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 2014년 10월 5일 주일 설교
2014-10-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1005 성령강림 제18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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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1~8절,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
* 설교 음성파일 : https://www.4shared.com/mp3/Sin4SDepce/20141005__35_____.html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Abraham H. Maslow는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가 욕구라고 규정하고, 인간의 욕구를 다섯 가지의 계층으로 구별합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단계로서 몸이 원하는 것들, 먹고 입는 것, 성적인 욕구 등을 가리킵니다. 2단계 욕구는 안전욕구(safety needs)단계인데요, 자기를 외부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물리적인 안전과 질서, 그리고 경제적인 안정 등이 다 여기 포함됩니다. 3단계 욕구는 사회적 욕구(social needs)의 단계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지라, 여러 집단에 소속되고 싶고 거기서 관계적인 만족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4단계의 욕구는 존경욕구(esteem needs)로서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지위나 명예 등을 향한 욕구입니다. 마지막 5단계 욕구는 이른바 자아실현욕구(self-actualization needs)로서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최대한 이루어내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Maslow는 이러한 욕구들을 피라미드와 같이 아래에서 위로 배열함으로써, 이것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욕구라기보다는, 순서적으로 우선순위가 있어서, 가장 낮은 단계의 욕구에서 높은 욕구 단계로 순차적으로 욕구들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위(下位)단계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어야 비로소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고 했는데요, 당장 내일 먹을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공동체에 속해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고, 또 그들로부터 인정받고자하는 욕구는 생기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아울러 이미 충족된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 부여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미 충분히 배가 부른 상태에서는 음식물로부터 어떤 행동의 동기도 발생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욕구들은 어떤가요? 어느 단계에서 여러분의 행동에 대한 동기가 발생하고 있습니까? 가장 원초적인, 생리적 욕구인가요? 지난 화요일, 가슴이 철렁하는 뉴스를 접했는데요, 전남 신안의 홍도 여객선 바캉스호가 좌초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근처 민간 어선들이 급히 구조에 투입되어서 30분 만에 100명이 넘는 승객이 전원 구조가 되었는데요, 자라보고 놀란 가슴을 정말 솥뚜껑에 다시 한 번 쓸어내렸던 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요즘 두 번째 욕구인 안전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삶을 보면, 이러한 5가지 욕구들 중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 삶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주 잠깐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보여 줄 땅을 향해 나아간 그 사건은 그가 이미 누리고 있던 모든 욕구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넉넉한 음식과 풍요로운 삶을 포기해야 했고, 이제 자신을 지켜 줄, 도시의 안전한 제도와 치안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욕구라 할 수 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마저 떠나야 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욕구들이 모두 흐트러진 상황에서 누군가로부터의 존경이나 자아의 실현 같은 더 높은 차원의 욕구들은 아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욕구의 체계가 붕괴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토대마저도 흔들리게 되는 상황은, 이제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어디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결국 '나그네‘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지게 됨으로써 모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나그네라는 이 정체성이야말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이라는 목적지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그는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가나안사람으로 거기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 훗날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는 했지만,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주인이 된 건 아니었습니다. 고작 자기 집안의 무덤인 막벨라 굴을 하나 얻고 죽었을 따름입니다. 그 대목의 창세기 말씀을 한 번 직접 보십시다. 창세기 23장 1~4절입니다. “1.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멘.
아브라함이 그 땅 주인 히타이트 족속에게 자신을 뭐라고 소개합니까?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a stranger and a sojourner.”입니다. 일평생 나그네요 떠돌이요, 이방인이었던 그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1,000km를 걸어 하란으로, 다시 하란에서 그만큼을 더 걸어 세겜 땅으로, 그러나 다시 이집트로, 그리고 네게브로, 다시 가나안으로, 그렇게 객으로 살아 온 세월이 그의 175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땅을 차지하고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았을까요?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이 노년이 되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했던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이 이집트에 살아있음을 알고 한걸음에 이집트로 찾아갔을 때, 이집트의 파라오가 야곱에게 묻지요. 네 나이가 얼마냐? (아마도 너무나 얼굴이 늙어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때 야곱이 파라오에게 대답합니다. 창세기 47장입니다. 7절부터 10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아멘.
9절에 보니, 나이를 묻는 바로에게 야곱이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 역시 스스로를 나그네라 부르며 그 나그네 세월도 험악한 시간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도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요, 그 가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뭐, 야곱의 조상과 야곱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야곱의 후손도 실상 같은 나그네 삶이었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을 때에야 이집트에서 나름 좋은 시절을 보냈지만, 요셉이 죽고 정권이 바뀌자 야곱의 후손들, 즉 이스라엘은 완전히 미운오리새끼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의 후손은 모세가 그들을 이끌어 나올 때까지 자그마치 사백 년간, 이집트에서 나그네의 고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모세를 비롯한 그때 출애굽한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객으로 죽음을 맞이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당장 이렇게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얻었지 않았는가, 이제는 나그네가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구약성경은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레위기 25장 23절로 가봅니다. 함께 읽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새번역은 이를 조금 더 쉽게,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라고 옮기고, 공동번역은 좀 더 신랄하게, “땅은 아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라고 옮깁니다. 그들에게 땅을 주신다는 의미가 그 땅을 소유하고 그 땅에 매여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39편으로 가봅니다. 시편 39편 12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여기에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땅의 왕으로서 그 땅의 주권을 모두 가지고 있던 다윗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그네’로서의 삶에 대해 정확한 신앙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진정 이스라엘이 살아내야 할 삶은 그 땅의 주인이나 땅에 매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이었음을 다윗은 온전히 깨달았고 또 살아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여러분의 입술로 고백해 보시지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 어떻습니까? 조금 와 닿습니까? 탁월한 성공회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어스(Stanley Hauerwas)가 쓴 책 중에,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 있습니다. 이 책의 영어 원제가 더 놀랍고 재밌는데요, ‘Resident Aliens’입니다. 직역하면 ‘외국인 거주자’ 이런 뜻이겠지요. 사실 이 표현은 미국 이민법에 따른 표현으로, ‘미국 내 체류하는 외국인’을 뜻합니다. 미국 시민권은 없는, 그저 그곳에 목적을 가지고 체류만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시지요? 이 땅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우어어스는 성도가 받는 세례가, 그 사람의 시민권이 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묘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a)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정체성이 마음에 드십니까?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 ‘하늘에 속한 떠돌이’ 충분히 납득이 되고, 또 그 의미대로 온전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나는 오직 이 땅의 정착민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삶은 아닙니까? 정직하게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 말은 멋있지만, 그게 결코 매력적인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나의 기초요, 토대가 되는 삶입니다. 한없이 흔들리는 삶이며, 언제나 부대끼는 삶임을 이미 말씀을 통해 확인한 바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땅의 성도들은 나그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들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가 아니라 ‘주와 함께 있는 지주’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 없는 지주로 살고자 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Resident Alien’이 아니라 ‘Resident Citizen’으로 살고자 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나그네인가, 아니면 이 땅의 시민인가.
나그네는 모든 시민들의 이방인입니다. 성도의 삶이 이방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음에 있어서 이방인이라 합니다. 유대인들이 내내 그렇게 외부의 사람들을 불렀지요. 그런데 여러분 A가 B를 이방인이라 규정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B 역시 A를 이방인으로 여기고 규정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너를 나의 이방인이라 하는데, 상대는 나를 가족이나 벗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을 모두 이방인이라 여겼고, 반대로 다른 민족들은 유대인들을 철저하게 이방인 취급한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은 세상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 저 놈 참 유별나네. 우리가 상종을 하기 참 어려운 족속이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 이런 이야기가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듣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너 아주 좋아. 우리랑 잘 어울릴 수 있겠어. 우리랑 재미있게 한 번 어울려 살아보자.” 이런 소리를 듣습니까?
나그네를 영어로 뭐라 합니까? ‘stranger’입니다. 낯선 사람. 이상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어떤 관점에서 보면 ‘참 이상한 사람’, 그게 성도입니다. 여러분, 이상한 놈이라는 소리, 들으십니까? 그게 아니면 여러분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나그네가 아니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겁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2장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요일2:15~16,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은 단언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 안에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남기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성도는 언제나 가벼이 떠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가볍고 단순함입니다. 이것저것 주렁주렁 달고 살려 하지 마십시오. 이것저것 쌓아놓고 살고, 모아놓고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건 성도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입니다. 주님이 복음을 위해 저기로 가라면 가고, 이리로 오라면 와야 할 것 아닙니까? 나그네가 짐이 많아 어떻게 나그네로 삽니까? 심플하고 단아하게, 정말 주님 앞에 갈 때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가볍게 가야 합니다. 2000년 4월 19일 향년 98세로 타계한 고 한경직 목사님(1992년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틀턴상을 수상), 늘 검소하고 청빈했던 그분이 남긴 재산이라고는 말년에 타고 다니시던 wheelchair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와 입고 다니던 생필품이 전부였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살지만 세속에서 살지만, 저 산속 스님들보다도 더 가벼이 살아야 합니다. 그게 나그네이니까요. 그분이 은퇴하시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26년 간 사셨던 6평 남짓한 집이 남한산성 자락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는 목사님이 손수 쓰신 ‘한경직 우거처’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우거처(寓居處). ‘내 집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처소는 이곳이 아니라, 그리 머지않아 가게 될 저 천국의 주님 나라입니다. 이곳은 그저 우거처요, 우리의 영원한 집은 저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세상의 욕구를 다 채우고 가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영원한 하늘의 삶도 부자로, 여기서도 넉넉히 누리며 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해서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살면 결코 믿음의 길을 완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삶은 성도가 왜 나그네로 살아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구원은 늘 떠남이며, 모험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며 다시 떠나야 하는 것이기에, 나그네가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길이 믿음의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탄은 우리를 철저하게 땅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삶의 무게를 줄이기를 힘쓰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도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 세상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삶이지만, 이 땅을 하나님나라로 회복시키는 일 또한 사명으로 삼습니다. 그게 세상의 나그네 됨과 다른 지점입니다. 세상의 나그네는 나그네로서의 낭만 하나에 의지합니다. 정처 없이 발길 가는 대로 흘러갑니다. 청록집에 수록된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라는 시가 있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건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따라 그 긴 여정을 떠나갔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너무나 분명한 기준과 주님의 나라라는 명확한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입니다.
그 푯대 뒤에는 주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나그네이지만 결코 처량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닌, 세상의 복이 되는 은혜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고, 그런 나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그 주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습니까? 앞서 야곱이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 섰을 때의 장면 말씀이 혹시 기억나십니까? 야곱이 파라오에게 내 나그네 길 세월이 130년이라고 말하는 그 장면 앞뒤에, 동일한 한 마디 말씀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요. 다시 창세기 47장으로 가봅니다. 함께 읽습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아멘.
야곱이 바로에게 어떻게 합니까? 축복합니다. 바로가 야곱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바로를 축복합니다. 땅에 속한 거주민이 나그네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가 거주민을 복 주며 사는 겁니다. 이 땅의 권세와 부요를 다 가진 자들이 성도를 축복하고 먹을 것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그네가 세상의 권세자를 축복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입니다. 이게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란 말입니다. 여러분, 부디 이러한 나그네가 되십시오. 비록 여러분은 어디든 갈 수 있는 가벼운 나그네 인생이라 하여도, 여러분이 만나는 이들마다 여러분이 복 빎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존귀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황무지가 개간되고, 영적으로 메마른 곳이 비옥한 평야가 되고, 사막에 샘이 나는 주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나그네 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비춰지고 보여질 수 있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도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성도가 된다는 것은 이 땅의 시민에서 나그네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Born Again 하는 것입니다. 설교 처음에 Maslow의 다섯 가지 욕구를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태어난 성도는 이 모든 욕구들을 관통하는 궁극의 욕구를 가집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욕구입니다. 아브라함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의 나그네 길을 걸어간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본능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내 삶을 향한 주님의 뜻, 내 일상을 향한 주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여러분의 영혼이 갈망하는 그 욕구를 온전히 분별해서, 주님이 가라하는 그 땅으로 언제든 가벼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떠날 수 있는, 그래서 그 땅을 주님의 나라로 바꾸어가는 주의 일에 귀히 쓰임 받는 복 된 인생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