내 삶의 주님으로 인
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맞아.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이
내 마음보다, 또 나의 문제보다 더 크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
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더는 내 마음의 주도권을 근심에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힘껏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를 바랍니다. 근심하는 것이 불순종이며,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우리 늘 기억합시다. 내가 근심하
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는 금세 알아차려야 하고, 그걸 방치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지요. 근심거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는 구
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근심거리가 내 삶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근심거리와 싸
우는 게 아닙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을 믿는 그 싸움’
을 싸우고 있고, 주님을 신뢰할 때 비로소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잠깐 근
심할지라도 오히려 더 크게 기뻐하게 되고(벧전 1:6),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6:10).
근심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근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지요. 내 마음을 향해 “근심하지 마!” 명령
한다고 해서 내 맘이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근심은, 근심거리보다 더 큰 주님을 향한
믿음과 경외로만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믿음과 근심이 한곳에 공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직후에 곧바로 믿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
라.” 이것 또한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성경책에 보면 여기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부분에 작은
글자로 숫자 1이 적혀 있습니다. 아래 주석을 보라는 건데요, 아래쪽에 보면, ‘또는 믿고’라고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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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니’를 ‘하나님을 믿고’라고 바꿀 수 있다는 건데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도 믿으라.” 이렇게 됩
니다.
그리고 실은 이게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앞의 ‘하나님을 믿으니’와 뒤의 ‘나를
믿으라’가 둘 다 ‘이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되어 있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명령문일 수도 있고 평
서문일 수도 있습니다. 헬라어 동사의 이인칭 복수 명령형과 평서형은, 그 형태가 같거든요. 그
래서 문맥을 보고 이것이 명령문인지 평서문인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우리말 성경처럼 앞에는 평
서문으로, 뒤에는 명령문으로 번역하는 건 좀 부자연스럽습니다. 앞을 평서문으로 하면 뒤도 평
서문으로, 앞을 명령문으로 하면 뒤도 명령문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그래서 지금 개역개정
(과 그 전 개역한글 성경)을 제외하고 제가 참조할 수 있는 다른 모든 한글, 영어 성경이 둘 다
명령형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 이렇게 됩니다.
그럼 저를 다시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아멘. 그런데 여러분, 주님은 이 말을 지금 누구에게 하고 계십니까? 네, 제자들에게 말
씀하고 계십니다. 그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하나님도 믿고 있고 주님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그들은 모두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도 있듯이, 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
겠습니까?
네, 우선은 그 믿음이 연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떠나실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지금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지요. 하나님
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쉬운 상황이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 속해 있다고 해서, 지금 내가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내가 예전
에 주님께 믿음의 고백을 드렸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나의 신앙을 보증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믿지 않는 것처
럼 살아갈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일인칭 현재형’이기 마련입니다.
지금 내가 믿는 것이고, 믿기로 지금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다시 말씀하세요.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다시 주님을 믿고 신뢰
하는 삶을 선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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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믿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다시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또 다른 중요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 내용과 깊이에 있어 조금 더
온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지금 저와 여러분도 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그 믿음
의 내용이나 깊이를 보면 서로 조금씩 다 다를 겁니다. 그냥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이것이 우
리 믿음의 전부는 아니지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신뢰하고 경험하느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어디까지 행하셨고 또 약속하셨는지를 믿고 누리느냐, 이것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
임없이 자라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도 믿
고 예수님도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통해, 더 온전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믿으라.” 명령할 땐, 그저 막연히 불신에서 믿음으로
돌이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과 깊이에 있어 자라가라는 뜻이고, 그러기 위해 하나님
을 아는 일에 힘쓰라는 뜻입니다.
오늘 제자들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가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주님이 곧이어 설명해 주
시지요. 그게 2절과 3절의 내용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 내가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가서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그런 하나님과 주님을 믿고,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말씀하는 것입
니다.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건 무슨 뜻이겠습니까? … 천국에 자리가 많다, 어지간한 사람
은 다 천국에 들어온다, 이런 뜻만은 아니겠지요. 그런 믿음이 지금 제자들의 근심을 그치게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버지의 집’이지요.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
라’라는 표현 대신, 주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장소’
가 아니라 ‘관계’인 거지요. 아버지가 계신 곳이 ‘아버지의 집’이고, 그곳은 아버지의 자녀들이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곳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정리해 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고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들로서 사랑하시듯,
너희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친히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잠시 떠나 있는 그
상황 속에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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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내 아버지로 믿고 신뢰한다면, 근심은 우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 뭔가
좀 이상하고 창피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아버지가 이재용 회장이라
면, 젠슨 황이라면, 여러분 근심할 일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별로 근심하지 않겠지요? 하나님을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동네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
아닐까요?
근심을 해야 한다면 아버지와 자녀 중에 누가 하는 게 맞습니까? 네, 근심은 아버지가 하는 것입
니다. … 이번 추석에는 장인, 장모님과 계속 함께 지냈는데요, 두 분 눈에 저를 향한 걱정이 한
가득입니다. 예배당 이전하고 어려운 점은 없는지, 성도들은 평안한지, 교회 재정은 괜찮은지, 물
어보고 싶으신 게 산더미인데, 제 마음 불편할까 봐 잘 물어보지도 못하세요. 저는 괜찮은데 부
모 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마 저를 위해서 두 분이 저보다도 더 많이 기도하실 거예요. 아
버지시니까요.
하나님도 그러시지요. 근심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라고, 염려를 내게 맡기라고 하세요. 그리고 너
희에게 필요한 걸 마음껏 구하라고 하시지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
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말씀합니다. 여러분, 고아를 자처하지 마시고, 그 하나님을 정말 아버지로서 온전히 믿고 누리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떤 걸 믿으라고 하십니까? 네, 주
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건, 제자들의 거처를 예비하기 위함이고, 다 준비되면 주님이 다시 오셔
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주님 있는 곳에 그들도 있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너희를
위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2절에도, 3절에도 반복해서 나오는 구절이,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주
님이 왜 잠시 제자들을 떠나야 하느냐, 제자들을 위하여 중요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믿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결정과 행동이, ‘제자들을 위한’, ‘우
리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설사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셔야 한다면, 그건 제자들에게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더 좋은지, 이제 다 설명해 주시지요. 어쨌든 핵심은 그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
을 결정하고 또한 행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까? 실은 그때에야말로 정말로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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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일들을 주님이 행하고 계신 때입니다. 제자들이 홀로 있어야 하는 그 순간이 실은 제자들
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에요. 그들이 머물 거처를 주님이 예비하시지요. 천국에 무슨 집을 지으
러 가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아버지 집에 거할 수 있도록, 십자가와 부활의 과정
을 통해 터를 닦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먼저 우리 자신을 주님이 거하시는 거처로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그 거룩한 연합의 관계 속으로 이
끄시는 그 주님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신 그 시간 속에서 말이
지요.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그 캄캄한 시간 속에서, 실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기는 금방 울지요. 엄마가 곁에 없는 것 같고, 자기 혼자 남겨진
것처럼 서럽게 웁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엄마는 아기를 위해 일하고 있지요. 아기의 분유를
타고, 이유식을 만들고, 기저귀도 빨고, 청소도 하면서, 아기의 생명에 꼭 필요한 것들을 분주하
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눈에 보일 때보다도 실은 더 중요한 일들이 그때 이루어집니다.
앞서 제자들을 향해 ‘어린 자녀들아’(33절) 하고 부르셨습니다만, 주님도 그렇다고 하십니다. 제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 그래서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 주님은 제자들의 생
명을 위한 일들을 행하고 계실 겁니다. 그 주님을 믿으라고,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고, 주님은 제
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그 주님을 꼭 신뢰하고 근심을 떨쳐 버리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삶
에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오곤 하지요. 여러분, 그때가 어떤 때라고요? 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준비하시는 때입니다. 주님이 곁에 없는 것 같을 때, 뜻
하지 않은 고난 속에 처해서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은 그런 순간에, ‘여호와 이레’ 하나
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러 간 그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지요. 그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가 되십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근심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하셨고, 하나님을 알
고 신뢰하는 그 믿음이 자라가야 한다고, 그럴 때 근심을 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삶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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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의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
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주님의 그
평강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