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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2020년 6월 14일 주일 예배

2020-06-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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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4 오순절 후 두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5:33~41,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68) 본문 39절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매달린 지 단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보통 하루 종일, 혹은 며칠에 걸쳐서 죄인이 눈을 감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너무나 이례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주님을 조롱하고 즐기고자 하지만, 주님은 오래 버티지 못한 채 운명하십니다. 복음서는 그 마지막 여섯 시간을 두 개의 구간으로 나눕니다. 아침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와 정오부터 오후 세 시, 이렇게 나누고, 그 마지막 세 시간 동안에는 어둠이 임했다고 기록합니다. 하루 중 가장 밝은 시간, 가장 깊은 어둠이 임한 것입니다. 보통 성경 속에서의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종말의 중요한 징조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나무에 매달려 저주 속에 죽어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버리고 심판하셨다는 뜻일 겁니다. 어둠이 임한 직후 예수님께서 “왜 나를 버리셨느냐?” 외치신 것을 보면, 예수님 역시 그렇게 그 어둠을 이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 어둠은 아들의 그 모습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처럼도 느껴집니다. 아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눈뜨고 볼 수 있는 아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도저히 그것을 바라볼 수 없는 아버지의 외면이기도 했습니다. 어둠이 임하면 사람은 보통 말이 없어집니다.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킬 때, 선생님들은 주로 눈을 감으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 이 어둠은, 십자가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조롱을 잠시나마 멈추게 만듭니다. 그리고 내내 침묵하시던 주님의 입이 마침내 열립니다. 마가가 묘사하는 주님의 마지막 모습에는, 주님의 소리 지르심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34절에, 우리가 잘 아는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바크다니!”도 ‘크게 소리 질러’ 하신 말씀이고, 운명 직전에도 또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셨다고 37절은 기록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크게 외치신 후 주님이 숨지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눅 23:46), 아마도 본문의 이 마지막 외침은 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런 주님의 외침은 한편으로는 모순적입니다. ‘왜 나를 버리셨느냐’는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시 아버지의 손에 당신의 영혼을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순된 두 마디가 같은 시각, 한 사람의 입을 통해 고백됐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도,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공존하는 이러한 고백이 적잖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 신앙의 여정이 이어지는 동안, 이 두 고백도 계속 번갈아가며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주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 또한 오래 곱씹게 되는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기력이 조금씩 쇠하여져서 결국 작은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숨을 거둡니다. 죽기 직전 두 번이나 크게 외치고, 또 그 마지막 외침과 함께 숨을 거두는 것은 그 자체로 분명 뭔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을 때 그 호흡하는 보신 적 있으신지요? 들숨으로 생을 마감할까요, 아니면 날숨으로 생을 마감할까요? … 보통은 숨을 내쉬면서 운명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라고 합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후흡' 하고 숨을 강하게 들이마시고, 그걸 더는 내쉬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겁니다. 고인이 되신 저희 할아버지와 할머니, 또 아버지의 돌아가실 때 모습을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모두 다 입을 벌리신 채 들숨의 모습을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반대로 태어나는 아이는 숨을 내쉬며 이 땅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엄마의 몸에서 나온 아기가, 큰 소리로 울면서, “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 세상에서의 첫 호흡을 시작하지요. 숨을 마시는 게 아니라 내뱉으며 생명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요가를 비롯한 여러 운동을 하거나 또 노래를 배우거나 할 때 중요한 호흡은 보통 들숨이 아니라 날숨입니다. 사람이 들숨을 배우는 경우는 별로 없지요. 뭔가 호흡을 배운다면 그건 보통 날숨의 방법을 배웁니다. 가능한 길게, 조금씩, 천천히 내쉬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생명은 들이마셔야 삽니다만, 그걸 어떻게 내쉬느냐에 그 실존이 달려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그저 더 많이 들이마시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가지는 데 있지 않음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죽음은, 그래서 저는 왠지 오히려 생명의 순간을 닮았다고 느껴집니다. 죽음의 호흡이 아닌 새 생명을 향한 울음처럼, 주님은 그렇게 마지막 숨을 내쉬셨습니다. 마치 부활의 생명을 시작하려는 듯, 또 아낌없이 내어주어 자기를 비우신 삶의 모습 그대로, 주님은 그리 운명하셨습니다. …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도, 또 죽음도 그리 주님을 닮아 가면 참 좋겠습니다. 계속 들이마시기만 하고, 가지고, 채우기만 하고,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니라, 잘 내쉬고, 나누고, 비우고 살다가, 참으로 새 생명을 얻듯이 그렇게 부활을 향한 평안한 날숨으로 삶을 마감하는, 그런 저와 여러분, 또 우리고백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순간, 본문의 시선이 갑자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합니다. 38절이지요,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됐다고 기록합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번, 온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들어가는 지성소 입구의 거룩한 휘장이,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찢어졌습니다. 신적 수동태라고 해서 하나님에 의해 찢겨짐을 당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죄를 속하는 피 뿌림의 제사가 더는 필요 없어졌고,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어 어떤 가름막도 존재하지 않게 됐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육체가 곧 이 성전 휘장이라고 기록하지요. 주님의 몸이 찢어짐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음을,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이루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잠시 성전을 향하던 시선이, 곧장 십자가 현장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39절에, 현장에 있던 로마 백부장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는 건데요, 39절을 우리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아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러분,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표현하는 다른 대표적인 장면이 생각나실 겁니다. … 그것은 다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마가복음 맨 앞 장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성령이 주님께 내려오십니다.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9~11) … 기억나시지요? 놀랍게도 그때 “하늘이 갈라졌다.”하는 그 동사 ‘갈라지다’[스키제인]가 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한 번 더 사용된 것이 바로 오늘, 여기 ‘휘장이 찢어졌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 계신 하늘의 휘장이 찢어지듯,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졌을 때 말입니다. 주님의 세례와 십자가는 이렇게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 다 한 생명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고, 신앙적으로 보면, 세례의 완성이 곧 십자가임을 드러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첫 번째 선언이,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던 때, 세례를 받는 그 첫 순종의 행위를 통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선포되었고, 그것이 이제 그 사역을 마무리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어떤 한 ‘사람’의 입술을 통해 다시 한 번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기억을 한 번 더 더듬어 보십시다.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또 다른 한 번의 경우가 있었는데요, 그것이 언제였는지 생각나십니까? … 혹 베드로의 유명한 그 신앙고백을 생각하시는 거라면, 방향이 조금 틀렸습니다. 마가복음 8장의 그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라고 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만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기록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이 조금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마가복음에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한 후 주님의 십자가를 책망하며 막아섰던 베드로, 그래서 주님께 ‘사탄아’라고 불린 그 베드로에게서 나온 고백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드러내는 온전한 신앙의 고백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어쨌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마가복음의 두 번째 고백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름 아닌 귀신에게서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이었지요. 주님께서 거라사라는 이방 지역에 가셔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시던 장면에서,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막 5:7)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고백인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됨은 하나님 아버지의 외침으로부터 시작하여 귀신의 인정으로, 그리고 사람의 고백으로 이어져 완성됩니다. 하늘과 땅 아래 음부에서 먼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예수가, 사람에게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는 과정, 그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중요한 얼개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자녀 삼아 주신 그것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도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들 또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셨고, 그래서 우리로 예수를 믿을 수 있게 하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임은 귀신들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올라가 날마다 고소, 고발을 이어가고 있겠지요. 중요한 건 하나님과 귀신이 인정하는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이제 사람에게서도 인정받는 일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첫 번째 사람이, 다름 아닌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치와 조롱 속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라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을 통해,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 도대체 이 백부장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 자신이 직접 체포하고 못 박으라 명령하여 그렇게 숨을 거둔 이 예수를 향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게 됐을까요? 사실 오늘 본문에는 이에 대한 답을 다 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39절 한 절,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라는 내용뿐입니다. 여기라도 잘 살펴봐야 하겠는데요, … 그런데 우선 여기 ‘예수를 향하셔 섰던’이라는 표현은 그가 본래 예수님께 아무 호의도 없었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말로는 ‘예수를 향하여’라고 해서 뭔가 예수님 쪽을 바라보거나 지향하는 방향을 생각하게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서 그냥 ‘예수님 맞은편에’라는 뜻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오히려 이 표현 안에는 ‘반대편의 입장에서’, ‘적대자의 편에서’라는 의미가 있다고 나옵니다. 백부장은 결코 주님께 호의적인 사람도 아니고 또한 그럴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로마의 백부장은 이번 예수님의 처형 과정 전부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책임자입니다. 백 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부터, 때리고 채찍질하며 조롱하는 상황, 또 십자가에 못을 박는 그 모든 과정을 실질적으로 주관한 자입니다. 나중에 요셉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빌라도를 찾아와 장례를 위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을 때, 그렇게 예수님이 빨리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빌라도가 바로 이 백부장을 불러 상황을 보고받습니다. 이번 십자가 사건에 있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바라본 장본인이 이 백부장입니다. 어떤 한 부분만을 보았을 다른 병사들이나 빌라도와 달리 이 백부장은 이 과정 전체를 객관적으로 지켜봤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꽤 많은 다른 백부장들처럼, 진지하고 신중하게 예수님을 지켜봤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지, 그러면서도 왜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는지 …, 이미 수많은 가짜 왕들을 못 박은 경험도 있기에, 이번에도 주목하여 살펴봤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잡히시는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또 빌라도 앞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 매질과 채찍질을 당할 때 어떤 반응이었는지, 수많은 조롱 앞에서 침묵하신 것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채 숨지시는 모습까지, 그 모두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런 백부장의 결론은, 예수라는 이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 물론 이 고백이 구원 얻는 완전한 믿음의 고백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뭔가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그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분명히 ‘과거형’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고, 그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고백 안에 담겨 있습니다. 분명 완전하지 않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 고백에 오류가 있다거나, 그래서 중요하지 않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오히려 그래서 이 고백이 더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예수를 온전히 모르고도,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이 고백이 가능했으니 말입니다. 어떤 기적의 경험도 없이,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지시는 그 전체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유대인의 정복자이자 원수이며, 직접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책임지는 한 군인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기적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비로소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잘 알고 믿고, 예수님 편에 섰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모르고, 예수의 맞은편에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기적을 볼 수도 없었고, 그 의미는 더 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께 버림받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버림받아 그렇게 숨지는 모습을 보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자, 하나님이 친히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하는 빌립보서의 말씀이 오늘 이 장면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백부장이 정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온전한 신앙에 이르게 됐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훗날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증언을 들었을 때,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매우하며,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에 대하여 어떤 잘못된 편견을 가지거나, 이유 없이 비방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에 대해 궁금히 여기게 됐을 것이고,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오늘의 이 경험을 나누고자 했겠지요. 이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맞소!”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러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좋은 마음으로 궁금히 여기게 된다면, 여러분 우리에게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 귀한 신앙의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혹시 그런 말을 이미 들어보신 분도 계시지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다 그런 고백의 대상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 엄청난 기적이 나타나는 사람이 된다거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삶의 환경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숨졌을 때,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냐고 소리칠 때, 그러면서도 내 영혼을,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외칠 때, 그때 그 고백이 있더라고 오늘 주님이 친히 증언해주고 계십니다. 정말 믿음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지요. 그러면 오히려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건강하고, 내가 잘 되고, 내가 많은 축복을 받아야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것들을 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 실제로 이 땅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보면,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전하기는 하는데 스스로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오늘날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진지하게 알고 싶어 하지 않지 않습니까? 무슨 말만 조금 듣거나, 조금 손해가 되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맞붙어 싸우기에 급급한 그런 신앙으로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눅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23:43). “여자여,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 보라, 너의 어머니시다.”(요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마27:46; 막15:34). “내가 목마르다.”(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 이것들이 무엇인지 다 아실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성경이 기록하는 말씀들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 고통의 자리에서 주님이 어떤 모습이셨는지,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고, 또 깊이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바로 그것을 보고 백부장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 남을 용서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용납하고, 끝까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그 자리에서조차 믿음을 잃지 않고 내 영혼을 그분에게 의뢰한다고 기도합니다. … 주님은 그런 십자가의 길이어야 한다고 우리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 길을 뒤따라가는 것일 때, 그러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가 나타날 거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정말 그렇습니까? 이유 없이 고난당하고, 억울하게 미움 받을 때, 그때도 원수를 위해 용서를 빌어주고 축복하며, … 좀 손해 보는 일이 생길지라도 타인의 실수나 불의를 눈감아주며, 그로 인한 피해를 기꺼이 감수합니까? … 지난 주중에 묵상한 고린도전서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이 크게 책망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그 자체가 이미 믿음의 실패라고 결론내립니다. 왜 차라리 그냥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하고,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하냐고, 그런 똑똑하고 잘난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지 못하느냐, 책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바울이 말한 그러한 삶의 모습을 실패자의 구질구질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언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아니라, 거기서 내려오는 기적을 통해서, 시원한 승리의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경험하고 드러내고자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런 모습을 통해 세상이 당신을 이해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단 말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혹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야, 이 사람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구나,’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만든 사람, 있으신지요. … 아마 우리는 대체로 ‘와, 정말 이 사람마저도 하나님의 자녀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그것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형편없는 모습이라는 것 …, 그것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가진 공통의 경험일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이면 충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입네 유난 떨지 말고, 복음을 위해 무슨 큰일을 하고, 어디 대단한 선교나 봉사를 하기 전에, 정의와 하나님나라를 말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십시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도 드러나야 하고,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특별히 다른 일을 더 하지 않아도, 우리의 원수요, 우리를 못살게 구는 자요, 우리를 못 박는 자로부터, “이 사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구나.” 하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인간이 예수의 길을 쫓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내 그렇게 주님께 물었습니다. … 그런데 하루는 제 안에 문득 주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죄의 말씀, 그 에스겔서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다. 새로운 영과 새 마음을 줄 것인데, 곧 내 영을 너희 안에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됨을 드러내는 것이 사람의 인격이나 실력으로 안 되는 일되니, 그래서 하나님의 영을 너에게 부어주신 것이 아니냐, 그게 주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에이, 또 성령 이야기인가? 또 기도하고 말씀 보라는 건가?’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실제로 주님의 자녀 됨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정말 성령을 사모하고, 구하고, 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이를 악물고 참기 위해 주님처럼 기도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 우리는 이제까지 내 삶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 기도를 실제로 해야 하고, 한 번도 진지하게 해보지 않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참기 위해 성령을 구해야 하고, 이를 악물고 주님의 길을 흉내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새롭게 하시는지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 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보 전면의 그림 속 여인들이 바로 그 세 사람입니다. 그들은 멀리서 십자가 현장을 지켜봤고, 제자들이 다 도망간 상황에서 오늘 이 모든 사건의 중요한 증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녀들의 이름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이름을 공적인 영역에서 결코 언급하는 일이 없는 당시 로마 시대에서, 매우 이례적인 기록입니다. 그만큼 그녀들의 삶과 신앙이 특별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그녀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라고 나오고(40절), 이들의 이름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15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또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한 16장에도 다시 등장합니다. 바로 이 세 명의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을 함께 찾아갔고, 결국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최초의 증인들이 됐습니다. … 참 놀라운 일입니다. 십자가의 증인이 곧 부활과 영광의 증인이라는 것을, 성경은 이 여인들을 통해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십자가의 증인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세 여인을 가리켜, ‘예수를 따르며 섬기던 자’라고 41절에 적어놓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며 섬기던 자’(Re) … 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모습으로, 예수를 따르며 섬기는 자로,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자의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뭔가 엄청난 일을 하는 듯이 그렇게 예수의 제자 티를 내며, 어디 높은 자리나 구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비록 멀리서이지만, 그저 조용히 따르고 섬길 뿐이지만, 드러나지 않게 인내하고 견딜 뿐이지만, 오직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서, 부활과 영광의 증인 되는 그런 그리스도인 되기를, 홀로 그 길을 가는 것이 어렵다면, 셋이 함께, 성령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함께 그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_ 엘 그레코, ‘피에타’(1575) / 출처 - https://blog.naver.com/yc510/40036429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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