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기생의 노래" 2014년 12월 22일 새벽 설교

2014-12-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1222 월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23장 15~18절,  이사야 강해188  기생의 노래 *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41222.mp3       이사야서 백여든여덟 번째 말씀으로, ‘기생의 노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새벽에 같은 본문으로 나눴던 말씀 속에 여러분이 꼭 기억하셨으면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돌보심, 권고하심을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여러분 기억나시는지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파카드’였습니다. 이 땅의 연약한 자, 아프고 무너진 자들을 기억하시고 친히 돌보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바로 ‘파카드’입니다. 그럼 여러분, 그 주님의 파카드가 누구를 향해, 어떤 마음을 향해 임하게 된다고 말씀했습니까? 이사야 마지막 장인 66장에 기록된 말씀이었는데요,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며 통회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리는 자, 그에게 하나님의 파카드가 부어진다 하셨습니다. 부디 주님의 그 위로와 은총의 파카드가 남은 2014년 여러분의 삶의 자리와 또 다가오는 2015년에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바로 그 파카드의 은혜를 입어, 70년간 잊혀진 바 되었던 두로가 다시 세상의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 17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모를 불편함과 어색함이 느껴짐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17절을 다시 보시지요.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로를 돌보신 후, 두로가 다시 자신들이 자랑하는 해상무역에 뛰어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데요, 거기 포함된 ‘음란’이라는 말이나, ‘다시 값을 받고’라는 등의 표현들이 왠지 모를 부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음란, 음녀, 이런 표현은 단지 육체적인 타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은 물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권세와 힘을 상징하는 것이 음녀라는 것은, 일찍이 Talk Bible 시간에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바벨론을 일컫는 성경의 표현들을 통해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두로를 향해서도 비슷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벨론은 군사적, 정치적 힘과 영광을 상징한다면, 물론 그보다는 덜한 강도와 강조점이 있기는 하지만, 두로는 경제적인 힘과 권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해 다시 세상의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의 무역 활동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풍요를 누리게 되겠지만, 두로는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그 물질을 섬기는 불신앙의 모습을 이어갈 것임을 지금 이 말씀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15절과 16절에서 두로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기생’이나 ‘음녀’와 같은 표현들을 고려해 본다면, 지금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상업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실제적인 타락, 곧 음란과 탐욕의 모습 역시도 같은 관점에서 책망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세계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 부분, 그러니까 대규모의 무역이나 상업 활동과 혼탁한 성 문화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금방 알게 됩니다. 신약성경에도 그런 도시의 이름이 중요하게 다뤄지지요. 바로 고린도교회가 있던 고린도, 코린트, 혹은 코린토스라는 지역이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 남부에 위치한 이 고린도는,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이자, 가장 타락한 도시였던 이 고린도를 향해,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스트라보라는, “이 도시가 사람으로 붐비고 부유해진 것은 그 여인들 덕분이었다.”고 꼬집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문란한 성 문화가 그 도시의 대명사였습니다. 이 고린도를 사도 바울이 자신의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방문하여 사역하게 되지요. 주후 50~51년 경 처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우리가 읽고 있는 고린도전후서를 써서 신앙적 권면을 했는데요,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교회가 겪고 있던 음란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물질을 쫓아 사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는 가장 심각한 영적 음란임과 동시에, 그러한 삶이 다다르게 되는 곳에도 역시 몸과 삶의 타락이 있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돈을 쫓아 사는 삶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합니다. 물질의 염려, 생활의 염려에서 자유해지는 것과 동시에,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 그것은 성경의 일관된 명령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로 영적 타락이요, 음란이며, 하나님을 향한 가장 큰 불신입니다. 물론 돈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지요. 문제는 사탄이 그 돈을, 우리의 거룩한 양심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극히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여러분 제 말을 따라해 보시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아멘. 부디 이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 앞에 늘 조심하는, 경건한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성도는 돈을 버는 방식에 대해서도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물질에 대하여, 또 그 물질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신명기 23장에 보면 음란을 경고하시는 말씀 뒤에 이런 경고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18절과 19절인데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육체의 음란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진노하시는 지와 잘못된 수단으로 인해 얻은 물질을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받으시지도 않는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강조합니다.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그저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 폼 나게 쓰고 살라는 건 아닐 겁니다. 벌 때에는 남들 앞에 굽신거려야 할 때도 있고, 정말 낮은 모습으로 애를 써야 하지만, 쓸 때에는 이치에 맞게 바르고 멋있게 쓰라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이 말이 와전 되어서 어떤 방법이든 그저 돈을 벌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돈이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의 또 하나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개처럼 번 돈을 결코 인정하거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개처럼 벌었다면 개에게나 합당한 재물일 뿐,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도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그런 유혹을 받았거나 아니면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면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로를 향해 성경은 기생의 노래라 칭합니다. 그가 누린 부요와 풍족함이 어떠했는지는 모르나, 참으로 비루하고 추악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돈만 바라보고, 돈만 쫓아 사는 삶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이보다 더 분명한 교훈이 또 없습니다. 어찌 성도가 기생의 노래처럼 살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아름답고 존귀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인생,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부디 다시 시작되는 오늘 하루, 그리고 이 한 주도, 그 소망으로 살아내길 원합니다. 비록 개처럼 벌어야 하는 우리네 삶이지만, 결코 개가 되지는 말기로 결단하는, 오직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