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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의 정체" 2014년 5월 15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5-1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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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5 목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6장 8~13절, 이사야 강해 56  그루터기의 정체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ArEcGMrGba/20140515_.html 이사야서 쉰여섯 번째 말씀으로, ‘그루터기의 정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어제 새벽에는 이사야의 소명이 가진 특수한 모습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를 향한 부르심의 음성을 우리가 어떻게 분별하고 반응할지에 대해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같은 본문의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역시나 매우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보다 깊이 그 의미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전하라 명령하시는 메시지는 우리의 생각, 상식, 그리고 신앙 모두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통상 예언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 예언을 듣는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믿음으로 인내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회복과 축복의 자리로 전진하라는 격려와 독려의 말씀도 거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에게 전해진 메시지는 그러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본문 9절을 한 목소리로 합독하시겠습니다. 시작.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아멘. 참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듣고 깨달아 회개하여 돌이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전해야 할 하나님의 전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헛갈리는 대목입니다. 백성으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메시지의 목적이라면, 아예 그 말씀을 하시지 않으면 될 것인데, 하나님은 굳이 말씀하시고 듣게 하셔서 그 목적을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10절에서 이사야를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함께 10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갈수록 태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예 대놓고 유다 백성들이 회복되지 않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백성에게 가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회복하게 되면 어찌 하겠느냐고 이사야에게 반문하십니다. 사실 히브리어 원문 상의 의미는 지금의 번역된 표현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치료되지 않도록, 그들을 더욱 어둡게 하고 무지하게 하라.”는 의미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애초에 이사야를 부르실 필요도 없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없는 어둠의 삶을 이제껏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내버려 두신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목적을 충분히 이루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굳이 이사야를 부르셔서 백성들에게 보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케 하십니다. 그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하나님의 중심은 결코 당신의 백성들이 이대로 망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 6장의 마지막 말씀들을 통해서 그 뜻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이사야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마치 이사야의 이야기를 들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질문처럼 되어 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 이들을 둔하게 내버려두실 것입니까?”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계속해서 대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내시고 나면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심지어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땅에 남아 있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그 심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남은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게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서 마무리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또 헤아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회복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바로 베임을 당한 나무라 해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처참한 심판 후에도 거룩한 씨가 남아 있을 것인데, 바로 그들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루기를 원하시는 이 모든 일의 목표라고 선언하십니다. 그 그루터기만을 남겨두고 구별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주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보다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이사야에게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회복이 아닌 심판입니다. 이제 모든 가능성은 끝났으며, 더 이상의 회복은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선포됩니다. 이 선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일은 이미 확인한 대로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가진 일차적인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회복과 구원이 아닌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백성들은 이제 두 부류로 명확히 구별될 것입니다. 그 첫 부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더 용감히, 더 분명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메시지로 인해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여호와 하나님도 우리를 떠났다고 더 이상 하나님께는 소망이 없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소망의 길은 이제 다른 곳에 있다. 주저하지 말고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신은 우리를 버렸다.” 하나님과 다른 신들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수많은 신앙의 회색분자들 역시 이제 명확한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하나님을 향한 미련과 죄책감을 다 씻어버리고, 그 용감한 발걸음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아주 작은 수의 무리만이 마치 다 베인 나무 그루터기처럼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경험하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사그라들지 않는 자들, 아니 하나님 외에는 어떤 소망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가장 약한 자들이 그들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그 심판의 불길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며,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거룩한 씨로 삼아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회복해 가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앞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자들을 구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그것이 바로 이사야를 통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취하셨던 기존의 방식, 그러니까 회복과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으로는 이 그루터기들을 구별할 수 없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하기 위해 그저 입에 발린 회개와 거짓된 눈물로 하나님을 속이는 자들을 더 이상 하나님은 거룩한 씨앗으로 남겨두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회개는 곧 다시 더 큰 죄의 씨앗이 될 뿐이며, 그와 같은 심각한 부패로 인해 이 땅의 온전한 그루터기들까지 점점 더 쇠약해지고 소멸해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와 같은 거짓된 회개, 비겁한 회개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남은 마지막 기회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루터기에게만 허락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멸망을 목도하겠노라고 고백하는, 또 고백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하나님바라기들에게만이 이 마지막 메시지가 구원의 메시지로 들려질 것이기에, 하나님은 오늘 이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이와 같은 상황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작금의 현실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거짓된 회개와 더 큰 불순종의 반복. 그리고 그 속에서 더 이상 어떤 소망도 빛도 없이 그렇게 사그라들어가는 그루터기들의 미약한 존재감. 저는 이사야의 예언을 듣게 될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다는 사실에 몰골이 송연할 따름입니다. 어쩌면 더 이상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제 당신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으시는 지도 모릅니다. 이제 더 이상 알곡과 가라지를 한 데 섞어 놓아야 할 이유도 의미도 남아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가라지의 부패함이 알곡마저 다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이 상황을 주님은 더 이상 간과하지 않으실 지도 모릅니다. 이사야서를 묵상하며 깨닫는 저의 이런 생각이 아주 허황된 것만은 아님은, 이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들이 더 잘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심판의 메시지 앞에서 하나님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환난을 당해도 주님의 심판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과연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가 끝났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구원의 길을 찾지 않으며, 다른 위로와 평안을 구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긍휼을 기다릴 수 있느냐, 하는 그 마지막 선택만이 오늘 패역한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찾는 마지막 그루터기. 그들은 하나님의 냉혹한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뿌려 거둘 거룩한 씨는, 긍휼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그 하나님의 차가운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거기 남아 서는 자들입니다. 긍휼이 끝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붙잡는 자, 그가 바로 그루터기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찾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 이사야를 불러 보내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 이사야의 유다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오직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그루터기가 맞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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