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한 가난한 과부' 2020년 3월 15일 주일 설교
2020-03-1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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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200315 사순절 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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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41~44, 한 가난한 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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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55) 본문 42절의 ‘한 가난한 과부’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온전히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오늘은 먼저 시 한 편을 좀 읽고자 합니다.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이라는 시인데요, 오늘 설교 중에 총 세 번을 읽을 예정입니다. 일단 한 번 그냥 읽고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시집 ‘나무는 간다’(창비, 2013) 수록] … (여기까지인데요) 산비탈에 판 구덩이, 곡기를 끊겠다는 다짐, 그리고 꺼내 쥔 심장, 그런 걸 통해 이야기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그래서 사랑은 참 모질고, 위태롭다고, 또 무모하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네, 사랑이란 그렇게 빚어지는 것이지요. 그런 절실한 뭔가가 오늘 본문에 묻어납니다.
성전 안에서의 가르침을 모두 마치시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전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뜰’이라는 성전의 바깥 공간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시더니, 자리에 앉아, 한동안 뜰 주변에 놓인 헌금함을 바라보십니다. 당시 ‘여인의 뜰’에는 각각의 용도에 따라 총 열세 개의 헌금함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반 세겔의 성전세를 넣는 헌금함부터 시작해서, 번제와 속죄제 등 여러 제사와 관련된 헌금함이 있었고, 구약의 낙헌제처럼,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을 넣는 헌금함까지 다 따로 구별되어 있었는데요, 웬일인지 예수님께서는 그 헌금함들을 주시하며 한참을 가만히 앉아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행위를 기록한 41절의 동사 ‘보실 새’는 문법적으로 미완료형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주님이 계속해서 바라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예물 드리는 모습이 주님의 시선 안에 들어왔다가, 또 이내 흩어집니다. 개중에는 부자들도 있어서, 그들은 많이 넣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싶지만, 과거에는 지폐라는 게 없이, 모든 예물은 다 동전으로 드려졌고, 헌금함 역시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그 소리만으로도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헌금함 앞에서 예물의 액수를 일일이 다 확인하여 말하고 적는 제사장도 따로 있었다고 하니, 주의를 기울여 보기만 한다면 누가 얼마 냈는지를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궁색한 행색의 한 가난한 과부가 다가와,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습니다. 당시 화폐 중에 가장 작고 가벼운 ‘렙타’, 지금으로 치면 오백 원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동전 두 개가, 유독 가벼운 소리를 내며 헌금함 속으로 굴러 내려갑니다. 그녀는 분명 조용히, 오직 하나님께로만 은밀히 드리고 싶었겠지요. 너무나 작은 액수인 것이 드러나, 괜히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고, … 예물을 드리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워진 그녀의 용기를, 주님은 또한 보고 계셨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자리에 앉아 예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참동안 주목하시던 주님이, 이제 다 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십자가 영광을 받으실 때가 가까이오자, 이제 주님의 초점은 확실히 제자들입니다. 제자들만 따로 불러 조용히 말씀하시는 일이 잦아지지요.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넣었다. 다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새번역 참조) …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마지막 메시지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제가 과거 설교 중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본문 자체를 설교한 것은 아니고, 다른 본문을 설교하면서 이 내용을 잠깐 다룬 적이 있지요.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시겠습니다만, 그때마다 접근하는 관점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실제로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본문입니다. 과부에 대한 칭찬으로도, 또 당시의 종교와 예배에 대한 탄식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메시지는 실은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본문은 매우 간결하고도 객관적인 서술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과부나 부자에 대해 어떤 신앙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지요. 성전에 대한 비판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였는지, 주님은 그저 사람들이 예물 드리는 것을 보고 계셨고,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리는 것까지 보신 후, 제자들에게 어떻게 그 예물들이 하나님 앞에서 계수되는지, 하나님나라에서는 그 예물들이 어떤 원칙에 따라 다시 계산되어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하셨을 뿐, 그 외의 다른 말씀이나 행위가 추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감동을 이야기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가장 많은 헌금을 했으니 주님이 그녀를 불러 그 믿음을 칭찬하시거나 혹은 구약의 사르밧 과부 때처럼, 그녀의 생활이 윤택해지도록 별도의 축복을 베푸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과부는 그렇게 예물을 드리고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주님과는 말을 섞지도 못했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넣었으니, 그녀는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배고픔을 참으며 그날 하루를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이런 반응은 참 뜻밖입니다. 주님 말씀대로라면, 주님은 과부로부터 많은 걸 받으셨지만, 뭐 하나 베풀어주시지 않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드린 그녀의 형편을 다 알고 계셨으면서도 말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공동체는 별도의 돈 궤를 따로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뭔가 도움을 주라고 하실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 네, 오늘 주님의 초점은, 과부의 귀한 헌신에 대한 단순하고 기계적인 보상이 아닌 것이지요. 얼마 드렸으니 주님이 얼마의 축복을 주실 것이다, 지금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칭찬이나 보상들이야말로, 지금 드려진 이 두 렙돈의 가치와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 뿐이겠지요. 이 여인은 결코 그런 걸 바라고 하나님께 드린 게 아님을 주님은 헤아리셨고, 다만 두 렙돈이 전하는 그 깊은 울림을, 사랑하는 제자들을 불러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바로 이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그 자리에 그토록 오래 앉아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을 한 번 더 읽고 싶습니다. …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사실 오늘 본문 안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읽는 누구나 사랑을 발명해야만 할 것처럼 느끼게 되지요. 주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하나님마저 없다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거기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곡기를 끊고 누울 것처럼, 두 손에 자신의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모질고 무모한 사랑으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놓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이 과부의 가난한 삶을 너무 쉽게 판단하여, 그저 안타깝고 불쌍하다, 단정해버리곤 합니다. 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너무나 궁핍하고, 고달픈 삶이지요. 본문 42, 43, 44절 모두에서, 가난이라는 말과 과부라는 말이 계속 함께 나오는 것만 봐도, 그녀의 경제적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됩니다. 더구나 그 가난이 단지 그녀의 책임만은 아니기에, 우리는 또한 쉽게 비판의 대상을 찾기 마련이고, 또 그녀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성급히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단지 그런 불편한 시선으로 이 과부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네, 주님은 과부를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닙니다. 뭔가 당장의 축복이나 보상을 주지 않으십니다. 다만 잠잠히 그 헌신을 받으시며, 그 사랑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전의 모든 예물을 받으시는 분이자, 판결하시는 분으로서, 주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이 가난한 과부의 헌신이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제자들 역시 실은 이 가난한 과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 또한 자신의 모든 삶을 오롯이 예수에게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과부와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해, 기쁨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무엇이 가장 존귀하며, 또한 누가 가장 크고 복 된 자인지를 말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저는 문득 오늘 과부의 이 두 렙돈이 우리 주님의 삶과 십자가와도 오버랩 됩니다. 주님이 운명하실 때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만 봐도, 마리아는 이미 홀로 된 지 오래였고, 그런 그녀에게 예수는, 자신의 전부, 곧 두 렙돈이나 다름없는 그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이제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지기 직전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들도 다 누군가의 두 렙돈이었고,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린 헌신의 열매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과부의 예물을 향한 주님의 인정은, 비단 과부의 두 렙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기까지 주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헌신에 대한 은유였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 또한, 우리의 헌신과 삶 또한 이 이야기 속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누군가는 이 과부를 그저 불쌍하게 바라보고, 그녀의 처절한 신앙 또한 안타깝게 느끼겠지만, 주님은 전혀 다르게 바라보십니다. 잠잠히 그녀를 인정하시며, 그녀의 전부를 받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다른 누군가를 더 안타까워하심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녀처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 없는 우리들을, 오히려 주님은 더욱 안타까워하십니다. 네, 오늘 본문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는 내내 어릴 적 읽은 오래 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어떤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부부는 이번 성탄절에 꼭 서로에게 좋은 선물로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간절히 뭔가 해주고 싶었습니다. … 너무나 가난한 형편에 돈은 없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 중 팔 수 있는 걸 생각하다가, 남편은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생각했고, 아내는 애써 기른 긴 머리카락을 떠올렸습니다. ‘그래, 이거라도 팔아 꼭 좋은 걸 선물해야겠다,’ 두 사람은 똑같이 결심했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아끼는 그 시계를 팔아 아내의 긴 머리에 어울리는 머리장식을 사주고 싶었습니다. 또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의 줄 없는 시계에 좋은 시계 줄을 달아주려 했습니다. 그렇게 부부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상대방이 가장 기뻐할 것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두 사람은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한 선물을 상대방에게 전해주었지요. 하지만 더는 그 선물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는 그런 이야기 …, 여러분 다 들어보셨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부부가 불쌍하십니까? … 쓸모도 없는 그 선물을 위해 그토록 심각한 낭비를 하다니, 차라리 그걸 팔아 생활비라도 좀 보태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잘 차려서 성탄절답게 보낼 것이지, ‘참 어리석다’라고 느껴지시는지요? … 아마 아닐 겁니다. 세상 그 어떤 부유한 가정보다, 세상 그 어떤 넉넉한 성탄절 식탁보다, 더 귀하고 완전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너무나 부러운, 그런 부부, 그런 가정의 모습일 겁니다.
오늘 이 가난한 과부에게 있어 두 렙돈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이나 은혜를 구하는 어떤 수단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가난하지만 이미 그녀는 온전하며 자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도 아닌 두 렙돈인 것이지요. 구약의 사르밧 과부와도 다릅니다. 곡식통과 기름병이 마르지 않게 되는 그런 복을 기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다만 드리고 싶었고, 자신의 전부로 헌신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 두 렙돈의 헌신, 그 자체보다 이 여인에게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 헌신 자체가 이미 주님 안에서 누리는 가장 온전한 믿음의 행복인 것이지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누릴 수 있다면, 여러분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 지금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지금 어떤 관계를 누리고 있습니까? … 여러분이 누리는 하나님나라는 어떤 행복, 어떤 감동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 생활비 전부마저도 염려 없이, 두려움 없이 드릴 수 있는, 정말 전적인 사랑과 신뢰를 주님께 드려보고 계십니까? 정말이지 감동이 있는 신앙의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고, 같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또한 감동시키는, 그런 신앙의 감동이 우리 안에 있는지요? 서기관이 그토록 추구하던 존귀하고 인정받는 삶, 그것을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그런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아니면, 그게 예물이든 뭐든, 우리의 헌신은 그저 마지못해 드리는 하나의 의무이거나, 단지 체면치레를 위한 무거운 책임으로 여기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은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는 어떤 신앙적 투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어떤 영어 성경을 보니 44절 본문을,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라는 부분을, 조금 다르게, 이렇게 옮겼습니다. “All the others gave what they’ll never miss; She gave extravagantly what she couldn't afford.”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워하지 않을 만큼만, 아깝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만 드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사치스럽게, 낭비하여 드렸다.” … (본문의 핵심을 짚어낸 참 놀라운 번역입니다.) ‘아, 아깝다, … 너무 많이 드린 거 아닌가?’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되고, 한 번 더 고민하게 되지 않는, 그런 류의 예물은 실상 오늘 부자의 예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없으면 불편하고 당연히 삶의 큰 부분이 영향을 받는 그런 헌신이 바로 오늘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특징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저와 여러분의 헌신의 모습은 어느 쪽입니까?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로만, 내 삶에서 전혀 아쉽다고 느끼지 않을 그 정도로만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헌신이 이미 우리에게는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지는 않습니까? …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낭비하십니까? 물질이든 시간이든 뭐든 간에, 하나님을 위해 사치를 부려보고 계십니까? 내일의 삶을 온전히 주께 맡기는 무모함으로, 그렇게 하나님께 낭비하며 헌신하는 것을, 혹시 여러분은 미련하다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 저는 지금 우리 성도들에게 많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런 말 하려는 게 아닙니다. … 여러분이 받은 구원이, 여러분이 누리고 사는 하나님나라가, 여러분이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 생존과 생활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이 베푸는 생명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내맡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듯, ‘하나님만 곁에 있다면 기어이 살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가, 이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두 렙돈을 드린 과부는 조금도 불쌍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삶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그건 불행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누리고 있고, 그 관계 안에서 행복에 젖어 있습니다. 그녀가 신뢰하는 이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그녀는 철저히 안전합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그녀는 온전히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녀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헌신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도 그녀와 함께 더불어 누리고 계십니다. 그게 하나님나라이지요. …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 사랑과, 내 삶 매순간의 모든 호흡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과연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으로 누리고 있는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걸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이 가난한 과부보다 넉넉할 것이며, 분명 두 렙돈보다는 훨씬 더 많은 헌신을 주님께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많은 것인지, 과연 우리가 이 여인만큼 존귀하며 행복한지, 또 그만큼 실제로 안전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만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나 영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마치 지금보다 조금 더 가지면 행복하고, 또 안전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예전에도 그랬지요? 지금 가진 것만큼만 가지고 살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과부처럼 되지 않기 위해 수고하고, 서기관처럼 높아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생활의 염려, 물질에 대한 염려에 휩싸여 살아가지요. 그러면서 정작 하나님과 천국은 시야에서 놓쳐버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과 기쁨은 너무나 빈약하기 짝이 없지요. … 하나님을 위해 뭘 해드리면 좋을까 잘 고민하지 않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어떻게, 무엇으로 하나님을 누릴 수 있을까 그런 고민 대신, 무엇 먹을까, 무엇 마실까, 무엇 입을까, 그 고민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그토록 절실하고 간절한 삶이, 하나님 앞에만 서면 하나도 절박하지 않고, 조금도 무모해지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님 없이도 돈만 있으면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우리는 그리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아니지요, 본래 구원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과부의 절실함으로 십자가 예수를 붙잡았고, 그녀의 두 렙돈 같은 간절함으로 주님께 헌신을 결심했습니다. 실은 헌신이랄 것도 없었지요.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구원이고, 진짜 천국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두 렙돈 전부 드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랑, … 그럼에도 내일이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 그 믿음이, 다름 아닌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허락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과연 지금도, 오늘 우리에게도 그 감동과 그런 절실함이 남아 있는지요?
여러분, 우리는 이 질문 앞에 고민하고 갈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향한 절실함을 다른 무엇으로의 절박함으로 대체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소유에 대한 절실함으로, 돈이 주는 만족으로 천국을 대신하려고 몸부림치며 살 것입니다. 그게 마치 우리에게 안전이 되는 양, 그것이 마치 우리에게 온전한 행복이라도 가져다 줄 수 있는 양, 우리는 세상과 함께, 돈과 함께 정말이지 미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뭐가 중한지, 무엇이 신앙이며 무엇이 천국인지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과부가 아니라 우리가 불쌍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며, 여전히 행복하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생활의 염려에 휩싸여 근심할 것이 아니라, 서기관처럼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분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내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 영원한 생명을 바로 여기서 누리고자 힘써야 합니다. 때론 두 렙돈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믿음의 용기로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내 삶의 근거가 정말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두 렙돈을 드려서 인정받는 나라가 하나님나라입니다. 그저 가난한 한 과부의 두 렙돈이 주님 받으신 가장 큰 헌신이요 기쁨이었음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가 가진 물질이 얼마이고, 우리가 얼마나 근사한 인정을 받는 사람인지는, 그 나라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 몇 천원으로도 가장 많은 헌신을 한 하나님나라의 귀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음을 그녀가 보여줬습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로 계산되는 그런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런 것 하나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과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족하다, 모자라다, 더 필요하다, 그렇게 말하고 사는 대신,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말입니다.
가난해도 할 수 있는 섬김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주어져 있으며, 가난해도 누릴 수 있는 천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허락되어 있습니까? 그 모든 축복들을 그저 생활의 염려로 인해 빼앗기지 마십시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어떤 때에나 항상 즐거워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그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십시다.
무엇보다 성도 여러분, 부디 주님 안에서 사랑하며 살고 있기를, 정말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느끼는 애틋함을 항상 놓치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두 렙돈 안에 담긴 그 사랑의 애틋함을 소멸하지 않는 그것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내어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자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는 그 사랑의 힘으로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을 다시 한 번 나누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를, 그때 그 성전에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실 겁니다.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헌신을 …, 과연 우리 안에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뜨거움이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쉼과 평강이 있는지,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이 말씀을 통해, 다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주님이 곁에 없다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그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누리는 그 사랑 속에 감춰진 온전한 평안과,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지극한 기쁨이, 오늘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여 흘러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