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집에 들어가시매' 2019년 11월 3일 주일 설교
2019-11-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1103 오순절 후 스물한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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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14~29, 집에 들어가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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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37) 본문 28절의 ‘집에 들어가시매’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따로 산에 올라가 기도의 십자가를 지시고, 메시아로서의 영광을 입으시던 그 때, 산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주보 전면의 그림에서처럼, 혼돈과 갈등의 어두운 분위기가 산 아래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 주보 표지에는 라파엘로 산치오의 같은 그림, ‘그리스도의 변모’가 위아래 절반으로 나뉘어 각각 실려 있는데요, 본래 이 그림은, (서른일곱 이른 나이에 자신의 생일에 숨을 거둔 천재 예술가의 유작으로, 마지막 숨을 거둔 그 방에 이 작품이 미완성으로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가로 3m, 세로 4m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의 작품으로, 현재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요, 이런 그림을 실제로 본다면 아마 오늘 본문의 그 대비된 분위기가 훨씬 더 잘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던 때를 연상케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형상으로도 빗대어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모세가 얼굴에 광채를 내며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가 제일 먼저 본 장면은, 다름 아닌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스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내면에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 앞에 머리 숙여 경배하는 것보다 더 큰 수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산에서 내려온 주님이 보신 장면 역시 또 다른 수치입니다. 예수 이름의 존귀한 능력은 없고, 그저 사람들의 논쟁거리가 되고 만 제자들의 수치였습니다. 이처럼 산 위와 산 아래가 영광과 수치로 극명하게 나뉘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어려서 말 못하는 귀신에 들려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넘긴 아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예수님과 주요 제자들은 산에 올라가고 자리에 없었지요. 남은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기 위해 애를 써봤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거나 숫자가 모자라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는 아닙니다. 앞서 마가복음 6장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둘씩 묶어 파송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주님 없이 제자들만 있었고, 또 숫자도 훨씬 더 적은 두 명씩이었지만, 귀신들은 그들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 앞에 하나 같이 항복했습니다. 상황과 조건이 훨씬 좋아진 지금, 그럼에도 아무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고,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옆에 있던 서기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예수와 그의 공동체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시끄러운 논쟁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이게 왜 안 되느냐, 온갖 신학적 논리와 구약의 말씀을 들이대며 논쟁을 이어갔고,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제자들의 무능함만 도드라졌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 공동체는 결국 세상의 논쟁거리만 될 뿐입니다. 아울러 그 반대도 참입니다. 기도와 능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말과 논쟁만 무성하면, 거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제자라는 이름표, 성도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고 능력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에게는 어떤 언어, 어떤 말이 많은가 …, 우리고백교회 역시 깊이 숙고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 수치의 자리 가운데 주님이 돌아오셨고, 곧장 모든 혼돈과 어둠을 질서와 빛으로 바로잡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이 좋으실 리 없습니다. 그 불편한 마음이 본문에 자주 등장하지요.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주님의 말씀이 여럿 등장합니다만, 사실 그 유명한 말씀들 속에는, 무엇보다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안타까운 마음이고, 보다 정확히 하자면, 주님의 분노와 강한 스트레스가 담겨 있습니다. 3년의 사역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주님 마음에 드는 게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주님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데리고 간 세 명의 주요 제자는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 기도해야 할 자리에서 잠만 잤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유일무이한 영광의 자리에서 한다는 소리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습니다. 산 아래 남은 아홉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예수 이름의 능력을 다 잃어버린 채, 세상의 논쟁거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서기관들은 비판과 논쟁만 일삼으며 예수를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 공동체에 대해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이 아버지 역시, 예수를 의심하며 시험합니다. 거기에 여전히 기세등등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나가라 해도 나가지 않고 버티는 귀신들까지, 정말이지 주님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남 이야기 할 거 없이 오늘 이 땅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마음, 또 우리의 삶을 향한 주님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기록된 주님의 여러 말씀이 매우 예리한 칼처럼 날카롭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더니, 주님은 거기 담긴 표현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에 아버지가 쩔쩔 매게 되는 걸 보면, 분노어린 주님의 어조와 표정이 어느 정도 상상이 갑니다.
사실 지금 이 아버지 입장이라면 이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제자들이 숱하게 애써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그리 말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 보입니다. 아무 차도도 나타나지 않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의 안타깝고 지친 마음에 무심코 한 말이었을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의를 차리기 위해 했던 수사법 정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가끔씩 사용하지 않습니까? “주님 하실 수 있다면, 이것 좀 해 주십시오.” 심지어 주님도 비슷하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런데도 오늘 주님은 그 말 한 마디, ‘하실 수 있거든’(‘if You can do anything’)에 격하게 반응하십니다. 그만큼 지금 주님의 마음이 심히 괴롭고 답답합니다.
여러분, 좀 오래된 설교 말씀이긴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하실 수 있거든’이 아니라, ‘원하시면’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말씀,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마가복음 1장에서,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원하시면’(If You are willing) (주께서)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오늘 본문과 차이가 느껴지시지요? 이 나병환자의 관심은 주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주께서 고치시려는 의향과 뜻이 있는가,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원하시면’ 자신을 깨끗하실 수 있다는 이 말 속엔 실로 엄청난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질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은 물론이고, 그 치유의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겸비함도 이 고백 속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 속에는 정반대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지요. 우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뉘앙스입니다. 더구나 주님의 뜻이나 의지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표현입니다. 아마 우리끼리도 이런 말 들으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정확히 이 표현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도 기도할 때 이 ‘할 수 있거든’의 마음일 때가 참 많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아니라, ‘원하시면’, ‘뜻하시면’으로, 우리의 기도를 바꿔야 합니다.
다행히 이 아버지는 그 믿음 없음을 간절함으로 만회합니다. 너무나 절실하기에, 주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간구합니다. 주님을 무시하거나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이게 내 문제가 아니라 자식 목숨 달린 문제라 다급한 마음에 그런 거라고, 주님께 간절하고 겸비한 태도로 다시 나아갑니다.
여러분, 분명 간절함에 기댄 이 믿음도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금방 날아가 버린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휘발성이 워낙 커서, 문제가 사라지면 믿음도 함께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간절한 믿음을 생기게 만드는 아주 어려운 문제들을 계속 겪을 수도 없습니다. 보통의 성도들이, 믿음이 잘 자라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님 마음이 무겁습니다. 앞서 이 아버지가 주님께 다가와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제자들이 능히 고치지 못하더라고 이야기했을 때도 주님은 같은 실망감을 드러내십니다. 19절이지요, “…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 ‘너희 정말 언제까지 이럴래.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어떤 표현, 조금은 어색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너희여,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세대여’ 그랬습니다. ‘faithless generation’라고 해서 어떤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지 않으시고, 그 세대, 곧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전부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 전부 다 마음에 안 드신다, 하는 거지요. 제자들만이 아니라, 서기관들이나 많은 무리들, 또 이 아버지 역시도 함께 포함된 책망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제자들이, 성도들이 끼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믿음 없는 세대 가운데 교회가 한 몫 합니다. 거기서 주님의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패역하다’라는 말이 추가되는데요, 이 말은 본래 구약에서 많이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믿음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패역합니다.’ 그래서 더 문젭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뭔가 부족한 상태, 연약한 상태를 의미하고, 그래서 마치 도움과 자비가 필요한 문제처럼 들립니다만, 패역함은 뉘앙스가 많이 다르지요. ‘패역하다’는 건 기본적으로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비뚤어지고 삐딱하여 하나님을 거슬러 행한다는 뜻입니다(perverse). 주님께서 지금 믿음 없는 것과 패역함을 함께 언급하신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 없음’은 단지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함의 문제이며, 그래서 죄와 심판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주님은 여기서 패역하다고까지 하십니까? 여러분, 패역함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며, 믿음 없는 이 세대와, 세상과 같은 수준에서 살고자 하는 것, 그래서 온전한 믿음이 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거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성도들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믿음이 마치 내 노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기에,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믿음 없음과 패역함을 따로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위하여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그 고집과 게으름을 주님은 패역함에 빗대어 책망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 하나로 인하여 책망을 들은 아버지가, 주님께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여러분,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믿음 없는 걸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순 같지요?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 절박함 속에서도, 정확하게 구원 얻는 길을 짚어냈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주님을 향해, “주님, 그래도 제발 이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그래도 불쌍하니 이 아이를 살려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다 하시니, “내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세요.”라고 고백한 겁니다. 이것이 간절함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의 문제임을 어쨌든 인정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 아버지의 고백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온전히 믿는 자만이, 믿고자 하는 자만이,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성도는 자신 안에 정말 믿음이 있는지를 숙고해봐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내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주님께 소리라도 지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해 뭔가 해야 합니다. 지난주에는 기도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여러분, 꼭 기도의 자리를 지켜주십사, 여러 차례 권면 드렸습니다. 여러분, 해 보셨지요? 잘 안되지만 노력이라도 해 보셨지요? (네, 잘하셨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 이게 너희 제자들은 불가능하다는 취지입니까? 아니지요. 가능하다, 그러니 기도해라, 이 말씀 아닙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다른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해서, ‘금식’을 포함시킨다고 나옵니다. 기도로 안 되면, ‘금식’이라도 해서, 너희 믿음 없음과 능력 없음에 대해 탄식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냥 ‘믿음 없고 패역한 세대’ 속에 함께 묶이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사니까 어쩔 수 없어. 뭐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우리라고 많이 다르겠어?’ 우리 스스로 타협하고 패역함의 길로 가면 안 됩니다. 그건 연약함이 아닙니다. 완악함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롬 12:2). ‘흘러가는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세대에서 탈출하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구원 얻는 시작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치는 자로, 회복시키는 자로, 귀신을 내쫓는 자로, 세상을 꾸짖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저 세상 속에 포함되어 한 덩어리로 주님의 책망을 듣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게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소속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겐 사명도 있고, 책임도 있습니다.(*)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표현이 본문의 어디냐면, 28절입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라고 했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한 집에 들어가 머물게 됐습니다. 으르렁대던 서기관들과 믿음 없는 수많은 무리들, 그리고 귀신 들렸던 아이와 아버지가 다 돌아간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한 집에 들어가신 겁니다.
저는 이 ‘집에 들어가시매’라는 구절이 너무나 좋습니다. 같은 집에 들어가시고, 함께 산단 말입니다. 믿음 없는 세대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시나, 주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한 집에 들어가 같이 먹고 자며, 그 믿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베드로가 변화 산 위에 짓겠다고 했던 그 영광의 초막에 머물러 계신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제자들이 살고 있는 답답하고 어두운 그들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을 믿음 있는 자로 이끌어 가십니다.
믿음 없음에 대한 주님의 분노는 단지 포기하고 외면하는 분노가 아닙니다. 그 연약함과 패역함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시고, 거기 함께 머물며 그 문제를 직면하시는 분노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주님은 도망가지 않으십니다. 거기가 더럽다고 피하지 않으십니다. 기어이 그 진흙탕 속에 들어가, 당신의 자녀들을 꺼내어 나오십니다. 말만 하고, 기도만 하며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 진흙탕 속에 들어가셔서 주님은 미움 받고 싸우며, 보내신 사명을 감당하십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뒤따라가는 길은, 무슨 구경꾼이나 비평가의 길이 아닙니다. 패역한 세대 속으로 깊이 들어가 거기서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귀신을 내어 쫓고, 상한 자를 치유해야 합니다. 그저 교회에서 기도만 하고, 예배만 드리는 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교회가 아닌 세상에서 우리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출발점이, 우리의 믿음 없고, 능력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세상을 고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일으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그저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래, 나도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어. 어쩔 수 없는 거야. 남을 위해 하긴 뭘 해. 나를 위해서도 아무것도 못하는데 ….’ 이런 자기연민으로 타협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목표치를 이루지 못하거나, 기준에 미달하면, 묘하게 자기연민이라는 감정 뒤에 숨습니다. 그래서 잘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최선을 다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핑계를 만들지요. 그 출발이 자기연민입니다. ‘난 원래 그럴 수 없는 상황이야. 내 탓이 아니라 내가 처한 환경이 그래. 하나님이 허락한 내 능력, 내 믿음이 원래 그래. 내 형편에 지금 이 정도도 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 내 가족과 내 주변의 도움이 부족해서 그래.’ 그렇게 합리화를 해버립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제일 힘들었던 부분, 또 자주 싸우는 문제가 바로 이 자기연민의 감정입니다. 스스로를 안쓰럽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결국 환경 탓을 하고, 다른 사람 핑계를 댑니다. 실상 너무나 비겁한 모습입니다.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세상을 위로해야 할 사람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느라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어찌 보면 가장 지독한 이기주의이며,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자기연민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앞에서도 회개하고 돌이키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만 지키려고 할 뿐이지요. 무슨 상처와 아픔이 그렇게나 많은지, 한때는 ‘내적 치유’라는 말이 온 교회에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요.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거든요.
믿음 없음에는 연민이 아니라 분노가 필요합니다. 분노라는 에너지가 있으면, 자기연민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래도 잘 한 것은, 집에 들어갔을 때 주님께 질문한 거라고 했습니다. 나름 열도 받고 짜증도 난 거지요. 안 되면 물어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주님, 왜 안 됩니까? 왜 우리는 못합니까? 어째서 나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까? 왜 나는 여전히 믿음 없는 자입니까?” 따져 묻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게 제자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믿음이란 없습니다. 모든 믿음에는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건 믿음 있는 자만이 그 믿음 없음과 싸우려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 없음과 싸우는 것, 그게 믿음의 증거입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들 특징이 뭡니까? 자기가 모르는 것, 자기가 틀린 것을 견디지 못하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싸웁니다. 그 상황에서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분노하고 짜증을 냅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지금 당장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그 믿음 없음을 주님께 아뢰고 기도로 싸워야 하는 겁니다. ‘난 원래 이래.’ ‘난 원래 믿음이 없어.’ ‘난 부족해.’ ‘난 어쩔 수 없는 환경이야.’ 그러면 영원히 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연민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그냥 그 늪에서 구해주지 않으십니다.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내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모습 그대로 남겨지고 버려지는 것, 그것이 자기연민에 빠진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메뚜기라 여기며, 믿음의 싸움을 회피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십니까? 네, 그들의 고백 그대로 메뚜기로 살다 죽게 하십니다. 너희 스스로 메뚜기라 했고, 거기서 일어설 마음이 없으니, 그냥 메뚜기로 살다 광야에서 죽어라, 그게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우리가 그렇게 예수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제자들의 집 안까지 들어오셔서, 기어이 그걸 해결해주고자 하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주시고,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 주님의 의지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혼자 걱정하며 고민하지 말고, 기도하시란 말입니다. 가끔 여러분이 말씀하는, ‘기도할 수 있기를’과 같은 이상한 기도 제목은 그만 이야기하시고, 이를 악물고 기도의 자리로 가서, 자더라도 거기서 주무시란 말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유명한 바울의 권면이 나옵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걸 영어로 보면 참 재밌는 것이, ‘아무 것’(anything)과 ‘모든 것’(everything)이 서로 대조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아버지가 주님께 했던 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의 영어 번역이 바로 ‘if you can do anything’이지요.
주님은 그게 잘못됐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의 ‘모든 것’을 염려하면서, 결국 ‘아무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길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 저를 따라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구하라.” 여러분, 이 고백을 기억하고 살아내셔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주님과 한 집에 들어가는 존재이며, 같은 집에 사는 존재입니다. 주님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받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거기에 숫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홉이 있으나 둘이 있으나 상관이 없습니다. 능력은 숫자가 아니라, 믿음과 기도와 금식에서 나옵니다.
말은 그만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말을 안 하니, 사람 앞에서 할 말만 많아집니다. 기도 없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 의미 없는 논쟁과 자기주장임을 본문이 증언합니다.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한 인간들끼리 모여서 고민하고 염려하고 회의할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고민하는 그만큼만이라도 기도해야지요. 여러분, 저는 우리고백교회가 기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믿음의 공동체이기를 소망합니다. 회의하고 토론하기 전에 기도하고, 우리의 믿음 없음을 위해 분노하며 기도합시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논쟁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능력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판단하고 꾸짖는 자(고전 6:2),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자가 되십시다(히 11:38). 스스로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세상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치유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이 믿음 없고 패역한 세대 가운데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행 2:40).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악하고 패역한 세대를 빗대어 그런 비유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신이 나가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나간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래서 그 사람의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각해진다, 말씀하시며, 이 악한 세대가 그렇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마 12:45).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귀신을 향해 말씀하지요.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그것이 다시 그 아이에게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게으르고 나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지요. 귀신은 게으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믿음 없고 패역한 이 세대로부터 일어나십시오. 끈질긴 자기연민은 이제 그만 내려놓고, 회개하고 분노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귀신을 내쫓지 못하는 믿음, 아무 열매도 없는 믿음, 그걸 수치로 여겨 주님께 아뢰십시오.
그래서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자가 되십시오. 교회라는 변화 산 초막 안에서만 복음을 말하지 말고, 교회 밖에서 믿음을 말씀하십시오. … 스스로를 메뚜기로 여기다 메뚜기로 죽지 말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하시고(빌 4:13),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담대히 요청하십시오. 오늘도 주님은 그런 우리와 함께 한 집에 들어가십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_ 라파엘로, '그리스도의 변모'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