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하나님나라의 비밀' 2019년 6월 23일 주일 설교

2019-06-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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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오순절 후 두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4:1~20,  하나님나라의 비밀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19) 본문 11절의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비유의 말씀입니다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기존의 설명과 해석으로 인해 우리의 선입관이 많이 견고해진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밭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좋은 밭이 되어 열매를 풍성하게 맺자,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본문의 내용을 단순화시킨 것일 뿐만 아니라, 본문의 주제에서도 상당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들은 꼭 좋은 밭이 되어라. 그래서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런 영적 현실이 있음을 말씀하실 따름입니다. 오늘 긴 본문에서 명령으로 된 동사는 단 하나입니다. 그 동사가 무엇입니까? 네, ‘듣다’라는 동사입니다. 3절에 말씀을 시작하면서 ‘들으라,’ 말씀하시고, 9절에서 다시 한 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4장에 이 동사가 10회나 등장하니 본문의 핵심 동사입니다. 단순히 좋은 밭이 되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게 아니라, 지금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정확히 이해하라고, 그러기 위해서 더 온전히 들으라고 먼저 강조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들을 귀 있는 자이기를 원합니다. 사실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비유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신 말씀(3~9절)은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짓고 수확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내용은 쉽고 익숙한데 의도가 어렵습니다.  이 당시 근동에서의 농사는 수고에 비해 소출이 적었습니다. 근동의 토지가 그리 비옥하지 않았고, 농법도 지금에 비해 많이 발달하지 않았지요. 농부는 충분한 양의 씨를 밭에 뿌립니다. 아울러 씨를 뿌릴 때 지금처럼 땅을 갈아엎은 뒤에 흙 속에 심는 게 아니라, 먼저 맨땅에 씨를 뿌리고 그 다음에 갈아엎습니다. 모내기까지 따로 하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엔 그게 더 생산성이 높았습니다. 농부는 말 그대로 씨를 ‘뿌린 겁니다.’ 그래서 뿌려진 씨 중에는 소위 밭고랑에 해당하는 길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길 가), 얇게 흙이 덮여만 있는, 그리고 그 아래로는 석회석이 자리한 그런 밭에 떨어지기도 하고(돌 밭), 가시떨기, 곧 억센 잡초가 무성한 밭에도 떨어집니다. 농부는 그렇게 다 뿌리고 난 이후 쟁기로 땅을 갈아 그 흙으로 씨를 덮습니다. 당연히 이 씨는 아무데서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땅의 악조건과 여러 방해로 인해 많은 씨들이 열매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모든 땅에서 결실을 원하고 뿌린 씨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추수해보면 열매는 충분합니다. 좋은 밭에서 100배까지의 풍성한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아마 당시에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갸우뚱 했을 것입니다. ‘이 평범한 이야기를 뭐 그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시나?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씨를 뿌리고 왔는데, 다 아는 이야기인데, 왜 굳이 예수님은 들으라고 강조하고, 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마치 뭔가 더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하시나? 혹 뭐 중요한 게 있다면 그냥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생각했을 겁니다. 네, 그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평범한 이야기인데, 계속 중요하다고 강조하셔서, 내가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중간에 갑자기 말씀을 끝내셔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감질나게 만들며, 그 이야기의 속뜻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십니다. 일종의 낚시와 같습니다. 그 말씀의 미끼를 문 사람들이 지금 주님 곁에 남았습니다. 뭔가 찜찜해서 그 비유가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을 가진 것인지 알고자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야기가 그게 다가 아님을 직감한 사람들이 홀로 계신 주님 옆에 남아 있다가,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소위 ‘나머지 공부’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자가 됐습니다. 학창시절, 혹 여러분은 방과 후에도 남아서 나머지 공부 같은 거 해 보신 적 있습니까?(구구단) 주님 나라에서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잘 하는 사람, 잘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최소한 눈치가 빠른 사람이 나머지 공부를 합니다. 말씀이 다 이해가 되고 스스로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사람은 나머지 공부에 관심이 없고, 결국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처럼, 그 아는 것마저도 모르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국 알게 됩니다. 주님께 묻게 되고, 말씀과 씨름하며, 기어이 그 답을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이 말은, 결국 너희가 들어도 알 수 없으니, 남아서 나에게 질문해라, 모르면 물어봐라,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것의 의도를 더 명확히 기록하기를, 이것이 일종의 ‘주님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게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맹인 되게 하는 주님의 메시지, 그것이 선포되는 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그 메시지를 통해 알곡과 가라지가 1차적으로 가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과 지식에 근거하여 가벼이 듣고 넘어가는 그 모습이, 실은 이미 예수를 통해 내려진 심판의 결과입니다. 들을 귀 있어 참으로 말씀을 들은 자는 남아서 머물며 주님께 묻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이해한 바가 정말 맞는지, 주님이 친히 그 비밀을 풀어 설명해주시기를, 주님께 요청합니다. 지금처럼 주님이 계시지 않을 땐, 성령께 요청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고(요 14:26),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고전 2:10)고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네,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주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내 마음에, 내 삶에 심어야 합니다. 적당히 눈으로 읽고 대충 넘어가는 그런 방식으로가 아니라, 묵상을 해도 그냥 해치우는 게 아니라, 듣고 읽은 말씀에 머물며, 다시 묻고 듣는 겸손함과 진지함이 필요합니다. “주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으며, 무엇을 제게 원하시는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령님 도와주세요. 분별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 공부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그런 겸비함과 진지함이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 단지 어렵게 쓰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의 관심과 초점이 주님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이 이해되지 못할 게 없는 쉬운 말씀이어도, 도통 깨달아지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나머지 공부를 하시면서 하신 첫 마디에 주목하십시오. 그 전에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던 단어를 제일 먼저 말씀하십니다. 11절의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다 아는 내용의 그 비유가 실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주님이 계속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나라에 있지 않으니, 그것은 선포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되며, 도통 깨달을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나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지난 한 주 바쁜 일상을 살면서 여러분은 그 일상이 하나님나라라는 생각을 하신 적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어떤 꿈,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소망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까? 주님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관심도 하나님나라입니까? 이 땅 한반도에 산다고 다 대한민국에 관심 있는 건 아닙니다. 또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다고 대한민국에 대한 생각이 다 똑같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삶이 중요하고, 내 일이 중요하지, 정말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다 자기 삶을 먼저 생각할 따름입니다.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하나님나라에 관심 있는 거 아닙니다. 자기 일이 중요하고, 자기 꿈이 중요하지, 하나님나라는 의식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삶, 자신의 나라를 세워가는 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뿐,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나라를 위한 삶을 고민하는 성도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습니다(우리고백교회 성도들밖에 …). 그래서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꿈에,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쏟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한 나라의 비밀은 보통 누가 알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의 비밀, 국가기밀이 모든 국민에게 노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소수의 나랏일 하는 분들만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안기부 같은 정보기관에서, 요즘엔 청와대나 국정원 같은 곳에서, 정말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분들이 그 비밀을 관리합니다(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안기부). 물론 사적 욕심을 가지고 그런 비밀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공무원, 정치인이 많은 나라는 결국 망하는 거지요. 어쨌든 나라의 비밀은 감춰져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인에게는 다 비유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의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도 변화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초점과 우리의 초점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평안하게 살게 하고, 건강하고 부요하게 살게 하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단 하나의 주제를 다룹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영광과 존귀함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어 내 삶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풍요롭고 여유 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은 결코 성경의 본질에 닿을 수 없습니다. 재미도 없을 것이고, 이해도 잘 안 될 것이며, 별로 남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천국, 하나님나라, 이런 말들은 죽음을 앞둔 어떤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떠올려볼 따름입니다. 단지 바빠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하나님나라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가 돼서야 생각하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라면, 그의 삶의 열매는 뻔한 것입니다. 네, 그것이 우리 믿음의 현실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 제자들도 똑같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완전히 최후의 족집게 과외였습니다. 주님은 그때 무엇에 관해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까? 네, 당연히 ‘하나님나라의 일’입니다(행 1:3, …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마지막 40일의 핵심 주제 역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전하는 승리의 메시지였으니 그 말씀이 얼마나 달고 또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다 들은 제자들이 주님께 마지막으로 질문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였습니다(행 1:6). 주님은 하나님나라를 말씀하는데, 그들은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그 동안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됐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그분이 오셔야 해결될 문제라고 하시지요. 그러고 보면 그들은 참 대단한 애국자들입니다. 만약 우리였다면 마지막으로 주님께 무엇을 물어봤을까요? “이 문제 언제 해결될까요?” “취업은 잘 될까요?” “장모(부모님)가 아프신데 언제 나을 수 있겠습니까?” “집 문제는 잘 해결되겠습니까?” 온통 그런 것이겠지요. 제자들의 그런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 승천하시기 전, 주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어찌 될지, 아파트 청약 결과가 어찌 되고, 취업의 결과가 어찌 되고, 희망이가 언제 태어날지, 그건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럼 뭐가 우리의 알 바입니까? 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며, 오직 그 성령께서 임하시면, 비로소 말씀이 이해가 되고, 바른 질문을 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 우리의 언어와 삶으로 다시 그 말씀을 뿌리는 자가 된다는 것(행 1:7~8), 그것이 우리의 알 바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실은 우리의 알 바가 아닙니다. 그건 다 여러분의 아버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알 바이니 그분께 맡기십시오. 오직 성령의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죽어서 가는 저 나라에서나, 지금 이 땅에서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나라 백성이며, 하나님나라를 살아내고 있음을 한 순간도 잊지 마십시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나님나라의 비밀임을 기억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찾고, 구하며, 두드리기 위해 말씀을 듣고 받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제대로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나머지 공부를 꼭 하십시오. 성령께 묻고 기다려 들으십시오.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깨닫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 자신을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는”(고전 4:1) 그런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시면서 주님은, 씨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십니다(14절). 이 ‘뿌리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네, 당연히 예수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모든 밭에 넉넉히 씨를 뿌립니다. 좋은 밭만 골라서 뿌리지 않으시고, 밭 옆에 난 고랑 위에도, 흙은 별로 없고 그 아래 돌이 가득한 곳에도, 가시와 잡초가 무성한 곳에도 똑같이 뿌립니다. 네,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낭비처럼 보이는 말씀의 파종을 통해 하나님나라는 잉태됩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보기에는 낭비와 실패만 보입니다. 뿌려진 말씀을 싹 다 먹어치우는 사탄들만 보입니다. 앞서 예수님의 권능을 바알세불의 힘이라고 말한 서기관들과 같이, 악한 새들의 배만 불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잘 듣고 이해하는 것 같아도 그 때뿐이어서, 작은 어려움에도 곧바로 넘어지는 모습이 보입니다. 눈물 흘리며 감동하여 말씀을 받는 것 같은 성도 역시, 결국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가득하여, 결실하고 보면 온통 인간의 열매, 세상 열매뿐인 것이 보입니다. 뿌려진 씨앗은 온통 허비된 것 같고, 이번 농사는 망한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개의치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네, 그 씨가 좋은 땅에도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깊이 뿌리를 내려 인내로 결실하는 좋은 땅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졌기 때문에, 주님은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맺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인해, 이번 하나님나라 농사 역시 풍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부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또 그때 제자들 또한 주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분명 기쁘고 가슴 벅찬 말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된 마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내가 과연 그 좋은 밭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또 두려운 마음도 생겼을 겁니다. 내가 아무리 말씀 앞에 완악하고, 아무런 열매가 없는 쭉정이의 삶을 살아도, 하나님나라는 충분히 알곡으로 풍성하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가난하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살아도, 결국 하나님나라는 임할 것이며, 넉넉한 영광 가운데 그 백성들은 즐거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내 삶이 100배의 결실이 있는 ‘좋은 밭’이 될 수 있습니까? … 우리 힘으로 될 거 같으면 뭐가 걱정입니까? ‘좋은 밭 돼야지’ 마음먹어도, 실은 그게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여러분. 밭이 어떻게 밭을 갈 수 있습니까? 땅이 어찌 스스로 좋은 땅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그건 우리 몫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는 것은 누구의 몫입니까? 네, 성령 하나님의 몫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사죄의 말씀으로 주셨던 에스겔 36장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아멘.”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에스겔 선지자도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단지 이스라엘로 돌아가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언젠가 그들의 마음 자체를 변화시킬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중심에 바로, 성령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가득한 밭, 길 가의 밭과 같이 단단하고 굳은 마음을 아예 제거하시고 거기 성령을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기쁘게 말씀을 받아 순종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제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행하게 하십니다. 기경은 그 성령이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내 의지와 노력만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모하셔서 직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말씀이 인내로 100배의 결실에 이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국 밭은 두 종류뿐입니다. 열매를 맺는 밭이냐, 열매가 없는 밭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과연 어떤 밭인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바로 서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성령을 늘 사모하고, 또한 말씀 앞에 언제나 간절한 갈망이 있는데도, 왜 여전히 내 모습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싶다면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리십시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고전 3:7). 기약대로, 때가 되면, 언제 싹이 나고, 또 이렇게 빨리 자랐는가, 놀라게 될 것입니다. 집사님께서 주신 스투키를 친교실 창가에 두고 기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예쁜 새싹 셋이 올라오더니, 지금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새순까지 올라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예쁘고 신기한지 모릅니다. 네, 하나님나라가 그리 자라 결실한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였어도, 반드시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할 것입니다(욥 8:7). 이번 주 QT의 히브리서 말씀에 아브라함의 신앙을 언급하면서, 그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삭을 바칠 수 있었다고 말합니까? 네, 그에게 부활의 믿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부활을 모를 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능히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에까지 그 신앙이 자랐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도 그리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 주어 가꾸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며, 친히 결실하게 함을 믿고 인내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농사하여 백배의 소출을 얻은 사람이 실제로 성경에 등장하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네,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이 농사하여 첫 해 백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창 26:12).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그리 될 것을 믿습니다.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다만 뿌려지는 모든 곳이 결실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잘 기억하시고, 부디 귀 있는 자가 되십시오. 성령께 한 번 더 묻고 듣는 성도, 그래서 말씀을 삶에 ‘심는’ 성도가 되십시오. 내 나라, 내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우리의 필요들은 너희가 알 바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나라를 먼저 구하십시다. 그리하면 반드시 그 나라의 영광이 저와 여러분의 기업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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