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주님만의 교회가 세워지며 1 (마16:13~20, 첫 예배를 위한 첫 기도회)

2013-12-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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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01 첫 예배를 위한 첫 번째 기도회 ----------------------------------------------------- 마태복음 16장 13~20절, 주님만의 교회가 세워지며 1 오늘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을 한 마음으로 준비하고자 모이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조촐하고 오붓한 시작이 아닐 수 없지만, 제 개인적인 심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고 기쁠 따름입니다. 비록 시작의 겉모양이 미약하고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 담긴 주님의 뜻과 섭리,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계획은 완전하심을 믿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에게도 같은 위로와 기쁨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고백교회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선한 일이, 주님 다시 오실 때 온전케 될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함께 축복하고 감사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저희 고백교회가 세워지는 데 있어서 기초가 된 말씀으로,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복음서의 유일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때 이후 이 땅에 세워진 그 수많은 교회는 모두 이러한 믿음의 고백의 기초 이에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오늘 고백교회 역시 동일한 고백 위에 세워짐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깊이 묵상하고 그 의미와 뜻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고백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시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는 데 가장 중요한 한 부분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물론 여러분 모두는 베드로의 이 고백과 같은 고백으로 이 자리에 계신 것이라 믿습니다. (주는[당신]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멘.) 사실 이 말씀의 본문은 사실 모르시는 분이 없을 만큼 잘 알려진 말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상 이만큼 해석의 논란이 많았던 본문이 또 없다는 점에서도 유명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논란이 심하고 해석의 가능성이 다양한 본문일수록 좀 더 단순하게 접근해야 보다 큰 오류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데요, 세세한 나무 한 그루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그것을 확대해서 해석하다보면 전체 숲을 오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세한 본문의 내용은 오는 15일 첫 예배 시에 함께 자세하게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교회의 모습에 관하여 함께 상고하려 합니다. 과연 주님은 우리의 바른 신앙의 고백 위에 어떤 교회를 어떻게 세우시고자 하셨는지 바로 앎으로써, 앞으로 고백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할 기도와 일들을 바로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자면, 비록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그 이름은 달라도, 그 교회들 모두 주님이 친히 세우신 ‘주님의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세웠든, 언제 세워졌든, 누구의 돈이 들어간 예배당을 지었든, 누구의 생명이 바쳐진 교회이든, 얼마에 세웠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 이 땅의 일체의 조건과 상관없이,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주님을 위한 교회이며 주님에 의해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오직 주님‘만’의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먼저 본문 17절에서, 주님은 베드로를 복 되다 축복하시며,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가 베드로의 인간적인 혈육이 아닌,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다”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그저 간단히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시지 않고 굳이 “너의 혈육이 아니라, 주님의 아버지, 곧 주님의 혈육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혈육’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한 단어가 아니라, ‘사륵스 카이 하이마’라는 어절로서, 직역하면 ‘살과 피’입니다. 이는 인간적 힘을 나타내는 셈족 계열 언어의 고유한 표현인데, 인간의 이성, 혹은 책과 교사의 가르침의 결과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만 가능한 계시의 결과가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러한 어원적 해석과 함께 구문적인 해석도 필요해 보이는데요, 여기 ‘혈육’은 그러한 인간적인 앎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실제 혈육, 그 중에서도 아버지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17절에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바요나 시몬’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시몬 베드로’라 부를 때 알 수 있듯이 ‘시몬’이라는 원래 베드로의 이름이고, ‘바요나’는 이스라엘 특유의 표현으로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베드로의 아버지를 함께 호명하게 되는 것인데, 주님이 굳이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이라 부르신 것은 뒤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나의(주님의) 아버지와 더욱 또렷이 대비시키고자 함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본문을 옮기면, “너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한 이는 네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시다.”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주님의 아버지는 다시 16절에 베드로가 고백했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의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갑니다(여기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부분은 다음 주에 더 깊이 묵상하겠습니다). 정리하자면, 베드로는 멋지게 주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고백했지만, 그 고백을 있게 한 근거와 힘의 주체는 바로 그 고백 속의 객체였던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고백의 근거가 고백의 내용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그 고백의 주체가 베드로가 된다고 하기는 어렵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하는 대상이 바로 그 고백을 할 수 있게 했다면, 아무리 고백의 내용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가 대단한 인정을 받을 일은 못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저와 여러분, 그리고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맥 빠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도의 길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하심과 붙들어주심의 선한 결과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베드로의 고백은 비록 베드로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베드로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그런 고백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신앙의 고백이란, 그것이 어떤 형태와 내용을 가지고 있든, 단순히 나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의지를 통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베드로와 우리의 고백이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근거를 둔 고백이라 한다면, 잠시 우리 스스로를 조금은 대단하다 여길 수는 있겠으나, 그 고백은 결코 영구(永久)하고 온전한 고백,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당신의 교회를 세울 기초로서의 견고한 토대인 그런 고백일 수는 결코 없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실 때의 기초인 우리의 고백이 단지 우리의 존재에 근거한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를 만나게 됩니다. 모든 신앙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의 완전함으로부터 나오며, 그 완전함을 향하여 날마다 지지(支持)되며 새로워집니다. 비록 날마다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기에 급급한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온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백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의 공급이 없이는 결코 우리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존귀한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있게 하신 그분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 그리고 고백교회를 변함없이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분을 통해 토해진 그 고백이 바로 그분의 고백이며, 그 고백 위에 오늘도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신앙의 슬럼프나 영적 침체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 다시 여러분의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십시오. 부디 여러분 자신의 능력으로 여러분 자신을 회복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일체의 인간적인 노력을 멈추고 그분이 내 안에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 곧 신앙의 고백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다시 여러분의 신앙의 기초를 견고히 하십시오. 그 고백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의(義)에 거하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에게 필요한 성령의 임재를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훗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찾아가 하신 첫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권면을 하셨습니까? “너 어서 기도해라,” “너 말씀 안에 거해라,” “너 어서 회개하고 더 거룩해져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시고, 베드로의 새 고백을 들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 가운데 새 사명과 비전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신앙의 정체(停滯)를 경험할 때, 나의 연약함과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다고 느낄 때, 보다 윤리적으로, 보다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보려는 인간적인 노력으로부터 멀어지십시오. 보잘 것 없고 나약하기만한 ‘나의 의(義)’와 유치한 체면과 염치로부터 당장 벗어나십시오. 우리는 연약한, 그래서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향해 나아갈 것이 아니라, 연약한 나의 조건과 상관없이 나를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나의 그 믿음의 고백을 주님의 교회의 기초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의를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나 자신의 연약함을 겸허히 고백하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스스로를 내어맡기는 자만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경험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고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이 자아의 껍질을 깨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연약함을 벗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기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다가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잠시 이야기가 옮겨졌지만, 저희 고백교회의 영적 기초 역시,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시로부터임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조명, 그리고 고백의 섭리를 통해, 오늘 고백교회는 이 땅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할 것은 공허한 영적 비전이나 허황된 부흥의 꿈이나 인간적인 성취와 업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열악한 현실적 조건과 물리적인 한계들을 바라보며 고백교회의 정체성과 그 역할을 미리부터 제한하고 위축되어서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비견되는 수많은 기성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폄하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모색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우리의 고백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를 향하여 겸손히 나아감으로써 날마다 주님의 교회다워질 따름입니다. 고백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고백 위에 세워진,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의를 구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확인케 되는, 주님의 교회임을 명심하면서, 저와 여러분 모두, 겸손한 당당함 속에 하나의 교회로 빚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어서 주님은 18절에서 그 고백 위에 세워지는 교회가 ‘내 교회’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교회의 주권의 소재에 대해 보다 명확히 하십니다. (‘내 교회’라는 부분에 Highlight!) 실제 헬라어 성경에서도 이 부분은 Highlight 되어 있는데요, 어떤 색이나 글자의 크기의 차이로 강조된 것은 아니고, 문법적인 변형을 통해 Highlight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무 텐 에클레시안’이라 기록된 이 부분은 ‘무’라고 하는 소유대명사가 관사 앞으로 나오면서 ‘나의’라는 소유가 강조된 표현입니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영어식으로 기록하면 ‘my the church’(물론 문법적으로는 틀렸지만)라고 옮길 수 있는 표현입니다. 물론 보통은 그런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지요. 그만큼 ‘주님 당신 자신의’ 교회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내가 이 반석 위에 바로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단언컨대 교회는 오직 주님의 소유된, 주님의 통치 아래 놓인, 주님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것 같아도, 돈이 세우는 것 같아도,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께서 예배당과 교회는 명확히 구분하고 계시다는 전제 하에 이 말씀을 드립니다만, 교회는 누가 주도가 되어 세우든, 누구의 명의(名義)로 되어 있든, 그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이 주인 된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종들일 뿐입니다. 물론 은혜로우신 주님이 아들, 딸로 부르셔서 주님과 한 식탁에 앉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당연히 주님이 주인 되는 곳에서 사람의 소리가 난무하고 사람의 권위가 세워져서는 안 되겠지요. 교회를 통해 사람이 유명해져서도 안 되고, 사람이 칭찬 받아서도 안 되겠지요.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기억해야 할 구절이 있다면, ‘무 텐 에클레시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 속에서 고백교회가 세워지길 원합니다. 목사를 섬기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절대 사람이 주인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부디 교회에서만이라도, 힘들면 억지로라도 겸손하십시오. 아니 겸손한 ‘척’이라도 하십시오. 교회는 사람이 나설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성도도 들레거나 까불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보다 사람의 소리가 나지 않게 합시다. 설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인간의 넋두리들을 소거하십시다. 모두 종 된 바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십시다. 지금이야 당연해 보이는 이 말씀이 이제 곧 교회가 세워지고 그 틀을 잡아가고, 훗날 보다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할 때가 되면, 진정 더 뼈저리게 다가올 것입니다. 목사인 저 역시 단단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맙시다. 고백교회를 오직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애쓰십시다.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욕먹지 않으시도록 고백교회가 잘 합시다. 함께 외쳐보십시다. ‘무 텐 에클레시안.’ ■ 계속되는 본문 18절에는 주님이 비단 교회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친히 건축자가 되셔서 이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심을 보게 됩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의 동사 ‘오이코도메소’의 주체는 당연히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1인칭 화자, 곧 주님이십니다. 이는 교회의 주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과정 역시 주님의 책임 아래 있음을 강조하신다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고백교회 첫 예배 때에 집중적으로 살펴 볼 것이라서 여기서는 그 결론적인 의미만 잠깐 살펴보려 합니다.) 교회는 결국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친히 세워지고 건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워지는 것’이며,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개척되어지는 것’입니다(물론 이 수동태 문장의 행위상의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는 또한 교회의 목적이 주님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건축 방법과 수단 역시 온전히 주님의 뜻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면서 우리의 방법대로, 우리의 편리한 대로 세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의 건축 그 방법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며, 그 방법은 우리 인간의 생각, 우리의 편의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건축 방법, 그리고 그 교회의 실존적 모습에 대하여는 우리가 나중에 다시 자세히 묵상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다. 교회의 목적이 옳게 설정되었다고 해서, 그 방법 모두가 하나님께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합리화 되는 수많은 인간적인 불의와 부정을 보게 됩니다. 이는 오늘 말씀에 비추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세워짐이 오직 그분이 세우시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방법으로 교회가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워지는 그 과정을 통해서도 역시나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고, 영광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의 옳음은 하늘의 선택이며 방법의 옳음은 사람의 선택이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열매는 교회가 성취한 무언가만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방법까지임을, 아니 그 방법이 얻기에 훨씬 더 어려운 열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관습과 교회의 관례와 우리의 편의를 극복하고 부디 저희 고백교회가 주님의 손에 의해 바르게 세워져 갈 수 있기를 여러분께서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바 되는 우리의 고백 위에, 주님 당신께서 주인이 되시는 교회를,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겠다는, 주님의 이 엄중한 선언 앞에서 우리는 잠시 여기 모인 여러 이유와 목적을 뒤로 하고, ‘주님의 교회’라는 평범한 말 앞에 겸손히 무릎 꿇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한 고민은 단지 이 곳, 이 시기에만 잠시 끝나는 고민이 아니라, 고백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든 세월 동안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고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지한 고백과 고민 없이 그저 사명감인지 야망인지도 모를 감정적 동요에 휩쓸려 열정의 칼을 휘두르지 마십시다. 만약 그러할진대, 주님 약속하신 우리 고백교회만의 천국의 열쇠(19절)는 어디 열어 볼 문(門) 하나 찾지 못한 채, 그저 쓸모없는 죄의 문들만 열고 다니며 녹슬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여기 모이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시는 말씀 안에서, 주님의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친히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주관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분명 수많은 교회 가운데 고백교회를 새롭게 세우심에는 주님의 뜻이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믿음을 잃지 마십시다. 그리고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시다. 혹 먼 훗날 고백교회가 많은 새들이 깃들 너른 나무가 되었을 때에도 이 처음 주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다. 무엇보다 더 뜨겁게 기도하며 주님을 바라봅시다. 인간의 말을 앞세우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기도로 말하고 고백합시다. 그 기도의 고백 위에 고백교회가 세워지게 하십시다. 고백교회가 진실로 주님만의 교회 되게 하십시다. 아멘.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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