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2) (2022년 4월 24일 주일 설교)

2022-04-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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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설교 ------------------------------ 누가복음 4:1~4:1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2)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도입부와 종결부 음성은 없습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파일 luke014(3) .mp3 파일 다운로드 ​ (누가복음 강해 14)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본문 3절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도 우리의 삶으로 꼭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저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것을 증명해내라는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을 어떻게 이기시는지,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그 시험 앞에서, 주님이 어떤 말씀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시는지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일용할 양식과 삶의 필요에 대한 세상 염려를 잠시 멈추고, 떡에 대한 관심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관심으로 사는 존재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된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의 떡에 대한 필요를,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돌보아주셔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또한,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살아내라고 권면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삶, 그것은 우리 안에 품게 하신 하나님나라와 의에 대한 소원을 붙잡는 삶이고, 우리 각자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떡보다 앞세우는 삶이었는데요, 여러분은 혹시 그런 소원을 어렴풋이나마 발견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미 품은 소원에 대해 조금 더 확신을 가지게 되시거나 혹은 그런 소원을 달라고 기도해보셨는지요? … 부디 이 말씀들이 꼭 그렇게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고,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자녀 됨이 온전히 선포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두 번째 시험에 관한 내용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아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으로 뭘 보여준 건가, 하는 것은 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고 말하는 걸로 봐서, 권위와 영광을 보여줬다는 거지요. 천하만국을 누가 다스리는지, 그 통치와 영광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이걸 순식간에 보여줬다고 하지요. ‘순식간에,’ 문자적으로는, ‘시간의 어느 한 시점에’라는 뜻인데요, 우리 인간의 어떤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초월적인 시간 속에서, 영적인 감각과 능력으로 봤다는 뜻이겠지요. 이 세상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 권력과 헤게모니가 누구에게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 힘의 현실을 똑똑히 보여준 것입니다. 아마 당시로는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의 권력과 군대와 그 엄청난 영광부터 보여줬겠지요. 그러면서 마귀는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그 권세를 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 권위와 영광은 자신에게 ‘넘겨 준 것’이다, 말하지요(6절). 넘겨줬다는 건 무슨 뜻이겠습니까? 네,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닌데, 말 그대로 ‘넘겨받았다’는 뜻입니다. ‘넘겨준 것,’ 문법적으로는 완료 수동태를 쓰고 있는데요, 마치 그것이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넘겨주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으니, 자신에게 절하면 그것을 주님께 넘겨주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인데요, 마귀는 이것이 예수님에게 하나의 강력한 시험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40일을 금식한 사람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 힘든 시험인 것만큼, 하나님의 아들에게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하는 이것 역시 그렇다는 것이지요.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왔다면, 그 보냄 받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영광과 권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백성 없는 왕이 있을 수 없고, 권세 없는 메시아는 더 이상 메시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반드시 어떤 힘이 필요한 거지요. 뭔가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힘, 영향력을 끼치는 힘, 사람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힘, 그게 있어야만 예수님도 하나님나라를 세우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당장 로마의 황제 자리에라도 앉게 된다면, 그러면 메시아의 일은 거반 다 이룬 게 아니냐는 거지요. 그거 내가 주겠으니 나에게 절을 해라, 마귀는 제안합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도 충분히 매혹적인 얘기였겠지요?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의 왕이요, 만민의 구주로 오신 것이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든 세상을 구원하든, 거기엔 반드시 어떤 힘, 권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보여준 것처럼, 현실은 엄연히 마귀에게 넘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늘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만큼은 마귀의 주장이 그럴 듯한 겁니다. 세상은 온통 힘 있는 자들의 차지라고 여겨지지는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그 힘은 마귀에게 절하지 않는 한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 마귀는 단지 자신에게 절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무슨 고난이나 십자가나 이런 거 없이, 그저 마귀에게 절하고 경배하면, 그것으로 그 권세와 영광을 넘겨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이것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 뱀의 유혹처럼, 참 달콤하게 여겨집니다.) 여기에 대해 주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이번에도 신명기 (6장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지요. 무슨 설명이나 근거도 없이, 그냥 말씀 한 구절만 얘기하고 끝입니다. 사실 마귀 입장에서는, 또 설명이 필요한 우리 입장에서도, 좀 맥이 빠지는 그런 대답이기도 합니다. 냉혹한 세상 현실을 다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줬는데도, 결국 하는 말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그런 모범답안을 얘기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세상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의 대답처럼,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면 그러면 모든 세상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인지, 마귀가 주겠다는 그런 권위와 영광 없이 어떻게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것인지, 주님의 말씀은 참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얘기처럼도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마귀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 정도는 지적하실 법도 한데, 주님은 그것도 아닙니다. 세상 권세가 다 마귀에게 넘어와 있고, 그걸 마귀가 자기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하나님이 완성하신다. 네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네가 실제로 권세를 가져서가 아니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시는 하나님께서, 추수 때까지 그 횡포에 대한 심판을 미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권세와 영광은 너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는 사실을 너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뭐, 이렇게 한 번 시원하게 답해주시면 좋겠는데, 주님은 그 어떤 반론이나 반박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아주 원론적인 얘기,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씀하시고, 스스로 그 말씀에 복종하심으로써, 이번에도 마귀의 주장 자체를 무색하게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마귀 역시 더는 대꾸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주님의 대답이 이번에도 어떤 증명이나 반론이 아니라, 단순히 말씀에 대한 선포와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그대로 수긍하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비록 시원하게 마귀를 굴복시킨 것은 아니지만, 어떤 힘이나 논리로 압도해서 꼼짝 못하게 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을 살아낼 수 있는 믿음의 현실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합니다. 힘으로, 능력으로 세상을 압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해내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논리적인 대답으로, 세상 사람들의 입을 꼼짝 못하게 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는 순간들을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로 스스로 고백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승리요, 진정한 승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부디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시험의 장면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 예수님께서 오늘 마귀에게 못다 한 얘기들을 언제, 누구에게 하시는가, 성경을 되짚어보면, 우리에겐 문득 어느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도대체 주님이 왜 이렇게 답답한 말씀만 하실까, 생각하다가 저는 문득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신 대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부분이 참 놀랍게 다가왔는데요, 마귀에게, 세상에게 ‘증명’하지 않았던 그것을, 주님은 3년 뒤 제자들에게 스스로 확증해주십니다. … 마태복음 28장인데요, 여러분 한 번 잠깐 찾아보시겠습니까? 마태복음 마지막 28장, 마지막 16~20절입니다. 저와 같이 천천히 합독하겠습니다.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선교(에 대한) 대위임령’이라고 해서, 남아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위임하시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16절에,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갈릴리 근처 어느 산에서 이 마지막 대화가 이루어졌는데요, 오늘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고 계신 곳 역시 갈릴리 근처의 광야이고, 또 두 번째 시험은 그곳의 어느 산에서 치러졌다는 걸 생각해보면(누가는 ‘올라갔다’고만 나오지만(5절), 마태는 ‘지극히 높은 산’(마 4:8)이라고 밝힙니다), 지금 이 두 사건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 더구나 거기서 제자들이 뭘 했다고 합니까? 네,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했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던 바로 그 단어[프로스퀴네오]를, 마태는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사용한 겁니다. 내게 경배하면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마귀의 시험과, 주님을 경배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신 그곳은, 다름 아닌 주님이 사역을 처음 시작하시며 마귀에게 시험 당하신 그 산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게 됩니다. …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리라.”고 했던 마귀의 주장에 대한 주님의 실질적인 대답이 바로 이 마태복음의 본문인 것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배하고,’ 주님은 드디어, ‘주님이 가진 권세’에 대해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하늘만이 아니라 땅의 권세도 내게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라. 내가 너희와 끝까지 함께 하며, “하늘과 땅의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주겠다.” 주님은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마귀에게, 세상에게, 당신의 권세를 말씀하지 않고, 주님을 경배하는 제자들에게 그 권세에 대해 밝히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있다, 세상을 향해 말하지 않고, 교회를 향해 말씀합니다. ‘세상’에 ‘증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증명 받으실 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주님’으로 드러나시고,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의 예배와 순종과 삶을 통해, 그 권세를 세상에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을 받고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하시듯, 주님은 똑같이 산에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들을 통해 다시금 또 다른 예배자들을 일으키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주신 권세와 능력과 진리로,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게 하십니다. 세상을 통째로 바꾸거나 어떤 힘으로 증명하고 압도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을 바꾸셔서, 그가 보냄 받은 그 삶의 자리를 주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십니다. 아멘이십니까? 사람을 예배자로 새롭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그곳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그 뜻이지요. 스스로가 주인 된 삶의 자리, 실은 마귀를 경배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새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귀에게 절하고 굴종하여 얻어지는 그런 권위와 영광이 아니라, 실은 그것이 영광도 아니요, 권세도 아님을 아담과 하와가 보여줬지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은, 결국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주신 그 권세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완전히 뒤집어졌지요. 주님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고, 또한 우리를 통해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새로운 아담과 하와들이, 다시금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로서, 세상 앞에 담대히 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섬김으로서만, 하나님이 주신 그 다스림의 권세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주겠다고 하는 권세와 영광은, 실은 마귀에 대한 비참한 굴종 없이는 가질 수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마귀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마귀에게 절하지 않고는, 마귀에게 종속되어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이지 않고는, 결코 그 힘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러한 굴종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지요. 한 번 절하면 결국 거기에 매여 살게 됩니다. 어떤 힘이나 폭력에 한 번 굴복하면, 거기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습니까? 얻어터지더라도 항복하지 않고 싸우는 이유는, 그 굴종이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굴종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더는 보존할 수 없게 되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유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없게 되고, 공의와 사랑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건 진정한 권위도, 영광도 아닌 것이지요. 그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읽는 만화로 된 동화 중에서 ‘무적 수첩’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책인데요, ‘무적 수첩’ … 문수라는 이름의 한 초등학생이 이 책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문수가 속한 그 반에는, ‘나무’라는 이름의 아이가 대장 노릇을 하고 있어서, 다들 그 아이 앞에 주눅 들어 삽니다. 나무의 말이라면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고, 그가 시키는 건 다 해줍니다. … 하루는 나무가 문수 앞에 수첩 하나를 일부러 떨어뜨립니다. 문수가 수첩을 펼쳐서 그 안의 내용을 살펴보는데, 거기 깜짝 놀랄 내용이 적혀 있는 겁니다. 거기엔 자신을 비롯한 그 반 친구들의 비밀스런 약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나무는 그걸로 아이들을 쥐락펴락했던 거지요. 그래서 이 수첩이 ‘무적 수첩’입니다. 자신의 약점이 기록된 수첩, 그래서 그 내용이 알려질까 봐 아이들은 아무 말 못하고 나무 앞에 굽실거리게 된 거였습니다. … 그런데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도 있다는 걸 알고 문수가 기겁합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체구가 작아서, 친구들이 입는 그냥 평범한 남자 아이 옷이 아니라, 작은 여자 아이 옷이라는 것, 그리고 그 옷이 다름 아닌 나무의 여동생 달래의 옷을, 엄마가 빌려다 입힌 거라는 사실이 그 수첩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 문수의 별명에 대해 이 수첩은, ‘달래 옷, 난쟁이 거지 공주 문수’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이 비밀이 친구들에게 밝혀지면 정말 끝장이라고 생각한 문수는, 결국 다른 친구들처럼 되지요. 나무에게 굽실거리고, 참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학교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루는 문수가 화장실에서 우연히 이 나무의 ‘무적수첩’을 발견하여 손에 넣게 됩니다. 나무가 깜박 잊고 두고 간 수첩을 가지게 된 건데요, 이젠 드디어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문수는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수첩을 바로 없애지 않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그걸 이용하기로 한 겁니다. 처음엔 나무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무적수첩에는 나무의 별명과 약점도 적혀 있었는데요, 그걸로 나무를 꼼짝 못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수가 점점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나무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다른 친구들의 약점을 쥐고, 말 그대로 무적의 힘을 휘두른 겁니다.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거지요. 아이들을 통해 간식도 얻어먹고, 급식 반찬도 원하는 걸 마음껏 먹고, 하기 싫은 청소는 남에게 시키고, … 그렇게 또 나른 나무가 됐고, 그 반은 여전히 굴종의 상황이 이어졌지요. 사람만 나무에서 문수로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무를 그렇게나 싫어하고 혐오했는데, 결국 그 수첩을 가지고 나니, 문수도 똑같은 모습이 되더라, 권력은 그렇게 인간을 부패하게 만들어, 스스로 뭔가의 종이 되어 살아가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하는 걸 작가는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잘 그려냅니다. 우리가 다만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가 모든 굴종으로부터 자유해지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세상 그 어떤 것 앞에서도 경배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할 때 나도 모르게 마음에 담대함과 평안함이 생기는 걸 아마 여러분도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권세를 가지고, 누군가를 다스리면 자유를 얻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매이게 되고,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괴물이 되어간다는 것을, 비단 이 동화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 많은 권력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또 별 것 아닌 작은 힘에도 우쭐하는 우리 자신을 통해서 늘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피조물인 인간, 생명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인간,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안에서만, 그분을 인정하고 의지할 때만, 온전한 자유를 얻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생명의 주님이지만, 우리를 힘으로 억누르고, 억압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 우리가 거기서부터 멀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지요. 우리의 죄와 약함을 적어놓은 어떤 ‘무적 수첩’ 같은 것으로 우리를 협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되,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고, 다시금 우리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내 약함을 가지고 억지로 굴종하게 하시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약함을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채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 안에 거하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여 세상으로 다스리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요,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종이 아닌 주인의 삶을 살 수 있노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 사는 삶, 그것은 다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 세상을 통째로 바꾸거나 힘으로 증명하고 압도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새롭게 하셔서, 그가 사는 삶의 자리를 주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십니다. … 비록 그것이 너무나 작고 연약한 변화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하나님나라가 겨자씨 하나와 같고, 적은 누룩과 같다고 하시지요. 그 작은 나무가 자라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되고, 적은 누룩이 들어간 곡식 자루가 어느 순간 전부 부풀어 오르게 되듯이, 하나님나라는 주님을 경배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지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열매를 맺으며 확장되고 있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증명하는 게 아니라 물들여가는 것,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나라임을, 우리는 다만 믿고 순종할 뿐인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 두 번째 시험을 열심히 시연해내고 있을 겁니다. 모든 시험이 다 끝난 게 아니라고 했지요.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속되고 있습니다. … 물론 우리는 노골적으로 마귀에게 절하라, 이런 요구를 받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그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교묘한 시험에 노출되어 삽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의지하는 삶의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걸 세상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이라고 말하지요.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위해, 세상의 힘과 물질을 추구하고 축적하는 방향으로 마귀는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상숭배를, 우리의 탐욕과 연결지어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상을 만들어 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지요(골 3:5). 그 탐심의 밑바닥에, 내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 더 많은 권세와 힘을 가지고 또 다른 나무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교만이 있다고 성경은 진단하는 것이지요. ‘다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삶의 방향’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처럼 설 수 있는 삶을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한 우리의 모습이, 다름 아닌 마귀에게 절하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탐욕에서, 그 우상숭배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이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사는 한,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주님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살면서, 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 수는 있겠지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주님은 말씀합니다(마 16:26). 마귀에게 절하면 주겠다는 그 천하를 얻는다 해도, 결국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 안에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소유에 대해 말하고, 주님은 생명에 대해 말합니다. 매번 우리가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귀는 설사 천하를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을, 생명의 충만한 삶을 우리에게 결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하를 얻는 삶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풍성히 누리는 삶을 이해하고, 깨닫고, 그것을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 삶이 내가 가진 어떤 소유, 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임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늘 기억하고 고백해 나가야 합니다. … 물론 예배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내 생명과 삶을 내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집약된 것이 오늘 우리의 예배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숨 쉬고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최선의 사랑과 존중과 인정을 올려드리는 것, 여러분, 그 예배로부터 우리의 탐심과 우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완성하실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 예배자로부터 시작됨을 믿고, 저와 여러분 앞에 놓인 마귀의 시험을 잘 분별하고 승리하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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