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2022년 1월 23일 주일 설교)

2022-01-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3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설교 ---------------------------------- 누가복음 1:39~56,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luke004 .mp3 파일 다운로드 ​ ​ (누가복음 강해 4) 본문 39, 40절의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삶으로 고백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에 대해 전해들은 마리아는,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천사가 떠나자마자 가장 먼저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 문안하게 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39절에 보면,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렀다.”고 나오지요.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서,’ ‘빨리 갔다’라고 표현해서, 가브리엘의 메시지를 전해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아가 곧바로 서둘러 이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본문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마리아는 왜 급하게, 빨리 엘리사벳을 찾아갔을까요? … 네, 천사가 엘리사벳 이야기를 언급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는 증거로 친척 할머니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이야기한 게 마음에 남았을 겁니다. 말씀을 믿었지만 또한 보고 싶었던 거지요. … 그런데 이것이 그냥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 본문을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유대 산골에 살고 있었다고 나오는데요(39절), 마리아가 사는 나사렛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상당합니다. 적게 잡아도 수십 킬로미터이고,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집이 만약 예루살렘과 가까운 산골이라면, 백 킬로미터도 넘는 거리인데요, 그 먼 곳을 여인 홀로 그렇게 찾아갔다는 것은 그만큼 마리아의 마음이 다급했다는 뜻이겠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그 마음이 충분히 헤아려지시는지요? 메시아를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다, 비록 천사가 전해준 이 말씀을, 마리아가 기쁘게 품었고, 또 저는 하나님의 여종이니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음으로 고백도 했지만, 마리아는 아직 여린 소녀입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도 당연히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두려운, 정말 엄청난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거 정말 괜찮을까? 요셉에게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 ‘설마 내가 그냥 꿈은 꾼 건가? 내가 정말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맞나, 혹시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건 아닐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나 났겠지요. 결국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말한 친척 엘리사벳, 이미 아이를 잉태한지 다섯 달이 지난 엘리사벳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비록 가는 길은 멀지만, 분명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그녀가, 임신해서 벌써 배가 불러오고 있다면, 그걸 직접 보고 또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이 떨리는 마음에 큰 확신과 위로가 될 거라고, 마리아는 그런 기대와 소망 가운데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 역시, 앞서 24절에 기록됐던 것처럼, 지금 벌써 다섯 달째 숨어 지내는 상황입니다. 나에게 벌어진 이 놀라운 일이, 그저 나에게만 좋은 일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 거룩하고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이 그녀와 그 사실을, 드러내시기 전까지는, 나는 잠잠히 있어야 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엘리사벳도 스스로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출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마리아가 그런 그녀를 찾아간 겁니다. 아마 엘리사벳이 임신한 후 처음 맞이하는 사람이 마리아였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더 반갑고 놀라웠을 겁니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이 일을, 수백 리 떨어진 나사렛에 살고 있는 마리아가 어떻게 알고, 숨어 지내는 자신을 찾아왔으니, 그 기쁨과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는 이 두 사람의 이 만남을, 영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지 두 사람이 어떤 할머니와 손녀 사이의 친밀한 위로를 주고받았다, 이런 게 아니지요. … 우선 누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했다는 말을, 40절, 41절, 44절에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했을 때,’ 바로 그 때, 뱃속의 아이가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41절과 44절에서 언급합니다. …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아이가 뛰놀았다는 건, 이른바 태동을 느꼈다는 거지요? 제가 검색을 해보니까, 태아이의 태동은 보통 임신 18주에서 20주 정도 됐을 때, 엄마의 배꼽 아래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더라고요. 20주면 5개월이니까 정확히 지금 엘리사벳의 상태인 거지요. 어쩌면 이때가 엘리사벳이 그 첫 태동을 느낀 시점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쨌든 본문은, 세례요한의 그 뛰노는 움직임이, 정확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했을 때 일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뿐이 아니라, 바로 그때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41절은 말씀합니다. 마리아의 문안을 받은 엘리사벳이, 갑자기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큰 소리로, 마리아를 향해 축복하고 노래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이렇게 축복하면서, 그녀가 마리아에게 인사하기를,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와 문안을 여쭈)니, 이 어찌 된 일인가? 그대의 문안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복중의 아이도 함께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서, 마리아를 향한 축복과 예언의 메시지가 연이어 선포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내 주의 어머니’[헤 메테르 투 큐리우], 할머니가 소녀에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인사는 아니지요. … 마리아의 태중에 이제 막 성령으로 잉태된 그 아이가 나의 주님이시며, 당신은 그 주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이 놀라운 고백은, 성령의 충만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인사입니다. 여러분, 마리아도 당연히 이런 엘리사벳의 축복과 환대에, 정말 큰 위로와 힘을 얻었겠지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맞구나.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메시아가 드디어 나의 태를 통해 오시는구나. 주의 어머니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내가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했다는 게 사실이구나.’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믿어지게 됐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내 연약함과 두려움을 아시고, 이렇게 엘리사벳을 통해 먼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셔서, 준비하셔서, 나로 하여금 위로와 확신을 갖게 하시는구나. 참으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시구나.’ 생각하면서, 마리아 역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게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탄생한 노래가 바로 46절 이하에 나오는, 이른바 ‘마리아의 찬가’라는 유명한 찬송입니다. 이제 모든 두려움과 의구심을 다 떨쳐낸 마리아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노래한 건데요, 초대교회 시절부터 불리기 시작해서 기독교 역사 내내 널리 사랑받은 그런 찬송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아름답고 또 영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그런 노랫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노래가 언제 마리아의 입에서 불려졌느냐, 거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본문 마지막 절, 56절은, 마리아가 석 달쯤 엘리사벳과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 노래는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함께 있을 때, 성령 안에서 함께 문안하고 서로를 축복할 때 불려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기쁜 소식을 전해줬을 때가 아니지요. 아마 그땐 마리아도 정신이 없어서 노래할 겨를도 없었을 겁니다. 마음을 다잡고 먼 길을 달려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신과 비슷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자신과 비슷한 두려움에 휩싸여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던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그리고 자신보다 다섯 달 먼저 그 믿음의 길을 걷고 있던 그녀의 예상치 못한 축복을 받았을 때, 마리아는 비로소 이 벅찬 찬송을 부르게 됐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두 여인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지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이 만남과 문안과 교제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 여러분, 본래 누가는 성령에 특히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복음서 중에 성령을 가장 자주, 또 가장 중요하게 기록한 사람이 바로 누가이지요. 누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을 일컬어 다른 말로 ‘성령행전’이라고도 하는데요, 그만큼 누가는 성령을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그런 누가가 기록한 최초의 성령 충만함이 어디냐, 다름 아닌 바로 오늘 이 장면에서입니다. 같은 은혜를 경험하고, 같은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할머니와 소녀의 만남, 그들의 문안과 축복 속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고, 그래서 심지어 뱃속의 요한까지도 성령으로 충만해졌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있다가, 이렇게 이곳에 모여 함께 예배하는 우리 또한,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서로 영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부디 서로를 통해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느꼈을 그 위로와 은혜를 풍성히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이구나. 내가 받은 은혜가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구나.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다 같은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고 그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시는구나, 서로를 통해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 주보 앞면에 보면, 예루살렘 인근의 한 성당에 서 있는 조각상이 있는데요, 한 사람은 배가 좀 많이 나왔지요?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본문의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데, 문득 예수님의 그런 말씀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두세 사람, 엘리사벳과 마리아와 뱃속의 요한이 모인 그곳에, 예수님도 함께 계신다, 여러분, 그 말씀 그대로이지 않나요? 제 상상이 너무 지나쳤을까요? 네, 저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바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들이 만나고 문안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축복할 때,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인도하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고, 그리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며 늘 부르는 찬송이 있지요.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 본문을 생각하면, 이 노래가 새삼 더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우리 한 번 다 같이 불러볼까요? (반주 없이)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우리 모일 때, 주 이름 높이리. 우리 마음 모아 주를 경배할 때, 주님 축복하시리. 주님 축복하시리.” 할렐루야! 아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또 내 동생이냐?” …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옆에 둘러앉은 제자들을 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라고 말했다면, 우리도 서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고백하며 함께 예배하는 우리도, 서로를 향해, “내 주의 어머니가, 내 주의 자매가, 형제가, 나에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인정하며, 서로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그 자리에 성령께서 충만히 역사하십니다. 서로 한 번 해볼까요? 옆에 있는 분에게, “내 주의 어머니가, 내 주의 형제가, 자매가 내 앞에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은 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인사해 보십시다. … 여러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도 마리아와 엘리사벳과 같이 얼마나 서로 다르고, 또 얼마나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서, 이 서울 외곽에 있는 작은 교회에 모여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할머니요, 다른 사람은 소녀요, 한 사람은 예루살렘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갈릴리에 있고, 한 사람은 제사장 집안의 여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평범한 여염집 여인인 것처럼, 우리도 저마다 다 다른 나이, 다른 환경, 다른 모습이지만, 그러나 오늘 이렇게 말씀을 품고, 성령을 품고, 서로에게 다가왔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정현종 시인의 유명한 시도 있지요.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방문객’ 전문) 나에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마음, 그 마음을 바람은 헤아릴 수 있고, 내가 그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그것은 환대요 축복이라고, … 시인은 그것이 ‘바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성령’이라고 읽을 수 있겠지요. 히브리어로 성령과 바람은 하나의 단어지요? [루아흐], 바람,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도 마찬가지에요. [프뉴마] 성령, 바람이라는 뜻이지요. 여러분, 세상의 시인도 노래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나에게 온다는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모든 시간이 함께 오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헤아릴 수 있는 바람을 내가 흉내낼 수 있다면, 나는 그를 환대할 수밖에 없다, 노래합니다. 여러분, 생명의 바람,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믿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냥 오늘도 또 왔구나, 새로운 누군가가 왔구나, 이게 아니라, 그가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더 나아가 그의 영원이 함께 오는 것이라고, … 그 마음의 갈피를 아마 성령은 아실 것이고, 만약 우리가 그 성령을 믿고 의지한다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것은 필경 환대를 넘어선 축복이요, 주님 말씀처럼, 서로를 내 주의 어머니요, 내 주의 형제요, 내 주의 자매로 여기고, 진심으로 문안하며 축복하고, 또 기쁨으로 섬길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이 만남의 깊이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축복의 깊이를,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은혜를,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정말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마리아가 되고, 엘리사벳이 되어, 서로 만났을 때 성령의 위로와 확신을 주고, 우리가 잘 살고 있구나, 이것이 믿음의 길이 맞구나, 함께 확인하면서, … 우리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함께 눈을 뜨고, 그 뜻이 우리를 통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 서로를 찾아가서, 문안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오늘 마리아처럼,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마음과 여건과 열정이 있는 분이, 조금 더 먼저 다가가 주십시오. 엘리사벳은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며 숨어 있지요. 그녀 또한 성도의 교제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좌우를 둘러보면,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의 그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분명 그런 엘리사벳의 모습이 보이실 겁니다. 서로 문안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 코로나 때문에 많이 어렵고, 또 교회의 여러 가지 여건과 서로의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도, 가까이 다가가기 많이 힘든 상황이지만, 여러분 성령의 지혜와 도움을 의지하며, 이 시기 또한 성령의 은혜로 채워가기를 소망합니다. 마리아는 석 달쯤 엘리사벳과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본문 56절은 이야기합니다. 엘리사벳의 출산이 거의 임박했을 때까지 함께 했고, 임신한 마리아도 여행이 가능한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을 때 다시 나사렛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그리고 뱃속의 아기에게,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겠지요. 석 달 간의 그 깊은 교제와 위로 속에, 두 사람의 신앙이 훨씬 더 깊어지고 성숙해졌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 그 내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열다섯 소녀가 부른 노래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런 영적인 깊이와 통찰을 보여주지요. 저희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여러분도 한 번 이 본문을 먼저 읽어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마리아의 믿음이 어떠한지, 그 믿음이 엘리사벳과의 교제를 통해 어떻게 자라고 있고 어떻게 분명해져가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보십시오. … 중요한 건 이 찬송이 결코 골방에서 홀로 부른 노래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고 문안하고, 또 성령으로 충만해진 엘리사벳의 축복 속에서, 마리아는 이 노래를 비로소 부르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누가가 말한 그 복음의 시작, 그 근원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다고 누가는 말하는 겁니까? 전혀 다른 사람들, 서로 분리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성령을 품고, 그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만나고, 문안하고, 교제하며, 같은 부르심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거기서부터, 주님의 구원이 시작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행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참으로 주의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