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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강해 5. 속죄제

2021-03-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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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3 수요 성경 강해 --------------------------------- 레위기 4:1~5:13, 속죄제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설교 도입부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파일 lev05(2) .mp3 파일 다운로드 ​ ​ ■ 번제와 소제, 화목제에 이어서, 오늘은 네 번째로 속죄제(贖罪祭, 정결제)에 대해서 살펴보는데요, 그 본문 내용이 길고 좀 복잡하지요? 분량이 좀 많아진 것은, 누가 이 제사를 드리느냐에 따라 그 제물의 종류가 달라지기 때문인데요, 본문에 기록된 순서대로 보면, (대)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그리고 평민이 각각 다른 속죄제물을 드렸고, 이에 대한 설명이 4장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장에도 일부 속죄제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몇 가지 특별한 경우에 대한 설명과 또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속죄제에 대해서 별도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 그럼 우선 속죄제를 언제 드려야 하는지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름이 ‘속죄제’이니까 죄와 연관된 것일 텐데요, 오늘 본문 4장 2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다는 말이 뭘까, 그냥 ‘죄를 범하면’이라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같은 내용을 기록하는 13절, 1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부지중에 (죄를) 범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처음엔 내가 죄를 지은 줄 몰랐다가 나중에 그것을 깨닫게 된 경우에,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인 것입니다. ​ 본래 우리말 ‘죄’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여럿 있는데요, 우리는 다 ‘죄’라고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그 죄의 성격에 따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류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그런 ‘죄’의 표현이 ‘하타’인데요, 한 번 저를 따라해 보실까요? ‘하타’ … 그런데 이 ‘하타’라는 단어는 본래, 화살이 그 과녁을 빗나간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화살을 쏘면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과녁을 빗나가게 쏘는 사람은 없지요. 나름 조준을 해서 쏘는데, 의도치 않게 과녁에서 빗나갈 때, 마찬가지로 그렇게 죄를 범할 때, 처음엔 잘 과녁에 맞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가서 확인을 해 보니 과녁에 맞은 화살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런 죄에 대하여 성경은 ‘하타’라고 하고, 본문 2절에, ‘범하였으되’라는 말이 바로 그 단어입니다. 아울러 ‘속죄제’라는 히브리어 명사 역시 이 ‘하타’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는데요, 속죄제는 ‘핫타트’라고 합니다. 그냥 여러분은 ‘하타’ 정도만 기억하셔도 좋겠습니다. (화목제[쉘렘]에서 ‘샬롬’을 기억하듯) ​ 의도하지 않았고, 처음엔 죄인 줄도 몰랐고, 비록 고의로 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계명의 위반이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네, 본인이 죄라는 걸 몰랐다고 해서 그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과속한 줄 모르고 운전을 했고, 몇 주 지나서 집으로 과속 범칙금 고지서가 날라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얼굴이 찍힌 사진까지 동봉해서 말이지요. 내가 몰랐다고 그냥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당시에 내가 인지를 했든 못했든, 그때도 역시 법을 어긴 것은 어긴 겁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본인은 그 문제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뜻이고, 그러니 어디서든 아무 의식 없이 같은 문제를 계속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의도했든 안 했든, 내가 인지하고 있었든 아니든 죄는 성립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죄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타’라는 이 말에는 ‘나태함’과 ‘게으름’의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죄는 보통 우리의 영적 태만에 의한 결과일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속죄의 제사가 필요하다고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물론 알면서, 고의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죄는 더욱 심각합니다. 그러한 죄는 여기 속죄제의 대상조차 아닌 겁니다. 민수기에 보면 그런 죄는 아예 그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고 나옵니다(민 15:30). 하나님 백성 공동체에서 추방을 하든, 아니면 처형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예 그렇게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속죄제가 기본적으로 이렇게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한 제사라는 것을 보면, 죄라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얼마나 큰 문제인지 짐작케 합니다. 비록 모르고 지은 죄이지만, 그래서 우리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죄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가 가장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그런 부지중에 지은 죄를 어떻게 하나님이 다루시는가를 보여주심으로써, 다른 더 큰 죄가 가진 심각성을 분명하게 강조하십니다. ​ 모르고 지었던 죄, 그치만 이제 깨닫게 된 죄를 속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고의적인 죄의 무게에 대해서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겠지요. 또한 이렇게 나중에라도 죄인 것을 깨닫고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죄로 여기시는지 분명히 그들은 먼저 알아야 하고, 그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언행과 삶을 성찰하는 일에도 소홀할 수 없는 것입니다. ​ 뿐만 아니라 속죄제는 기본적으로, 내가 나의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죄인 줄 몰랐다가 나중에 죄를 깨닫는 과정이지 않습니까? 스스로 깨닫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은 분명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기 마련이지요. 친구나, 이웃이나 가족이 혹은 선지자가 그 잘못을 지적해서 깨닫는 경우도 많았을 겁니다. 그렇게 누군가 나의 허물과 죄를 드러낼 때, 여러분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쉬운가요? 아니지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 남이 내 잘못을 지적하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거부감부터 먼저 갖습니다. 그 사람의 의도부터 생각하게 되고,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됐을 때도 적어도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핑계를 대서 그 상황을 모면하는 데 힘을 쏟지요. 속죄제까지 가려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죄에 대한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또 죄에 대한 자복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 성경에 보면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지요. 선지자를 통해 책망을 듣고 지적을 받았지만 돌이키지 않는 겁니다.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지적한 사람을 해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죄를 알게 돼도 목이 곧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인 다윗이 나중에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듣고, 뒤늦게 돌이켜 자기 죄를 자복하며 참회하는데요, 여러분, 사실 이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대부분의 왕들은 아예 그 선지자를 가두거나 죽이지 않습니까? 아마 우리도 그럴지 모릅니다.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또 평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온전해야만, 그래서 정말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그런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또 그렇게 돌이킬 수 있도록, 평소에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부디 겸손한 마음으로, 죄 앞에 무기력한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죄를 자복하고 돌이켜서, 죄를 이겨나가시기를,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백성의 모습으로 매순간 온전해져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말씀드린 대로 속죄제는 누가 이 제사를 드리느냐에 따라 그 제물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3절 말씀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곧 대제사장이 죄를 범한 경우에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립니다. 13절 이하에 보면 이러한 수송아지 제물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회중)가 죄를 범한 경우에도 드리는 걸로 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전체 백성의 죄가 같은 수준으로 다뤄졌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이 생각납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죄는 곧 온 회중의 죄가 되고 말지요. 그만큼 대제사장이 가진 영향력이 지대하고, 그의 죄는 결국 온 백성의 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또한 족장이, 그러니까 백성들의 리더들이 죄를 범하여 속죄제를 드릴 때는, 숫염소로 드리라고 22절 이하에 나옵니다. 소보다 한 단계 아래 제물이지요. 그리고 일반 평민들의 경우는 암염소 혹은 어린양으로 드리게 되어 있다고 2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물로서는 염소가 양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는 것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5장으로 넘어가서 우리가 읽은 7절 이하에 보면, 양을 드릴 수 없는 형편의 가난한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경우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드리기 어려운, 정말 가난한 경우에는, 짐승이 아니라 곡식으로, 곡식을 곱게 갈아서 십분의 일 에바, 약 1.5~2kg 정도의 곡식 제물을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 여러분, 이러한 제물의 차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무엇입니까? 죄의 영향력, 또 죄로 인한 결과가 더 심각할수록 더 귀한 제물이 드려졌다는 것이고, 아울러 그 누구도 이 죄의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것,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평민이든 귀족이든, 그 누구라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가운데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속죄제로 고운 가루를 드리게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속죄의 제사라고 해서 반드시 피를 흘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히브리서 말씀이 있습니다만(히 9:22), 피를 흘리는 것 그 자체에 속죄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동물의 피로 속죄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렇게 속죄를 정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속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곡식 가루로 드리는 속죄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번에는 속죄제가 드려지는 절차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는데요, 제물에 따라 작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비슷한 절차로 속죄제가 드려집니다. 우선 제물로 드릴 짐승을 회막 문 앞으로 끌어와 그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그것을 잡게 되는데요, 여기까지는 번제와 동일하지요. 그런데 사실 속죄제의 중요한 부분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바로 그 제물의 피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인데요, 속죄제에서는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앞서 번제나 화목제에서는 짐승의 피를 받아 그것을 번제단 주변에 뿌리기만 하면 됐었는데요, 그런데 속죄제에서는 피를 제단에 뿌릴 뿐만 아니라, 피의 일부를 대야에 따로 담아서, 그걸 제사장이 회막 안으로까지 가지고 들어가서, 손에 그 피를 찍어서 성소의 휘장 앞에 뿌리고, 또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의 뿔에도 피를 바릅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다시 뜰에 있는 번제단 뿔에도 피를 바르는 거지요(종류에 따라 다름). 그러고 나서 남은 피는 다시 번제단 아래에 쏟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제물의 피를 ‘뿌리고,’ ‘바르고,’ ‘쏟는’ 총 세 가지의 과정을 거쳐서 제물의 피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 이렇게 피를 성막의 성물들에 바르고 쏟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중에 8장에 가서 보면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을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예식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때 속죄제를 드리면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바르는 것에 대해서 그 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피를 번제단 밑에 쏟는 것도 그 제단을 거룩하게 하는 것으로 나오지요. 결과적으로 속죄제에서 피를 뿌리고 바르고 쏟는 것은 모두 그 성소의 기물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거룩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 그러니 여러분, 이 말은 역으로 어떤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죄라는 것이 단순히 죄를 범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고, 그 죄인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가 만지고 접촉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을 더럽히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부분입니다.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죄는 죄가 범해진 곳, 그 땅을 더럽히고, 또한 하나님의 성소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당연히 죄를 범한 사람의 삶에도 지속적으로, 그의 삶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피를 통해 성소의 부분 부분을 정결하게 해야만 하는 이 속죄제가 바로 그러한 죄의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사인 것입니다. ​ 속죄제를 통해 제사장은 죄로 더럽혀진 성소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속죄제’라는 이름에, ‘정결제’라는 이름을 덧붙입니다. 죄를 사하는 제사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로 인해 생긴 더러움을 정결하게 하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피부병이나 유출병처럼 율법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경우에 드리는 제사도 속죄제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일견 틀린 말은 아닙니다. …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죄가 누구의 죄이냐에 따라 그 오염의 범위도 달라지는데요, 당연히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죄가 더 광범위한 오염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누가 됐든 죄를 품은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만약 그런 상태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간다면, 누구든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상태이지요. 속죄제를 통해 죄인과 성막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그 백성과 안전히 함께 거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단지 죄를 사하는 제사만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하여 부정해진 것들을 다시 정결하고 거룩한 상태로 회복하는 제사다, 하는 것을 여러분 기억해두시면 좋겠습니다. ​ 속죄제의 제사 절차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그 제물에 있어서, 하나님께 태워지는 부분과 남는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속죄제에서 하나님께 태워지는 것은 화목제 때와 마찬가지로 기름과 콩팥입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 제물을 이번엔 어떻게 합니까? 다 같이 먹거나 하지 않지요? 네, 절대 먹을 수 없습니다.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미 자신과 동일시 된 그 제물, 그래서 자신의 죄가 전가된 그 고기를 예배자가 먹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죄를 먹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름과 콩팥 외에도, 나머지 전부를 다 태우는 게 맞는데요,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의 성막에서 태우는 게 아니라, 성막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거기에서 태운다는 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죄가 전가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예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러 살아가는 삶의 공간, 그걸 성경에서는 ‘진영’이라고 하는데요, 그 진영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태우라고 하십니다. 진영 바깥은 결국 광야인데요, 그 광야 어딘가에 그것을 처리할 장소를 미리 정하라고 하셨고, 성경은 그곳을 가리켜 ‘정결한 곳’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속죄제 외에 다른 제사들의 경우는, 제물을 태우고 남은 재들을 이 ‘정결한 곳’에 모아서 버리라고 하셨는데요, 이 속죄제에서는, 아예 여기서 태워서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속죄의 제물이 다른 제사와 달리 진영 밖에서 태워지는 것에 대해,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예표로 이해합니다. 골고다 언덕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지요? 모든 인간의 죄가 그분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 실제로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이번 속죄제가 가장 예수님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속죄제를 통해서 얻었던 죄로부터의 정결함이, 이제 새 언약 아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죄를 씻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십자가 죽으심은, 바로 이 속죄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표현에 있어서 ‘화목’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또 실제로 신약성경에 ‘화목 제물’이라는 표현도 나오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지난주 ‘화목제’와 연결되나 싶지만, 아닙니다. 여러분, 화목제는 한 마디로 어떤 제물, 어떤 제사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시지요? 네, 그것은 감사의 제사, 감사의 예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이웃을 향한 화목으로 확대되는 그런 제사가 화목제였지요. 물론 예수님의 몸에도 그런 의미가 있지만, 죄로 인해 어그러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화목제가 아니라 속죄제이고, 이런 속죄제를 완성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보혈이라는 것은 잘 구별해서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 끝으로 5장 앞쪽에 나오는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여기에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몇 가지 특별한 경우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간단하게만 정리하면, 어떤 일의 증인으로서 자기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은 경우에 속죄제를 드리라고 되어 있고, 또 부정한 것과 접촉한 경우, 그리고 부주의하게 맹세한 경우에도 속죄제를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비록 앞선 4장의 내용들처럼, 내가 모르고 죄를 범했다가 나중에 알게 된 경우라고 보기에는 조금 어렵지만, 이것들 또한 개인적인 태만과 부주의에 의해 이루어진 죄라는 점에서, 속죄제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속죄제에 대해서는 이제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치고, 전체적인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하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속죄제가 다른 제사에 비해서는 조금 복잡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여러분, 이해가 충분히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속죄제는 모든 제사 가운데 가장 의무적인 성격이 강한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사를 드리는 빈도나 그 제물의 종류로 볼 때, 속죄제는 결코 그 부담이 가볍지 않은 제사입니다. 비록 일부러, 고의로 지은 죄가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과 생사화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하나님은 분명하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단 한 번의, 영원한 속죄 제사가 드려진 우리에게도 죄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죄는 또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복을 우리가 누릴 수 없도록 만듭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께 다른 좋은 것으로 헌신한다 해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을 느끼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고, 탄식하게 만들고, 성령의 은혜를 소멸하게도 만듭니다(엡 4:30). 심지어 죄로 인해 발생한 삶의 문제도 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모든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떤 고난은 분명히 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문제 앞에 늘 민감하고 진지하게 반응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 그렇다고 죄에 대한 노이로제(신경증)를 안고 살아가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거룩한 부르심을 우리는 모두 받았습니다. 이미 우리의 죄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히 해결되었고,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의 거룩함과 존귀함을 인정하고, 그러한 죄들이 지금의 나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나와 무관한 삶 모습임을 다시, 또 다시, 믿음으로 선포하며, 우리는 죄를 이겨내야 합니다. ​ 말씀드린 것처럼 속죄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넘어질 때마다, 그리고 그것이 죄임을 깨달았을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만일 진실하게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요일 1:9). 여러분, 믿으십니까? … 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결국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얼마나 진실하게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감추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기만 해도, 우리는 죄라는 맹수가 가진 이빨과 발톱을 모두 잘라버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죄의 고백은 중요합니다. 죄를 고백할 때,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을 통하여 역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내가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바울 사도가 고백했지요. 성도는 그 믿음이 온전해지면 온전해질수록, 이른바 성화의 과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자아를, 여호와 앞에, 또 사람들 앞에 드러내게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드러난 죄는 더 이상 성도를 얽매지 못합니다. 늘 넘어진 자리에서 진실하게 죄를 고백함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그래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임을 확증하시기를 바랍니다. ​ 죄를 깨닫고, 죄를 자백하게 되는 것부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지만, 우리 스스로 그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선택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어느 순간 죄를 깨닫게 되고, 죄를 고백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여 말씀을 듣는 것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고, 어떤 이유와 계기를 만들어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고백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오늘 속죄제의 이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가 모르고 있던 죄와 허물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입을 열어 하나님 앞에 온전히 고백하게 하시는 귀한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죄를 깨닫고 돌이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아 영문 밖으로까지 나가는 삶, 곧 의에 대하여 살아 있는 온전한 삶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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