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여호수아 21:43~22:9 (구약 352쪽)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2025-06-08 · 설교 원고 · 9쪽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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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성령강림 주일 [여호수아 강해 36] 여호수아 21:43~22:9 (구약 352쪽)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본문 4절의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을 위한 도피성을 포함하여, 레위 자손 이 머물 마흔여덟 개의 성읍과 목초지까지 모두 결정됐습니다. 그렇게 가나안 땅에 대한 각 지파 의 기업 분배가 마무리됐고, 그제야 그들 가운데 안식이 임했다고, 성경은 오늘 21장 마지막 단 락에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했다고 강조하지요(수 21:45).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그 약속을 받은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 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것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남김없이 다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말 합니다. …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러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 씀이 선하고, 비록 우리 또한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저와 여러분을 택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고백교회를 통해,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어긋남 없이 그대로 이루 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어지는 22장은 ‘그 때에’라는 부사로 시작됩니다. 그렇게 모든 가나안 정복과 분배가 마무리됐 을 때입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르우벤, 갓, 므낫세 절반 지파를 부릅니다. 이들은 어떤 지파지요? 네, 요단강 동편, 트랜스 요르단 지역, 본문의 다른 표현으로는 ‘길르앗 땅’에 기업을 가진 지파 들입니다. 이번 가나안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기업을 분배받았고, 나머지 아홉 지파 절반의 승리와 안식을 위해, 함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4만여 명이 이 전쟁에 참전했고, 7년 넘게 이어진 전쟁 동안, 전투의 맨 앞, 선봉 에 서서 싸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 두 지파 절반을 여호수아가 왜 불렀습니까? 네, 이제 집으로,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마침내 하나님이 안식을 주셨으니, 너희도 인제 그만 각자의 기업으로 돌아가서 그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누리고, 그리운 가족과 함께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어떤 것이 놀랍습니까? 그들이 ‘먼저’ 여호수아에게 찾아와서, 이제 우리 기업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요청한 게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 그만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는 겁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 직장 상사가 퇴근하라고 말해야 퇴근하나요, 아니면 퇴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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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간 되고, 내 일 다 마무리했으면, “가보겠습니다!” 하고 퇴근하나요? 예전에는 윗사람 눈치도 보 고 그랬는데요, 그래서 딱히 할 일이 없는데도, 담임목사님 퇴근할 때까지 밤에 열 시, 열한 시 까지 그냥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퇴근하고 그랬는데요, 지금은 안 그러지요? 그러면 아마 직장 내 괴롭힘 같은 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사실 전쟁은 일찌감치 끝나지 않았습니까? 가나안 전쟁의 승리 선언이 기록된 곳이, 여호수아 11장이었습니다. 지금 벌써 22장이지요. 그만큼 시간도 꽤 흘렀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후 길갈에서 1차 기업 분배가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절반 지파가 거기서 기업을 분배받았고, 그 기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각 지파가 개별적으로 전쟁을 치르기도 했습니 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지파가 분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분배가 계속 지체됐습니다. 결국 분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길갈에서 어디로 이동하지요? 네, 지금의 실로로 이동해서 회막 을 세우고, 거기서 다시 남은 일곱 지파의 기업 분배를 진행합니다. 각 지파에서 세 사람씩 뽑아 가나안 전역에 정탐을 보내 지도를 그려 오게 하고, 그래서 그 지도를 보고 다시 제비를 뽑아 기 업을 정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 요단강 동편의 두 지파 절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기다렸습 니다. 전쟁은 다 끝났고, 이제 분배만 남았으니, 그만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퇴근하겠습니다, 그 러지 않았습니다. 큰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가나안 족속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고, 분배받은 기 업을 각 지파가 차지하는 과정에서 언제 다시 국지전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정복과 점령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정복한 땅을 점령할 일이 남아 있고, 그래서 분배도 정복의 일부입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 땅의 지파들은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두 지파 절반이 요단강 동편에서 얻은 안식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땅 을 분배하여 점령하고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립니다. 형제들도 자신들이 얻은 그 안식에 이 를 때까지, 그들 곁에 머물며 그들의 안식을 위해 함께 싸운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모든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은 후에도 그들은 계속 기다렸습니다. 기업 분배의 마 지막 퍼즐이 맞춰질 때까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도피성을 정하라고 말씀하시고, 후에 레위 자손이 나서서 자기들 거주지와 목초지를 달라고 하자, 그 성읍들을 제비 뽑아 줄 때까지, 그렇 게 정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전부 다 안식을 얻을 때까지, 하다 하다 여호수아가 이제 너희 그 만 돌아가라, 이야기할 때까지, 그렇게 르우벤, 갓, 므낫세 절반의 지파는 끝까지 형제들 곁에 머 물러 있었습니다. 살아보니 안식은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지도, 누려지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나 혼자의 노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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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인내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서, 우리가 비로소 안식 을 누리게 됨을 성경은 일관되게 말합니다. … 지금 나에게 안식이 있다는 건, 사랑받았다는 뜻 이고, 돌봄 받았고, 섬김받았다는 뜻일 겁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과 안식이 그랬습니다. 누군가의 말 없는 헌신이 있었고, 자신의 안식을 내려놓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여호수아가 진심을 담아 칭찬합니다.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형제를 떠나 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책임을 감당했다, 3절에서 말합니다. …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 록’ 형제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책임을 지켰다. 참 대단하고, 또 어려운 일이지요? 한 번 헌신하고, 잠깐 열심히 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그것을 지속하는 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일입니다. … 그냥 참는 게 아니라, ‘오래’ 참는 게 사랑이고, 그것이 성 령의 열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일도 마찬가지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오래’ 열심히 하는 사람이 결국 결실을 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오래’ 할 수 있느냐, 역설적이지만 그 ‘오래’를 목표로 삼지 않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을 ‘오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다들 ‘오래’라는 말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됩니다. 너무 멀리 보지 않고,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오래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식입니다. 처음부터 ‘내가 몇 년을 버텨야지!’ 이래서는 오 래 견디기 어렵지요. 내일의 무게까지 미리 지려고 하면 오늘이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오늘 하 루를 잘 버틴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긍정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잃지 않을 때, 비로소 시간도 인 내도 조금씩 채워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이 시간이라는 채찍으로 인간을 다스린다면 인간에게는 유머라는 최후의 무기가 있다.”라는 한 소설가(김경욱)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간으로 길들이실 때, 그 시간을 견디려면 웃음의 힘이 필요합니다. ‘오래’ 하려면 웃으면서 해야 하고, 웃을 일이 별로 없어도 웃으려 애를 쓰다 보면 정말 웃을 일이 생기곤 합니다. 진지하고 무거운 태도만으로는 오래 할 수 없는 것 같 습니다. 이번에 청송에서도 느낀 거지만, 힘들어도 웃고 웃기고 해야, 또 그런 사람들과 ‘함께해 야’, ‘오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웃음’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시지요. 슬픔 대신 기쁨 을, 근심 대신 찬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게 주님의 첫 기적이 잖아요? 우리 삶을 기쁨의 잔치로 바꾸시기 위해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 십니다. 지난주 묵상 본문이 빌립보서였습니다만, 바울은 끊임없이 “기뻐하라.”라고 명령하지요. 기쁨이 ‘명령’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신앙적 진실이지요. 기쁨이 ‘감정’이 아니라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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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령’이고 ‘의지’라는 것, 기쁜 일이 생겨서 기쁜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선택해야 한 다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상황이 다 도와줄 때 웃는 건 쉽지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기쁨을 선택하려면 뭔가 다른 힘과 믿음이 필 요합니다. 다른 게 성도가 아니라, 웃을 줄 아는 사람, 어떤 순간에도 웃음을 선택할 수 있는 사 람이구나,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한 연구 기관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에게 바라는 것 한 가지만 얘기해 보라고 물어봤습 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좀 더 많았으면, 좀 더 잘 해줬으면, 친절하게 말했으면, 이런 걸 어른들 은 많이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한 것은, 엄마 아빠가 행복했으면. 기뻤 으면, 더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 조사를 한 기관에서는, 부모의 웃음이 자녀의 힘이 고 자존감이라는 얘길 덧붙였습니다. … 악동뮤지션의 수현이 방송에서 그런 얘기 하는 걸 들었 습니다. 아버지가 몽골 선교사님이셨는데, 집이 참 가난했다고 합니다. 집에 있는 쌀을 컵으로 퍼내면 한 번에 다 담길 정도로 쌀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가장 자주 먹은 밥이, 밥에 간장 비벼 먹는 간장 비빔밥이었다는데요, 계란후라이라도 더해지면 그게 최고였다고, 그렇 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두 남매가 전혀 어둡지 않게 자라게 된 건, 부모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는 거예요. 부모님이 만약 “우린 정말 가난해. 돈이 없어. 미안해.” 이렇게 얘기했으면, ‘우리가 가난하구나, 이게 맛없는 반찬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부모가 일절 그런 말을 안 하니까, 그걸 아주 당연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와, 오늘도 간 장 밥이네. 맛있겠다. 오늘은 달걀도 있네!” 이렇게 큰 겁니다. 아이들의 생각과 자존감이 결국 삶에 대한 부모의 태도에 달린 것이지요.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나 다 마찬가질 겁니다. 우리가 조금 더 웃으며 이 땅의 삶을 살아가기를, 날마다 기쁨을 빼 앗기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그래서 ‘날이 오래도록’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길 가장 원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도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다시 옷 입으시길 바랍니다. 웃을 일이 없을 때도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고, 웃 을 일이 없다면, 내가 그런 일을 만들겠다는 심정으로, 힘껏 기쁨의 길을 열어젖히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곁길로 갔습니다만)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절반을 향하여, 그들이 오 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충성했다고 칭찬합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실제로 7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기업을 가진 지파들은 어쨌거나 가족과 함께 있지 않 습니까? 힘들어도 외롭진 않습니다. 하지만 르우벤, 갓, 므낫세 절반은 다릅니다. 말 그대로 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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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별 중입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미국 군인들이 다른 나라로 파병 갔다가 돌아오면서, 예고 없이 가족을 만나러 가는 영상(Soldier homecoming surprise)을 보게 되는데요, 보신 분들 많이 계 시지요? 사무치는 그리움과 반가움을 어쩔 줄 몰라서, 아빠에게, 남편에게, 아들에게 달려가 안 기는 가족들 모습에, 볼 때마다 눈시울이 촉촉해집니다.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그들은 그렇게 가족을 떠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책임을 다했습니다. 먼저 기업을 분배받았으니 얼마나 거기서 살고 싶고, 일하고 싶고, 누리고 싶었을까요? 요단강 동편은 목축에 최적화된 땅이었고, 원래 많은 가축을 소유했던 지파들이 그 땅을 분배받지 않았 습니까? 이제 정말 마음껏 일할 기회가 왔으니, 얼마나 마음이 설레고 간절했을지 …. 예수님의 비유에도 나오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시면서, 준비가 다 끝났으니 이제 잔치에 오 시면 된다고 종을 보냈더니, 어떤 사람은 내가 밭을 사서 거기 나가봐야 한다고 얘기하고, 어떤 이는 내가 소 열 마리를 사서 그거 부려보러 가야 하니 양해해 달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 가 결혼해서 가기 어렵겠다고 하면서 하나 같이 거절했다고 하십니다. 지금 두 지파 절반이 딱 그런 상황 아닙니까? 밭도 새로 얻었고, 소도 길러야 하고, 가족도 있는 데, 그걸 다 내려놓고 이 전쟁에 참여했으니, 그게 다 눈에 밟혀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 해하고도 남습니다. … 저희 장로님이 이번에 순대를 파는 푸드트럭을 새로 시작하셨는데요, 3백 만 원 넘는 비용을 들여서 지난주에 트럭을 개조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렇게 차를 맡기고 청송에 다녀오셨는데요, 청송 가서도 계속 그 일이 생각나지 않으셨을까, 아마 돌아오자마자 바 로 차를 받아서 일을 시작하지 않으셨을까, 제가 혼자 상상을 해봤습니다만, 누군가의 안식을 위해, 나의 안식을 내려놓는 것만큼, 귀한 헌신이 없고, 또 그것을 ‘오늘까지 날 이 오래도록’ 감당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진심으 로 그들을 칭찬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축복하여 보냈다는 말이 본문에 두 번이나 반복되고 (6, 7절),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나눠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만큼 그들의 헌신이 귀하고 복됩니다. 아직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누군 가를 위해 잠시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는 그런 섬김이야말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우리를 향 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며 일하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비판했을 때, 주님이 하신 대답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요 5:17).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 시니 나도 일한다! 쉼이 없는 인생에 안식을 주시고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지금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안식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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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누군가의 안식을 위해 나의 쉼은 다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쉼이 없는데 남을 위해 일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몸과 마음이 쉼을 누리고 있을 때, 내 안에 이미 하나님 이 주신 안식과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변을 돌아보며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한 이들 을 섬기고 돌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요단강 동편에 이미 기업이 있고 예비 된 안식이 있기에, 선봉에 설 수 있는 거지요. 받았기에 줄 수 있고, 가졌기에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때마다 늘 잊지 말아야 할 건, 정작 내 안에 충분한 쉼과 에너지가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일입니다. 물론 진정한 안식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는지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냥 주말에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쉬면서 TV 보고, shorts 보고 한다고 해서 피로가 풀리고 삶이 refresh 되는 건 아니지요. 사람에겐 ‘휴식’도 필요하지만, ‘회복’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전문가 들이 많이 합니다. ‘휴식’(rest)과 ‘회복’(recovery)을 구분해요. 에너지를 쓰는 걸 잠시 멈추는 게 ‘휴식’이라면. 소모된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고 기능을 다시 끌어올리는 게 ‘회복’인데요, 현대 인들은 주로 ’휴식‘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 후에 꼭 하는 훈련이 ’회복 훈련‘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있는 게 아니 라, 가벼운 러닝 같은 유산소 운동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도 섭취하면 서, 몸을 다시 끌어올리는 겁니다. 정말로 ’충전‘하는 거지요. 귀찮다고 그런 걸 안 하고 그냥 쉬 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연료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채 그냥 엔진만 끄고 있던 자동차 처럼, 겉으로는 쉰 것 같고 다시 달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전히 에너지가 고갈된 채로,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이어지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말씀하신 주님의 그 ‘쉼’도 마찬가집니다. 단순히 아무것도 안 하는 쉼을 말씀하신 게 아니지요. 바로 그다 음에 뭐라고 하시냐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 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말씀하세요. 아무것 도 안 하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하세요. 무겁지 않은 짐 을 주님과 함께 메고, 진정한 ‘회복의 쉼’을 누리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주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걸어가며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 또 회당에 들어가서 한쪽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 일입니 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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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짐을 함께 지며, 참된 쉼을 배우게 하십니다. 사람의 영혼이 무엇으로 충전되는지, 사람이 어떻게 자아의 늪에서 벗어나 자유와 안식에 이르게 되는지, 가르 쳐 주십니다. … [사실 ‘쉬다’라는 헬라어 동사가 ‘아나파오’[ἀναπαύω]인데요, ‘멈추다’라는 뜻의 ‘파오’에, ‘위로부터’라는 뜻의 접두어 ‘아나’가 합쳐졌거든요. 스스로 쉬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쉼’이라는 뜻인데요, 놀랍게도 이 단어에는 ‘휴식’과 ‘회복’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습니 다. ‘안식’에 대한 헬라인의 깊은 통찰이 담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 사회’라는 책에서, 인간의 피로를 둘로 구분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면서 생기는 피로인 ‘자아 피로’가 있고, 그 자아가 세상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 을 때 생기는 ‘치유적 피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쉬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현대인은 더욱 자기 자신 안에 고립되는 경향이 많은데요, 그 자체가 심각한 ‘피로’를 유발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반면에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고, 타자의 삶에 참여할 때 경험되는 것이 ‘치유적 피로’입니다. 그 것도 ‘피로’이긴 한데 나를 ‘치유하는’ 피로에요. 우리에게 어떤 피로감을 주지만, 실은 그 안에, 휴식을 넘어서는 회복의 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그런 ‘치유적 피로’를 잔뜩 느끼고 왔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집중된 바쁜 일상 을 잠시 멈추고, 청송까지 가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노동을 하고 왔는데요, 돈을 받고 하는 게 아니라, 돈을 내가면서 일했지요. 더운 날씨에, 해마다 일은 점점 많아지고, 오가는 길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걸 ‘사서 고생한다.’ 그러지요. 그렇게 다녀와서 다시 일상을 살아내느라 평소보 다 더 힘드셨던 분들도 많이 계실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차라리 이럴 바에야 선교 헌금을 보내드리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실 수 도 있습니다. 실은 제가 처음에 그랬는데요, 저희가 가서 일하는 대신,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쓸 수 있도록, 인건비를 드리는 겁니다. 늘 그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니 저희보다 훨씬 손도 빠르고 정확하시겠지요. 그런 분들 몇 명만 있으면 아마 하루 안에 다 끝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에 내려갔을 때 선교사님께 여쭤봤어요. 적과(摘果) 작업하시는 분들 하루 쓰려면 얼마 정도 비 용이 드는지 물어봤더니, 11만 원에서 14만 원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런 분들 몇 명 있으면 저 희가 했던 작업을 하루에 다 할 수 있겠냐고는 못 여쭤봤습니다. 혹시 괜히 저희가 힘들어하는 걸로 오해하실까 싶어서요. 여러분, 몇 분 정도 쓰면 그 일 하루에 끝낼 수 있을까요? 나무 아 래, 위로 각각 1명씩 두 명이 한 조가 돼서, 대략 다섯 조, 열 명쯤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일당 을 14만 원씩 쳐도 열 명이면 140만 원입니다. 그런데 저희 이번 청송 리트릿 예산이 얼마예요? 기본 예산만 2백만 원이고, 회비도 5만 원씩 100만 원에, 오가는 기름값, 통행료 15만 원씩 열 대만 잡아도 150만 원이니, 다 합하면 5백만 원은 족히 듭니다. 인부를 고용하는 비용의 거의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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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배가 훨씬 넘지요. 거기에 성도들이 직장 월차 내고 반차 내서 갔으니, 그건 또 별개예요.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돈은 돈대로 나가고, 여러분 정말 세상 말로 ‘현타’가 오지 않습니까? 저희 이 사역 내년에도 계속 해야 할까요? 그런데 다녀오신 분들이 남겨주신 소감들이 어떻습니까? 힘들었다, 못 하겠다, 너무 비효율적이 다, 가지 말자, 그런 분 계시나요? 아니요, 한 분도 없습니다. 청송은 늘 특별하다, 뿌듯하다, 감 사하다, 너무나 풍성한 은혜였다, 감동이다, 기대보다 더 좋았다, 벌써 내년이 기대된다, 하나같 이 그런 얘기들입니다. 심지어 ‘청송 앓이’라는 말이 있을 정돕니다. 저도 올라오면서 그랬습니 다. 몸은 힘든데,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위로와 쉼이 있습니다. 돈으로 헤아릴 수 없고, 다 계산되 지 않는 은혜가 있고, 하나님은 그런 비효율적인 일들 속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또 이 땅에 당 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 계심을,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안식을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안식을 위해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위로부터 오는 진정한 쉼과 회복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예배이고, 선교이고, 하나님의 나라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만,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더 큰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선교함으로써 선교되어진다는 유명한 말처럼, 누군가를 위한 일들이 실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일 때가 많고,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임 을, 우리가 더 깊이 깨닫고 누리며 살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의 안식을 위해 요단강을 건넜던 두 지파 절반,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어떤 은혜를 받았 고, 어떤 안식을 누렸는지, 우리는 곧 보게 될 겁니다. 단지 수많은 전리품을 얻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열 지파와 함께하고 그들을 섬겼지만, 그러면서 그들이 먼저 받았고 먼저 자랐습니 다. 나의 안식에 매몰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참된 안식을 누렸습니다. … 사실 그들이 참전했기 때문에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지요. 혹 그들이 끝내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더라도, 하나 님은 나머지 지파만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 까?) 그들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에 ‘그들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고,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갈무리하면서, 그 참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 한 가지를 마저 짚고 넘어가려 합 니다. 저는 이번에 청송에 다녀오면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는, 선교는, 단지 ‘돈’이 아니라 ‘몸’이 참여하는 일이구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할 때 먼 저 돈부터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만, 실은 순서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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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님께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하나님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지요. 사람, 일꾼입니다. 그의 몸이고 삶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 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이사야가 대답했다고 성경은 말하지요. 보낼 사람, 갈 사람을 하나님 이 찾으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뭐가 적다고요? 네, 일꾼이 모자랍니다. 다른 게 부족한 게 아 닙니다. 사람이 부족하고 일꾼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나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일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다 보면 몸이 가고, 몸이 가다 보면 삶이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되, 단지 마음이나 기도, 물질만으로 함께하지 않기를 바랍 니다. 여러분의 몸이 가야 하고, 삶이 따라가야 합니다. 몸이 간다는 건 실로 위대한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그의 유한한 시간과 삶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 셨지요. 마음이 아니라, 생각이 아니라, 당신의 몸으로, 삶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으니, 지금 도 우리 가운데 그렇게 일하고 계실 겁니다. 돈이 아니라 몸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나 관념이 아 니라, 우리의 삶과 활동을 통해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안식을 누리게 됐을 때,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고,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 주시는 쉼이 있을 때, 잠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 겠습니다. 나의 안식에 집착하다가 더 깊은 피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아직 안식에 이 르지 못한 이가 없는가, 누군가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은가, 살피고, 또 용기를 내어 함께 요단강을 건너 진정한 주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그 길을 힘껏 걸어가고 계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 또 오늘 함께 예배하는 온누리교회 성도 님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끝까지, 날이 오래도록,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하나님의 평강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길,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