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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5:1~19(63) (구약 342쪽)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2025-03-09 · 설교 원고 · 9쪽 · 약 20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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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첫 번째 주일 [여호수아 강해 27]
여호수아 15:1~19(63) (구약 342쪽)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본문 19절의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갈렙에게 약속하신 헤
브론 분배가 이뤄지고, 이젠 정말 가나안 땅 분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
가 좀 이상합니다. 처음 땅을 분배받는 지파가, 열두 지파 중 장남 지파에 해당하는 르우벤이 아
니라,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후손, 유다 지파입니다. 15장 전체가 이 유다 지파에게 이루어진
가나안 땅 분배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오늘 읽은 전반부에는 분배받은 땅의 경계선이, 남쪽 경계
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동, 북, 서의 순서로 설명되고, 아직 읽지 않은 후반부에는 그 경계 안
에 자리한 여러 성읍과 마을들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다시 갈렙과 그
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요, 이후 이어지는 다른 지파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량
과 내용으로, 이 유다 지파 분배를 가장 먼저, 비중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분배를 받게 됐고, 또 이 순서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
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물론 갈렙이 속한 이 유다 지파가 당시 실제적인 리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인구도 가장 많고, 분배받은 땅도 가장 넓습니다. 장자는 아니
었지만, 여러모로 장자의 면모를 갖춘 지파가 바로 유다 지파였습니다. … 아시는 것처럼, 이러
한 유다 지파의 우월적 지위는 열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예언적 축복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열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이렇게 유다를 향해 예언합니
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
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왕의 지팡이(珪)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
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실로]이 오시면,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9~10) 놀라운 이야기로 축복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태
어나고,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다 지파가 꼭 먼저 분배를 받아야 하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다의 특별
한 권위를 예언했지만, 그렇다고 야곱이 유다 먼저 축복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태어난
순서대로, 장자 르우벤에게 가장 먼저 했습니다. 다만 온전한 축복의 메시지는 아니었지요. 르우
벤은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해서는 안 될 관계를 가졌고, 야곱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 일을 언
급함으로써, 사실상 르우벤의 장자권을 박탈합니다. 박탈된 장자의 축복은 누구에게로 가느냐,
네,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 향합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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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입양하지요. 다시 말해 손자를 아들로 삼은 건데요, 이는 결과적으로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의 기업을 받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장자는 동생들이 받는 기업의 두 배를 받도록 정
하는 율법의 규례(신 21:15~17)에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인데요, 우리는 다음 16, 17장에서 이 두
지파가 받는 기업을 보게 될 겁니다.
야곱이 유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함으로 그를 축복했지만, 그렇다고 유다가 맨 처음 축복을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장남 르우벤이 가장 먼저였고, 다음은 둘째 아들 시므온, 셋째 레위, 그리
고 넷째 유다의 순서였습니다. 물론 시므온과 레위 역시 축복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말을 들었습
니다. 야곱은 이 둘을 한꺼번에 언급하는데요,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 형제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난폭한 무기다. …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그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을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
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버릴 것이다.”(창 49:5~7, 새번역) 실상 축복과는 거리가 먼
말들을 쏟아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행한 보복과 살육 때문입니다. 여동생 디나가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에게 욕보임을 당하자, 화해의 명분으로 할례를 받게 해서, 그곳 남자를 전부 죽이고,
모든 가축과 재물과 여인들을 노략질했습니다. 앞서 르우벤이 자기 욕망에 굴복하여 불명예를 자
초한 사람의 표본이라면,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복에서 멀어진 사람의 전형입니
다.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그렇게 스스로 장자의 축복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이렇게 보면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했던 예언적 축복은, 사실 전부 다 축복이었던 것도 아니었
고, 또 단순히 미래를 점찍어 보여주는 그런 식의 예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자기도 모르게 하는 어떤 영적인 메시지라기보다는, 자녀들의 삶을 오랜 세월 지켜
본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신앙적 교훈과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이 넷째 아들 유다를 그렇게 축복했는지, 어째서 모든 지파를 대표하는 리더의
자격을 그에게 부여했는지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장자의 명분을 가지진 못했지
만, 장자처럼, 장자답게, 책임과 헌신의 삶을 살아냈던 것입니다.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장남이
꼭 장남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요. 장남은 아니지만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가족들의 형편을 돌
아보는 그런 자녀가 따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유다가 그러했고, 성경에는 그런 그의 모습이 여
러 번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을 형들이 죽이려 했을 때, 그래도 형제인데
죽이기까지 할 건 없으니 그냥 지나가는 상인에게 팔자고 나서 그 생명을 보존한 것도 유다이고,
나중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갔다가, 정체를 숨긴 총리 요셉이 형제들
을 시험하면서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가장 주도적으로 아버지 야곱을 설득했던 것
도 유다이고, 그렇게 애굽으로 갔던 베냐민이 도둑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빠지자, 자신의 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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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내어 주고 베냐민을 구해달라고 요청했던 이도 유다였습니다. 그런 삶의 궤적을 모두 지켜
본 야곱이었기에, 유다를 향한 그의 남다른 축복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존귀한 삶이
었기에 존귀한 미래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 유다의 후손, 유다 지파 역시 그 선조의 신앙과 삶을 잘 이어가는 모습입니다. 갈렙을 필두
로 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좇는 믿음’을 보이고, 모든 행진과 전쟁에 있어서도 항상 선봉에 섭니
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은 가나안과의 남은 전쟁에 있어 유다 지파가 앞장서라고 하
시는데요(삿 1:1~2), 유다 지파는 그때도 가장 약한 시므온 지파를 챙깁니다. “우리 기업에 함께
가서 싸우자. 그러면 우리도 너희 기업에 함께 가리라.” 시므온 지파를 따로 배려하고 도우면서,
진정한 장남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유다는 르우벤처럼 처음부터 장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요셉처럼 아버지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
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삶이 장자다웠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사모했고, 그 복에 합당
한 삶을 살면서, 점점 더 실질적인 장자의 모습으로 ‘자라’ 갔습니다. …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오늘 본문에서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집니다. 유다 지파가 인구가 많고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야곱이 유다를 그렇게 축복해서도 아닙니다. 유다 지파 스스로 그런 책
임과 역할을 자처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 분배와 관련해서 여호수아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분배의 순서에 대한 한 가지 중
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예상처럼 한 번에, 동시에 분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각 지파의 리더들이 한곳에 모여서 다 같이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한 게 아닙니다. 각
지파가 개별적으로 요청하여 각각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유다 지파가 먼저 제비를
뽑겠다고 나섰고, 그래서 가장 먼저 분배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유다 지파
와 요셉의 두 지파에 대한 분배가 끝나고 나중에 18장에 보면,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나머지
일곱 지파를 향해 여호수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
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수 18:3)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해서, 유다와 요셉 지파가 분배받은 땅을 제외한 나머지 땅을, 일곱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그려서 가지고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나눠주겠다,
그들을 재촉합니다.
성경은 여기서 가나안 땅 분배가 지체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유다, 므낫세, 에브라임, 세 지파만
분배를 마쳤고, 나머지 일곱은 계속 미적거립니다. 실제로 이들 세 지파의 분배가 길갈에서 이루
어진 데 반해, 나머지 지파의 분배는 ‘실로’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이루어집니다. 회막이 모셔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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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예배의 중심지가 되는 곳입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 분배는 크게 두 번에 걸쳐 이뤄졌습니
다. 분배에 적극적이었던 세 지파가 먼저 길갈에서 분배받았고, 나머지 지파들은 이스라엘 본진
이 실로로 이동했을 때까지도 계속 소극적이다가, 결국 여호수아의 책망을 듣고서야 비로소 분배
에 참여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분배를 요구했습니다. 아마도 갈렙이 헤브
론을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한 직후 곧바로 제비를 뽑았겠지요(수 14:6). 그래서 맨 먼저 분
배를 받은 것입니다. 야곱이 유다를 그렇게 축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구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특별한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부르심 앞에 누구보다
더 적극적이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가장 먼저 분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참 많은 걸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후반부에 보면, 갈렙이 헤브론 근처의 ‘드빌’을 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헤
브론까지는 괜찮았는데 드빌까지는 갈렙도 무리였는지, 그곳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자기 딸을 주
겠다고 하여 옷니엘이 나서 정복했다는, 그런 얘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왜 여기 나오는지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땅의 경계를 다 설명하고, 이제 그 경계 안
에 있는 성읍들을 나열하기 전에 이 내용이 삽입되어 있는데요, 다른 지파들의 분배에서는 등장
하지 않는, 그런 특별한 성격의 이야기입니다. … 하지만 지금까지의 배경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담긴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 분배가 왜 유다 지파로부터 시작됐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어떤 신앙과 삶의 태도를 원하시는지, 우
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증언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갈렙은 드빌 정복에 자기 딸 악사를 일종의 상으로 내걸었습니다. 지금의 관점
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수천 년 전에는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골리앗을 이기면 자기
딸을 주겠다고 했던 사울 왕도 생각납니다. 어려운 전쟁에도 이기고, 또 자연스럽게 용맹한 사위
도 얻을 수 있으니, 아버지로서는 그것도 방법이었겠다 싶습니다. 어쨌든 한 청년이 나서서 드빌
을 정복하고 악사와 결혼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훗날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가 되어, 메소포타미
아의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바로 그 옷니엘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 악사가 출가하면서 에피소드 하나가 더해집니다. 아버지와 이별하는 상황에, 악
사는 남편 옷니엘에게, 아버지에게 밭을 요구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조금 기묘하지요. 한참 기업을
분배받는 과정에서, 출가하는 딸이 아버지에게 땅을 요구합니다. 분배의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그런데 악사는 이 일에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절에, “그(남편)에게 청하여 아버
지께 밭을 구하자 하고”에 나오는 이 ‘청하다’라는 동사 ‘쑤트’가, 본래 ‘선동하다’ ‘유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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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기다’, 재촉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남편 옷니엘은 이 일에 별 뜻이 없었습
니다. 자신이 분배받은 땅도 있고, 남자의 자존심도 있지, 딸을 내준 장인에게 굳이 그런 부탁까
지는 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대다수 주석가들은 이것이 결혼 지참금을 요구한 거라고 얘기하
지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무슨 결혼 지참금을 떠나려다 말고 나귀에서 내려 달라고 하겠습니
까? 그런 성격의 요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악사가 계속 남편의 옆구리를 푹푹 찔러댑니다. “빨
리 가, 빨리! 가서 달라고 해!” 강하게 재촉합니다.
그런데 정작 나귀에서 내려 갈렙에게 부탁하는 건 옷니엘이 아니라 악사 본인입니다. 남편이 계
속 머뭇거리니까 본인이 직접 나섰겠지요. (분배에 뜸을 들이는 형제들 대신 앞장선 유다 지파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딸이 가다 말고 나귀에서 다시 내리는 걸 보고 갈렙이 말합니다. “왜 그
러느냐,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딸이 아버지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어 내린 게 아님을 갈렙도
모르지 않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아버지, 내게 복을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십시오.” 이야기합니다. 여기 ‘네겝’(네게브)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사이의 메마르고 건조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기도 하지만, 보통의 ‘마르고 황량한
(남쪽의) 땅’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옷니엘이 분배받은 땅이 바로 그런 곳이었고,
그래서 샘물을 요구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니, 샘물을 주십시오.” 그러니까
악사는, 단순히 또 하나의 땅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갈 네겝 땅에서 꼭 필요한 샘
물을 요청한 것이고, 아버지 갈렙은 그렇게 윗샘과 아랫샘, 두 개의 샘물을 모두 딸에게 내어 주
게 됩니다. 역시 아버지는 딸에게 약하구나, 싶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 종교개혁가 칼뱅은 본문을 주해하면
서, 이런 악사를 탐욕스런 여성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렇게 요구할 만한 명분이나 권리가 없음에
도 불구하고, 여자 특유의 허영심이 지나쳐 분에 넘치는 걸 요구했다는 건데요, 아마도 악사가
남편을 부추길 때 사용된 동사가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됐기 때문인 걸로 보입니
다. 그러면서 칼뱅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악사는 자기 남편을 부당하게 졸라대면서 솔깃한 마음
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야심적이요 탐욕적인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계속 충동질해서 마
침내 그들로 하여금 염치, 온건, 공평을 잊어버리도록 강요한다. … 그처럼 무모한 꼬임수에 넘
어가는 일이 없도록 남편들은 더욱더 세심한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악사를 평했
는데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처음 번역한 주전 4세기의 성경 ‘70인 역’은 여기서 한술 더
뜹니다. 악사가 옷니엘을 부추긴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부추긴 것으로, 원래 내용을 정반
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의 남성과 여성을 임의로 바꿔요. 갓 결혼한 여자가 도저히 이렇게
남편을 선동하여 무리한 걸 요구할 순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자는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 ‘70인 역’과 칼뱅의 동일한 인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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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문의 맥락을 전체적으로 고려한다면 이는 명백한 해석의 오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
경은 악사와 그녀의 요구를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요구를 갈렙이 아무
말 없이 허락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도 샘을 하나만 준 게 아니라 두 개나 줬습니다. 가나
안 땅 정복과 분배의 과정에서 갈렙이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생각하면, 간과할 수 없는 결과입
니다. … 성경이 아무 이유 없이 기록한 얘기가 아닙니다. 단지 이것이 한 가정의 가벼운 에피소
드였다면 절대 여기 기록되지 않았을 겁니다. 성경은 악사의 이 행위를 긍정할 뿐만 아니라 아버
지 갈렙, 그리고 유다 지파의 신앙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악사는 가장 유다 지파다운 여
인입니다. 헤브론을 정복한 갈렙도 대단하고, 드빌을 점령한 옷니엘도 훌륭하지만, 그런 일을 아
예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오직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결정되는 여성의 한계
속에서, 이렇게 힘껏 자신의 기업을 찾고 요구하는 악사를 통해,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지 더욱 또렷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옷니엘과 악사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내 원경왕후가 떠
올랐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원경’ 보셨습니까? 저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굳이
드라마가 아니어도 이방원의 아내 원경이 얼마나 당찬 여인이었는지는 익히 아실 겁니다. 이방원
을 태종으로 만든 게 사실상 아내였다고도 말하지요. 본문을 보면서 저는 옷니엘도 그런 게 아닌
가, 왠지 악사가 옷니엘을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로 만들었을 것 같고, 어쩌면 처음부터 악사가
(‘낮 전등’에 불과하던) 옷니엘을 꼬셔서, 드빌을 네가 정복해라, 그래서 나랑 결혼하자, 그런 스
토리는 아니었을까, 괜한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만,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악사의 역할이 이걸로 끝은 아니었겠다,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내용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위치가 하필 왜 여기인
지, 또 이것이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른 지
파들이 분배 자체에 소극적일 때, 유다는 당연한 듯 분배의 선봉을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배의 과정에서 한 여인이 전면에 나섭니다. 자신의 결혼과 기업,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
는 존재가 등장하더니, 그녀로 인해 이 분배에 어떤 변수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다른 남자들의 모습과 현저히 대비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분배받고
정복하는 일에 끊임없이 머뭇거리는 다른 지파의 수많은 사람과 비교되고, 척박한 땅을 분배받고
도 그냥 아무 대책 없이 가려는 옷니엘과도 구별됩니다. 무엇이 하나님 백성 된 삶인지, 어떤 모
습이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는 믿음인지 분명하게 보여주지요. 메마른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그런 땅을 기업으로 가진 남자에게 상품처럼 결혼을 ‘당했지만’, 그냥 그 현실에 머무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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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내게 복을 주소서!” 그 기업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필요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구하
고 찾고 두드린 것입니다.
악사는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부분과 요구해야 할 부분을 명확히 분별합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남편을 선택하긴 어렵습니다. 내 기업을 내가 정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정한 사람과 결혼해
야 하고, 남편 될 사람의 기업을 나의 기업으로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고 변화를 요구합
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아버지를 믿고 일단 구해보는 것이지요.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하든,
남편이 뜨뜻미지근하든 말든, 그러면 자신이 직접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내게 복을 주소서. 나
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에 힘껏 호소합니다.
유다가 야곱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의
기업, 나의 분깃이지요. 하지만 그 기업을 살아내는 방식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입니다. 장남은커
녕 차남, 삼남도 아닌 사남. 장자의 권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그는 보란 듯 그 넷째
의 삶을 장남처럼 살아냈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는 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지
요. 아버지 야곱과 하나님은 그런 유다를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장자로서 인정했습니다. 그의 허
리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그 계보를 통해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제비 뽑아 결정된 내 기업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필 받은 땅이 네겝이고, 하필 결혼한
남자가 네겝을 기업으로 받았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이 기업, 물러
주세요. 네겝은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다시 뽑게 해 주세요.” 이렇게는 안 되는 일입니다. “(여
호와가)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
윗이 고백하지요(시 16:6). 우리는 내게 주신 기업을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아멘) 기업에 대해 원망하고 바꿔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내게 주신 은총을 먼저 감사로 받
아들이고 귀히 여기면서, 동시에 그 기업을 온전히 살아내는 데 필요한 샘물을 담대히 요청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여러분, 이 말 속에 얼마나 깊
은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까?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의 긍휼을 구할 수 있습니다. ‘복’이라고 해서 그냥 남들 가진 좋은 걸 다
구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내게 샘물도 주소서.” 나의 기업
을 하나님의 나라로 누리고 살아내려 하오니, 필요한 샘물을 허락해 주십시오, 아바 아버지께 구
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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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만약 악사가 갈렙에게 샘물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떠나는 딸과 사위
를 억지로 가로막고, 내가 샘물도 주마, 갈렙이 그러겠습니까? 결코 아니지요. 달라고 했으니까
준 겁니다. 구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주시는 하나님, 그렇지 않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거라고 하십
니다(마 7:7). 설사 주시려는 마음이 있어도, 그래도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세
요(겔 36:37). 딸에게 샘물을 내어 줄 마음이 갈렙에겐 있지요. 달라고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 주
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신앙이고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도 있지요. 그러나 반드시 구해야만 주시는 게 있다
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와 더 깊이 관계를 맺고, 그렇게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다가 열두 지파의 으뜸이 된 것은 그가 분배받은 운명이 으뜸이어서가 아닙
니다. 아버지의 예언 때문도 아니에요. 내게 주신 기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
하되,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의지해서, 지금 내 앞에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힘껏 침노
해 들어갔기에, 진정한 장자의 복을 누리게 된 겁니다.
누구나 그 복을 누릴 수 있지만, 아무나 누리지는 못합니다. 유다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태어
난 장자 르우벤처럼, 차남과 삼남 시므온과 레위처럼, 자신의 욕망이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기업
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야곱의 형, 에서처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얼마
나 귀한 것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내게 주신 분복과 기업을 팥죽 한 그릇보다도 못
하게 여기고, 내가 성도로서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그 놀라운 특권을 아무렇지 않게 내
팽개치는 이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보다 내게 주신 기업을 스스로 구하고 정복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모든 걸 하나
님이 해결해 주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만 있는 경우가 제일 흔한 실수입니다. 구하지 않아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는 줄 착각하는 거예요. ‘때가 되면 알아서 분배해 주시
겠지, 남이 다 분배받고 나면 나한테도 기회가 오겠지.’ 그런 미지근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약속
에 반응하기 때문에, 실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도 기회가 오고,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도 기회
가 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성도가 분배받길 지체하는 일곱 지파처럼 살아가거든요. 괜히 먼저
나섰다가 더 힘든 땅을 기업으로 받을까 두려워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더 먼저 생각하며 늘 소극적인 신앙에 머무르고, …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이 주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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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자체를 불평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기업과 비교하며 원망하는 그런 모습일 때가 많고,
… 그래서 유다처럼, 갈렙처럼, 악사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며, 그 감사의 능력으로 힘껏
구하고 찾고, 무슨 일이든 앞서 행하고 책임지려는 이들에게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돌아가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힘껏 침노하는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내게 주신 기업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동시에 그 기업을 하나님의 나라로 누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대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이
말씀을 잊지 마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세상과 구별될 겁니다. … 적극적으로 분배를 요청
한 두 지파가 결국 남북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고, 더 나아가 오직 유다 지파만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유대인’이라 불리지 않습니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왕이면 먼저 하세요. 남은 것 선택하지 말고, 먼저 선택하세요. 먼저 선
택할 때 생기는 에너지가 있지 않습니까? 고난도 내가 선택하면 자랑이 되고, 견딜 힘이 생기지
만, 남이 준 고난은 견디기가 훨씬 어려운 법입니다.
본문에는 ‘경계’라는 말이 참 많이 등장하는데요, 우리 삶의 많은 경계를 과연 누가 정한 것인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인지, 아니면 스스로 정해놓은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강요한 것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한계와 거기에 순응하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도 성도의 책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금 나를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어떤 수단이나 핑계
가 되면 곤란합니다. 겨울이 끝나야 봄이 오는 게 아니라, 봄이 시작되어야 겨울이 물러갑니다.
‘누가 그 한계를 대신 없애 주겠지. 내 남편이, 나의 하나님이 그걸 해결해 주시겠지.’ 이런 마음
이 아니라, 누구를 선동도 해보고, 하나님께 직접 간구해 보면서, 스스로 나의 기업을 찾고 정복
하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것이 그냥 나의 욕심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실 샘물인지 잘 분별
이 안 되는 경우가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네, 일단 구해보는 겁니다. 나의
인간적인 욕심이면 그때 가서 알게 되겠지요. 안 될 수도 있지만, 요청조차 안 하면, 그게 샘물
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별 기대 없이 ‘혹시나’ 하고 한 번 요청해 봤다가 되는 일이
무척 많지 않습니까? 아버지께 구하는 건데 욕심냈다고 뭐 얼마나 크게 혼나겠습니까? 저를 한
번 따라 해보시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네, 그
믿음, 그 고백으로, 여러분의 삶도, 가정도, 또 우리 교회도, 이 땅에서 메시아의 나라를 충만히
누리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