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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52.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2)
2019-12-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1204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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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2:28~23:1,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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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약서의 내용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고 또 싫어하시는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모습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자고 말씀드렸고, 그렇게 묵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22장 후반부를 다 마무리하지 못해서, 22장 28절부터 계속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28절은 재판장과 지도자를 모독하거나 저주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힘이나 권력으로는 안 되니까 말로라도 어떻게 좀 해를 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언어로라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내용의 전개상 다소 갑작스러운 느낌이 있는 내용이지만, 22장 전반부(8, 9절)에도 재판장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이어지는 23장의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일관된 흐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재판장’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사실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로힘’입니다. 앞의 9절에도 ‘재판장’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아래 주석에는 ‘하나님’이라고 나오는데요, 여기서는 그냥 ‘재판장’으로만 옮겼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재판장’보다는 그냥 ‘하나님’이라고 옮기는 것이 여기서는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 다른 언어 번역들도 대체로 ‘하나님’이라고 옮기고 있긴 한데요, 한편으로는 개역개정 성경이 왜 ‘재판장’이라고 옮겼는지는 이해가 됩니다. 이어지는 ‘지도자’라는 말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리 했을 것입니다. 재판장과 지도자를 등위로 연결하여 백성의 리더를 존중하라는 의미로 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그리고 모세와의 관계 안에서 생각해보면, 그 초점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 광야 생활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또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를 저주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지도자를 저주하는 것이 같은 불신앙의 맥락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재판장’보다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게 맞고, 이것은 광야와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대언자를 존중하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23장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본문처럼 ‘재판장과 지도자’로 옮겨도 별로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재판장이나 지도자를 존중하라는 명령은 구약성경에서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로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마 22:21).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속의 권력자나 리더들을 최대한 존중함으로써, 우리의 싸움이 그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싸움이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신뢰함으로써 그 싸움을 우리가 싸우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권위를 다름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그들을 함부로 거스르거나 저주의 말을 내뱉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요즘 우리나라에서처럼 정치적 대립이 극심하고, 기독교인들이 그 대립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더 더욱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권이 내 마음에 맞든 안 맞든, 대통령을 비롯한 나라의 여러 지도자들에 대해,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모독과 저주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로마 황제에 대해서도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비판은 하되 비방은 아니어야 합니다. 모독하고 저주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그런 류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장로가 대통령이 되고, 내 마음 내 신앙에 맞는 누군가가 정권을 잡고, 그렇게 된다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 누군가를 지도자로 세워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인정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적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신뢰하는 문제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함으로 우리의 언행을 삼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29절과 30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관련됩니다. 29절에 보면,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에, ‘네 처음 난 아들들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이야기도 나오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은, ‘처음 난 것’과 ‘처음 거둔 것’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드릴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성경은 그것이 무엇이든 처음 얻은 소산은 특별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동식물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처음 난 것은 다른 것들과는 다른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처음 난 생명, 초태생이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 초태생을 구별하여, 즉 거룩하게 하나님께 돌려드림으로써(13:2), 우리가 누리는 모든 생명과 풍요가 오롯이 생명의 근원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 역시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결정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초태생의 구별이 다름 아닌 출애굽 과정에서 제정된 유월절 직후에 선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단지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죄의 종 된 우리를 택하여 사망에서 구속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그 구원은 다름 아닌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렇게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를 집에 바름으로써 그 심판이 넘어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죄의 종으로서, 사망의 심판이 예비 되어 있으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월(踰越)의 은혜를 입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받으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받아 마땅한 것을 우리가 받아 누리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말입니다.
초태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바로 이 구원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중요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얻은 영원한 생명과 우리의 모든 소유가 우리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누리고 사용할 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 처음 난 것을 더디 드리지 말라 하십니다. 첫 수확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살아 있고 충만할 때, 바로 그 마음을 담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농부가 첫 추수를 할 때, 또 기르는 가축이 첫 새끼를 낳았을 때, 또 사람이 장남이나 장녀를 낳았을 때, 직장에서 첫 월급을 탔을 때, 그때 느끼는 감동은 분명 특별한 것이지요. 첫 월급 타고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선물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감사와 기쁨을 담아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시간이 흘러 감격은 약해지고, 단지 예물의 형식 그 자체만 남게 되는 것보다는, 마음과 형식 모두 갖춰진 바른 예물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추수감사주일의 감사 예물이 그런 의미일 겁니다. 그 해 추수한 첫 소산으로 예배하는 게 본래 추수감사주일의 의미이니, 오늘 본문의 메시지와 그 맥락이 통합니다. 물론 우리가 더 이상 농사를 짓고 하는 것은 아니어서, 뭔가 현실적인 변용이 필요해보입니다. 어쨌든 그 해의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데요, 그래서 저는 한 해의 첫 월급을 받는, 1월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추수감사주일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난 것을 드리며, 결국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할 책임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열의 하나를 드리든, 초태생을 드리든, 그것 드렸으니 나머지는 내 것, 이런 게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서 내 삶 전부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다시금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돌이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그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31절은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사체를 고기로 먹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율법이 정한 바른 방법으로 도살하지 않은, 들에서, 야생에서 찢겨 죽은 동물을 먹지 말라는 것인데요 …,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피를 먹지 말라는 구약의 계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그냥 자연에서 맹수에게 찢긴 어떤 동물이나 길에서 죽어 있는 그런 동물을 먹거나 하지는 않지요. 그 자체로 인간에게는 모종의 거리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피의 문제, 생명의 주권에 대한 문제 때문이라고 언급합니다. 인간이 동물을 죽여서 취하여 먹는 것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식사 시간에 매번 고기 앞에서 살생을 고민하고 먹는다면 아마 육식 자체가 어려울 것입니다. 실제로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육식이 우리에게 그리 당연한 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리는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리인데, 그 다스림 가운데 생명을 빼앗아 취하는 권리까지 있다고 과연 생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본래 짐승이든 뭐든 피를 흘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나무열매와 땅에서 나는 채소를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받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했지만, 거기에는 짐승을 도살하여 피를 흘리게 한 후 먹는 것까지 허락된 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 언제 육식이 허용됩니까? 네, 노아의 홍수 직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에 처음 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말씀합니다. 아마도 물의 심판으로 인해 양식과 식물이 충분하지 않았던 현실적인 상황도 고려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먹으라 하시면서 그 생명 되는 피와 함께 먹지는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비록 짐승을 죽여 취하게 되더라도, 그 생명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또 그 허용이 결코 생명에 대한 주권의 허용이 아님을, 피를 구별하고 멀리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이 짐승을 도살하여 고기를 먹을 때에도, 율법이 정한 대로 가축을 도살한 후, 피를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만 먹을 것을 말씀합니다. 단지 위생적인 문제 때문만도 아니고, 유대인들의 먹거리 ‘코셔’처럼 어떤 안전한 식재료여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게 피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지요. 중요한 건 피를 구별하는 그 행위에 담긴 신앙적 의미입니다. 앞서 초태생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또 역시 같은 관점에서,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개입되지요. 피는 생명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피로 인하여 그들의, 우리의 속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뿌려 사람의 죄를 속죄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습니다. 이 속죄를 통한 화목이 출애굽과 율법의 핵심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는 생명에 대한 경외의 보루가 되는 것과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는 우리 인간의 자의적인 소유나 처리가 불가합니다.
정리하자면 육식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바뀐 환경과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허락된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동물의 생명을 희생해서 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또 인간의 본성이 그만큼 타락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이 동물을 피째 먹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셨고, 또한 피를 피로 갚는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인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서 여전히 보존되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율법이 아닌 새 언약 안에서 살아갑니다. 심지어 주님은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우리로 영원한 생명을 살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율법의 이러한 규례들에 더는 얽맬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자유 속에서도 절제와 숙고가 필요하겠지요. 우리는 자유가 생기면 일단 무조건 육체의 기회를 삼고 봅니다만, 그 속에 담긴 신앙적 의미들을 기억하며 삼가는 것도 중요한 신앙의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고기를 먹고 피를 먹는 그런 식생활 자체를 어떤 율법적인 기준으로 바라보고 정죄할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매주 성찬식을 통해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눌 때마다, 우리가 얻은 영원한 생명과 피의 속죄를 기억하고, 우리의 자유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그저 주님의 은혜와 배려로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됐음을, 또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고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우리 모두의 거룩한 소명임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23장으로 넘어가서, 오늘 우리가 읽은 1~9절은 대체로 사법적인 공의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1~3절은 증인과 관련된 것이고, 6~8절은 재판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간이 되는 데까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절은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홉 번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지요. 위증도 그렇고, 거짓된 풍설도 그렇고, 이것들 역시 다 말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언어가 그만큼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고 또 그만큼 지켜내기 어렵다는 뜻일 겁니다.
‘거짓된 풍설’에서 ‘풍설(風說)’이라는 말이 재밌습니다. 풍설, 풍문 등의 표현은 다 ‘바람’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 그러니까 ‘근거 없는 말’을 뜻합니다. 근거와 출처가 애매하기에 이런 말을 퍼뜨리는 데 우리는 별로 죄책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누구나 남의 말 하는 걸 좋아하지요.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 곧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우리의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는 잠언의 말씀도 있습니다(26:22). 네, 남의 말은 우리 귀에 즐겁고 또한 쉬이 오고 갑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합니다.
남을 해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거짓을 퍼뜨리는 것만 문제가 아닙니다. 풍설을 퍼뜨리는 것 자체를 성경은 금합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며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가볍게 던지는 말, 한쪽 편의 이야기만 듣고 그것이 마치 결론인 양 전하는 말, 맥락은 다 잘라내고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하는 말, 또 안 해도 되는 이야기인데도 굳이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남의 약점이나 아픔을 가십거리로 삼는 이야기 등, 우리 가운데 있는 수없이 많은 ‘거짓된 풍설’을, 진리이신 하나님은 매우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이런 말들의 파괴적인 결과들을 충분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독한 말을 일컬어 시편은 ‘화살’에 빗댑니다만, 정말로 익명의 악한 풍설들은 한 사람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화살과 같습니다. 수많은 악플과 가짜뉴스, 그리고 그것을 퍼 나르는 것 등, 거짓된 풍설의 위험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언어는 일단 사람의 입에서 나가면 스스로의 생명의 힘을 갖습니다. 내가 멈추고 싶다고 멈춰지는 게 아니라, 기어이 누군가를 쓰러뜨릴 때까지 언어 자체가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거짓된 풍설의 위험이 가득합니다. 사람이 모이고, 또 모여서 편이 갈리고, 적당히 서로를 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불필요한 소문과 ‘뒷 담화’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이 교회를 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가 거짓된 풍설인 겁니다. 아담과 하와를 결국 사탄이 거짓된 풍설로 넘어뜨렸다는 것을 우리는 뼈아프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또한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더욱 거짓된 말, 허망한 말, 악한 말을 미워하십니다. 1절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거짓된 말은 악인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진리보다 풍설에 관심이 많으면 교회는 결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더욱 말에 주의해야 함을 우리가 뼈에 새겨야 합니다. 혹 어쩔 수 없이 풍설을 들었다면, 내가 그 이야기의 무덤이 되리라, 하는 마음으로 말에 삼가야 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 그런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일단 살펴보고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정리하면 …, 우리의 생명의 주요 구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삶을 경영해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는 참 된 예배이며, 우리에게는 축복임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오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것 되기를 원합니다. 존귀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며, 아름답지 못한 죄의 모습들을 우리의 마음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하는, 온전한 거룩함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흡연자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비흡연자들에게 담배 냄새가 그냥 싫고 멀리 하고 싶어 얼굴이 일그러지듯, 죄에 속한 모든 것들을 향한 우리의 반응이 그러하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호불호가 우리의 것이 되기를, 그래서 오늘 말씀대로 언행에 삼가고,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함으로 사랑을 베풀며, 물질 앞에, 사람 앞에 머리 숙여 예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