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2026-08-30 · 설교 원고 · 9쪽 · 약 1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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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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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열네 번째 주일 [요한복음 강해 44]
요한복음 13:1~17 (신약 169쪽)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본문 17절의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
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지난 12장으로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모두 마무리됐습니
다. 그리스도가 들려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나, 주님이 어딘가로 숨으셨
는데요, 13장으로 넘어오니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계속 제자들에게만 집중
하십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인데요, 무리에서 제자들에게로, 또 성전에서 다락방
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이 그렇게 제자들을 위한 순간들로 채워집니다.
이런 내용이 오늘 1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
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
시니라.” 그랬습니다. 여기 1절에는 지금의 예수님에 관한 중요한 동사가 두 개 나옵니다. 하나
는 ‘아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뭔가를 아셨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여러 번 나옵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만, ‘안다’라는 동사 자체가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동사입니다. 본문에만 7번이나 나옵니다. 예수
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도 있고, 또 제자들도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도 그래서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입니다. 한번 따라 해 보실까요?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
리라.’ 네, 우리 다 그 복 있는 사람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아시는 것은 1절과 3절, 그리고 11절에 나옵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제 아버지께
로 돌아가실 때가 됐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나옵니다. 3절에서도 반복되는데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신 것과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
을 아십니다. 11절에서는 누가 예수님을 팔 것인지 아신다고 나옵니다.
반면 제자들의 경우에는 뭔가 아리송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을,
베드로가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주님이 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면서도 12
절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의미를 너희가 아느냐고 제자들에게 다시 물어보십니다. 발을 씻
어 주신 일 속에 담긴 의미 중에서, 제자들이 아직 알 수 없는 내용도 있고, 또 알 수 있고 알아
야 하는 내용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요,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권면하시지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십
니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도 복은 아니고, 또 그 의미를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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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만 행하는 것도 복은 아닙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고 그것을 행할 때,
그게 바로 복이다. 생명이고 행복이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럼 다시 예수님이 아시는 것에 관한 얘기로 돌아와 보면, 예수님은 유월절이 다가오자 이제 세
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된 줄 아십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1절과 3절에서 반복되
는데요, 주님이 아시는 것의 핵심이 바로 ‘때’입니다. 특별히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때’, 세상을
떠날 ‘때’이지요. 그때를 주님이 아시고, 그 ‘때’에 맞는 일을 하십니다.
사람이 ‘때’를 분별하고, 그 ‘때’에 맞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참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범
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솔로몬은 말하지만, 그 ‘때’를 분별하고, 거기에 맞
게 반응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혜와 용기, 모두가 필요하지요. 요즘 주식 시장이 신통
치 않은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팔아야 할 때인지, 아니면 낮은 가격에 더 사야 할 때인지, 판단
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판단이 된다 해도 실제로 그렇게 사고파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요.
떠나갈 때를 아신 오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낙화」라는 시의 유명한 첫 소절이 생각났습니
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랬습니
다. 자신이 가야 할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를 알고 산다면, 아마 그의 뒷모습도 아름다
울 겁니다. “새는 죽으려 할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하다.”라
는 논어의 말도 있습니다. 비록 정확한 때를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살아간다면 그러겠지요. 교만해지거나 악해지기 어려울 겁니다.
끝에 대해 깨어 있으면 과정이 온전해집니다. 사람이 욕심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쏟
는 이유는, 다가올 ‘끝’에 대해 무감각하고, 마치 끝이 오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이렇게 권면하지요. “상갓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라고 했습니
다. 상갓집에 가면 우울하고 불편한데 거길 왜 가라고 그래요? 끝에 대해 생각할 때 삶의 과정이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내 차례구나. 나도 곧 돌아가는구나.’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정
말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구별할 지혜가 생깁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오늘도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 종말을 오늘도 살아가
고 있지요. 제가 다음 주에 또 이렇게 설교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 끝이
바로 내일이 아닐 거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는 분명하지요. 그 ‘때’가 반드시 온
다는 것입니다. 그걸 마음에 담고 살면 지금이 조금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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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의 빚과 유산에 대한 한정승인이 마무리됐다는 법무사의 연락을 받
았습니다. 그런데 그 연락을 받으면서도 실감이 잘 안 납니다. 벌써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머니가 살아계신 거 같고, 전화하면 받으실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 휴대 전화는 저한테 있는데
말이지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계속 아버지 생각이 나고 꿈도 자주 꾸길래, 제가 아버지를 많
이 사랑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머니 돌아가시니까 아버지 생각은 이제 거의 안 납니다.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고, ‘이런 끝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계속 후회되면서, 한
편으로는 나도 그 끝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끝을 지금 여기로 가지고 와서 사는
게 신앙이지요. 그렇게 끝을 가지고 오면,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러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신 주님께서 그다음에 어떻게 하셨다
고, 성경은 말합니까? 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을
아신 주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기신 걸 아시고
는, 그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어요. 참 귀한 말씀이지요? 끝을 ‘아시고’, 사랑을 ‘행하
십니다’. 그리고 그게 ‘복’이라고 몸소 가르쳐 주십니다.
알아야 할 걸 알게 되면, 특별히 끝을 알게 되면 사람은 사랑하게 됩니다. 다른 걸 할 시간이 없
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만 살아도 시간이 부족한 게 인생입니다. 미워하고, 다투고, 자존심 세우
고, 서로 상처 주고 살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끝이 보이면 중요하지 않
은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되지요. 삶의 우선순위가 정리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붙잡게 됩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좀 다르게 표현합니다. 어떻게
얘기하지요? 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그럽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
저는 이 표현이 너무 좋고 또 멋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아닌 ‘자기 사람들’, ‘주님 사람들’입니다. … 세상에 있지만, ‘세상 사람’은 아니래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속해 있어요? 네, 주님께 속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에 그러셨어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셨습니다. 전부 다 사
랑하고 챙기신 게 아닙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으셨으니까요. 자기 사람들을 챙기고 사랑
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게 본래 그런 거지요. 자기 사람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식, 내 동료, 내 직원, 내 학생, 내 성도, 내 교우, … 그렇게 ‘내’ 사람들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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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사랑을 시작합니다. 내 사람도 사랑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사
랑하겠어요. 그건 자칫 사랑이 아니라 자기만족이나 위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사람부터 사
랑하는 거예요.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을수록 더욱 그렇지요. 바로 옆에 있는 내 사람들부터 사
랑하고, 그들과 함께 점점 더 그 사랑의 동심원을 넓혀가는 것이, 오늘 주님이 보여 주시는 온전
한 사랑의 길인 줄 믿습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이라고 부르고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
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
아가길 소망합니다. 포도나무 비유로 유명한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
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택해서, 원문에는 ‘세상 밖으로 골라내서’, 주님께 속한 자가 되
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여러분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자기 사
람이 아닌 걸 알기 때문입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계십니까? 아직
괜찮으세요? 네, 그러면 다행(?)입니다만, 언젠가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는 걸 느끼게 된다면,
그건 여러분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주님 사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
임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결국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거든요. ‘세상에 속한 사람’과 ‘주님께 속한 사람’ 그렇게
두 부류뿐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으니까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주님께
속해서 주님을 시인하고 살면, 세상이 그걸 알아보고 미워할 겁니다. 세상도 자기 사람을 사랑하
거든요.
바울이 그런 말 하지요.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전 4:13) 얼
마나 미움을 받았으면, 세상의 쓰레기처럼, 찌꺼기처럼 됐대요. 반대로 말하면 얼마나 온전히 주
님께 속한 삶이었는지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주님도 말씀하세요.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고 하세요. 주인이 미움받고 오해받았는데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은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 세상에서 미움받아서 바울이 괴롭다는 뜻인가요? 아니지
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충분하다는 고백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거든요(고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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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내가 주님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 주시는 사랑 안
에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지금 누구의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 만약 내가 주님 사람이라는 게 확실하다면, 세상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을 위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위하는 건 주님이세요. … 다시
저를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나는, 세상에 있는, 주님 사람입니다.”(Re) 네, 여러분이 어떻게 생
각하고 살든,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속하지도 않은 엉뚱한 곳에 가서 사람
의 영광을 구하며 살지 마시고,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영광을 누
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나감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는데요, 여러분 어떻게 사랑하는 게 ‘끝까지’ 사랑하는 걸까요? … 네, ‘끝’이라
는 걸 시간적 의미로 이해해서, ‘마지막까지’, 이 땅에서 주님이 머물러 계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은 이걸 조금 다르게 번역합니다. 영어 성경 NIV에 보면, “주님의 사랑을 ‘최고
조로’(the full extent of his love) 보여 주셨다.” 표현하고, 공동 번역에서도, “자기 사람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라고 해서, ‘끝까지’의 ‘끝’을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
로 해석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 아마 둘 다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사랑할 수 있는 최고치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
셨습니다. 그런 ‘끝까지’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일 텐데요, 주님이 어디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과 저녁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말없이 일어나십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가져오십니다. 영락없는 종의 모습이지요. 당시 노예들
은 겉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해칠 수 있는 흉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걸 내보여야 해서,
노예들은 늘 속옷만 입었습니다. 언제든 주인을 섬길 수 있도록, 허리에는 수건이나 천을 동여매
고 있었지요. 지금 주님이 딱 그런 모습이고,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다 비스듬히 누워 식사 중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거부하지 않는 한, 특
별히 제자들의 도움이나 허락이 필요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당시로선 극히 천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다
큰 자녀의 발을 부모가 씻어 주는 것도 부적절하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워낙 발이 쉽게, 심하
게 더러워질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그 종이 유대인일 경우에는, 발을 씻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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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주인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발 씻을 물을 가져다주는 것까지가 종의 의무입니
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에게,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
도 주지 않았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발은 다 자기가 씻는 것이고, 종의 의무로든, 주
인의 환대이든, 발 씻을 물을 준비해 주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금 종보다도 더 비천한 자리로 내려가신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지요. 감동이기 이전에, 너무나 부적절하고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극도로 불편한 일이에요. 제자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아마 지금 우리는 충분히 공감하
기 어려울 겁니다. 이와 비슷한 오늘날의 예시를 찾아보려고 해도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지요. 어째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 전에 발을 씻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럴 수 없는 어떤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끼리 논쟁이 있었다고 나오는 것이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더 크냐, 서로 말다툼이 벌어졌어요. 그러니 발 씻을 물을 가지고 오는 것조차도 서로 미룬 채,
어색하게 식사가 시작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주님의 행동은 제자들에게 더욱 민망하고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식사하
시다 말고, 주님이 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고 하시니까요. 결국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을 만류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반문합니다. ‘주’라는 말과
‘발을 씻으신다’라는 말이 한 문장에 있는 모순이지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나중
에는 알게 될 거라고 하세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에는, 베드로가 쉽게 알
수 없는 어떤 어려운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건데요, 사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런 상
황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면, 그 의미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
가 더 크냐고 다투지 말고, 겸손하게 서로 섬기라는 뜻인 것을 베드로라고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
다. 실제로 나중에 발을 다 씻어 주신 다음에, 주님이 다시 옷을 입으시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시
지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절) 말씀하세요. 지금은 모를 거라고 하셨는
데, 곧바로 알겠냐고 물어보세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의 이 모습에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지금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하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으
로선 알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알 수 있는 의미는, 말씀드린 것처럼 겸손과 섬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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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선생이고 주님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으니,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어 주며, 사
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엔 제자들이 알기 어려운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게 뭔지 여러분은 아시지요? …
예수님이 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셔야 하느냐? 그렇게 씻어 주지 않으시면 주님과 상관이 없
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 발을 주님이 절대로(원문에는 ‘영원히’) 씻지 못하십니다, 베드로
가 항변하자 하신 말씀이에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여기
‘상관이 없다’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하면, “네가 나와 함께할 분깃, 기업이 없다.”입니다. 성경
에서 ‘기업’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이자 하나님 나라, 또 종말의 천국을 의미
하지요(계 22:19). 그러니까 예수님과 상관이 없어진다는 건, 쉽게 말해서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제자들이 지금은 알 수 없다고
하셨는지, 좀 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의 씻음을 가리키는
거지요. 단순히 겸손과 섬김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이고, 예수님이 반드시 그 피로 우리를
씻어 주셔야 함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를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건 제자들이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입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
이 없다고 했더니,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어 달라고 할 정도의 영적 상황이라면, 도
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요. 주님이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야 비로소 깨닫
게 될 일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 의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상관하기 위하여, 친히 종이 되어 섬겨 주셨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끝까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씻어 주심은, 위에서 아래로 물을 부어서, 샤워기 틀어서 하는 씻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친히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직접 대야에 물을 떠서, 비스듬히 누
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을 씻겨,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신 씻음입니다. 우리를 구원
하기 위해 편안하고 고상하게 죽으신 게 아니지요. 모든 수치와 조롱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십자
가 죽음입니다. 종보다 더 낮은 자리, 죄인의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를 씻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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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왜 주님은 그렇게까지 하셔야 할까요? 어째서 종보다 더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를 섬겨 주
실까요? … 네, 죄로 인해 우리가 그만큼 망가졌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존재가 연약할수록, 무능할수록, 그를 사랑하는 존재는 더욱 낮
아져야 하고, 더 크게 섬겨야 하거든요. 갓 태어난 아기와 부모를 생각하면 됩니다. 아기는 너무
나 무능하고 무지하지요. 스스로 먹을 수도 없고, 씻을 수도 없고,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눌 수도
없습니다. 절대적 무능의 상태에요. 그러니 부모는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섬겨야 하지요. 자식이 상전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자식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자식이 스스로 생명을 누릴 수 없으니, 부모는 기꺼이 가장 비천한 종의 자리를 자처하는 것입니
다.
꼭 부모의 사랑이 아니어도, 온전한 사랑은 언제나 종의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호르몬이 분출해
서 생기는 에로스의 사랑만으로도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의 종이 됩니다. 내가 종이어도 기쁘고,
내가 종이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한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지금 어떤
사랑이 필요한 상태인지,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주님이 종보다
더 비천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태이고,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 섬김받아야 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주님은 기꺼이 거기까지 내려가서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런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
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베드로가 거부했던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비천한 섬김이 아니었습니
다. 그건 자신이 그런 섬김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잘 몰
랐던 거지요.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예요. 왜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낮아지셔야 했고, 왜 십자가까
지 지셔야 했는지, 자신의 무능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때가 곧 오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그런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과 상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게 되지요. 그저 자기만족과 자기 의를 위해 뭔가를
베푸는 사랑에 머무르게 되고, 그것은 결국 내 자랑과 교만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나는 이만큼
너를 사랑했는데 왜 너는 여전히 그거밖에 안 되느냐는 식의, 실망과 원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받은 만큼, 받은 대로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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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어디까지 어떻게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알고 사랑하면, 그게 복이라고 하세요. …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주님
의 섬김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종이 되어 여러분의 발
을 씻어 주시는 그것 외에는 답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여러분 받아들여지시는지요? … 네,
그게 은혜이지요. 그것이 인정되고 깨달아지는 게 은혜이고, 그 은혜를 알고 나면, 우리는 비로
소 내 힘으로 사랑하려는 걸 멈추고, 사랑하기 위해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 모습 안에 담긴 의미를 ‘알고’, ‘행하여’, 복이 되시길 바
랍니다. …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하셨으니, 살다가 더러워지고 상처 입은 발을 서로 씻
어 주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본을 따라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한데요, 세족,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족’만 강조하면 다시 ‘형식적’이 됩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오늘날 어떤 섬김일지 우리가 고민하고 찾아야 합니다. 힘들고 더러워서 남들은
안 하려고 하는 일, 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겠지요. 누군가의 연약함을 견디며 그와 계속 한 식
탁에 앉는 그런 일,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는 그런 일들도, 오늘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일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님은 당신의 끝을 아시고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이 정말로 알아야 할 걸 알게 되면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 주셨어요. 그리
고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을 우리도 알고 행하면, 그것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진리
를 알고 사랑하게 되기를, 주님 주신 사랑을 힘입어 나에게 속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함으로 복
이 되고, 또 우리가 주님께 속한 사람임을 세상에 증언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