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2022년 7월 24일 주일 설교)

2022-07-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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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절 후 일곱 번째 주일 설교 -------------------------------- 누가복음 6:20~26,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 설교 음성파일 :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설교 음성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220724_1058 (mp3cut.net) .mp3 null 파일 다운로드 ​ (누가복음 강해 25) 본문 20절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으로 꼭 누려지고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 가운데서, 열둘을 따로 세워 사도라, ‘보냄 받은 자’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본격적인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메시지,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른바 ‘팔복’으로 잘 알고 있는 말씀일 겁니다. 거기서는 여덟 가지 복의 선언이 나온다면, 여기서는 네 가지의 복으로 정리되어 있고, 거기에 따른 네 가지 화가 이어집니다. 비록 본문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그런 유명한 말씀이긴 합니다만,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또 우리가 이 말씀을 현실의 삶에서 과연 살아낼 수 있느냐 하는 차원에서도 아주 어려운, 그런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너희 것이다.” 하는 시작부터 참 막막하지요. 도대체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복 있는 사람이냐, … 가난하고 아프고 눈물 나고, 그래서 예수 믿고 한 번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했더니, 아니 가난한 그게 복이다, 오히려 부요하고, 배부른 것이 화다, 이렇게 나오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감동과 은혜보다는, 현실적인 막막함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물론 우리는 이 말씀이 자리하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냥 모든 일반 사람들에게, 어떤 삶의 교훈이나 위로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메시지는 아니지요. 가난 자체가 복이다, 이런 얘기도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냐, 이것이 본문의 의미만큼이나 우리에겐 중요한데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말씀 속에서 길을 잃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열둘을 따로 세워 사도라 칭하시고, 그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와 사역을 시작하신 때입니다. … 그리고 본문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말씀의 1차적인 청중이 누구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아마도 방금 주님이 세우신 그 열둘이 가장 핵심에 있겠지요. 예수께서 눈을 들어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볼 때마다 이 표현이 참 신기합니다.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 ‘눈을 들어 본다’, 성경에, 특히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아주 히브리적 표현인데요, 누가복음에는 여기 처음 나옵니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게 당연한데도, ‘눈을 들어서 본다’는 표현이 흥미롭지요? 눈을 들어서 본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걸까요? 그리고 왜 누가는 그냥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았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굳이 ‘눈을 들어 보시고’라고 했을까요? 뭔가 그냥 평소의 보는 것처럼 그렇게 봤다면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겠지요? 뭔가 더 주목하여, 마음을 담아서 보셨다는 뜻일 겁니다. 사실 누가가 이렇게 예수님이 눈을 들어 보았다는 말을 사용하는 건, 성경에 단 두 번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번, 또 부자와 과부가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모습을 보고 계셨을 때, 여러분,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 잘 아시지요? 그때도 예수님이 눈을 들어 보셨다, 그렇게 성경은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방금 주님이 ‘사도’라 칭한 이들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정말 진심을 담아, 마음을 담아 깊이 바라보시고,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 그래서 여기 ‘너희’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단순히 ‘모든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너희’ 가난한 자, 일차적으로 주님이 눈을 들어 보신 그 가난한 제자들에 관한 얘깁니다. …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복에 관한 말씀도, 단순히 세상의 어떤 불행한 일로 인해 배고프고, 눈물 나고, 고난당하는 그런 문제에 대한 얘기가 아님을, 우린 알 수 있습니다. 22절의 ‘인자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길잡이가 되어 주지요. ‘주님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겪는 애통함과 배고픔과 고난에 관한 얘깁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이미 감내하고 있는, 일종의 ‘제자도의 대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볼 부분은, 주님은 복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돼라, 이렇게 ‘명령’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가난한 너희가 이미 복되다, 하는 일종의 ‘복의 선언’입니다. 그렇지요? 앞으로 복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미 가난하고, 벌써 복되다는 겁니다. … 사실 제자들은 그런 일들을 벌써 조금씩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장 최근에 먹은 식사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으라고 남겨둔, 그 밀밭 구석의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생으로 먹은 거였습니다. 설마 자신들이 그런 걸 먹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열두 사도들, 그렇게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갈릴리 어부라고 했는데요, 당시 그들이 가난했느냐, 저 밑바닥 인생이었느냐,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부르시던 날에는, 예수님이 아주 작심하고 물고기를 다 일일이 쫓아내서 그렇지, 갈릴리의 조업 자체가 그렇게 열악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고된 일이지만, 좋은 물고기가 넉넉히 잡혔고, 무엇보다 갈릴리 산 물고기가 주변에 인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근처의 두로와 시돈의 상인들이, 수시로 와서 물고기를 사다가 열심히 멀리 내다팔았습니다. 당시 근동의 가장 활발한 상업도시가 바로 두로와 시돈이지요. 아주 좋은 판로가 이미 개척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갈릴리 어부들의 삶은,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중산층 이상이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엄청난 부자까진 아닐지라도, 가난과는 거리가 멉니다.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 잘라 먹을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인 거지요. 세리였던 레위도 마찬가집니다. 돈 꽤나 있던 직업이지요. 다 나름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밀 이삭으로 생식이나 하고 있다니, 현상적으로만 보면, 이미 그들은 오늘 말씀하신 가난과 굶주림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당하는 미움과 고난도 제자들이 이미 겪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벌써부터 뭐만 했다 하면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습니다. 벌써 예수를 죽이려는 논의가 시작됐으니, 이제 곧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곤란을 당할 겁니다. … 그런데 주님은 그 모든 것이 복되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제자들의 상황을 가리켜, 주님은 ‘너희 가난한 자’라 칭하시고, 그게 복되다고 하십니다. 이미 복 있는 자리에 들어와 있으니 잘했다는 얘기고,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니, 너무 놀라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잘 따라오라는 그런 얘깁니다. 그럼 가난한 제자들이 뭐가 그리 복이 있다고 하시는가, 주님은 그 이유가 뭐라고 하십니까? … 네, 하나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20절). 제자들이 복된 이유는, 그들이 이제부턴 결코 가난에 빠지지 않게 된다거나 부자가 돼서가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나라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셨던 이사야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다.”(눅 4:18) 그랬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전하게 하시려고요? 네,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하나님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 형편을 좋게 만드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나라를 도대체 언제 누리게 된다는 얘깁니까?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게 됐으니 복되는 말입니까, 아니면 지금 여기서 그 나라를 누리니 복되다는 겁니까? … 여러분, 20절 끝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는 구절의 동사 시제가 현재일까요, 미래일까요? 네, 현재시제입니다. 나를 따르는 일을 위해서 삶의 모든 것을 뒤로 물린 가난한 너희들, 삶의 초점을 온통 거기에 두고 사는 너희는 복 되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너희 것이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러신지요? 하나님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까? 그렇게 이미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계시는지요? 누리는 것 같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나라를 소유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하나님나라가 뭐지요? 하나님나라, 그런 한 마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맞지요?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분의 말씀이 그대로 실행되어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 거기가 하나님나라입니다. … 그럼 하나님나라가 여러분의 것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아들이면 그게 하나님나랍니다. … 제자들은 당연히 그 나라를 누리겠지요. 주님께 자기의 삶을 맡기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위해 삶의 모든 것을 상대화 한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은 약간 동어반복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삶으로 받아들여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분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나라인데, 그건 결국 주님이 ‘너희 가난한 자’라고 하실 때 염두에 두신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가졌다는 말이나, 사실은 다 같은 말입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면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쓴 로마서에 있는 내용이지요.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 14:17). 여러분, 다 들어보셨지요? 의와 평강과 희락. 저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복 있다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들, 너희가 배부를 것이요, 너희가 웃을 것이요, 너희가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것과 똑같은 얘기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상 주심이 바로 의로움이고, 하나님으로 인한 부요함이 평강이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의 넘침이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어떤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으니, 그 또한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해야 되겠지요. 예수를 통해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말이 좀 복잡해집니다만, 중요한 건 우리가 그러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이겠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것들을 잘 누리며 살아가고 계시는지요? 예수로 인해 배부르고, 웃고,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비록 매일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또 세월이 점점 지날수록, 그 경험의 빈도와 깊이와 밀도가 더해져가고 있으신지요? 부디 그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나라를 우리가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느냐, 그 가장 결정적인 갈림길이 되는 지점이, 가난함에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소유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가난해서 누려지는 세상이 하나님나라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하신 말씀도 생각납니다.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나라를 사느냐, 아니면 물질을 섬겨 재물의 나라를 사느냐, 그것이 제자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얘깁니다. 가난해야 한다면, 그럼 얼마나 가난하면 되겠습니까? 어느 정도까지 가난하면 하나님나라가 누려지고, 그 이상이면 안 되는, 도대체 그 기준이 어느 정도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주님이 별 말씀이 없으시지요? 그래서 어렵습니다. … 여러분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부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게 참 애매한 문젭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희 가정은 가지고 있는 자산보다 빚이 더 많습니다. 저희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합쳐도, 저희가 은행에 진 빚보다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가난하다고는 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혹시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요? 정말 가난한 건가요? ^^) 가난은 아무래도 상대적이겠지요. 집도 있고, 몇 억 자산이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저는 분명 가난할 겁니다. 그러면 늘 저는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사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이 가난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주님의 제자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가진 재물을 다 어디다 기부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재물을 상대화했을 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의 우선순위 앞에 돈과 물질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얘깁니다. … 여러분, 신앙이 수단이고 물질이, 복이 목적인 그런 신앙을 뭐라고 부르지요? 네, 기복주의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이 말씀하는 가난은, 그 반대라는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을 목적으로 삼고, 물질은 그저 그 일을 위한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여겨서 다스리고 사용한다,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는 가난의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이것도 결코 쉽지 않은 얘깁니다. 그렇지요?) 사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너희 가난한 자’라는 주님 말씀 자체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비록 남의 집 밀 이삭을 비벼 먹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정말 가난하냐,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 사실 헬라어에는 ‘가난하다’는 형용사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항상 돈을 염려하고, 쪼들리고 궁핍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 [페네스]가 있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가난한 상태,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당장 누군가에게 빌어먹어야 하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프토카스]라는 단업니다. 두 렙돈을 예물로 드린 과부를 묘사할 때 바로 이 단어를 썼습니다. … 그럼 여러분, 오늘 본문에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 ‘가난한’은 어떤 단어겠습니까? 네, 아무것도 없이 가난한, 절대적 빈곤을 뜻하는 단어 [프토카스]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자들이 의아해 했을 거라는 겁니다. 제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주님을 따라오는 많은 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중에도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그토록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었겠느냐,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그렇게 완전히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나서기 위해,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를 상대화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완전히 물질의 가치를 평가절하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 자체를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고, 범사에 오직 주님을 좇는 일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 물질에 대한 모든 관심과 염려와 주권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물질을 섬기는 게 아니라, 물질을 다스려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걸 선택하고 살아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물질에 대해서 성경은 참 이상한,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돈을 내가 소유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돈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고, 우리가 돈을 섬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동의가 되십니까?) 그러면서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시지요. 불가능합니다. 돈을 섬기면 결국 하나님나라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거의 무소유의 삶을 지향합니다. 그럴만한 실력이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주님의 제자는 다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말했지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대부분도 그 길을 향해 가고 있고, 그걸 더 원할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소유하면서도 섬기지는 않는 것, 그것은 실제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이 주는 힘을 다 경험해봤고,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돈은 우리를 모든 것의 주인으로 만들어줍니다. 돈만 충분히 있으면 내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세상엔 거의 없습니다. 돈을 섬기기만 하면, 잘만 섬기면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은 사실상 하나님과 쌍벽입니다. 동시에 하나님나라와는 가장 멉니다. 돈은 내가 왕이 되게 해주고, 왕처럼 느껴지게 해 주는데,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한 사람이 그 두 공간에 동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 있고자 하지도 않을 겁니다. 부요한 사람, 돈이 주는 위로를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흉내 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스스로 그 주인의 자리에서 결코 내려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대신 돈을 섬기면서, 거기서 오는 나름의 만족과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도, 현실적으로 보면 나름 괜찮은 삶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인생길이고, 거기서 오는 행복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 얼마 전에 TV에서 그런 걸 본 적 있습니다. 유치원을 다니는 정도의 한 여자아이에게,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보라고 하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는 아빠가 돈을 아주 잘 버는 직장을 다니는데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는 거하고, 다른 하나는 가족이 함께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순 있는데 아빠가 돈을 잘 못 버는 거하고, 만약 꼭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그런 잔인한 질문을 했더니 아이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돈 잘 버는 아빠, 함께 할 시간은 부족해도 부자인 부모가 더 좋다는 겁니다. 그 어린아이도 아는 걸 우리가 왜 모르겠습니까? 돈이 주는 그 안정감과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하나의 삶의 길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다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길의 한계와 정면으로 직면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지요. … 이미 다 부자로 살아보고, 그러면서 그 길이 주는 허무함을 경험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미 그걸 깨닫고 사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돈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화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가치와 존재를 만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번에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 군을 아실 겁니다. 저는 요즘 그의 연주에 푹 빠져서 지내고 있는데요, 그 어린 10대 친구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자신은 결코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러면 음악이라는 본질에 집중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랍니다. 유명해져서 바쁜 게 절대 싫답니다. 자신에겐 커리어나 사람들의 인정 같은 게 하등 중요하지 않은데, 오직 음악에만 집중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돈을 버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아예 돈이 없으면 연주도 할 수 없게 되니, 연주할 수 있는 만큼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겁니다. … 이번 반 클라이번 콩쿨에 나온 목적도, 무슨 유명해지거나, 상금을 타기 위해서가 아니랍니다. 내년이면 자신이 성인이 되는데, 내가 지금 음악적으로 얼마나 성숙해져 있는가, 그걸 확인받고 싶어서 나온 것뿐이라고, 자기가 연습한 것의 30%밖에 보여주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고 이야기합니다. … 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목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만, 도대체 그 어린 친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돈의 맛을 제대로 못 봐서 그런가, 그게 아니지요. 그는 돈보다 더 중요한 어떤 절대적 가치를 이미 발견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돈을 상대화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가치와 존재를 만난다면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그렇게 만난 겁니다. 생명의 주로서, 내 영혼의 궁극적인 만족의 대상으로 예수를 깊이 경험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은 천국이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어떤 밭에 아주 귀한 보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잘 덮어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천국이 그렇다는 겁니다. 보물을 발견하여 기뻐하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처럼, 천국도, 하나님나라도, 그것을 ‘발견하면’ ‘기뻐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사게 된다는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진정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이 있고, 그것을 발견하여 기뻐하고, 그리고 모든 재물을, 그 보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사는 것, 그게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우리 삶에 별로 유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채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섬겨지지 않는다는 그 불가능의 가능성 어딘가에서 위태롭게 서서 방황만 하고 있겠지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후 15:19)고 바울 사도가 말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삶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삶을 우리도 살아간다는 게 문젭니다.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되, 정말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고, 하나님나라를 깊이 누려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좀 더 진지해져야 합니다. 누리지 못하는 걸 누려진다고 자기 최면에 빠질 필요도 없고, 누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 무던해져서도 안 될 겁니다. … 물론 하루아침에 하나님나라가 충만히 누려지지는 않을 겁니다. 평생 오락가락 할 겁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지만, 동시에 ‘너희 부요한 자여’라고도 하십니다. 여기 두 ‘너희’는 같은 대상입니다. 제자들도 때론 가난한 자이나, 때론 부요한 자입니다. 우리도 매순간 그렇지요. …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를 온전히 만나고, 열심히 물질을 상대화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삼는 일들을 반복해서 연습할 뿐입니다. 내가 누구를 섬기며 살고 있는지, 어떤 나라의 백성인지 자주 성찰하며 살아야지요. 다만 주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켜라. … 이 말씀대로 우리가 섬기는 유일한 대상이 예수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자세로, 때마다 물질을 상대화 하면서, 너희 가난한 자가 되어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집중하고, 그래서 약속하신 하나님나라의 그 참된 만족과 평강과 기쁨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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