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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강해 12.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

2021-04-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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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수요 성경 강해 --------------------------------- 레위기 11:1~47, 부정하고 정한 것(2) :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lev12 .mp3 파일 다운로드 ​ ■ 저희가 지난주에는, 본문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정결법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함께 생각해봤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있고, 그리고 그 속된 것 속에는 다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구별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셨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이미 그 존재 자체로 거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과 삶으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야 하는 부르심 가운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성막과 제사장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 안에 안전히 머물고, 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은 이제 정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주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언약에 충실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거룩함의 우선적인 필요조건이 정결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기에 합당한 상태, 하나님 백성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기에 적합한 상태가 바로 정결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결은 매우 쉽게 부정해질 수 있다고 했지요. 죄를 범했을 때나, 또 이미 부정해진 것과 접촉했을 때, 곧 부정해집니다. 그러한 부정함이 다시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는데요, 그 부정함이 심하거나 죄와 연관되었을 땐 반드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고,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경우에는, 오늘 본문의 경우에서처럼 단순히 부정한 것과의 일시적 접촉으로 부정해진 경우에는,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주의를 기울이며 스스로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만 정결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 오늘 본문은 15장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정결법 규례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바로 사람이 먹는 짐승, 동물에 대한 정함과 부정함의 구별을 내리고 있는 건데요, 이렇게 사람의 먹는 문제가 제일 먼저 대두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이 우리들의 몸과 실제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 몸을 구별하라고 하셨고, 그 출발은 그들이 먹는 것에서부터라고 말씀합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있는데, 정한 것을 구별해서 먹고, 부정한 것은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죽은 것과 접촉하지도 말라,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 사실 본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꽤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도대체 짐승 가운데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어떻게 나뉘는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만, …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이러한 정결과 부정은, 우리 인간 차원의 어떤 기준에 의한 구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구별입니다. 이런 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제의적 정결’이라고 부릅니다. ‘제의적 정결’, 제사나 의식의 차원에서의 정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정결함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상태를 만족해야 하는데요, 도덕적인 정결과 제의적인 정결입니다. 도적적 정결은 다 이해가 되시겠지요. 윤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의적 정결은, 제사나 의식의 차원에서, 그러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정결이라는 뜻입니다. 도덕적인 가치판단과 상관없이, 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정하신 정결함의 원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정결법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안에 담긴 신앙적 원리와 의미는 여전히 중요하고,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쨌든 본문이 다루는 정결과 부정은,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에서, 어떤 과학의 영역에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원리와 교훈이 들어있어서, 그 부분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적용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보시면 좋겠다 싶습니다. ​ 이와 관련해서 도움이 될 만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 정결함과 부정함에 관한 성경의 최초의 언급이 언제였는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 바로 노아의 홍수 때입니다. 방주가 완성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을 배에 태우라고 하시면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동물에 관한 이런 정결과 부정의 구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정결한 짐승이고, 뭐가 부정한 짐승인가, … 그것은 짐승들을 방주에 싣는 상황에서 설명되지 않고, 나중에 배에서 나올 때 설명됩니다. 바로 노아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때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물을 바로 이 정결한 짐승들 중에서 골라서 드립니다. 물론 여기서도 그 짐승이 어떤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해 번제를 드렸다고만 나옵니다. ​ 따라서 성경에서 짐승이 정결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서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하다는 것이지요. ‘제의적 정결’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니까 정결함과 부정함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번제를 드릴 때 아무 짐승이나 드릴 수 없고, 반드시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로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인 것처럼, 짐승의 정결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물학적인 요인이나,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깨끗한 그런 위생적인 요인은, 비록 그것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 제한적인 설명은 해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유의미한 설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우리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기준에 따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면 정결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부정한 것입니다. ​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문제에 접근할 때 깊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정결한 짐승이냐 부정한 짐승이냐의 문제는, 결국 그것을 인간이 ‘먹는 행위’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으로 대두된다는 점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면, 우리가 어떤 것을 먹는 행위는 결국 그것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것을 죽여야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고기를 먹는 행위는 죽음과 아주 밀접한 행위이고, 그래서 정결법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국 죄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 생각해보면, 식물에 있어서는 부정하고 정결하고가 없습니다. 오직 짐승, 가축, 동물만 이 구별의 대상이 되지요.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차이는 결국 짐승의 ‘피’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물도 생명이 있고, 또 동물의 피가 하는 역할을 하는 어떤 체액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피는 동물의 특징인 건데요, 그런데 성경은 동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피는 절대 먹지 말라, 율법이 정하고 있지요. 짐승을 먹더라도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사람이 동물의 생명을 취하여 먹는 것은, 그 자체로 실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어느 정도 침해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본래 하나님의 것인데, 인간이 그 생명을 먹을 수 있도록 일정한 제한을 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물을 먹거리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분명히 나와 있지요.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 동물을 잡아먹게 됐지요? 네, 홍수 이후에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은 동물의 생명도 취하여 먹도록 허락하시고, 다만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는 먹지 말라, 말씀합니다(창 9:4). 말씀드린 대로, 동물을 죽여 그 생명을 취하여 먹기는 먹되, 그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서 정한 방법에 따라 구별하여 취하도록, 이미 오래 전부터 강조해 오신 것입니다. ​ 짐승을 잡아먹는 문제에 대해 정결과 부정의 문제가 개입되는 기본적인 배경이 이렇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된 문제이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는 내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11장의 말씀에 대해, 어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어떤 생물학적인 설명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 한계가 너무나 분명한 시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설명을 하기 전에, 우리는 다만 생명에 대한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생명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또한 생명을 취하여 먹는 그것이 우리의 본래적인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허락과 양보라는 것을 기억하고, 늘 감사함으로 그리고 최대한 질서 있게 먹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굳이 율법대로 먹자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질서 있고, 정결하게 먹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의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 대해, 어떤 일관되고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본문에 담겨 있는 어떤 신앙적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소는 정결한데 돼지는 부정하여 먹지 말라고 하시는가, 왜 땅에 기어 다니는 짐승들은 다 부정하다고 하시는가, 그걸 어떤 생물학적인 이유에서 찾는 게 아니라,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어떤 신앙적 원리에 따라 분별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 역시도, 아주 제한적인 설명일 수밖에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설명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이제 그 부분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십시다. ​ 우선 본문에 보면, 보통의 가축 중에서는 정결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한데요, 하나는 (되)새김질이고, 다른 하나는 발에 굽이 있어서, 그것이 갈라져 있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아시는 것처럼 되새김질은 위가 여러 개 있는 초식동물, 즉 반추동물(反芻動物)이 한 번 삼킨 것을 다시 게워내어 씹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이런 반추동물의 대표가 바로 소이지요. 대부분의 반추동물이 소와 비슷한 동물들입니다. 소와 양, 낙타, 기린, 사슴 등이 그렇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반추동물은 기본적으로 초식동물입니다. 즉 다른 짐승의 생명을 취해서 먹거나 하지 않고, 오직 식물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짐승의 피에 노출되지도 않겠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보다 합당한 모습이고, 하나님께 속한 생명의 주권을 온전히 드러내는 그런 모습이기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돼지도 매우 중요한 가축이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차이가 나는데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돼지는 기본적으로 잡식성입니다. 풀도 먹지만 고기나 다른 여러 가지를 다 먹지요. 그런 면에서 돼지는, 소에 비해 부정합니다. 위생적으로 깨끗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야생에서는 돼지가 소보다 훨씬 더 깨끗하다고 하지요. 그런 차이가 아니라, 생명을 취하여 먹는 데 있어서, 정결하지 않은 상태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 같은 원리로, 다른 동물의 생명을 취하는 육식성, 잡식성 짐승은 거의가 다 부정합니다. 조류에 있어서도 그렇지요. 본문에서 먹지 못하도록 규정된 새들은 대부분 육식성이거나 잡식성입니다. 맹금류와 같이 다른 새를 잡아먹든 아니면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잡아먹든, 아니면 물고기를 잡아먹든, … 아니면 박쥐(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조류가 아니지만)처럼 잡식성이든, 다른 생명을 취하는 것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더 가까이 있는 생명들은 대체로 거의가 부정합니다. … 본래 죽어 있는 동물은 정한 것이나 부정한 것이나 모두 부정하다고 본문 24절 이하에 나옵니다. 죽음 자체가 생명과 반대되기 때문에, 동물이든 사람이든, 죽은 그 시체는 부정합니다. 그래서 그것과 접촉한 경우에는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가 되고, 그가 입던 옷도 부정해서 반드시 빨아야만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죽은 것을 먹는 짐승은 당연히 부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늘 부정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짐승을 먹는다면, 결국 사람 또한 부정해지지요. 되새김질하는 소나 양과 같은 짐승은 그런 의미에서 정결한 것입니다. ​ 아울러 하나님은, 발에 굽이 있어서 그것이 갈라져야 한다고, 그래야 정결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굽인데요, 그것이 갈라져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발굽이 갈라진 짐승이 대체로 초식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발굽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그 발이 땅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발굽이 일종의 신발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피부가 직접 땅에 닿는 것을 막아주지요. 그럼 왜 이것이 중요하겠습니까? 네, 땅에는 수많은 부정한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피가 고여 있을 수도 있고, 죽은 벌레나 작은 짐승의 시체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그냥 몸으로 접촉하게 된다면 당연히 부정해집니다. 그런데 발굽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안전하겠지요. 그래서 굽이 있는 짐승이 정결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에 기어 다니는 길짐승이 부정한 이유도 설명됩니다. 뱀처럼 몸 전체로 땅을 접촉하고 살아가는 짐승은,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위생적으로 어떠냐와 상관없이, 제의적으로는 늘 부정한 상태입니다. 계속 땅과 접촉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개나 고양이, 사자나 곰과 같은 동물들, 그냥 맨발바닥으로 땅을 접촉하여 살아가는 동물들도 부정합니다. 당연히 율법은 그런 동물들을 먹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이처럼 부정함은 기본적으로 죽음과 연관이 깊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결국 죄와 무질서에 연관되어 있지요. 죄의 삯이 사망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창조 이전의 상태가 무질서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짐승의 모습이, 그런 무질서의 상태와 가깝다고 여겨지면, 그것은 대체로 부정합니다. 반대로 정결함은 생명, 또 질서에 잇대어 있습니다. 창조는 질서이고, 그래서 정결함은 질서와 연관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그 종류대로,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환경대로 구별하고 나누어서 창조하십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고, 물도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고, 다시 물과 땅을 구별하시지요. 그래놓고 그 각각의 공간 가운데 종류대로, 질서 있게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서에 어긋나는 모습인 경우는 대부분 부정합니다. 예컨대 새도 아니면서 새처럼 날아다니는 곤충이 그래서 부정합니다. 곤충 중에서 메뚜기처럼 뛰어 오르는 다리가 있는 것만 정결한 것은, 그것이 새와 명확히 구별해주는 곤충만의 특징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 생명 고유의 질서정연함이 있을 때, 그것이 살아가는 환경에 질서 있게 적응한 모습일 때 정결한 것이지요. ​ 물에서 사는 물고기의 경우,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정결하다고 본문은 말씀하는데요, 그것이 물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 질서 있는 모습이라고 율법이 간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어도 물에서 잘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냥 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다면, 장어처럼, 그 형태가 마치 뱀과 비슷해지고, 뭔가 일반적인 물고기와는 좀 다른 모양이 돼서, 어디에 속해야 할지 명확해지지 않고, 어딘가 질서와 온전함이 부족한 모습이 되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류는 본문에서 상대적으로 간단히 언급되는데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유목생활에 익숙하여, 어류를 접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의 삶의 환경에 율법의 일차적인 관심이 있다는 것이지요.) ​ 물론 이러한 설명들도 매우 불완전하고, 합리적이지 못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건 그저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완전한 근거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는 어떤 기준을 발견하고, 거기에 따라 분별해보려는 것뿐입니다. 제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이렇게 생명과 질서의 차원에서, 그리고 죽음과의 접촉의 차원에서 정결과 부정을 바라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래도 어느 정도 성경적인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정결함이 부정함으로 떨어지는 주된 원인이 죄와 죽음인데, 이 죄와 죽음은 본질상 잇대어 있어서, 죽음, 그리고 무질서와 연관된 것들은 부정한 짐승이고, 사람은 그것을 먹지 말라고, 그 죽은 것을 만지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 여기 12장의 내용 가운데 제 설명이 빠진 부분도 있는데요, 예컨대 그런 부정한 짐승의 주검이 사람의 옷이나 가죽이나 그릇 같은 물건에 닿았을 때, 또 그것이 물에 닿았을 때의 경우인데요, 이제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여러분이 한 번 더 본문을 읽어보시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실 것으로 생각이 돼서, 이 부분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그것 역시 부정해지고, 결국 물로 씻거나 혹은 그럴 수 없다면 폐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또한 이렇게 짐승과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함은, 상대적으로 그 위험성이나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정해졌다고 해서 어떤 제사를 통해 정결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그 부정함이 사라지게 되지요. 다시 다른 것에 접촉하여 그것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도록, 일상에서 주의를 기울이며 하루를 조심히 보내면 됩니다. … 실은 그러한 삶의 태도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의 모습인지를, 성도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갈 것을 하나님은 일관되게 요구하십니다. 거룩함과 속됨, 정결함과 부정함의 상태를 늘 인식하고, 정결함을 지켜 거룩함에 이를 수 있도록, 성도는 삶 속에서 늘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 무엇보다 먹는 것에 관한 말씀이 이렇게 정결법의 첫머리에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몸의 거룩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단지 도덕적으로 정결한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습관, 특히 먹고사는 모습에 대해서도 성도는 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또한 말씀드린 것처럼, 자연이나 환경, 또 동식물 등, 그 무엇도 우리 인간의 주권 아래 있지 않다는 것, 그 생명의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겠지요.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본문이 기록되고도 벌써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났고, 그동안 엄청난 과학의 진보를 이뤘지만, 여전히 인간은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도 속수무책이지 않습니까? 이번 코로나가 박쥐나 무슨 천산갑 같은 데서 왔다고들 추측하는데, 그런 건 먹지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지요. 질병과 생명에 대해, 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한계가 있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은, 그런 존재임을 잊지 말고, 늘 생명 앞에 겸손히, 그리고 질서 있는 모습으로 먹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 비록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더는 이러한 제의적 정결이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게 됐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먹는 문제 앞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신앙적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무거워졌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만약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근심하거나 실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부정한 것을 먹고 만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문제입니다. 음식 때문에 누군가를 실족하게 할 바에야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사도의 말을 우리 또한 귀담아 듣고, 십자가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를, 단지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만 삼지 말고, 우리의 주 되신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이 말씀이 그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 모든 삶의 모습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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