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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67. 브살렐과 안식일

2020-07-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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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수요 성경 강해 --------------------------------- 출애굽기 31:1~18, 브살렐과 안식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음질이 좋지 못함을, 용량으로 인해 후반부가 생략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고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번 주로 성막과 관련된, 하나의 내용이 일단락됩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 수요성경강해는 없어서, 다음 주 수요성경강해(29일)는 드리지 않습니다.] 25장부터 계속된 성막에 대한 말씀이 오늘 31장으로 마무리되는데요, 이 성막을 실제로 건축하는 과정은 3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의 내용, 곧 32장부터 34장까지에는,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과 그로 인한 여러 후속 조치들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지금의 이 언약들이 그 시작 단계부터 큰 위기에 빠지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부터는 제 안식월이 끝나는 11월에 다시 이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강해 방학 기간 동안, 출애굽기 복습을 한 번 해보시면 어떨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 3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지요. 앞쪽 11절까지는 성막과 그 모든 기구들을 만드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내용이고, 12절 이하는 전혀 다른 내용, 안식일 계명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두 개의 돌 판에 말씀을 기록하여 모세에게 주셨다는 마지막 18절은, 흐름상 그 다음 32장과 연결된 부분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먼저 본문 전반부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전체 성막 건축의 책임자로 브살렐이라는 사람을 직접 부르십니다. 본래는 [베-짤-엘]이라고 발음되고,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날개)그늘,’ 또 그로 인한 ‘하나님의 보호’입니다(그룹의 날개와 속죄소와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브살렐은, 지금껏 성경에 그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던 사람인데요, 여기서 갑자기 하나님의 지명을 받은 자로 깜짝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막 건축의 막중한 사명을 받습니다. 2절에는 그의 가족적 배경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요, 브살렐은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입니다. 브살렐을 돕는 자로 세워진 오홀리압(6절) 역시 레위 지파가 아니라 단 지파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성막의 여러 기물을 만드는 일이니 레위 지파 사람들, 제사장 가문이 동원되어야 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막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만큼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살렐의 할아버지는 훌이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라고 2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우림과 둠밈’의 ‘우림’이라는 단어의 단수형입니다. ‘우림’은 ‘빛들’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할아버지 훌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난 1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손을 붙들어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했던 인물로 추정됩니다.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성경에는 처음 나오는 이름이지만, 이처럼 하나님은 브살렐을 알고 계셨고, 정확히 그의 이름을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본문 2절 맨 앞에는 사실 ‘보라’라는 뜻의 ‘라아’라는 동사가 있는데요,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을 생략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Look!’이나 ‘See!’라고 옮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라, 내가 지명하는 브살렐이 여기 있다! 여기 내가 예비한 하나님의 일꾼이 있다.” 하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부르심의 성격이 더 명확해집니다. 모세가 추천하거나 브살렐이 자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예비하신 종을 직접 불러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꼭 자원하는 마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뭔가를 맡아 하는 걸 좋아하고 또 그럴 때 좋은 에너지를 얻고 또 결과도 좋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도 그렇습니다만, 때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르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가실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 주신 일이 정말 중요한 것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출애굽이나 가나안이 어디 사람이 자원해서 갈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원해서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갔습니까? 오늘 브살렐도 마찬가지지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부르시고 맡기실 때 거기 순종하고 자원함으로 감당하는 것, 그것이 실은 가장 온전한 순종인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신 이에게 하나님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루아흐 엘로힘]을 그에게 부어 주십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은 브살렐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이 부분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 성령을 어떤 한 사람에게 충만하게 부으셨다고 나오는 첫 번째 경우가 바로 이 브살렐입니다. 창세기 맨 앞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시던 그 ‘하나님의 영’(창 1:2)이,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거하실 거룩한 장막을 만드는 일을 위해 부르신 브살렐 가운데 가득히 부어졌습니다. 그랬더니 브살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네, 그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재주를 허락하셔서, 그가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성막의 모든 기물을 ‘만들게’ 하셨습니다(3~4절). 단순히 탁월한 재주만 더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깊이 연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주셨고, 그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말들이긴 하지만, 지혜, 총명, 지식은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지식[다아트](knowledge)은 진리를 파악하는 힘을 일컫는 말이고, 총명[테부나](understanding, discernment)은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며, 지혜[호크마](wisdom)는 그 파악하고 분별한 진리를 실제의 삶에서 판단하여 적용하는 능력을 주로 가리킵니다. 또 재주[멜라카](skill)는 그것이 반복 숙달되어 익혀진 어떤 기술이나 요령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비슷한 것도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약간씩 의미상 차이가 있지요. 어쨌든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혜와 생각이 특별히 깊고 완전해지게 하십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막을 만드는 일에 필요한 것이 단순한 손재주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어진 재료로 어떤 모양의 물건을 정확히 만들어내는 기술만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영적 의미와, 하나님의 뜻과 성품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어내는, 그런 깊은 정신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3D 프린터로 찍어내는 그런 물건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이 들어간 하나의 예술적 작품이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장인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으신 것입니다. 물론 브살렐은 분명 본래부터 솜씨 좋은 장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야에 아무 관심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새로운 능력을 주셔서 어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그냥 모세나 아론이 속한 레위 지파를 통해, 제사장들을 통해서 이 일을 감당케 하실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태어날 때 이미 그들에게 허락하신 능력과 재주를 따라 택하고 부르셔서, 거기에 성령을 부으사 더욱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아예 없던 능력을 성령의 은사로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여러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 예컨대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같은 것들이 그렇지요.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가 특별히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의사에게만 신유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미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타고난 능력이나 성품에 따라, 성령의 은사들이 부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내용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6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6절에 보면, 브살렐의 조력자 한 사람의 이름이 더 등장합니다. 단 지파 출신의 오홀리압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더 많이 있었고,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은,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에 아예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그에게 허락하신 능력과 재주를 따라 하나님의 영으로 더욱 온전케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본래 어느 정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어도, 충만하게 부어진 성령의 감동은 장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술성과 정교함을 가진 장인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이나 다니엘이, 성령의 감동을 덧입어, 이집트와 바벨론의 수많은 현인들을 압도하는 지혜를 드러낸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저 타고난 재주만으로 감당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영감과 지혜로 채워집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성령을 늘 사모하고, 평소 하나님과 누리는 온전한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덧입는 일이 중요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일하심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과 마음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섬김’이라고 하지요. 본래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 그러하고, 성령의 성품과 사역이 또한 그런 것이기에, 결국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지혜와 능력을 덧입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잇대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그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의 대상이 되는 그 누군가의 유익과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그 일을 더 잘하고 싶어 할 때,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이고, 그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온전히 역사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이 두 가지를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는 그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재주를 더하시기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십시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 구하는 지혜와 능력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의 동기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고, 부디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이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성령의 충만한 권능이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막을 만들 사람도 정해졌으니, 이제 여기서 성막에 관한 모든 내용이 마무리되고, 곧장 만드는 일을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12절부터 17절까지, 십계명의 말씀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는 안식일 계명이 다시 한 번 등장하는 것인데요, 결국 이 말씀으로 성막의 규례가 마무리됩니다. 그 위치나 맥락이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이 대목에서 갑자기 안식일 규례가 등장하게 됐을까요? 하나님의 ‘어떤 의도’가 느껴지시는지요? …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우선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성막을 만드는 이 일에 있어서도,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성막을 짓는 일, 그건 너무나 거룩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막을 짓는 일도 거룩하지만, 안식일을 지켜 쉬는 그것은 더욱 거룩합니다. 자칫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노력이 지나쳐, 애굽에서 피라미드나 성(城)을 만들던 관례대로, 노예처럼,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지도 못한 채, 그렇게 일하면 곤란합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이 쉼이야말로 내가 종이 아님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노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고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 백성과 교제하며, 그 백성에게 참 된 쉼을 주시기 위함인데, 만약 안식일도 구별하지 못하여 쉼 없이 일한다면, 성막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안식일 계명이 다시 한 번 강조되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본문 13절 후반부에,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막이 지극히 거룩하여 그곳에 머물고 접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해지듯이, 하나님이 친히 거룩하게 구별한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그 안식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멋진 비유를 이야기했는데요, 성막은 하나님께서 공간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라면, 안식일은 시간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참 적절한 비교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성막과 안식일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그 백성을 안식일을 통해 거룩하게 하실까요? 출애굽기 20장이었지요. 지난 십계명 설교 때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동기화 되는 것(synchronized)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그 다음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것, 그래서 이 땅에 속한 욕심과 죄에 동기화 되어 있던 내 삶을 다시 reset 하여 하나님과 조율하는 그런 의미가 안식일에 있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일치와 동기화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자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됐는지를 기억하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거룩을 이 땅 가운데 드러내는 것임을,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에 우리의 일상을 조율하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말씀이 15절에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는 일을 마치고 쉬셨으니, 그 백성인 너희도 그래야 한다, 그 삶의 방식을 내가 원한다,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한 주를 하나님께서 일하신 엿새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또 세상을 7일 동안 조금 더 여유 있게 창조하심으로써, 그렇게 한 주를 7일로 늘려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신 6일과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하루를 더 거기 추가하셔서, 그렇게 한 주, 곧 일주일의 리듬을 만드셨습니다. 일을 다 마치신 하나님이 하루를 쉬신 건 분명 하나님이 힘드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쉼이었으며, 그 날을 복 되게 하시는, 축복의 쉼이었습니다. 쉼이 포함된 세상을 만드시고, 그 하나님의 쉼에 인간을 동참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리듬과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모방함으로써, 삶의 호흡을 하나님과 일치시키고, 그렇게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모방은 가장 진실한 형태의 찬양이기도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 삶이 정말 중요하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영원한 표징이라고 하셨고, 그것을 어기면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을 강조하십니다. 거룩한 공간 성막의 지극히 거룩함으로 인해 거기서는 함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거나 말씀에서 벗어난 어떤 행위가 자칫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심지어 하나님이 정한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드린 분향이 죽음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거룩한 시간 곧 안식일 또한 지극히 거룩하여, 그것을 함부로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14절에 보면,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이라 명령하셨고, 덧붙여 말씀하기를,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하십니다. 죽임을 당하는 것과 그 백성 중에서 생명이 끊어지는 것, 곧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후손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심판 등 이런 두 가지 방식으로 심판을 명령하신 경우는 극히 드문 예로, 성경에서 이렇게 이중으로 명령하신 유일한 다른 죄는, 암몬의 신인 몰렉에게 자기 자녀들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실 때뿐입니다(레 20:2~3). 이것으로도 모자라 하나님은 15절 끝에서도,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안식일에 대해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참 무섭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심하시다, 하는 생각도 일면 들게 됩니다만, 그렇게 말하기 전에, 이 안식일 계명이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왜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인지, 그리고 거기 담긴 의미가 어디까지인지를 우리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건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통해 우리가 시간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과 조율되지 않는 한 참된 쉼과 샬롬을 누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동기화 되지 않는 한, 결국 다시 애굽의 삶, 곧 내 탐욕과 죄에 동기화된 그런 삶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울러 단순히 아무것도 안 하는 어떤 그런 문자적인 순종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살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열심히 안식일을 지킨다고 지켰지만, 그래서 수많은 기준과 전통을 만들어 아무 일 하지 않는 안식일을 만들어 놓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내 멋대로 하루를 보내는 그것이 안식일의 정신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모든 피조물과 시간을 만드신 주님이시며, 그 모든 피조물에 쉼을 주시기 기뻐하심을 인정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참 된 안식을 누리는 길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뭐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쉬는가, 그러면 제대로 쉴 수나 있나, 싶지만 사실 쉼이란 그냥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기는 뭔가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쉰다고 쉬는 게 아니다.” 우리도 자주 듣고, 하는 말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언제 정말 쉰다, 정말 편안하게 쉬고 있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까? 그냥 몸이 편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까? 아니지요, 일하고 싶은데 일할 수 없을 때, 일자리가 없거나 코로나 같은 질병으로 일할 환경이 안 될 때, 그때 쉬면 오히려 힘만 더 듭니다. 단지 쉬어서만이 아니라 쉼 이전의 그 엿새의 삶에 대한 깊은 만족, 자족함이 있을 때, 그리고 쉼 이후의 다시 시작되는 그 삶이 분명 안전할 것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그때 우리는 가장 온전한 안식을 누리게 되지 않습니까? 안식년을 앞두고 있는 저도 이 문제를 두고 깊이 씨름하는 중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안식년에 마음 편히 쉬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여러 염려와 걱정, 두려움이 제 안에 가득함을 시시때때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쉼의 날을 기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반드시 눈을 떠야만 합니다. 나보다, 세상보다 더 크고 완전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나보다 앞서 계시며, 나를 위해 준비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다만 씨를 뿌릴 뿐이고, 물을 줄 뿐이지만, 그걸 자라게 하시고, 결실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참 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성도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히 4:11). 쉼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써야 이루어집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 노릇을 감당해주실 것을 신뢰하기로 선택하고, 하나님의 안식, 엿새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아무 염려나 근심 없이 일곱째 날을 쉬신 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꼭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온전한 안식에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막에 관한 모든 말씀이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성령을 부으신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안식으로 보호하실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하나님은 이제 그 말씀을 돌로 된 두 개의 판에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친히 기록하셔서 모세에게 주십니다. …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마음의 돌 판에 잘 새겨 담아두고, 또 순종함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인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참 된 쉼을 누리는 복 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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