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나귀 새끼를 예수께서 타시니' 2020년 1월 19일 주일 설교
2020-01-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200119 주현절 후 두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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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11, 나귀 새끼를 예수께서 타시니
* 설교 음성파일 : 이번 주는 설교 음성이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강해 47) 본문 7절의 ‘나귀 새끼를 예수께서 타시니’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이제 마가복음 11장으로 넘어왔고, 우리에게 남은 마가복음 본문은 총 여섯 장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여섯 장의 시간적 배경은,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에 마가는 전체의 약 40%에 해당하는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에서 보낸 주님의 이 일주일이 마가에게, 주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지금까지도 저와 여러분은 이 복음서의 내용들을 나름 면밀하고 진지하게 살펴봐 온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부터는 그 노력에 조금 더 특별함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주의 깊게, 그리고 조금 더 삶으로, 우리는 이 말씀에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젠 특별히 주님 외에 다른 주목할 만한 사람이나 사건도 거의 없습니다. 지난주 바디매오를 끝으로 모든 치유 사건이 끝났고, 대부분의 조연들이 줌 아웃(zoom out) 되어 물러났습니다. 성경 자체가 예수님을 클로즈업 하고 있어,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진실해지며 깊어집니다. 이 마지막 일주일 동안 주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 말씀들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사순절은 2월 말이나 돼야 시작되지만, 저희는 말씀 안에서 이미 그 출발점에 서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향한 주님의 이 마지막 여정에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또 같은 삶으로 동참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 마지막 여정의 첫 순서는 본문의 예루살렘 입성(入城)입니다. 주님은 드디어 당신의 성(城)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드디어’라는 말이 사용되어야 할 때가 이런 때입니다. 저 먼 갈릴리 외곽에만 계시다가 드디어 예루살렘에 오신 겁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주님의 집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입성은, 오랜 만의 귀향, 귀가이고, 또 마지막 귀가입니다.
본문 11절에도 나오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주님의 첫 번째 관심은 그래서 성전에 있습니다. 천 년 전 세워진 내 집이 지금 어떤 상황인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주님은 그곳부터 확인하십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 예배당 임대인 장로님께서 교회에 들르기도 했습니다만, 집주인의 방문을 받는다는 것은 세입자로서는, 또 청지기로서는, 매우 긴장되는 일입니다. 이것저것 신경 쓰고 챙길 것이 많아지지요. 만약 예수가 그 성전의 주인이심을 믿었다면, 그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특별한 준비와 대비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 1:11). 오히려 처참한 방식으로 주인에게 함부로 했습니다.
오늘 이 예배당과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를 섬기는 자, 그를 예배하는 예배자로 주 앞에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저와 여러분은 이곳의 주인이 아닙니다.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마치 내가 이 예배에 초대받은 귀인인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지 마십시다. 마땅히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앞에 조심해야 하며 또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주인처럼 보이게 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종이며, 주인을 섬기러(serve) 여기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여기서 섬김 받고자 하십니까? 그럼 잘못 오신 것입니다.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며,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적당히 시간을 채우는 예배 관람자로 여기 계시면 곤란합니다. 예배에 집중하고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십시오. 다른 누군가에게로 시선이 흐트러지거나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지 않게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힘을 다해,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주를 섬기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는 것을 가장 큰 힘으로 삼는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를 그렇게 예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장 강하고 존귀할 것입니다.
그분이 왕이시며 주님이시라면, 우리의 소중한 겉옷을 벗어 주님의 임재 앞에 깔아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힘껏 찬송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이 예수를 영접하듯,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영광 받으소서,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찬송이 마치 우리를 위한 노래인 듯, 흥얼거리지 마십시오. 힘껏 소리를 높이십시오. 비록 나귀를 타고 계시나 그분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에 합당한 태도와 모습을 갖추십시오. 우리는 예배자이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아올 때 결코 빈손으로 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배에 합당한 예물을 준비하십시오. 아마 오늘 본문 속 주님도, 당신을 예배하기 위해 준비된 수많은 유월절 양들과 함께 입성하셨을 겁니다.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우리의 형편에 맞게, 마음과 정성을 담아, 예물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이 가난해서 여러분의 예물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물질만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빈손으로 당신 앞에 나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십시다.
가능하다면 좋은 것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흠 없고 가치 있는 것으로 드리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태우는 어린 나귀를 보십시오. 나귀라 해서 아무 거나 다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아무도 태워보지 않은 나귀’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우리의 예물도, 예배도, 오직 주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우리가 잊지 마십시다.
예수님은 그 나귀를 얻고자 두 제자를 앞서 보내며 말씀합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만 하면 그 주인들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절). 가보니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그 나귀로 무엇 하려느냐고 물었지만,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하니 더는 용처를 묻지 않고 내어줍니다. 어디에 쓰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쓰느냐, 그게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가 쓰시겠다, 그 주권의 말씀을 기쁘게 여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소유와 재능, 힘과 능력을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신다면,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이요, 가문의 영광이요, 최고의 출세임을 잊지 않는,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각각의 복음서가 강조하는 바가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는 구약 예언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누가는 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는 예언자 예수님의 눈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 요한은 십자가 자체가 영광임을 강조하여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예수를 영접했다고 이 대목에서 기록합니다.
각각의 관점이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메시아의 영광, 백성의 환호입니다. 그래서 분위기는 장엄하게 고조되어 있고, 감정적으로도 에너지가 충만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좀 다릅니다. 상대적으로 가장 차분하고 침착합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얼핏 신문 기사 같기도 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일례로, 다른 복음서들은 정말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몰려와 환호한 것처럼 기록하지만 …, 마태는 ‘온 성’이 소동했다 하고, 누가는 심지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는 말씀도 기록하지만, 마가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라고만 기록합니다.
실제로 유월절과 무교절에 예루살렘에는 어디나 사람이 많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다 모이기 때문이지요.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개의 성문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온 순례객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입성 행진만이 아니라, 다른 문들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빌라도와 그의 군대가 행진하여 들어왔을 서쪽의 문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겁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총독 빌라도는 본래 항상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게 아니지요. 그의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에 있다가, 이런 큰 명절이 되어 유대인의 봉기나 소요가 예상되는 때에만 치안유지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그 빌라도의 입성을 보기 위해 반대편 성으로 몰려갔을 겁니다. 이익에 밝고 권력이 필요한 사람들은 주로 거기 있었겠지요. 그 빌라도는 뭘 타고 들어왔겠습니까? 네, 당연히 좋은 말을 타고 들어왔을 겁니다. 여러분, 지금 유월절 예루살렘은 그런 상반된 분위기가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서로 다른 두 주권자가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고, 사람들은 정반대편의 이 두 행렬 어딘가를 선택하여 동행해야 했습니다.
마가는 그런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려내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나오지만, 그 이상의 어떤 흥분으로 이어지지 않고, 곧장 그 환호는 사그라집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기록하지요. 11절에 보시면, 이미 때가 저물어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거기 얼마 계시지 않고 곧장 열두 제자들만 데리고 다시 성 밖으로 나오십니다. 기다리던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치고는 조금 김이 빠지는 결말입니다.
대신 그러다보니 마가복음에는 본래 예루살렘 입성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메시지가 훨씬 더 도드라집니다. 차분한 기록이 가진 강점은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한다는 점인데요 …, 어린 나귀를 가져오는 상황을 통해 주님 스스로 조용히 입성을 미리 준비하시는 모습과 그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겸손함이 자연스럽게 전면에 등장합니다. 지난 수요일 말씀에서 나왔던 단어를 사용하자면 …, 네 ‘청종’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청종’(聽從)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뭐랄까, 본문을 그린 어떤 그림이 있다면, 그 제목을 ‘청종의 향연’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앞서 보낸 두 제자의 모습이 그러하고, 나귀의 주인도 그러하며, 왕의 무거운 무게를 견디는 어린 나귀까지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십자가의 여정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계신 주님 또한 ‘청종하는 자’입니다.
함께 읽은 구약의 스가랴 말씀은 오늘 본문의 이 장면들이 결코 예수님의 의도된 세리모니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겸손한 왕이니까 나귀를 타야지,’ ‘전쟁의 상징인 말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 나귀를 타는 게 좋겠어,’ 뭐 이런 생각으로 하신 게 아닙니다. 그럼 왜 그리 하셨습니까? 네, 구약의 말씀이 기록된 그대로를 이루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청종하신 것입니다.
나귀는 겸손을 상징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겸손은,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겸손, 청종하는 자의 겸손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부드러운 언행을 보이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의 본질은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 앞에 겸손했기에, 그의 말씀을 청종했고, 그래서 십자가까지 지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사람 앞에서의 겸손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는 겸손한 듯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완악하고 교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고통과 번민으로 마음이 가득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내가 일주일 후면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만약 알고 있다면, 과연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주님은 직접 당신의 감정을 세 명의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14:34) … 네, 주님도 사람이셨고, 그 고민과 슬픔에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의 마음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는 주님의 그 괴로움과 간절한 기도가 이때 등장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 이미 입성할 때 주님의 마음이 이랬습니다. 괴로움과 갈등으로 가득했습니다.
본문이 그려내는 주님의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청종의 모습입니다. 나귀 타는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냥 걸어 들어가면 될 것을, 굳이 예언된 말씀 그대로 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던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 한 가지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여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청종의 삶, 여러분 그것이 주님의 겸손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뭐든 이루기 위해 삽니다. ‘이루고자 하는 바’ 그게 삶의 목표이지요. 여러분은 올 한 해, 또 여러분의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습니까? … 이번에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하다보니, 어떤 분은 작년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도의 제목이 생긴 것을 봤습니다. 훨씬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목표가 세워진 분도 계시더군요. 그게 이루어진다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다 싶은 그런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네, 그게 뭐가 되었든 우리는 ‘이루고 성취하는 삶’이 고귀한 것을 압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것이지요.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십자가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내는 삶, 그래서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삶, 주님은 그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주의 말씀을 이루는 삶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 청종들이 하나둘 합하여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지금 예수님의 입성을 보면, 예수님 혼자 모든 걸 이루시지 않음을 봅니다. 주님 자신의 청종과 또 당신에게 청종하는 주님의 제자들, 그리고 백성들과 심지어 나귀까지, 그 모든 청종하는 존재들의 합력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본문은 증언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청종의 향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고백교회도, 그와 같은 청종의 믿음들이 합력하여서, 하나님의 뜻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나귀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 본래 주님께서 이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스가랴 말씀보다도 훨씬 이전 시대의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본문의 기원은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우선 결정적인 신명기의 말씀에 보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게 됐을 때, 우리도 다른 민족처럼,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서의 힘을 가지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해야 될지, 어떤 왕을 세우고 그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지에 관해 하나님께서 지침을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 한 가지가, 군마를 많이 기르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돈이 좀 있다고 애굽에 가서 군마를 사오지 말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왕을 세웠는데, 왕이 있는 국가가 됐는데, 그런데 기마병을 많이 두지 말라, 여러분,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당시 군마는 군사력의 지표였습니다. 그런데 군 통수권자인 왕이 충분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실상 그것은 왕이라 하기도 민망합니다. 언제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언제 다른 나라가 침략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군마가 없다면, 그 왕은 불안해서 하루나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명령하십니다. 군마를 많이 두어 거기 의지하는 왕이 되지 말라고. 말이 많으면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기도도 하지 않게 될 테니, 처음부터 많이 가질 생각을 말라 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 되라고, 그 나라를 세운 것도, 보존하는 것도 하나님이심을 신뢰하라고. 하나님이 앞서 가시며 그들의 삶을 준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그들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하나님이 지키시는 평화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짐승이 다름 아닌 오늘 나귀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보이는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고 했습니까? 네, 어차피 지금 이스라엘이 맞서야 할 상대가 그들이 군마를 모은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시려는 삶의 목표 자체가 이스라엘이 가진 군마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기에, 우리의 능력이나 깜냥으로 준비하고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축복, 그런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이 아니기에, 군마가 아닌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이,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청종하는 믿음, 그것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맞습니까? 그걸 놓치면 안 됩니다. 그 믿음이 곧 승리입니다. … 우리는 요즘 QT 본문을 통해 다시 아브라함의 삶을 보고 있습니다. 어제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땅을 선택하는 권한을 양보하지요? 살아보니, 경험해보니, 좋은 땅 먼저 가진다고 하나님의 복이 되는 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어차피 그런 것으로 세상을 이기는 게 아닌 것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한참 어린 조카에게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여러분 장유유서의 수직관계가 강했던 고대에는 이게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없이는 할 수 없는 선택이지요. 누구는 이것이 아브라함의 성격이고, 인격이며 겸손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니지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믿음의 결과입니다. 겉으로는 겸손이 드러나지만, 속에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복이 되는 것은, 내가 가진 힘이나 지혜나 능력의 결과가 아님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믿음에 기초한 청종의 선택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복이 되는 길임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굳이 말을 타지 않아도 됩니다. 심지어 내가 소유한 나귀가 아니어도 됩니다. 남에게 빌려서 타는 나귀일지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다만 청종하는 믿음뿐입니다. 나귀를 타는 겸손은 이 믿음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심판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어떤 개인적 인격에 근거한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때 생기는 하나의 종말론적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파워, 그것이 겸손인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에게 그 믿음과 겸손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의 많은 사람들이 그 겸손한 왕을 경배하고 환호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들이 며칠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친 그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나귀를 타신 메시아를 찬송하며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주님을 뒤따르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선택을 내린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반대편 성문으로는 빌라도의 행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말과 병거로 무장한 병사들의 호위 속에 로마의 황제를 대변하는 총독이 평화의 도성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리적 힘에 근거한 평화, 그게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입니다. 그 평화가 지금 주님 반대편에서 행진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반대의 두 가지 평화가 이스라엘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둘 중 하나의 행렬에 참여하게 됩니다. 힘에 근거한 평화의 행렬이냐 믿음에 근거한 평화의 행렬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그 미련한 십자가의 도가 로마는 물론 결국 온 세상을 물들일 때까지, 그리고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까지,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는 그 자리까지, 인내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느 행렬에 몸 담고 있습니까? 군마를 이끌고 백마 위에 올라 탄 빌라도와 함께 서쪽 성문을 통해 평화의 도시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귀 새끼를 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걸었던 예수님과 함께 동쪽 성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이 하나인 이상, 우리는 지금 어느 하나의 행렬에만 참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귀를 탄 메시아를 부끄러워하고, 반대편 부와 성공을 약속하는 로마제국의 행렬에 참여하고 있느냐, 그것은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요. 지금 내가 어떤 행렬에 속해 있는지를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멈춰 서서 이제 어떤 행렬을 뒤쫓아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뒤따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누구의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지, 무엇을 이루며 살고자 하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만약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의 길을 뒤따라가겠다고 하신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믿음,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겸손하여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 군마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힘을 신뢰하는 예수.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예수. 당신과 똑같은 삶을 살고, 그 삶을 증언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예수. 우리는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주님과 끝까지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전에 잠시 들어가셨던 주님께서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성 밖으로 나오십니다. 내일 다시 날이 밝으면 주님과 제자들은 또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다시 들어가지요. 주님을 향한 환호는 줄어들 것이며, 점점 주님은 외면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알아갈 것입니다. 이 길이 좁은 길이며, 많은 사람들이 가려고 하는 길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우리의 삶이 예수를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능히 겸손할 수 있는, 어린 나귀 같은 순전한 예배자이길 축복합니다. 어린 나귀여도 괜찮고, 그래서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누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자, 우리가 모시는 자, 우리 등에 계신 이가 누구냐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입니다. 부디 주의 말씀을 청종하는 어린 나귀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