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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7:7~18 (구약 344쪽)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2025-03-30 · 설교 원고 · 10쪽 · 약 20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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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네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30]
여호수아 17:7~18 (구약 344쪽)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본문 15절의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
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므낫세 지파의 기업 분배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므낫세 지파가 분배받은 ‘땅’보다는, 땅을 분배받는 ‘사람’에 더
초점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지난주 슬로브핫의 딸들에 이어 오늘도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메시지들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므낫세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 대해서는 7절부터 11절까지 설명되어 있는데요, 주보 표지의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므낫세 지파, 그리고 같은 요셉 자손 안에 있는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은 가나안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여러 지파들과 그 경계를 마주하고 있
는데요, 므낫세 지파의 경우 가장 많은 일곱 지파와 잇대어 있고, 그래서 므낫세의 기업을 설명
하는 내용 안에 다른 지파의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땅은 므낫세 지파의 기업인데, 그 땅의 성
읍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속한 답부아 같은 곳도 있고, 땅은 잇사갈과 아셀 지파의 기업 안에 있
지만 도시는 므낫세 지파에 속한 벧 스안, 이블르암, 돌, 엔돌, 다아낙, 므깃도 같은 지역도 있습
니다. 당시 ‘가나안 땅 분배’라는 것이, 지도에 반듯한 경계선을 긋는 것처럼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또 본문 후반부에 언급된 것처럼, 어떤 숲이나 골짜기 중에는 딱히 어느 지파의 소
유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애매한 곳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하
게 다뤄지는 두 사건 역시, 바로 그런 지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선 잇사갈과 아셀 지파의 땅에 있지만 므낫세 지파에 속한 성읍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면요, 다
같이 12절과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
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
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아멘) 대단히 놀랍고 기묘한 상황이지요? 어
떤 부분이 눈에 들어오세요? 네, 앞의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족속을 유다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것과,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에브라임 지파가 쫓아내지 ‘않은’ 것이, 한꺼번에 등장합니
다. 처음에는 가나안 족속이 강해서 쫓아내질 ‘못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강성해져서 그들을
쫓아낼 수 있게 됐음에도 쫓아내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쫓아내지 ‘못한 것’과 ‘안 한 것’이 결합
되어 있고, 그런 성읍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혹시 우리의 삶에도 이런 (죄와 사망의) 문제
들이 있지 않은지 새삼 돌아보게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처음엔 쫓아낼 힘이 없어서, 함께 있어선 안 될 존재와 같이 살았습니다. 몇 번 노력도 해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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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그렇게 점점 더 그 상황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충분히
쫓아낼 수 있는 상황이 됐지만, 이번엔 쫓아내질 ‘않았습니다’. 왜 그랬다고 하지요? 네,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종으로 부리며 힘든 일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그 달콤한 편리와 이
익을 내려놓지 못한 것, 아니 내려놓지 ‘않은’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성도의 굴복이 대부분 그렇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믿음이 약해서 이기지 못하다가, 나
중에 신앙이 자라서 충분히 이길 수 있게 돼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익과 쾌락을 포기하지 못해
서 그냥 죄와 타협해 버리곤 합니다. ‘고작 성읍 몇 개에 불과한데 그럴 수도 있지. 남들도 다
그렇게 살고,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긴 데, 이 정도야 괜찮겠지.’ 자신을 합리화하며 죄에 길들여져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삶을 얼마나 병들게 만드는지는 외면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런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 하나가 나옵니다. 쫓아내지 못했다가
쫓아내지 않게 되는 과정에서, 가나안 족속이 보인 어떤 모습이 12절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했다.”
말씀합니다. 가나안 족속이 어떻게 했습니까? 네, 결심하고 거주합니다. ‘여기 계속 머물 수 있겠
구나. 끝까지 버텨야겠다!’ 단단히 마음먹은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도 ‘결심’하고 버텨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변은 온통 이스라엘 백성이고, 다른 가나안 족
속들은 계속 쫓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땅에 거주하는 게 그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도 결심해
야 하고, 자신들의 생명과 운명이 그 결단에 달렸습니다.
한쪽은 결심하고 한쪽은 타협합니다. 그러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우리가 왜 자꾸 죄에 넘
어지는가, 죄는 결단하고 우리는 망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열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사탄에게도 ‘열심’이 있고,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 5:8). 결
심하지 않고, 뜻을 정하지 않고,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죄가, 마귀가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은혜받고 신앙이 자라면 저절로 죄를 이기
게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뜻을 정하여 싸우지 않으면, 곧 그 죄가 나의 일부가 됩니다. 은혜를
받아도 소용이 없고, 그걸 성경은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째서 죄에 대해 그리도 단호하셨는지, “(만일) 네 오른쪽 눈이, 네 손과 발이 너로 하
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잘라내어 버려라. 신체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
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29~30)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지, … 예수님도 그렇게 죄를 이기신 거지요. 그런 결심과 결단 없이 되는 싸움이 아닌 겁니
다. 신앙이 자라면 저절로 이겨지는 그런 죄도 있겠지만, 정말로 내 삶을 망가뜨리는 근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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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결심하지 않으면 죄가 결심한다는 것, 어렵다고 안 하다 보면
정말 못하게 된다는 것, 그걸 잊지 말고 단호하게 결단하여 다시 죄와 싸우라고 주님 말씀하십니
다.
말씀에 대한 순종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하기 어렵다고 미루고 못하다 보면, 결국 안 하게 됩니
다. 본문을 읽으면서 저는 사울 왕이 생각났는데요, 처음엔 믿음이 없어서 순종을 못하다가, 나
중엔 할 수 있어도 안 하게 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기다리는 사무엘이 오질 않으니
까, 조급한 마음에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리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믿음이 약하고 두려워서 실족
하는데요, 나중엔 자기 의지로 불순종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많은 전리품을
남겨 자기 이익을 채우지요. 그걸로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했다는 핑계를 댑니다. 처음에야 죄인
줄도 알고 불순종인 줄도 알지요. 하지만 나중엔 그런 인식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럴듯한 핑계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기 전에, 양심이 살아 있고
말씀에 반응할 수 있을 때 결심해야 합니다. 순종하기로, 싸워 쫓아내기로, 죄가 결심하지 못하
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뜻을 정하여 죄에 맞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므낫세 지파나 사울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랍니다.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은 어떠실지, 우리를 부르시고 존귀하게 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일지, 다시 뜻을 정
하고 결단해야 할 부분은 없는지, 이번 사순절 동안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고 돌이키는 마음 주
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소망합니다.
므낫세 지파의 기업을 이야기하다가 본문이 이번에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를 하나로 묶어
서, 이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뭔가 요청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본문 14절부터인데요 요
약하면, 우린 두 지파인데 왜 하나의 제비만 뽑아서 기업을 주느냐, 하는 얘깁니다. 실제로 요셉
자손이 제비를 뽑았다고 나오는 16장 1절에도, ‘제비’라는 명사 ‘고랄’이 단수로 되어 있었습니
다. 그러니까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의 땅을 한 번에 제비 뽑았고, 그것을 두 지파가 다시
나눠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지파 입장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
까? 분명 두 지파인데, 그리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큰 민족이 됐는데, 이렇게 하나의 제비를
뽑아 둘이 나누라고 하는 건, 분명 공평하지 못한 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두 지파의 요구가 담긴 14절을 꼼꼼히 읽어 보면, 사실 이들이 가진 불만의 초점은 하나
의 제비를 뽑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할 때,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라는 말 대신, ‘나’라는 일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눈에 들어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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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14절에는 ‘나’라는 대명사가 계속 나오지요.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셔서, ‘내
가’ 큰 민족이 되었다.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해 한 분깃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입니까?” 이렇
게 ‘나’를 강조해서 말합니다. 분명 두 지파이고,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하나의 지파인 듯
본인들이 먼저 얘기합니다. 비록 이 둘이 각각의 지파이긴 해도 다른 지파들과 구별되듯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는 관계는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 지파처럼, 때로는 두 지파처럼
처신했고, 지금은 ‘요셉 자손’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게 본인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 보
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셨음을 강조하는 걸로 봐서는, 우리가 이렇게 홀대받을 수 없는 그런 지
파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거지요. 실제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다른 지파는 한몫인데,
요셉만 두 몫이니 이미 특별한 복을 받은 지파가 맞습니다.
이처럼 불만의 핵심은 하나의 제비를 뽑았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제비를 뽑음으로써 충분히
넓은 땅을 분배받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요. “네
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이렇게 저렇게 해라.” 이야기합니다
(15절). 제비가 하나인 게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뽑은 땅이 좁다는 것이고, 그걸 이해한 여호수
아가 대안을 제시합니다. 브리스 족속, 르바임 족속의 땅에 있는 삼림을 직접 개척해서, 그곳을
기업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요셉 자손들이 받아들일 만한 합당한 대안이라고 생각
되십니까?
네, 요셉 자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 산지 역시 자신들에겐 넉넉하지 않을뿐더러, 그곳
으로 가는 골짜기에는 아직 가나안 족속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당대 최
고의 무기인 철 병거까지 가졌습니다. 충분하지도 않은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시 힘든 전쟁
까지 치러야 했으니 요셉 자손들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제안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도 물러서
지 않습니다. “너희는 큰 민족이고, 큰 권능이 있으니, 너희들 말대로 한 분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니 그 산림을 정복하고 개척하여, 산지 끝까지 네 기업으로 삼아라. 비록 가나안 족속이 철
병거를 가졌지만, 네가 능히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격려합니다.
그 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더는 설명이 없고 이대로 므낫세 지파의 기업 분배가 17장에
서 마무리되는데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여호수아의 대답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가고, 두 지파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 분명한 건 그들이 처음에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비를 하나 더 뽑은 것도 아니고, 땅을 추가로 분배받
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힘든 전쟁을 통해 산지를 정복해야 하고, 또 거길 개간하는 일도 남
아 있습니다. ‘산 너머 산’이고 혹을 떼러 갔다가 오히려 붙여 온 셈입니다. 불만이 더 커졌을지
도 모릅니다. 아시는 것처럼 여호수아 본인이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자기가 속한 지파에 왜 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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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엄격하고 까다로운지,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째서 여호수
아는, 이 두 지파에게 처음부터 두 개가 아닌 하나의 제비만 뽑게 했을까요? 그리고 두 지파는
왜 그걸 거부하지 않고 어쨌든 하나의 제비를 뽑음으로써 그 결정을 받아들였을까요? … 여기서
제비를 뽑은 므낫세 지파가 온전한 하나의 지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요단강 동편에서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남아 있는 절반의 사람들만 형제
지파인 에브라임과 함께 기업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두 개의 제비를 뽑을 순 있겠지요.
하지만 다른 지파 입장에서 보면, 그게 그렇게 당연하게 여겨지진 않았을 겁니다. 가뜩이나 요셉
자손이라는 이유로 두 몫을 받고, 요단강 동편에서 이미 예외적인 축복을 받았는데, 여기서도 두
몫의 제비를 새로 뽑게 한다면, 그건 지나친 특혜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두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과연 그들 주장처럼 그렇게 부족한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사실 정반대에요. 다른 어떤 지파보다 넓은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요단강
동편에서 받은 것까지 고려한다면, 이미 너무 많이 받았어요. 이것은 각 지파의 인구를 고려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실 에브라임 지파는 가장 인구가 적은 지파 중 하나입니다. 에브라임
(32,500명)보다 인구가 적은 건 시므온 지파(22,000명)뿐입니다. 주변에 있는 단 지파(64,400명),
잇사갈 지파(64,300명), 스불론 지파(60,500명) 모두 에브라임의 두 배에 달합니다. 광야에서 숫
자가 가장 많이 증가한 므낫세 지파 역시 그런 지파들보다는 적습니다(52,700명). 게다가 이미
절반에 대한 분배가 끝났으니 나머지 절반의 인구(26,350명)는 에브라임 지파보다도 적고, 므낫
세 절반과 에브라임을 합한다고 해도(58,850명) 다른 하나의 지파 숫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
렇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정말 큰 특혜를 받았습니다. 인구 대비 가장 넓은 기업을 분배받
았지요. 물론 땅은 저마다 비옥함의 차이가 있어서 단순히 넓이만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
만, 그러나 이런 과정과 결과가 불공평하다고 주장할 처지는 아닙니다. 불만을 제기한다면 오히
려 다른 지파에서 해야 할 상황입니다.
여호수아의 대안을 거절하는 그들의 주장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 큰 민족이
됐다고 하면서도, 그 숫자와 힘으로 골짜기를 정복하고 산지를 개척할 마음은 없습니다. 정복이
다 끝난 땅을 거저 받을 생각뿐입니다. 골짜기의 가나안 족속에게 철 병거가 있다지만 그것도 핑
계에 불과합니다. 병거는 원래 평지에서나 무섭지, 산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
나 수많은 병거를 가진 하솔 왕 야빈을 이겨본 경험도 있습니다(수 11:4). 단지 싸우기 싫은 핑
계를 대는 것뿐입니다. 이런 핑계야 수없이 만들 수 있지요. 하지 않기 위한 핑계, 순종하지 않
기 위한 핑계야 무한히 만들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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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얼핏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 두 지파의 요구,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빠지
기 쉬운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겐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 이미 주신 힘으로 능히 싸워 정복할 수 있음에도, 그
저 하나님이 다 해결해서 떠먹여 주기만을 바라는 마음, 우리의 신앙을 단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그런 나태함과 탐욕의 질병입니다.
이 질병의 증상은 항상 불평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은 나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 감사할 줄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깨닫지 못하고, 깨달으려
하지 않고, 오직 더 편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은 복을 구합니다. 실상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자기 욕심을 섬기는 거지요.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자기 욕망 채우기에 급급하
고(갈 5:13), 결국은 다시 물질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러한 질병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신앙의 본질 자체를 왜곡해서, 단 한 걸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는 일’에만 매몰되어 ‘복이 되는 삶’
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
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그랬습니다. 복을 받는 것과 복이 되는 것, 어느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까? 네, 하나님은 아브
라함을 ‘복이 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니 복을 주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네게 복을
줄 테니, 너는 복이 되어라. “I will bless you. … You will be a blessing.” 복을 받는 것에
그치지 말고, 네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삶을 살아라. 그게 내가 너를 택한 이유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복은 아브라함만 받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 전에도, 후에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
록된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복이 되는 축복’은 아브라함에게만 하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은 복을 주시지요, 그러나 그가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복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주신 약속이고, 저와 여
러분은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
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복이 되는 삶’과 무관할 수 있음을 오늘 두 지파는 보여줍니다. 이미
충분히 받았지만, ‘더 받을 것’만 생각합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고, ‘왜’ 받았는지, ‘어떻게 복이
될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더 받을 생각만 하다가, 누가 봐도 복이 되는 삶과는
멀어졌습니다. … 얼마 전 주일 예배 후에, 한 가지 질문이 있다고 재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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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에게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다고, 목사님께 한번 물어보자고 해서, 세 분이 저한테 왔습
니다. 저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서 무조건 저한테 오시면 곤란합니다만, 암튼 떨리는 마음으로
재이의 얘길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렇게 엄마 아빠랑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왜
친구 중엔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는 거예요?” 순간 망치로 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여섯 살 아이가, 자기가 누리는 복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아, 나는 행복하게 잘 사니까 너무 좋다. 하나님, 감사하다.’ 그냥 여기 머무르지 않고, 사실 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그걸 넘어서, 스스로 ‘왜?’라는 질문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여러분
‘복이 되는 삶’이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받은 복의 이유와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주신 분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그냥 운이 좋아서 얻은 거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왜’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
습니다. 그냥 다 내가 누리면 되고, 아무도 그걸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때부터는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나에게 주셨을까?’ 그 질
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가 성도입니다.
여호수아가 두 지파에게 하려는 얘기도 마찬가집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하기 전에, 먼저 주신
것에 감사하며, ‘왜?’라는 질문을 던져봐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사람이 많아졌으니, … “필요
한 땅을 더 주십시오. 땅이 넓어졌으니 이젠 다시 인구가 더 늘게 해 주십시오.” 계속 그렇게 가
지 말고, ‘왜?’라는 질문을 마주해서 ‘왜 많이 주셨을까?’ ‘어떻게 하면 이 복을 가지고, 복이 되
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자문해 보고, ‘아, 큰 민족, 큰 권능을 가졌으니, 그 힘으로 새로운 땅을
개척해야겠구나.’ ‘결심’하면서, 그렇게 ‘복을 받는 인생’에서 ‘복이 되는 인생’으로 나아가라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한 목적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므낫세 지파는 가장 많은 지파와 그 경계를 잇대고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
파의 땅에 므낫세 지파의 성읍도 있고, 므낫세 지파의 경계 안에 다른 지파의 성읍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축복으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복
을 주셔서 큰 민족이 되었거늘 왜 한 제비만 뽑아 기업을 주십니까?” 이게 아니라, “하나님이 큰
복 주셨으니, 주변의 다른 연약한 지파들도 돌아보는 삶 살 수 있도록, 하나님 믿음과 지혜를 주
십시오.” 이렇게 가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불평하는 많은 것들 속에는, 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린 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땅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만큼 두 지파는 이미 많은 생명의 복
을 받았습니다. … 예배당 공간, 아이들 예배 공간을 계속 고민해야 할 만큼, 이미 교회가 큰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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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를 받았지요. 우리의 기도 제목 안에 이미 하나님 주신 복이 들어 있습니다. … 아침마다 출근
하기 힘들어하고, 회사 가기 싫다고 괴로워하지만, 그걸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이에겐 ‘지옥철’이지만, 누군가에겐 ‘천국철’이겠지요. 내가 불평하는 그 일이 누군가에겐 간
절한 기도의 제목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잊으면 안 됩니다.
분당의 한 대형 교회 목사님이, 처음 교회 개척할 때 겪은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서, 창립 멤버
서른 몇 명이 모여 분당 어디에 겨우 70평 정도 되는 예배당을 계약해서, 어렵게 교회를 시작했
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영상의 제목이 ‘믿음으로 견딘 세월’이었는데요, 그 제목
이 참 잊히질 않습니다. … 누군가에게는 믿음으로 견뎌야 하는 세월이, 누군가에게는 일평생 바
라고 꿈꾸는 기적 같은 세월일 수 있는 게 저마다의 사람 인생입니다. ‘나에겐 왜 그런 복이 없
나?’ 그런 얘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주신 걸로 족하고, 하나님은 그걸로도 얼마든지 우리
를 세상의 복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실은 나에게 없는 그 부족함이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복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될 때
가 많습니다. 결국 므낫세 지파가 그 산지마저 정복하고 그곳에 거주하게 됩니다만, 땅이 좁은
그 걸림돌 때문에 철 병거를 이기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어떤 한계나 부족함이
있어야, 거기서부터 창조적 힘이 생기는 법이지요. … 여러분, 얼마 전 안세영 선수가 전영 오픈
에서 우승했는데요, 혹시 결승전 경기 보셨습니까? 2:1 역전 우승이었는데요, 저는 그 경기를 보
면서 ‘배드민턴이 예술이 될 수 있구나. 그리고 그 예술은 저 네트라는 제약, 한계가 있어서 완
성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트가 없다면 훨씬 편하게 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
도 그런 경기를 보지 않을 겁니다. 우릴 힘들게 하는 그 조건이 실은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고, 바로 거기서 우리 삶을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개의 명령형 문장이 나옵니다. 15절과 18절인데요, 그런데 그 두 명령 모두 같
은 동사가 사용됐습니다.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
척하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이렇게 ‘개척하라’는 명령
이 반복되는데요, 여기 ‘개척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바라’는 사실 성경에서 대단히 유명
하고 중요한 단어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성경의 첫 동사이기도 합니다. “베레시트 ‘바
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네, ‘바라’
라는 이 동사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가, ‘창조하다.’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왜 이 단어 ‘바라’를 썼는지 참 의문이고, 두고두고 생각해 보게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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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라’ 말고도, ‘개척하다’, ‘개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개간하다’라
는 뜻의 ‘하라쉬’도 있고, 새로운 땅을 개척한다는 ‘파라츠’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비슷한
동사가 있지만, 여호수아는 굳이 ‘바라’라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썼습니다. ‘개척하다’가 첫 번째
뜻도 아닌데 말입니다.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남아 있는 적들을 쫓아내고, 숲을 개
간하여 새로운 땅을 만들어라, 창조하라.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복이 되는 삶’을 개척해 나가라.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신 이유, 복을 주신 이유”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겠습니까?
그냥 ‘개척하라’도 아니고, ‘스스로 개척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의 도움이나 이런 것 기대하
지 말고, 하나님이 너에게 이미 충분한 힘과 지혜를 주셨으니, 너 자신의 능력으로 해 보라.”는
것입니다. 더는 자기연민과 무력감에 빠지지 말고, 더 많은 복을 달라고 하는 대신 복이 되는 삶
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 저희 교회가 여전히 개척 교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끝까지
‘개척하는’ 교회, 새로운 길을 ‘창조해 내는’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족한 어떤 것에 매몰되
기보다 이미 주신 것에 감사하고, 그 감사의 능력으로 새로운 지경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복이
되는 교회 되길 바랍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래야겠지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새롭게 도전하고 개척하여, 반드시 세상의 복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게 말처럼 쉽고 편한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시지만, 우리는 땀과 피로 개척
합니다. 동기나 후배 목사님들에게 저는 정말 어지간하면 개척하지 말라고 합니다. 쉽지 않습니
다. 그래서 창조하고 개척하는 삶의 시작은 언제나 ‘감사’입니다. 이미 내게 주신 것을 감사로 인
정하고 거기서 쉼을 누려야 합니다. 나의 기업을 결코 남과 비교하지 않아야 하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오늘 왜 이런 불평을 하게 됐을까, 저는 유다 지파와의 비교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
다. 자신들이 가장 복 받은 지파인 줄 알았는데, 이미 ‘복이 되어 살아가는’ 유다가 보입니다. 거
기서 이미 감사를 빼앗기고 신앙의 푯대를 놓친 겁니다. 남의 땅(집)이 더 커 보이면 진다는 바
둑의 오래된 격언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기업에 항상 감사할 때, 어려운 개척의 길을 끝까지 걸
어갈 수 있습니다.
감사로 시작하지만, 감사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감사에만 머무르면 그 감사도 썩어 부패합니다.
감사의 능력으로 ‘왜?’라는 질문을 힘껏 입에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복을 주셨을까?’
‘왜 나에게 이런 감사의 일들을 허락하셨을까?’ ‘왜 나에게 건강 주시고, 지혜 주시고, 시간 주셨
을까?’ 힘들지만 이 질문을 곱씹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는 삶에서 복이 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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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조금 더 형편이 좋아지면 그때 고민해 봐야지, 미뤄두면 안 됩니다. 지금 ‘못하면’, 나중
에 ‘안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결심하고, 지금 순종해야 합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십시
오. “너는 복이 될지라.”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네, 복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복이 될 거
라는 약속입니다. ‘개척하라’, ‘감사하라’가 명령이지요. 주신 명령에 지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