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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의 장막" 2014년 11월 23일 주일 설교

2014-11-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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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23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 사도행전 7장 44~50절, 증거의 장막 * 설교 음성파일 : http://gobackch.iblug.com/index.jsp?cn=FP1335443N0144057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41123acts42.mp3   “증거의 장막”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저도 다른 누군가의 부탁이나 이야기를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살다 보면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 참 스스로 불편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단 하겠다고, 좋다고 말은 했지만, 나중에 돌이켜서 생각을 해 보면, “아, 괜히 그랬다. 그냥 못하겠다고, 안 한다고 할 걸.” 후회하는 경우가 많지요. 거기에 관계가 개입되고 그러면 거절은 더 어려워집니다. 내가 좋아하고 아주 친한 사이의 경우에는, 거절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때도 생기게 됩니다. 일보다도 관계 자체가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그리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깊이 사귀면 사귈수록, 하나님도 참 거절에 약하시다,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저 자신의 기도에도 그렇고 또 목사로서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를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아주 가끔이지만, “아, 저 기도는 안 들어주실 수도 있겠다. (목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저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시면 오히려 저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은 많은 경우,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실 때가 참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 결과 역시, 제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응답이 오히려 그를 더 잘못된 신앙으로 인도해 가는 것도 보는 것이지요.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도 여전해지고, 늘 생활의 염려에만 갇혀 있는 신앙도 변화가 없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의문을 가지지요. “하나님은 왜 그렇게 기도에 후하실까, 왜 거절하지 못하시는 걸까.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왜 그렇게 약할까.” 오래 전 제가 어린 시절에, 어버이날이 되고 그러면 선물을 준비하는데 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사실 어버이날 선물이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부모님께 양말 한 켤레라도 사 드리려면 용돈이라도 좀 모아놓고 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오락실 가야하고, 불량식품 사먹어야 하고, 친구랑 놀기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버이날은 자꾸 다가와도 선물 살 돈도 하나도 없는 겁니다. 주변 친구들이나 동생은 모아 놓은 용돈으로 부모님 선물 산다고 할 때, 이제 다급해집니다. 결국 어버이날이 거의 다 되어갈 때,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지요. “엄마, 용돈 좀 주세요. 급하게 쓸 일이 있는데, 꼭 좀 주세요. 다음 번 용돈 그냥 가불이라도 해주세요.” 엄마는 그 내막을 다 아시지요. ‘그래, 니가 지금 어버이날 선물 사려고 그러는구나.’ 그럼 엄마가 어떻게 하시나요? “야, 이놈아, 그건 니가 평소에 아끼고 모아 놓은 걸로 해야지, 그렇게 하면 되냐? 됐다, 그냥 받은 걸로 치자.” 뭐 이렇게 하시나요? 아니지요. 그냥 모른 척 하고 주시지요. 자녀가 그렇게라도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겨서 그 용돈을 기꺼이 내주십니다. 물론 어버이날, 카네이션과 편지, 그리고 선물을 너무나 기뻐하며 받으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나게 자랑을 하고 다니시는 것은 언제나 이어지는 같은 결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러실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라는 단서를 달고 열심히 무언가를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속을 뻔히 다 아시지요. “그래, 니가 평소에는 기도 한 번 제대로 안 하다가, 급하니까 나를 찾는구나. 그리고 그게 날 위하는 거라고 말은 하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도 내가 안다. 하지만 준석아, 그래도 나는 너의 그 마음이 너무 좋다. 나를 생각하고, 나의 영광을 네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게 나의 가장 큰 기쁨이요, 영광이 된다.” 주님은 그렇게 여겨주시고, 우리의 그 뻔한 기도에도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오늘 스데반이 공회에서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인,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도 실은 그런 인간의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이 만난 결과였습니다. 본문 46절을 잠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 곧 성전을 준비하게 된 것이 ‘누구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늘 스데반은 그것이 야곱의 집을 위하여, 곧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된 것이었다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여기 47절의 ‘그를 위하여’의 ‘그’가 누구입니까? ‘야곱의 집’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을 준비하고 지을 때, 우리를 위하여 지어야지,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오늘은 일단 그 성전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사실 성전을 짓는 데 있어서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이 바로 오늘 44절에 나오는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은 이동식 성전, 곧 텐트였지요. 물론 44절 뒷부분의 내용처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서 하나님께 그 모든 치수와 재료, 그리고 설계도를 다 받아서, 그대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텐트 이름이 왜 증거의 장막입니까? 그렇습니다. 모세가 처음에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진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 십계명 판을 바로 증거판이라고 부릅니다(출애굽기 31: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그런데 이 증거판을 그냥 보관하는 게 아니라, 궤로 만들어서 그 안에 보관을 했지요. 하나님의 율법의 증거판이 담겨진 그 궤를 바로 증거궤 혹은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증거판이 곧 율법의 판이니까, 다른 말로는 법궤라고도 하지요. 이어서 하나님은 그 법궤가 어디에 보관되어야 할지도 지정해 주셨습니다. 이게 말씀드린 텐트, 장막입니다. 잠깐 출애굽기 40장으로 가 보십시다. 1절부터 9절인데요, 함께 읽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3.또 증거궤를 들여놓고 또 휘장으로 그 궤를 가리고 4.또 상을 들여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잔대를 들여놓아 불을 켜고 5.또 금 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휘장을 달고 6.또 번제단을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놓고 7.또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놓고 그 속에 물을 담고 8.또 뜰 주위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달고 9.또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아멘. 그 뒤에도 여러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는데요, 16절을 보실까요? 합독하십니다.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아멘. 자, 저를 보시지요. 증거판이 들어간 궤, 곧 법궤를 이제 장막에 보관합니다. 그래서 이 장막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막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또 거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서, 거룩한 장막이 되어, 그 이름을 성막이라고도 부르게 됩니다. 또 거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니, ‘회막’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핵심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동행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여호수아도 당연히 이 증거의 장막을 가나안 땅에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이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승리 뒤에는 언제나 이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그 언약궤를 멘 레위인들의 발이 요단강에 들어갈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나타나지요. 그 이후 긴 시간, 증거의 장막은 그렇게 원형 그대로 가나안 땅에 있었는데요, 처음엔 길갈에, 세겜에, 벧엘에, 실로에 보관됩니다. 그러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기게 되는데, 그 궤를 보관하던 성읍에는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되면서, 7개월 만에 이스라엘에 반환됩니다. 반환되어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20년이나 안치되었다가 다윗의 때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는데요, 그러나 옮겨오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그것이 지체되고, 다시 3개월 간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무르게 되고, 이후 예루살렘으로 모셔져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게 됩니다. 이동식 장막에서 이제 고정된 건물이 되었고 거기 언약궤가 놓이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솔로몬이 지은 첫 성전은 아시는 것처럼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할 때 함께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70년이 지나 다시 고국으로 귀환하게 된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성전 재건 사업은, 어려움 가운데 결국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대제사장과 총독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완성이 됩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학자들이 그 안에는 법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립니다. 바벨론에 의해 무너질 때, 함께 파괴되었던 것이지요. 대신 돌 하나만 거기 놓여져서 언약궤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탈무드에도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사실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쨌든 그렇게 힘겹게 재건한 성전은 이후 계속해서 보수되고 정비되어 본래의 모습을 갖춰갔습니다. 그러다 로마가 패권을 차지하게 되자, 결국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황폐화되고 약탈되지요. 그걸 바로 헤롯 대왕이 새롭게 화려한 성전으로 다시 짓게 됩니다. 본래 유대인이 아니었던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 건축을 시작했는데요, 그게 얼마나 화려했던지, 주전 20년 경 시작된 일이 도무지 완성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지어지고 있었던 건데요, 거기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그랬지요.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그런데 사실 이 성전은 이후에도 30년 이상 더 완공이 늦어졌습니다. 주후 64년까지도 완성이 다 안됐다고 하는데요, 결국 그로부터 몇 년 뒤, 주후 70년, 아시는 대로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야 맙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를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기 중요한 메시지 몇 가지를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최초 다윗에 의해 성전이 계획될 때, 다윗이 품었던 마음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이 성막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다윗이 아름다운 성전을 하나님께 지어서 거기 언약궤를 모셔야 하겠다고 생각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 같습니까? 10년? 50년? 100년? 아닙니다. 자그마치 500년의 세월이 이미 흘렀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은 광야에서 사용하던 그 장막을 그냥 그대로 가나안 땅에 방치하고 또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다 블레셋에게 뺏기고 난리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사실 다윗이 짓고자 한 것은 새로운 법궤가 아니라, 새로운 장막입니다. 맞지요? 말씀드린 대로 사실 이 성막의 목적은 광야에서의 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시기 위해 법궤를 보관할 이동식 장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에 정착을 했고, 성막은 사실 그 유효기간이 끝난 겁니다. 그럼 뭔가 다음 조치가 필요한 것이었죠.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과거 그대로 방치해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이었겠습니까? 자신들을 이끌고 가던 성막이 이제 그 기능을 상실한 채, 가나안에 있으니, 그 성막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신앙적 의미와 가지도 자연스럽게 퇴색하게 된 것입니다. 현실과 신앙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다윗과 솔로몬의 고민이 거기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법궤가 있는 이 장막이 더 이상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하니 새로운 장막이 필요하다고 느낀 겁니다. 물론 거기에는 감성적인 신앙의 동기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불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삼하7:1~3) 나는 이렇게 좋은 곳에 지내는데 하나님의 궤, 말씀은 여전히 휘장, 천으로 만든 텐트 속에 있으니, 이건 아니다, 성전을 지어야겠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시지요. 물론 모든 상황과 조건, 그리고 부요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는다고 하지만, 그게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게 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1)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2)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3)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4)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5)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8~16) 참 어마어마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치를 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너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신 약속에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한 영적인 메시지까지 내포되어 있습니다. 좋은 성전 짓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게 아닙니다. 실제로 다윗은 성전을 짓지도 않습니다. 그냥 마음만 먹었을 뿐입니다. “아, 나만 이렇게 편하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천 안에 계신데, 나는 이런 좋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사는구나.” 그 마음을 품은 것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억한 것 때문에, 다윗은 영원한 왕위를 약속받았습니다. 그것 말고도 정말 많은 복을 받았지요. 아무리 솔로몬이 잘못을 해도 하나님이 사울처럼 왕에서 내쫓지는 않으신 이유, 다른 게 아니라, 아버지 다윗 덕분입니다. 여러분, 속이 훤히 보이는 효도라도 효도는 해야 하고, 속이 훤히 보이는 하나님 앞의 헌신이라도 하면 그에게 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시고 그를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편해지고 평안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내 이웃을 기억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신앙인 겁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건 어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헤아리며,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라도 하려는 그 마음의 중심인 겁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새번역)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고민, 염원이 있습니까? 그냥 하나님 덕에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바빠 죽겠는데, 뭐 그냥 이렇게 살면 되지. 성전? 뭐 건물의 성전이 이제 의미가 없다는 데 뭐 고민할 것 있겠어?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안에 부디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소망, 소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울러 그 일은 변화된 시대 속에서 어떻게 과거의 전통과 신앙을 새롭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그 고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이 어떻게 장막의 의미를 살리고, 어떻게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갈 것인가, 고민했기에, 성전이 지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들 솔로몬도 그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장면으로 잠깐 가보시겠습니다. 열왕기상 8장입니다. 15절, “왕이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 27절부터 읽습니다. “27.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28.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이어지는 내용도 계속 이와 같은 의미들의 반복입니다. 이곳을 향하여 백성들이 손을 들고 기도하면 모두 응답해주시기를 원하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56절부터 61절입니다. “56.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57.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시오며 버리지 마시옵고 58.우리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그의 모든 길로 행하게 하시오며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 59.여호와 앞에서 내가 간구한 이 말씀이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시옵고 또 주의 종의 일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필요한 대로 돌아보사 60.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61.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이후 63~64절, 어마어마한 양의 제사)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이 성전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겠다는 것, 그리고 여기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것을 오늘의 시대 안에서 어떻게 새롭게 구현하고 만들어갈 것이냐를 고민한 결과가 바로 이 성전이었고, 그렇게 본질을 새롭게 하는 노력 안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써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수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것들을 읽으며, 그 안에 기록된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항상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새롭게 적용하고 만들어갈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신앙적 책무입니다. 그 고민이 우리를 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닿게 하고, 우리를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고백교회가 그런 사명을 감당했으면 합니다. 변해가는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교회와 성도, 그리고 목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본질을 잃지 않되, 새로운 현실 속에서 더 그 본질이 빛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물리적인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저와 여러분의 몸과 삶, 그리고 연합의 성전이지요.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역설적으로 주후 70년 로마에 의한 성전의 완전한 파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즉 70년 이 파괴가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교회를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했고,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님을 인식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소들은 이제 유대교의 제사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선언하는 증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의 구약적 제사가 필요 없어졌다, 그 증거가 바로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이며, 그걸 주님이 예언하셨고, 결국 당신의 몸이 성전임을 말씀하신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전과 제사는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우리들 각자의 몸과 삶,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우리의 연합이 이제 새로운 성전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제 증거의 장막, 성막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지성소, 그게 어디입니까? 바로 여러분의 몸과 삶이지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여러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일상과 삶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이 바로 증거의 장막임을 믿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정말 이 사실을 더 확신하고 실제 여러분의 삶에서 느끼고 살아내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냥 내 삶이 성전이야, 내가 증거의 장막이야, 이렇게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힘든 삶, 일상, 구차한 하루하루가 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 자신과 가정, 그리고 직장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합니다. “아, 이건 돈 버는 곳이야. 아 이건 너무 구질구질한 우리 가정이야.” 이런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거기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 해 보십시오. 내가 증거의 장막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목사이지만, 저희 교회가 아직 정해진 공간이 없다 보니, 주로 있는 장소가 집이라는 공간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침에 아내를 출근시키고, 보통 근처 역까지 자동차로 배웅을 하고, 다시 집으로 출근을 하는 셈입니다. 집으로 출근한다, 그게 뭐냐 싶으시겠지만, 저는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집에 다시 돌아갑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앞에서는 저 혼자 괜히 큰 회사 빌딩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치 출근하는 회사원처럼, 과거 교회로 출근할 때, 그 교회의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서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갈 때에도, 비밀번호를 누르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이제 이곳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야 하는 내 일터이며, 내가 가정을 위해 일하는, 나의 일터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퇴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집은 좀 특이해서 아내가 퇴근을 할 때 반드시 제가 마중을 나가게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거의 100% 아내와 제가 함께 퇴근을 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게 아내를 마중 나가는 바로 그 순간, 저는 “이제 나는 퇴근하는 거다. 오늘 하루의 일상을 모두 마무리하고 이제 나도 집으로 가자.” 이렇게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마중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서, 저는 다시 생각합니다. “이제 아내와 함께 퇴근한다. 그리고 이제 집에 도착하여 들어온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이지만, 그건 결코 같은 의미, 같은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택배 같은 게 온다거나 할 때 조금 이상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집에 들어가 집에서 생활하면 완전히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비록 공간은 내게 익숙한 집이지만, 결코 마음대로, 마음 편하게 생활하는 공간으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오전 시간과 오후 세 시까지는 거기가 완전히 교회입니다. 가장 거룩한,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터가 됩니다. 가사를 주로 하는 3시 이후의 시간 역시 또 다른 나의 거룩한 일로 여기고 모든 일에 임하게 됩니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그 시간들 속에서 저는 또 다른 차원의 거룩함을 만납니다. 솔직히 저는 과거에 사역만 할 때보다, 제가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훨씬 더 건강해지고 활기차게 되었습니다. 몸으로 하는 노동이 사람의 정신을 얼마나 맑게 만드는 지, 특별히 가사를 감당하면서, 가정에 대한 더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온전히 느끼고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 물리적인 공간이란, 또 거기서 하는 구체적인 일의 종류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일이든, 어느 곳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느낄 수 있는 거룩한 성전임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의식으로 그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전이 되기도 하고, 오직 인간만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 하나님나라이며, 천국이며, 그리고 성전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몸과 삶이 성전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정말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대부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여러분의 가정, 회사가 과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장소가 되느냐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여 함께 하시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그 공간에 있느냐, 거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그 공간에 있다면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고자 애쓰며, 사람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나를 통해, 나의 정직하고 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어떻게든 따르고 순종하기 위해 참고 인내하며, 그렇게 내가 말씀 안에 거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회사를 가든, 집이나 도서관에 있든, 어느 장소에 머물든, 그곳에서의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이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공간에 들어오는 그 마음보다 결코 가볍거나 흐트러지거나 해이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 그것이 방심이고, 마음을 붙잡는 것이 조심인데요, 부디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도 여러분의 거룩한 성전 됨에 대하여 방심하지 않는, 내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그 임재 앞에 있음을 잊지 않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게 바로 다름 아닌, 우리가 영성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이며,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소원이 품고 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신앙과 전통을 오늘에 다시 새롭게 구현하고 더 본질에 가깝게 바꿔가는 지혜와 능력이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과 일상이 하나님나라, 천국으로 빚어지는 귀한 은혜, 탁월한 영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복된 삶으로, 교회로 빚어지는 우리 모두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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