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수아 19:10~51 (구약 348쪽)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2025-05-11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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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부활절 네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33] 여호수아 19:10~51 (구약 348쪽)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본문 50절의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앞에서 이루어진 일곱 지 파의 기업 분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냐민과 시므온 지파의 분배까지 지난 시간에 살펴봤고, 오늘 나머지 다섯 지파에 대한 분배가 이루어짐으로써, 마침내 모든 지파의 기업 분배가 마무리 됩니다.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본문에 나오는 다섯 지파,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그리고 단까 지, 이들은 모두 가나안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그 기업을 분배받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물론 단 지파는 가나안 중남부 지역에 원래 분배받은 곳이 따로 있긴 합니다만 결국 북쪽으로 이주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가나안 북부 지역에 다섯 지파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들 지파의 위치를 기억 해 두면 앞으로 여러모로 유익한데요, 외우기가 쉽지는 않지만, 여러분, ‘안나수이’라는 패션 브 랜드를 아시지요? 그 이름을 조금 변형해서, 왼쪽 위에서부터 ‘아’, 아셀, ‘나’, 납달리, ‘수’, 스 불론, ‘이’, 잇사갈, 그리고 맨 위에 단, 이렇게 외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은 특별히 예수님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란 나사렛이 스불론 지파의 기 업 안에 있고, 주님의 주요 사역지인 가버나움은 납달리 지경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이들 지역은 사실상 이방인의 땅이나 다름이 없었는데요, 가나안 남쪽 경계 밑으로는 넓은 사막 이 있어서 이집트와의 완충 지대 역할을 했던 반면, 북쪽으로는 그런 게 없이 바로 이방 민족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만큼 외부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나 바벨론의 침략에 가 장 먼저 노출되어 큰 피해를 당한 곳도 바로 이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곳을 향해 예언하기를,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 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1~2)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 ‘큰 빛’이 누 구겠습니까? 네, 메시아, 예수님이십니다.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멸시와 고통을 당했던 그 땅에, 주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장 먼저, 가장 집중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한 번 더 ‘안나수이’ 기억해 보실까요?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그리고 단. 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다섯 지파의 기업에 대한 오늘 성경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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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발견됩니다. 보통 어떤 지파의 기업을 기록할 땐, 먼저 그 기업의 동서남북 경계를 설명하고, 그 안에 있는 성읍의 이름과 개수가 뒤따라 나오는 것이 하나의 정형화된 형식인데요, 오늘 이 다섯 지파의 경우에는 그 기본적인 틀이 깨집니다. 스불론을 제외한 나머지 네 지파의 경우, 기업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고, 또 스불론의 경우에는, 기업의 경계는 분명한데 거기 속한 성읍 목록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 속한 성읍의 숫자가 실제 성경에 기록된 성읍의 개수와 일치하 지 않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스불론이 받은 성읍이 열두 개라고 15절에 나오지만, 아무리 세어 봐도 그보다는 훨씬 많고, 아셀과 납달리도 숫자가 맞지 않기는 마찬가집니다. 기록은 됐지만 제 대로 정복하지 못한 성읍이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명확한 경계를 말하기도 애매했던 것 같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기업을 온전히 점령하는 일이 그만큼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뜻입니다. 그런 와중에 뭔가 다른 분위기의 내용도 발견됩니다. 마지막으로 제비를 뽑은 단 지파의 이야기 인데요, 47절에 보면,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나옵니다. 단 자손의 경계가 더욱 확장되었다는 표현은 일단 대단히 긍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원래 받은 기 업에 더해 그 지경을 추가로 넓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성경(공동번역, KJV 등)은 그 들의 인구에 비해 그 땅이 너무 좁았다는 이유까지 덧붙여 말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건 원문에 는 없는, 매우 심한 의역(意譯)입니다. 문제는 다른 번역본들의 경우, 이 부분을 정반대로 번역한 다는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그들의 땅을 잃었을 때, 레센까지 올라가서”라고 번역했고, 최근 에 나온 새한글 성경 역시 “단 사람들은 이 영토를 지켜 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 올라가서 레 셈과 싸워 그곳을 … 차지하여 거기에 살았다.” 말합니다. 영어 성경도 비슷한데요, “그들이 자 기 기업을 소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NIV) 혹은 “그들의 땅을 잃었다.”(ESV) 기록합니다. 왜 이런 정반대의 번역이 나왔을까, 원인을 찾아가 보면, ‘더욱 확장되었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야짜’에 대한 해석 때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단어를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go out’, ‘밖으로 나가다’라고 나옵니다. 기업의 경계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 까? 좋게 보면 경계가 확장된 것이고, 나쁘게 보면 원래 주신 기업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 자체에는 그런 긍정 혹은 부정의 뉘앙스가 없습니다. 단지 ‘기업의 경계’가 원래 기업 밖으로 옮겨졌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그럼 어느 쪽이 맞는 해석일까요? 다행히 본문의 행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른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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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사사기 1장과 18장인데요, 먼저 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각 지파가 자신들의 기업 을 ‘점령한’ 일에 대해 기록합니다. 유다 지파, 그리고 그 유다 지파 안에 기업을 얻었던 시므온 지파가 힘을 합쳐 여러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는 이야기도 나오고, 갈렙이 드빌(기럇 세벨)을 점 령하는 사람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하자, 옷니엘이 가서 점령하여 악사와 결혼한 얘기, 그런데 출가하던 악사가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 갈렙에게,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요청하고, 갈렙이 그런 딸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모두 주었다는 얘기도 다시 언급됩니다. 그러면서 점령에 일부 실패한 지파들의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여부스 족속 을 쫓아내지 못한 베냐민 지파를 비롯해서,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스불론 지파, 아셀 지 파, 납달리 지파 등이, 결국 가나안 주민들을 온전히 쫓아내지 ‘못하거나’, 쫓아내지 ‘않은’ 내용 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사기 1장의 마지막 단락 내용이 뭐냐, 바로 단 지파의 이 야기입니다. 거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 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 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 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삿 1:34~36) 그럽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지파를 어떻게 했다고요? 네,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는 것도 용납 하지 않았습니다. 입장이 거꾸로 된 거지요. 단 지파가 아모리 족속을 몰아내고 그곳을 점령한 게 아니라, 아모리 족속이 단 지파를 압도하여 산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렇게 단 지파는 거기서 한동안 내려오지 못했는데요, 결국 옆에 있던 요셉 지파의 힘으로 아모리 족속을 굴복시키게 되 는데요, 그럼에도 단 지파가 자신들의 기업을 회복했다는 얘기 없이, 단 지파의 기업 경계가 아 니라, 아모리 족속의 경계가 기록된 채 어두운 분위기로 내용이 마무리됩니다. 사사기 18장에 보면, 이런 단 지파가 결국 그 땅을 포기하고 갈릴리 북쪽으로 이주한 과정이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다른 땅을 물색했습니다. 용맹한 사 람 다섯을 뽑아 땅을 살펴보게 했는데요, 그 여정 중에 이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잠시 머무른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 ‘미가’라는 사람은 본래 자기 집에 산당 을 차려놓고 은으로 만든 신상을 모신 우상 숭배자였는데요, 처음엔 자기 아들을 멋대로 제사장 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어떤 레위 청년 하나를 데려와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엉망진창이 지요. 하나님의 회막이 있는 실로가 지척에 있는데, 집에 산당을 세우고 개인 제사장까지 뒀습니 다. 성소에서 일해야 할 레위인이 돈을 받고 한 집안의 우상이나 섬기고 있습니다. 그때엔 이스 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사사기의 유명한 반복구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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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로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기업으로 누리며 살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세계관은 이미 가나안의 우상과 탐욕에 의해 오염되고 잠식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단 지파의 정탐꾼이 우연히 그런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이 레위 청년 제사장에게 일종의 신탁을 물어봅니다. 과연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하나님께 좀 물어봐달라고 하지요. 오죽 답답하 고, 오죽 물어볼 사람이 없으면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인지, 결국 그 레위인 청년 은 그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줍니다.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야기합니다. … 그렇게 다섯 명의 정탐꾼이 올라가서 레셈이란 땅을 살펴보니, 그곳 백성들은 한 마디로 그들만의 낙원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 다른 민족과 도시로부터 거리가 먼 외진 곳에 있어서,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않고, 기름진 땅에서 아무 염려 없이 평온하게, 안전하게, 아무 부족한 것 없이,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사는 걸 발견하게 된 겁니다. 여러분, 20년 전 영화이긴 한데, ‘웰컴투동막골’이라는 영화 혹시 아십니까? 태백산맥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 잡은 동막골이라는 마을이 배경이지요.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너무나 순수한 사람 들이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레셈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군사적으 로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지요. 결국 단 지파는 그곳을 칼로 정복하여 이름을 ‘단’으로 바꿉니다. 그러고는 앞서 미가의 집에 있던 우상을 빼앗아 가지고 오고, 그 집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던 레 위 청년을 자신들의 제사장으로 모셔 옵니다. 왜 우리 집 제사장과 우상을 가져가냐, 반항하는 미가는 힘으로 겁박하고, 제사장 청년은 잘 구슬려서, 한 사람의 제사장보다는 한 지파의 제사장 이 더 낫지 않느냐, 설득하여 데려온 건데요, 이렇게 ‘단’은 처음부터 우상의 도시가 되고 말지 요. 훗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라는 유명한 왕이 이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 를 사기도 했고, 그렇게 앗수르에 의해 가장 먼저 멸망할 때까지, ‘단’은 악명 높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 47절, 단 자손의 경계가 더욱 확장되었다는 말씀의 행간에 담긴 내용 입니다.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비를 뽑아 기업을 받은 단 지파, 그들은 결국 자신 들의 기업을 점령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나안 족속에게 쫓기다,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 없는 엉뚱한 곳에 가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자기 기업을 지킬 힘과 의지가 부족했고,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 강했습니다. 이미 모든 가나안 땅이 분배된 상황에서, 저 아래 남쪽으로는 온통 사 막이고, 갈 곳은 북쪽 끝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적절한 곳을 찾아서, 큰 힘 들이지 않고 정복 하여 살게 됐습니다만, 이것을 ‘기업의 확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실 그들이 정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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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레셈(라기스)은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본래 납달리 지파의 기업 안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땅을 정복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못해서 생긴 불가피한 선 택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기업을 포기한 실패의 증거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 종하지 못한 신앙적 타협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읽어보면 처음부터 단 지파 전체가 레셈으로 이주한 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 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 지파 출신의 사사 삼손만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원래 단 지파의 기업 안에서 가나안 민족과의 싸움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삼손을 도와 함께 싸울 사람들이 없었지요. 그래서 삼손은 참으로 이상한 사사가 됐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사사가 항상 군대 없이 혼자 싸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삼손을 잡아다가 블레셋에 넘겨주기까지 하지요. …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단 지파가 그렇게 북으로 이주하지 않고 조금만 더 견뎌냈다면, 그래서 삼손과 함께, 그리고 자신들을 도와주던 주변 다른 지파들과 함께 끝까지 싸 우려고 했다면, 분명 단 지파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면서 어떤 일을 선택하고 그것을 이루어 나갈 때, 그 과정이 힘들고 고되다 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한 일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그 과정이 다 순 적하기만 한 게 아니지요. 하나님의 뜻이어서 순탄한 게 아니라, 단지 내가 순적한 길을 선택한 것일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점령하고 누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주신 기업을 포기하고, 내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러 가는 과정은 오히려 평안하고 형통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짓는 일인데, 가는 곳마다 도움의 손길이 있고, 모든 게 척척 맞아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안’이라는 기준으로 하나님 의 뜻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순적함이, 평안함이, 내 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내가 쉽고 편한 길을 택하여 살고 있을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와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 다 정복되고 점령된 땅을 기업으로 나눠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서 직접 점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도 싸움이 남아 있고, 죄와 사망 의 권세를 우리 스스로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서,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도록,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단 지파가 정복한 레셈에 대하여 성경은 온갖 좋은 미사여구로 묘사하지만, 그곳은 결국 하나님 의 뜻과 무관한 곳이었습니다. 평온하고, 안전하고, 부족한 것이 없고, 부가 넘쳐났고, 평화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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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성읍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마 그곳을 본 단 지파 사람들은, ‘이런 좋은 땅을 하나님이 우 리에게 예비해 놓으셨구나!’ 하나님께 감사했을지도 모릅니다. “거봐,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었던 게 분명해.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길을 형통하게 하시잖아. 우리의 경계가, 이스라엘의 경계가 더 확장됐으니 얼마나 감사해!” 그렇게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면서, 그들의 신앙은 길을 잃었 고,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분명 평안은 성도에게 축복이지만, 위험한 함정이기도 합니다. 거기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참 어렵습니다. 평안의 관성을 이겨내는 게 너무나 어렵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주신 기업을 포기 하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과정이 온통 평안입니다. 그 여정에 문제가 발생했더라면 돌이킬 기회 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게 순적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죄의 길은 넓고,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걸어갑니다. … 주중에 묵상했던 시편 119편의 한 구절에 보니까, “(교만한) 그들의 마 음은 살져서 기름 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70) 하는 고백이 있던 데요, 그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마음이 살져서 기름 덩이 같다. 평안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기름 덩이처럼 비대해지고 무뎌져서, 아무 분별력 없이 살아가는 그런 모습 은 아닌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 니다. 하지만 평안할수록 더욱 깨어 있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가난한 심령, 하나님의 법을 즐 거워하는 건강한 영혼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제 열두 지파의 모든 기업 분배를 마치면서, 오늘 19장은 여호수아의 기업 분배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갈렙의 이야기로 시작된 기업 분배였는데, 마지막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기가 막힙니다. 여호수아가 분배받은 땅은 ‘딤낫 세라’인데, 그곳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기름진 평지가 아니라 산지에 있습니다. 그곳에 여호수아가 성읍을 건설하고 거주했다고 50절은 이야기합니다. 다른 기업들처럼 이미 세워진 성읍을 받은 게 아닙니다. 여호 수아가 직접 산지를 일구고 성을 쌓아 성읍을 건축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얼마 후 죽어 그곳에 묻 히게 되지요(수 24:30). 개인의 종말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가 심은, 한 그루 사과나무 같은 것 이, 바로 여호수아의 기업, ‘딤낫 세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50절을 자세히 보면 여호수아의 이 선택이 얼마나 오묘한지,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 수아가 요구한 성읍 딤낫 세라를 그에게 주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 습니까?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 른 결정인데, 그걸 또 여호수아가 요구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엘르아살과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여호수아의 기업으로 ‘딤낫 세라’를 주고,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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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로 성읍을 건축하라고 해라, 이렇게 명령하시고, 그걸 여호수아가 순종하여 받아들였다는 뜻일까 요? 그랬다면 왜 여호수아가 그것을 ‘요구했다’고 성경은 말할까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기 업을 주었고, 여호수아는 순종하여 받았다고 하면 될 텐데, 왜 하나님도 명령하시고, 여호수아도 요구했다고 말하는 걸까요? 사실 저는 하나님이 먼저 명령하셨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면 여호수아가 ‘요구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요. 더구나 한 개인의 기업을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여 주신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려운 기업 을 사람이 먼저 택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우는 있었지요. 갈렙이 그랬습니다. 여호수 아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호수아가 먼저 딤낫 세라를 바랬고,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 하여 리더들이 결정했을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의 여호수아 버전인 거지요. 최고 지 도자로서의 특권을 내려놓고 거친 산지를 택해서, 스스로 성읍을 건설하여 후대에 물려주겠다는 그의 중심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요구 중에 어느 쪽이 먼저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여호수아의 소원이 일치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나님의 명령인데, 그게 바로 나의 요구, 나의 소원입니다. 내가 바라는 길이 있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이루는 과정이 험난해서, 하나님은 차마 우리에게 그 길을 먼저 명령하시기 어려워하실 때도 있 는데, 내가 먼저 요구하니 허락하시고,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믿음의 삶까 지, 꼭 자라가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과 여호수아의 소원이, 결코 편안하고 쉬운 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내가 나이도 제일 많고, 리더이고, 고생도 제일 많이 했으니까, 좋은 땅 달라고, 여호 수아는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원치 않을 법한 곳을 스스로 원했습니다. 평안이나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선택이었지요. 직접 건축해야 하지만, 정작 자신은 누리지 못할 기업입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에게는 평안함과 안락함을 넘어서는, 거룩한 삶의 기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의 이유가, 매번 안전함과 부요함과 여유로움이 되어서는, 우린 하나 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남들 다 좋아하고 바라는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면 맞습니다. 문은 좁고 길이 험해서 선택하는 사람이 적은 거기가 바로 생명의 길이라고, 너 희는 그 좁을 길을 택하여 가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원고 8쪽

- 8 - 성도는 언제나 고생길로 가야만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쉼을 누릴 줄 도 알아야지요. 다만 그 평안이 나를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만들고 있는지, 그 평안 속 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 혹시 기름 덩이의 삶은 아닌지, 끊임없이 스스 로 돌아봐야 합니다. 그 평안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요 복이라면, 그 평안 속에서 우린 점점 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질 것입니다. 평안이 내 안에서 단지 소비되고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으로 흘러넘쳐서, 점점 더 그 평안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평안이라면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삶의 어떤 선택의 순간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정확히 분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 습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정말 하나님이 정하신 나의 기업이 무엇인지, 헛갈리고 확 신하기 힘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기업을 제비 뽑듯, 선택의 기로마다 제비 뽑아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사람이 매번 힘든 길만 선택해서 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이, 어떤 하나의 선택만이 아니라, 그 선택 이후의 모습입니다. 내 선 택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는, 선택 그다음을 보면 압니다. 단지 가나안이냐, 레셈 이냐,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그 길을 걸어가는 내 모습이 어떠하냐, 거기에 그 선택의 진 정성이 달린 것입니다. 정말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선택했다면, 이후의 과정에서도 계속 해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려고 애를 쓸 겁니다. 단지 어떤 문제 앞에서만 하나님께 묻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벗어나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말 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심을 늘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사 잘못된 길을 선택했더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사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벽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서로를 선택하는 마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란 단 한 번의 뜨거운 감정이나 어떤 특별한 결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반복적인 선택과 의 지라는 뜻입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한 번의 어떤 믿음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 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마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푯대로 삼고, 날마다 여호와의 뜻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길임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단 지파는 한 번의 실수로 망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포기하고 레셈으로 올라간 그것만 으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평안을 택하는 선택이 수없이 반복됐고, 그 과정을 통해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져, 결국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

원고 9쪽

- 9 - 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한, 성도는 선택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금 하나님의 뜻 앞에 귀를 기울이는 한, 나의 어 떤 선택으로도 하나님은 최선의 결과를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이 집약된 구절이 저는 오늘 50절의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 읍’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나의 요구가 되고,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삶, 주님과 나의 기호가 일치하는 삶, 우린 지금 거기까지 자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나의 요구가 되는 그런 삶입니다. 주중에 시편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고백을 봤습니다. 시편 119편 111절인데요, “주의 증 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그랬습니 다.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주의 증거들로,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 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 나의 영원한 기업이 뭐라고 시인은 고백하냐면, 주의 증거, 주의 말씀이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업, 나의 자랑, 나의 재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업이라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이 인도하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뜻인데, 시인은 그것이 또한 나의 즐거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바로 그 얘기지 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내 기업이 되고, 내 소원이 되는 그 믿음의 삶을, 날마다 성 실하게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단지 정복하기 쉬운 곳을 찾고, 이미 다 준비되 고 완성된 것을 누리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기업을 온전히 분별해서, 힘껏 정복 하고 건설하여,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함께 살아갈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사 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그 믿음의 길 걸어갈 수 있도록,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