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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받은 자여 (2022년 1월 16일 주일 설교)

2022-01-1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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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후 두 번째 주일 설교 ---------------------------------- 누가복음 1:26~38, 은혜를 받은 자여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luke003 .mp3 파일 다운로드 ​ ​ (누가복음 강해 3) 본문 28절의 ‘은혜를 받은 자여’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삶으로 고백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될 세례요한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의 근원에 대해서, 또 하나님이 어떻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누가는, 이제 드디어 ‘예수’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데오빌로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이 되지요. 아기의 이름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직접 천사가 전해주는데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예수,’ ‘예슈아’,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겁니다.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지 여섯째 달이 되던 시기에 일어난 일로(26절), 그러니까 요한과 예수님은 6개월 차이로 태어난, 거의 비슷한 또래였던 거지요. 더구나 두 어머니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먼 친척 지간이었으니(36절), 예수님과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탄생과 사역을 긴밀하게 연결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사가랴에게 찾아갔던 가브리엘 천사가 이번에도 마리아를 찾아갑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북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마리아는 살고 있었는데요, 다 아시는 것처럼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대단히 작고 외진 마을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고, 탈무드나 랍비 문헌 같은 유대인들의 주요 문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정말 시골 중의 시골입니다. 그래서 다들 예수님의 고향에 대해 알고는,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나사렛 같은 곳에서 그런 선한 일이 날 수 있느냐, 반신반의했다는 거지요?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예컨대 제가 신정동에 사는데요, 신정동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런 말을 들으면 좋아할 사람이 없겠지요. 나사렛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작고 이름 없는 동네였습니다. 사실 ‘마리아’라는 이름도 너무나 흔하고 평범합니다. 아마 성경에 제일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마리아일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읽다보면, 이 마리아가 저 마리아랑 같은 마리안지, 다른 마리아인지 헷갈리곤 하지요? 실제로 신약성경에만 여섯 명의 각기 다른 마리아가 등장하거든요. 동명이인이 가장 많은 이름입니다. 그만큼 당시엔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마리아 중에서 정확히 나사렛에 있는 그 마리아를 아셨고, 택하셨고, 또 찾아가셔서, 지금 그녀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거지요.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나사렛의 마리아, 그녀를 택하여 축복하십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속에 얼마나 평범한 모습으로 살고 있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 각각의 존재로 알고 계시고, 찾아오시고, 우리 각자를 구별하여 부르고 계신다는 것, 여러분, 이것이 실제적으로 믿어져서, 주님 앞에 늘 단독자로 서고 만나는, 그런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마리아를 찾아간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에게 처음 건넨 인사말이 28절에 나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그랬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인사말 치고는 조금 길다 싶은, 세 마디, 세 문장인데요, 앞서 사가랴를 찾아갔을 때는 하지 않았던, 특별한 인사말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여기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이 어땠냐면, 한편으로는 놀라고, 도대체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그 의미가 뭘까 ‘생각했다’고 29절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마리아는 이 세 마디 인사 중에 어떤 부분에서 마음에 걸림이 있었던 걸까요?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평안할지어다’는 그냥 샬롬의 인사말이니까 특별할 게 없는데요, 문제는 ‘은혜를 받은 자여’와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 부분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택하여,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 위해 부르실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이 인사말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도 뭔가 그런 느낌, 그런 부담감을 받은 거지요. 사가랴처럼 단순히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 놀란 게 아니라, 그의 인사말에 놀랐고, 그냥 당황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인사말에 담긴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마리아를 진정시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여기서도 천사가 한 번 더 강조하는 게 있지요? 어떤 이야기를 반복합니까? 네, 마리아가 은혜를 받았다는 걸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 마리아가 은혜 받았다는 이 말이 좀 놀랍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아닙니까? … 천사가 말하는 ‘은혜’, 이게 어떤 은혜인지 우리는 그 의미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는 은혜,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십자가 죽음을 맞게 되는 그런 은혜인 거지요? 그런데 그게 정말 마리아에게 은혜가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정말로 은혜로 여겨집니까?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마리아가 받은 이런 은혜를 주시겠다, 그러신다면, “네, 주님. 감사합니다. 그 은혜 제가 받겠습니다!” 그러실 분, 한 번 손들어 보시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참 중요한 한 가지 메시지, 우리가 놓치면 안 될 그런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은혜에 대한 우리의 오해, 또 편견의 문제입니다. … 여러분, 우리는 보통 ‘은혜’ 그러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이렇게 사전적인 의미를 먼저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언제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요? 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어떤 깨달음이나 감동을 은혜라 말하기도 하고, 또 우리 마음에 임하는 어떤 위로나 좋은 느낌, 그런 감정적인 부분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어떤 좋은 일에 대해서 우리는 ‘은혜’라고 말하지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때, 그때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얘기합니다. 맞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는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선하심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은혜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부는커녕 성경이 주로 강조하는 그런 은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지요. … 사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찾아보면, 우선 이 말이, 방금 나눈 그런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별로 많지 않다는 것에서, 우리는 일단 놀라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복음서에는 ‘은혜’라는 말 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분, 혹시 아시는지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고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아주 드물게 사용될 뿐입니다. 물론 그 드물게 사용된 경우 역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주로 예수님의 영광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처럼 말입니다. (은혜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영광과 연관된 말입니다.) 예수님 외에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는데요, 그게 누구겠습니까? 네, 오늘 본문의 마리아가 유일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았다고 나오는 복음서의 그 많은 사람들, 주님을 통해 위로와 힘을 받고, 그래서 인생이 바뀌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은 단 한 번도,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이렇게 표현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좀 놀라운 이야기이지요. 아마 오늘 이 이야기를 접한 데오빌로는, ‘은혜’라는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결국 지금 우리와는 조금 다른 입장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아, 은혜, 이거 정말 어마무시한 거구나. 그냥 좋은 느낌, 이런 게 아니구나. 내 판단과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영광, 무거운 영광이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성경이 무엇에 대해 ‘은혜’라고 말하는지, 어떤 은혜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가 눈을 뜨기 원하시고, 또 사모하길 원하시는지, 어째서 하나님은 그런 것에 대해 ‘은혜’라고 이야기하시는지, 우리도 마리아처럼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마리아의 태도, 반응, 이런 것들이 잘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 같은 쫄보는 아마 못한다고, 난 아니라고 그랬을 거 같습니다. … 말이 좋아 은혜이지, 이런 은혜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미 한 남자와 약혼하여 결혼을 앞두고 있고, 이제 시작될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는 그런 처녀에게, 약혼자의 아이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을 낳을 거라니요. 여러분, 이게 어떻게 은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가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고, 유다의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라고 해도,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위태롭게 될 게 뻔하고, 결국 아이 역시 사생아로 태어날 게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이가 왕이 된다는 것도 참 무서운 말이지요. 앞서 1장을 시작하면서, 5절에서 누가가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지금의 왕은 헤롯이 아닙니까? 여러분, 헤롯이 누구입니까? 유대인,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로마가 자기들 좋으라고 꼭두각시처럼 세운 그 헤롯이 유대인의 왕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롯의 아들이 아닌 그녀가 낳은 아들이 왕이 된다는 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이자, 지금의 왕에 대한 반란이 전제된 말인 겁니다. 결혼을 앞둔 평범한 처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닌 거지요. 사실 처녀라고 번역은 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나이는 아닙니다. 보통 유대인들 정혼하는 나이가 열두 살에서 열네 살이라고 하니까요, 마리아도 대략 열다섯 살 정도의, 처녀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녀에 가까운 나이였는데요, 그런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그런 이야기에 대해 성경은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 생각한 마리아의 첫 반응이 사뭇 놀랍습니다. 34절인데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입니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반응 같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보통은 “아, 저는 도저히 그런 일을 감당 못합니다. … 곧 결혼할 처녀에게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저는 그런 은혜를 원하지도 않고, 감당할 힘도 없습니다.” 뭐, 이렇게 말해야 정상 아닙니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건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지금 나는 처녀인데, 그런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요셉의 아이인 겁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겁니까, 그걸 묻는 모양새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천사가 그 방법을 가르쳐줬을 때 보이는 마리아의 반응을 보면, 마리아는 정말 어느 정도 이 일을 벌써 마음에 품고, 그 방법에 대해서 물은 건 아닌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앞에서 사가랴는 그런 반응이 아니었지요?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을 거라고 하자 사가랴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 믿을 수 있는 어떤 징조나 표징을 원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믿음 없음에 대해 천사가 지적하고 나무랐지요. 그래서 얻은 징조가 믿음 없는 말 그만 하라는 것, 말문이 막히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갑니다. 마리아도 그렇고 천사도 마찬가지지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를 마리아가 묻자, 천사도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 일이 가능하다.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었지만 임신하여 여섯 달이 지났으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하지 못함이 없다, 이야기해줍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충분한 답이 됐다는 거지요. “(나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 이게 요셉의 아이를 말하는 게 아니군요. 성령으로 태어나는 아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그런 아이라고 한다면, 그럼 오케이,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 되면 되겠군요. 그렇게 선언해버린 겁니다. 실로 엄청난 고백이지요. 뭐,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자신이 어떤 것을 감당해야 할지, 뭐 그런 걱정, 염려, 이런 것은 보이지 않지요. ‘은혜’라고 하셨으니까, ‘은혜’로 받는 겁니다. 내가 생각해서 ‘은혜’인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라고 하는 그것에 대해서, 마리아는 지금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그런 것입니다. 어떤 나의 필요와 욕구가 채워지는 그런 좋은 일들만이 은혜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 앞에 우리의 마음이 열려서, 기꺼이 그 필요를 우리의 마음으로 품는 것, 그게 은혜입니다. … 사가랴는 자식 달라고 평생 기도라도 했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이고, 마리아는 거기에 내가 주의 종이라고 응답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필요인 그 일에 대해 반응하고 순종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라고 부르는 것을 은혜로 받는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가 이 땅에 오시게 됐다고 누가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가랴도 그랬지만,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도 마리아처럼, 그 부르심을, 그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도 처음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여러 합당한 핑계를 대며 받아들이지를 않았지요.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 테니 믿어줄만한 증거를 달라고 하면서 빼고, 하나님이 지팡이로 증거를 보여주시자, 이번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여서 말을 잘 못하니 안 되겠다고 다시 한 발 물러섭니다. 내가 직접 너의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셔도, 끝까지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거절하다가, 네 형 아론을 붙여주겠다, 하나님이 노해서 말씀하시니까 겨우 못이기는 척 순종이라는 걸 하게 되지요. 다른 예언자들도 비슷합니다. 나는 아이라서 말을 할 줄 모른다, 나는 무엇 때문에 어렵다, 이 핑계, 저 핑계 안 되는 이유만 찾다가 그렇게 끌려가듯 부르심을 받아들입니다. … 세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고, 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가랴가 기도는 했지만 막상 그 일이 불가능할 거라고 스스로 단정해버렸던 것처럼, 그들도, 또 우리도 우리의 지식과 경험의 틀 안에서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라 말씀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지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저는 마리아의 이 고백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셨던 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 아빠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어린아이, 그래서 아빠가 ‘은혜’라고 하는 그것을 정말 ‘은혜’로 받아들이는 그 마음, 아빠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그 열린 마음, 여러분 그것이 사가랴에겐 없던 마리아의 믿음, 아니었을까요? 앞서 사가랴에게 가브리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요한이 태어나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인데,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하고,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한다고, 그렇게 백성들을 준비시킬 거라고 말입니다. 앞의 17절 말씀인데요, 저는 여기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게 뭔가, 이게 무슨 뜻인가, 참 고민이 많이 됐었는데요, 오늘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좀 이해가 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굳은 마음이지요. 사가랴처럼, 하나님을 믿지만, 이미 자신의 경험과 논리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가능성을, 온전히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마음들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 부드럽고 겸손하여서, 아빠 아버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자라고 한 겁니다. 실제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가 전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그들의 경험과 필요에만 갇혀서, 이방인에게까지 열린 하나님의 구원을, 그 구원에 있어서 그들이 감당해야 할 복 된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대부분이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 그 굳은 마음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주님이 은혜라고 말씀하는 그것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굳어버린 마음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현실에 대한 고정관념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마음이 굳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그 말씀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모습은 아닙니까? … 사실 이것은 우리의 어떤 신체적인 나이나, 신앙의 연륜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요. 다만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신뢰하고, 그분이 내게 좋으신 아바 아버지로서 온전히 경험되고 있느냐, 거기에 달린 문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 밭을,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고 온유하게 일구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성령께서 여러분 가운데 들어오셔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맑고 깨끗한 공기가 밖에 있다한들, 집안 창문을 다 꼭꼭 닫아 걸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성령의 바람이 들어와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도록, 부디 여러분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습니다, 고백하시면서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수많은 일들과 계기를 통해서, 특히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고 계실 겁니다. “은혜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말씀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겠지요. 그 은혜의 메시지가 뭔지, 그 은혜가 얼마나 우리에게 복되고 영화로운 부르심인지, 여러분 마리아처럼, 여러분도 그 이야기를 끝까지 한 번 잘 들어보시고, 또 깊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조금 힘들 것 같다고 그 은혜를 마다하지 마시고, 그것을 마치 혼자 다 감당해야 할 것처럼 오해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은혜가 되도록, 영광이 되도록, 주님이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물론 마리아의 삶이 늘 평안했느냐, 그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세상 기준으로만 본다면, 마리아가 정말 복된 삶을 산 여인인가, 거기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요. 아무리 예수의 어머니라고 해도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본 그 여인의 삶을 누가 복되다고 할 것인가, 분명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정반대의 이야기도 있지요. 가톨릭 같은 데서는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서, 그 어떤 인간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마리아를 존경하고 추앙합니다. 심지어 마리아의 중보를 바라며 그녀에게 드리는 기도도 자주 하지요. 그만큼 그녀가 받은 은혜, 그녀가 누린 영광이 크다는 뜻일 겁니다. 과연 무엇이 정말 복된 삶인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판단할 일입니다. 마리아의 믿음과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그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가치관의 문제이고, 각자의 신앙으로 판단할 몫입니다. … 며칠 전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되시는 배은심 여사의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만, 그렇게 자신의 아들을 민주화의 불꽃으로 보내고, 평생을 당신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 삶을 보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존경과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을 겁니다. 그 위대한 삶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지요. …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단지 고난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대해 좁아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해, 복된 삶에 대해, 저와 여러분의 시야가 조금은 더 온전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오늘 누가는 ‘예수’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데오빌로에게, 또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하지만 담대하게 반응했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열린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나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는 그 고백을 통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시게 됐다고,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데오빌로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겠지요. 그는 로마의 황제를 주로 섬기는, 황제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태어나 왕이 되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가 영원할 거라는 지금 이 이야기는, 그에게 그냥 단순히 하나의 종교를 믿고 안 믿고의 그런 문제일 수 없는 겁니다. 자신의 왕을 바꾸는 문제요, 주인을 바꾸는 문제요, 말 그대로 자신의 운명이 건 엄청난 결단이 요구되는 그런 문제인 것입니다. 아마 데오빌로는 이 편지를 읽는 내내 심한 중압감을 느꼈을 겁니다. 과연 나는 이 예수를 뭐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과연 나는 이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종의 전향서처럼, 무겁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입장은 조금 다르지만, 당연히 오늘 우리에게도 본문은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지, 우리는 그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으며, 그분께 우리가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 또한 주님이 말씀하는 그 은혜를 우리도 받고자 하는지, 그러한 삶이 참으로 은혜로 여겨지는지, 우리가 받은 은혜는 무엇이고, 또 어떤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누가는 우리에게도 그 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설교 중간에 드렸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여러분께 드려보면 어떻습니까? 만약 마리아가 받은 이런 은혜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겠다고 하신다면, “네, 주님. 감사합니다.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대답하시겠는지요. …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했던 그 인사로 설교를 마칩니다. “은혜를 받으신 여러분, 평안하십시오. 주께서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