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출애굽기 강해 48. 자유인이 될 것이며

2019-10-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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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수요 성경 강해 --------------------------------- 출애굽기 21:1~11, 자유인이 될 것이며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음질이 양호하지 못함을, 또 시스템 문제로 인해 앞부분이 많이 누락되어 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십계명 이후에 주신 이른바 언약서의 내용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언약서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올바른 예배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오늘은 언약서의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서, 삶의 여러 규례들 중 제일 먼저, 소위 ‘종에 관한 법규,’ 다른 말로 ‘노예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노예’라는 말을 붙이기는 적절치 않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종에 관한 법규’가 언약서 본론의 시작부터 등장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 외에도 다른 중요한 삶의 규례들이 더 많이 있을 텐데, 예컨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문제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한 내용인데요, 그런 규정보다도 이 문제를 더 우선하여 다룬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더군다나 이런 규례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당장 하나님이 종이나 노예를 인정한다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본문의 내용은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종에 관한 문제, 이것은 조금 다르게, 역으로 표현하면, 자유에 관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표현하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 이 말씀은 여기, 언약서의 맨 앞에 등장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미국의 독립운동가 헨리 페트릭의 1775년 연설 마지막 문장)는 유명한 이야기처럼, 인간에게 있어 자유란 생명 그 자체나 다름이 없으니 말입니다. 성경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다루기도 전에, 이 자유를 박탈하는 ‘종 됨’의 문제를 더 먼저 다루는 것도,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직접 연결되어 나오는 것도, 모두 자유의 이런 절대적인 가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본문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여호와란 어떤 분이십니까? 네, 애굽의 억압과 학대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다름 아닌 노예와 종의 삶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 여호와입니다.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노예나 종의 삶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능력으로, 그 종의 멍에가 끊어진 지 이제 석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아마 한 100여 일 정도 됐지 싶습니다. 자유케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예배한 지 100일, 청춘남녀가 서로 사랑을 고백한 지 100일을 기념하듯,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새 언약을 베풀어 주셨고, 그 언약의 맨 앞머리에 바로 예배와 자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온전히 자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모든 얽매기 쉬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오늘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종’의 문제를 다루심에 있어서, 조금은 의외의 방법을 택하십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냥 종이나 노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그런 제도를 폐지하면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리 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인간이 이런 종이나 노예의 상태 그 자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주장하시듯, 이미 종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께서 종이나 노예의 문제를 긍정하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시의 시대적인 특성, 문화적인 특성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여기엔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혼과 관련된 율법을 해석하실 때 분명하게 말씀하셨지요.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와 이혼하도록 남편들에게 이혼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셔서가 아니라고,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완악하여, 그래서 아내를 소유물로 여겨 제멋대로 버리는 일이 당시 사회에서는 너무나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차선의 길을 확보하신 것임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종의 관계가 발생하는 것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 완악한 인간들 속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혹 종이라는 제도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종 된 실존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요.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과거로 돌아가 모세에게 여러분의 직업을 소개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회사원이나 노동자라는 말을 모세는 분명 잘 이해하지 못할 텐데요, 어쩌면 우리는 그냥 엄청난 부자의 종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이미 종복제도나 노예제도가 다 사라진 오늘날에도 ‘갑질’과 노예적 계약의 문제들이 여전하지 않습니까? 최근엔 국정감사 현장에서 금융투자협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저지른 갑질이 폭로되어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데요, 법과 제도가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린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이 다 사라질 리는 만무합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완악하며, 그 좋은 제도와 법을 더 교묘하게 이용한, 더 악랄한 학대와 착취가 여전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문제는 당시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면 불가피한 성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당시의 자유인이 종으로 전락했겠습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입니다. 궁핍하여 빚을 졌는데 결국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겁니다. 지금처럼 개인 파산신청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빚에 대한 배상으로 자신이나 가족을 팔아 그것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이라는 제도가 나쁘다고 그런 모든 빚을 다 면제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해주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재물을 빌려준 사람의 재산 역시 보호받아야 하기에, 이러한 종의 제도는 소위 또 하나의 ‘필요악’이 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브레이크를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사회에 발생한 빈부의 차이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단단하게 고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그 종 됨의 현실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걸 하나님은 아십니다. 실제로 왕이 생기고 귀족이 생기고, 그렇게 계급이 생기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두가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규례와 희년의 율법이 그래서 중요하고, 또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이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기억하고 분별하여 삶으로 살아내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 어떤 종도 스스로의 힘으로 쉽게 자유를 되찾지 못합니다. 설사 종의 멍에를 벗고 자유를 얻는다 해도 그 다음이 문제이지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다시 남들과 같이 정상적인 출발선에 설 수 있는 기회, 그것이 보장된 자유일 때 비로소 그 자유가 의미가 있습니다. 땅 한 평 가진 것 없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뭐라도 좀 주면서 자유를 베풀어야 다시 종이 되는 일을 그나마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13.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15.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 15:13~15)고 했습니다. 얼마를 챙겨주라고는 안 했지만, 하나님이 복 주신 그대로 ‘후하게’ 주라고 하십니다. 더불어 같은 의미에서 희년도 중요합니다. 잃어버린 땅을 다시 돌려주어 정말 제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50년 만에라도 허락할 때, 비로소 한 인격과 그 가정, 또 그 후손이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에 관한 성경의 규례는 단순히 가난과 종의 문제를 개인에게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 이상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가난과 빚의 문제를 개인이 다 알아서 일어서라고 하는 것도 아니며, 그냥 자포자기로 굶어죽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빚을 준 사람의 호의와 돌봄을 통해, 종으로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 6년의 기간 동안 새로운 삶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제와 구속의 의미가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백성들이라면,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하는 중요한 현실적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은 6년 이상 부릴 수 없도록 제한하십니다. 7년째가 되면 더는 어떤 값도 치르지 않고 자유인이 됩니다. 왜 6년이고, 왜 7년째이겠습니까? 주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던 때의 그 질서 그대로, 인간의 질서 또한 그것에 잇대어 존재함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결코 하나님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어 피조물의 안식을 허락하시고 명령하신 것처럼, 그의 백성들은 서로를 향해서도, 같은 패턴의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자비로 대하시듯,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서로를 대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것은 율법의 다른 그 어떤 규례보다도, 하나님께는 중요한 문제였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언약서의 내용에 있어서 그 순서의 의미도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 그 생사화복을 결정합니다. 훗날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는가, 그 이유를 밝힐 때 항상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예배가 더러워지고,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도 문제였지만, 그런 불신앙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가 바로 오늘 이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 한 구절 잠깐 찾아봅시다. 예레미야 34장입니다. 13절부터 21절까지 읽습니다. “12.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3.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 16.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 17.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19.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21.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아멘. 마지막 부분은 정말 ‘아멘’이라고 답하기에도 무서운, 그런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인데요,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의 이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오죽하면 종을 풀어준 다음, 다시 그들을 끌어다가 종살이를 시켰습니다. 여러 권력과 완력을 사용했겠지요. 그만큼 오늘 규례는 현실적으로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인 겁니다. 내내 종의 섬김을 받다가 그 종이 없어진다고 하면, 주인 입장에서는 당장 불편하고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본문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 경외하지 않는 한 지켜낼 수 없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서로 그렇게 자유를 선포하지 않으면, 전쟁과 질병과 가난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어떻게 이 안식년과 희년의 메시지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만 합니다. 다시 오늘 출애굽기 말씀으로 돌아와서 본문의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면 …, 7년째 되는 해 자유의 몸이 된다는 내용에 이어서, 3절과 4절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종이 되기 전부터 이미 아내가 있는 상태였다면 7년째 자유의 몸이 될 때는 당연히 아내도 함께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종으로 있는 동안 주인이 아내를 주었고, 그래서 결혼을 통해 그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생겼다면, 이때는 남자가 자유의 몸이 되어도 처자식은 그 주인에게 귀속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매정한 이야기인 것 같으나, 이는 분명 합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종은 주인의 소유이며, 종의 소유는 결국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마저 부정된다면, 말씀드린 대로, 사실상 사유재산 자체가 부정될 가능성마저 생깁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오늘과 달라서, 여자와 아이는 사실상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는 남자의 소유 개념이 더 강했습니다. 7절 이하에 여자 아이, 곧 딸을 팔게 되는 상황이 전제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런 당시 문화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거의 상식과도 같은 문제였을 겁니다. 지금 이 규례는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 그 테두리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어서인지, 하나님은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경우에 대해서도 따로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나중에 레위기 25장에 보면, 가족 일부가 종으로 있을 때, 그 가족을 속량하는 것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일정의 값을 치르면 자기 가족을 되찾아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종이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6년 뒤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 시간 동안에는 결혼과 출산의 문제는 좀 미뤄두든가, 아니면 처자식을 속량할 수 있는 힘을 빨리 기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이 규례는 단지 종이 된 사람만을 생각할 수는 없는 성격의 문제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규례는, 종을 부리는 주인에게 요구되는 희생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사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6년 연봉이니, 뭐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지금 제 기준으로 계산해보니 한 1억 정도 됩니다. 그런데 빌려주고 못 받은 돈이 몇 억이라면 이건 주인이 크게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기도 해야 되니 말입니다. 또 종의 입장에선, 그것이 비록 힘든 일이긴 하겠습니다만, 어쨌든 기한이 정해진 고난이니 버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군 생활처럼, 끝이 있는 고난은 어떻게든 견뎌지는 게 사람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종은 미래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자신이 받을 수 없게 된 재산의 크기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본전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종을 학대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있으니 율법은 도망간 종의 경우, 그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주인이 너무 가혹하다고 여긴 종이 주인을 피해 어딘가로 도망을 가게 되면, 그는 설사 붙잡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원래 주인에게는 되돌려주지 못하도록 신명기 말씀이 정하고 있습니다(신 23:15~16). 그가 종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그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니 주인이 본전 생각에 종을 심하게 억압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신약성경 빌레몬서의 배경이 바로 그것이지요. 오네시모라는 종이 빌레몬이라는 주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서는 주인보다는 종에게 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요. 뭔가를 훔쳐서 달아났거나, 문제를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만약 그런 문제가 없는 경우라면, 바울처럼 도망간 종을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 (그러니 바울은 지금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주인과 종 모두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따를 것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선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고 있고, 만약 그가 빌레몬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자신 앞으로 달아놓아 달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어쨌든 주인은 자신이 부리는 종을 그렇게 대우해야 합니다. 생사여탈권을 모두 빼앗긴 노예가 아니라 삯을 받고 일하는 정당한 노동자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팔려온 여자에 대해서도, 7절 이하의 말씀에서처럼, 분명한 기준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경우, 즉 첩이나 아내 혹은 며느리로서의 대우(음식과 의복과 동침)를 해 주지 못하게 될 경우, 조건 없이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제대로 된 종노릇보다 제대로 된 주인 노릇 하기가 더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마음도 거기 있는 거지요. 주인은 종을 노예로 생각하고 그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다시 자유롭고 온전한 삶, 스스로 자유를 책임질 수 있는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돌보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삼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 이를 때에야 진정 ‘주인’이라고, 여기까지 가야만 그것이 진정 ‘자유’라 하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그런 주인, 그런 상사, 그런 사장, 그런 담임목사를 만나신 경험이 있습니까? 주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 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 애굽에서 속량하시듯,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속량하시듯, 그렇게 종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종이지만, 종이 아닌 것처럼 대우하여, 결국 나에게 온전한 자유를 얻게 해 준 그런 주인을 만나신 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큰 행운이겠지만, (예수라는 주인 외에는) 그런 사람 찾기 참 어렵지요? (우리가 그런 주인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남자는 나를 인정하고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도 바친다고 하는데, 또 그런 주인이라면 얼마든지 내 마음을 다해 섬길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서도 그 부분이 언급됩니다. 6년 간 섬겼는데, 그 주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공의와 자비로 대하여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면, 종의 입장에서는 정말 그 주인이 고맙지 않겠습니까? 자기 인생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가 그 낭떠러지에서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 밑바닥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 길도 어차피 고되고 힘든 건 마찬가지이니, 그리고 또 다시 종으로 추락할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 고통을 아는 종으로서는, 이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주인을 섬기며 은혜 갚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나을 수 있겠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귀 뚫은 종’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목사님들은 이제 연세가 어느 정도 되셨는데도, 한 교회에 오래 머물러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임지를 구하거나, 담임목사로 나가려고 하지 않으세요. 교회도 평안하고, 담임목사님이 아주 인격적이신 경우인 건데요, 그런 것이지요. 물론 오늘 말씀의 경우에는 중간에 그 언약을 무를 수 없다는 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 주인의 종으로 남겠다고 선언하면 그는 종신토록, 죽을 때까지 그 상전을 섬겨야 합니다. 재판관은 그걸 선택한 종의 귀를 주인의 집 기둥이나 문에 대고 송곳으로 뚫어 피의 언약을 세웁니다. 종신토록 그 상전과 그 집에 묶인다는 의미이고,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주인을 사랑하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선택이겠지요.  아울러 종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또 한 가지 경우는, 종으로 있는 동안 얻은 자신의 처자식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때입니다. 처자식을 단지 자신의 소유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그들을 정말 사랑할 때, 종은 자유를 포기하고, 일평생 가족과 함께 주인을 섬기며 살 수 있습니다. 이때도 같은 방법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결국 인간은 사랑의 이유로만 자유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종 됨을 허용하는 유일한 이유이며, 또한 이유여야만 함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실제로 사랑하면,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 안에는 자유를 내려놓고서라도 상대방을 섬길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여도 그렇습니다. 내가 주인을 사랑하고 참으로 주인을 위해 일할 때, 종은 그때 진정 자유롭습니다. 한용운 선생이, ‘복종’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지요.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요. 기꺼움으로 복종하게 …. (물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사랑을 근거로 남에게 구속을 요구하라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니 스스로를 구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당신의 무한한 자유와 능력을, 우리의 자유와 구원을 위해 내려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지금도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 속에 계시며, 우리를 그 사랑으로 자유케 하시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또한 사랑 가운데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살지 않도록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이웃을 섬기는 참 된 자유를 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 됨이 아주 없을 수는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나와 이웃을 자유롭게 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이 세상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되는 것은 모두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이 꼭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 받는 주인과 종, 그 관계 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종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주인들, 스스로 귀를 뚫어 주인을 섬길 만큼 주인을 사랑하는 종들, 그리고 그런 그들이 함께 잇대어 살아갈 때, 비로소 그곳이 하나님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그런 주인이요, 그런 종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종을 자유하게 하는 데 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내가 종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면, 마치 귀를 뚫은 종처럼, 전심으로 주인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우하시듯, 그렇게 서로와 이웃을 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범사에 삼가며, 나와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_ 그림 출처 : '라이프 성경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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