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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2014년 5월 13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5-1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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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3 화요일 새벽기도회  ----------------------------------------------------- 이사야 6장 8~13절, 이사야 강해 55  탄식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w1uYHyHace/20140513_.html 이사야서 쉰다섯 번째 말씀으로, ‘탄식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마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스랍 하나가 주의 제단에서 가져 온 숯에 의해 입술의 정결함을 회복한 이사야에게 드디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부르심의 방법이 다른 예언자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를 직접적으로 호명하고 부르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 스스로 하시는 말씀, 곧 하나님의 독백을 통해 이사야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하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탄식의 한숨이 명령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는 이사야의 반응으로 오늘 예언자의 소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예언자들 혹은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부르시는 장면과 비교해 볼 때, 오늘 이사야 소명의 특별함은 더욱 도드라집니다. 보통은 하나님이 대언자를 지명하여 불러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를 나의 메신저를 삼았다. 가서 전해라.”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러셨습니다. “아무개야,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는 전혀 다릅니다. 이사야를 지명하고 부르셔서 명령하시기는커녕 “이사야야, 네가 나를 위하여 가겠느냐?”는 권유의 음성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자신의 탄식과 독백이 등장할 뿐이며, 그에 대한 이사야의 자발적인 응답으로 부르심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8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탄식에도 매우 특이한 점들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주어의 수에 있어서의 변화가 주목을 끕니다. 처음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나’라는 단수형의 주어 표현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표현에서는 주어가 복수 ‘우리’로 바뀌어 있습니다. 당장 여기 ‘우리’라는 표현의 우리가 누구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러한 복수형에 대하여 하나님의 중요한 결정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히브리어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히브리어로 ‘에차’라 부르는 이 결정은 이른바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일어나는 천상의 회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비롯한 천상의 존재들이 지금의 상황과 그 대책을 논의하고 그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음을 뜻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은 결정되었고, 그 뜻을 전할 메신저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메신저를 찾는 하나님의 방법은 뜻밖에도 명령이 아닌 탄식과 의문입니다. 사실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결정 사항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메시지를 유다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탄식에 적극적인 긍정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지명하여 불러 명령하신 것처럼, 그렇게 자발적인 응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스스로 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반응은 다른 메신저들에게서 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모세는 수차례 그 부르심의 명령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스스로를 낮추며 애써 주님의 명령을 고사합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예레미야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와 같이 특정한 메시지나 명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겠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나를 보내십시오.”라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물론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전혀 없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눈 것처럼, 이미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고, 또 자신의 부정한 입술이 거룩하게 되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전 조치가 있었기에, 이사야는 감히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불로 정결케 된 자신의 입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곧이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렇게 이사야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부르시는 이유와 목적이 궁금해집니다. 왜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전적인 조치와 이사야의 자발적 응답을 통해 당신의 메신저를 세우셨을까, 의문이 듭니다. 한 가지 이유는 이제 이사야를 통해 전하게 될 메시지의 내용에 있어서의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내일 새벽에 다시 깊이 다루겠습니다만, 오늘 읽은 9절 이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사야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결코 회복과 치유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메시지의 내용이 메신저의 소명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내일 다시 나누고자합니다. 이사야를 부르시는 특별한 방식의 목적, 그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메신저 이사야의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신저는 기계적인 스피커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전해지는 데 사용되는 무감각하고 무정한 울림통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니느웨에서의 요나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은 그러한 무정한 스피커와 같은 예언자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가실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찾는 메신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자, 그래서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된 자임은 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사야를 향한 하나님의 방법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현재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탄식, 그리고 고통스러운 심판의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누군가가 하나님은 필요하신 것입니다. 그런 목적에 있어서 이사야는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백성의 죄를 자신의 죄와 동일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도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를 불러 명하시고 이후에 그를 정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거룩하게 하시고 스스로 결단하도록 유도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을 이사야 스스로 듣고 그 아픔을 공감하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사야를 통한 적극적인 공감과 위로가 하나님께도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이 땅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가 없기 때문이며,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전할 자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부르심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또한 이사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나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음성으로 우리가 지목되어 부르심을 받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직접적인 명령의 음성이라기보다는 이사야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탄식과 독백일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목사들 대부분도 그러한 부르심의 방법을 통해 주의 종으로 결단했던 것 같습니다. “준석아, 너 목사해라!” 이런 음성보다는, 일반적이지 않은 은혜와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느끼고 알게 하시고, 다시 내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의 탄식과 아픔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셔서, 결국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강권하시는 방식으로 부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비단 목사의 소명만이 아니라, 오늘 거의 모든 성도들의 부르심이 이와 동일합니다.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때로는 그와 같은 음성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오늘 이사야를 부르시는 것처럼, 먼저 은혜와 회복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아픔과 탄식에 스스로 반응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어느 특정 누군가를 향한 부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함을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통된 부르심입니다. 비록 시간과 장소와 여건은 다 다르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거하시며, 그곳에서 탄식하며 누군가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하는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의 독백이 아닙니다. 다수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도 아닙니다. 그렇게 듣고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이미 여러분의 영혼은 더 이상 심각할 수 없을 만큼 무뎌지고 병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그분의 탄식이 들려졌다면,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통증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미 여러분은 오늘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려지면 부름 받은 것입니다. 느껴지면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것이 명령이 아닌 탄식과 의문인 이유는 여러분 아닌 다른 누군가를 택하여 부를 가능성을 남겨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안타까움과 고통이 더 온전히 공감되어져야 하기 때문임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탄식하고 계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누가 나를 위해 갈 것인가?” 말씀하십니다. 가야 할 곳, 전해야 할 곳, 섬겨야 할 곳이 이토록 많은데,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고, 음성이 들리게 하였는데, 오늘 이 땅의 이사야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모두가 나 몰라라 하며 자신의 일과 자신의 아픔에 분주할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들렸다면 응답하십시오. 느껴진다면 반응하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 당신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들으라고 탄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를 보내기 위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저하라고 명령이 아닌 탄식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온전히 주님의 아픔을 헤아리고 주님의 다급함을 나의 다급함으로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지금도 탄식하며 홀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디 그 탄식 앞에 오늘 이사야와 같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부디 주님의 그 탄식 앞에, “주님, 제가 그 마음을 헤아리기 원합니다.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탄식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우리에게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우리를 향해 들려오고 있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주의 마음과 소리를 담아, 세상으로 나아가는 믿음과 용기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고백교회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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