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020년 12월 13일 주일 설교)
2020-12-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대림절 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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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8~24,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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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15) 본문 20절의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약 한 달여 만에 고린도전서 강해를 이어가게 되는데요, 잠시 내용을 되짚어 보면, 앞의 6장까지는 고린도교회 내부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책망과 권면이 주로 담겨 있었고, 여기 7장부터(10장까지)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 사도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 포함되어 있던 여러 질문에 대해 바울 사도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신앙이나 경건을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은가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눴는데요, 오늘 읽은 본문에도 이와 비슷한 주제가 이어집니다. 미혼자나 과부의 결혼에 관한 문제, 또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성도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16절까지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내용을 우리는, 지난 3주간 심경미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함께 나누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히 정리만 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우선 바울은 이혼한 사람들, 또 사별하여 혼자 된 사람들에게 무조건 재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8절에서 이야기하지요. 사실 바울이 살던 당시에는, 오늘에 비해 이혼과 재혼이 훨씬 더 흔한 일이었다고 하는데요, 이혼을 했다면 서둘러 재혼을 하는 것이 사회적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재혼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이것이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였을 텐데요, … 사회가 정해놓은 어떤 기준이나 조건에 맞춰서 그대로 살아가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대로, 자신의 부르심을 선택하고, 그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관점이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물론 이미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부부라면, 그 관계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에 힘을 쏟으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배우자의 음행이 아니라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본문의 전체적인 관점 역시 이와 동일합니다. 신앙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결혼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은 유대인이었지요. 이미 부부 양쪽이 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건데요, 하지만 오늘 바울이 말하는 대상은 이와 다른 상황입니다. 배우자 중에 한 사람이 먼저 그리고 처음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경우, 그래서 나머지 한 쪽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수님의 관점을 그대로 적용해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원하지 않는 한, 이혼하지 말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14절에 보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아직은 믿음이 없더라도, 믿는 배우자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그가 결국 하나님을 알게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건데요, 바울은 이 부분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형이 아니라, 그렇게 된다는 평서문으로 말합니다. 훨씬 더 강력한 어조인 거지요. 믿는 성도의 삶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거룩한 능력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능히 이긴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당시 믿지 않는 배우자들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지 않는 그런 불신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요. 그들은 거의 대부분 이방 신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 참여하고 …, 그렇게 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한 범죄자를 숭배하는, 이상한 사교(邪敎) 집단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런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라고 말하고 있고, 결국 성도의 거룩함이 그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그들도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주님을 만졌을 때처럼, 주님이 나병환자를 만지셨을 때처럼, 부정함이 정결함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거룩이 전염되고, 생명이 전염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랬지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었고(행 24:5), 예수를 영접한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의 가족은 물론 많은 주변 사람들이 거룩함에 물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의 가족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바르게 예수를 믿는 일에 힘쓴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복 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살아내야 할 믿음의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아마 여러분이 저보다도 더 잘 아실 겁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바울이 살던 시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부정적입니다. 얼마 전에 SNS를 통해 제가 기막힌 글을 본 적 있는데요, 어떤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국 교인들, 모두 십자가 목걸이를 해주세요. 일반인들이 알아서 피해 다닐게요, 부탁합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어떤 일부만의 인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다만 대놓고 말은 못하고 의심의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지요. 상황이 이러하기에, 저와 여러분의 신앙 역시 초대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과연 정말 경건의 능력이 있는가, 정말 성도가 가진 거룩함의 영향력이 어떠한가, 제대로 시험대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그들도 거룩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역으로 우리가 영향을 받아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바깥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인지, 이젠 정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보다 더 힘써 복음 앞에 깨어 있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런 세상의 분위기 속에서, 그저 그런 종교인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저 이 사회의 선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온전한 믿음을 사모하고, 더욱 힘써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 여러분, 절대로 자포자기의 마음이면 안 됩니다. 전도해도 안 된다느니, 이젠 다 틀렸다느니, 이런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제대로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해집니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진짜 복음의 능력이 더 온전히 역사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다시 말씀과 기도의 본질로 돌아가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우리의 행할 바가 무엇인지 잠잠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후반부, 17절부터 24절의 말씀은, 이러한 현실 속에 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강조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17절, 20절, 그리고 24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어떤 한 구절 속에 담겨 있는데요, 17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나옵니다. 20절에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또 24절에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함에 있어서,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두 가지 예시를 들어 설명합니다. 18절과 19절에는 ‘할례’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21절부터 23절까지는 ‘자유인과 종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할례에 대한 말씀부터 생각해보면 …,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그가 유대인으로서 이미 할례를 받은 상태였다면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 하면, 당시 이방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 중에는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마치 무할례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복원 시술을 받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중에도 그런 시술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나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속한 자다, 그러니 할례 받았던 걸 무르고 싶다, 이런 마음이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러지 말라고, 그냥 할례 받은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된다고 말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방인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동시에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할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던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특별한 징표를 몸에 새김으로써, 내가 이제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자각하고자 했을 텐데요, 바울 사도는 이 경우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할례든 무할례든 그건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의 모습 그대로 지내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21절부터 이어지는 두 번째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또 상식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이번엔 종과 자유인의 신분 문제인데요, 만약 누군가 종의 신분, 노예의 신분일 때 예수를 믿게 됐다면, 그는 대부분의 노예가 갈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유인이 되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이 말이 이런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노예에게 있어서 자유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 최고의 소망이자 평생의 과업이 자유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유가 뭔지, 구원이 뭔지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신약의 빌레몬서 같은 성경이 바로 그런 배경 하에 기록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성경은, 부르심 받은 그 부르심대로 지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노예였던 사람은, 마치 자유인이 되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자유인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지 말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가진 그의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이미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된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미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종의 신분조차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 거룩한 영향력이 노예의 삶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연약하고 무능한 자의 삶을 통해 부요하고 유능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고, 사도는 앞에 이미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고전 1:27).
물론 이것이 노예로 하여금, 그가 자유인이 되는 길이 있는데도 그걸 굳이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21절에 보면,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나오지요. 기회가 있다면 자유인이 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고, 그 ‘부르심’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이 부르심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 19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24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 우리의 어떤 형편이나 상황을 더 좋게 만드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말씀인데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에 아멘이십니까?(*)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거나 더 좋은 형편을 누리게 됐을 때, 그것이 우리가 성도로서의 부르심을 살아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데 별로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함을 우리는 경험하지 않습니까? … 우리의 경제적인 형편이 좀 나아진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더 잘 순종하고, 비정규직이었다가 정규직이 된다고 이전보다 더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고, 그 하나님과 더 온전히 동행합니까? 남을 섬기는 종의 신분이었다가 남을 부리는 사람이 된다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만듭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경험상으로도 그렇지 않지요?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팔려간 노예였을 때, 누군가의 종이었을 때, 옥에 갇힌 죄수였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 부요할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목동이었을 때 하나님으로 인해 참 생명과 만족을 누렸던 사람이 왕이 돼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맺고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우리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이미 인정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귀하고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존귀하며 충분히 영화롭다는 것이며, 그 삶을 하나님이 친히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의를 누리며 사는 삶이 다름 아닌 하나님나라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삶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가 가득함을 믿고, 우리가 결코 실패자, 낙오자가 될 수 없다는 확신 속에,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설사 내가 자유인이요, 남을 부리는 자이면 그게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2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이미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어차피 지극히 작은 자까지도 용납하고 먼저 섬겨야 하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 저와 여러분의 소명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부자라 할지라도, 세상 모든 사람을 종으로 부리는 황제라 할지라도 그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는 결국 그리스도의 종이자,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섬기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의 부요함과 그의 높은 지위는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유익은커녕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오죽하면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삶을 살던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고, 그분이 허락한 의로움을 참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그분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그의 삶을 더 안전하고 평안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아바 아버지 안에서 부족함 없는 사랑과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아버지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러면 너희가 원하고 근심하는 모든 것들을 더하실 것이다. … 여기서는 ‘먼저’가 중요하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기에, 주님은 그 한정된 것들을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갈 것인지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바꾸는 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부르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분명한 갈림길을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심겨진 곳, 하나님이 우리를 심으신 그곳에서 꽃을 피우는 데 집중해 보십시다. 더 좋은 땅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꽃을 피워야지, 그런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를 심으신 곳이 어디든, 거기서 생명의 꽃을 피우고, 거기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려고 노력해보십시다. … 우리의 지위나 신분이나 형편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보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누리며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한 노력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보십시다. 그랬을 때 정말 우리가 구하지 않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는지, 한 번 경험해보십시다. 할렐루야!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말이 쉽지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많은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그렇게 믿고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찾고 구해야 합니다. 적당히 가까이 하고, 구하는 척만 해서는 안 되고, 예수에게 좀 더 가까이, 아주 실제적으로 가까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원하고 사모하듯이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노력해 보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한 그 의와 생명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의 삶이 놀랍도록 풍성해질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을 향해 나아가다가도 자꾸만 실패하고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우리 자신에게 많이 실망하는 일도 생길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실제적인 믿음의 성장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조금 더 깊이 알아갈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바 그 의와 생명이 무엇인지도 비로소 알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여러분 옆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 경건의 능력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고,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누군가 거룩하게 되는 일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더러 십자가 목걸이를 차고 다니라고, 그러면 피해서 다니겠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가 전할 수 있는 메시지가 이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나라, 그 온전한 자유와 생명과 만족만이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의 이유일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 살아있는 메시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