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019년 6월 2일 주일 설교
2019-06-0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0602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2:23~3:6,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설교 도입부는 생략되었습니다. 원고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강해 16) 본문 28절의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서 만찬을 즐긴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으로 향합니다. 만찬은 끝났고, 오늘은 먹을 게 없습니다.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걸어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 먹기 시작할 만큼 허기진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생식(生食)입니다. 얼마 전 마태의 집에서 먹은 만찬 생각이 간절했겠지요. 주님을 따라 나선 마태 본인도 말입니다.
네, 주님과 제자들은 그렇게 먹고 살았습니다. 누가 대접하면 풍성히 먹기도 하고, 또 그런 게 없을 땐 민폐를 무릅쓰고 남의 밭에서 이삭을 잘라 생식도 했습니다. 배부를 때도 있고, 또 배고플 때도 있는 …, 정말 하나님의 보호하심에만 의존하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내일과 미래가 너무나 내 능력 밖의 일이었기에 염려마저도 무의미했습니다.
주님이 매번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으로 그들을 먹이신 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끼리만 그런 기적을 누렸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제자들은 그저 주님과 함께,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삶,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에 의존하며 사는 삶을 연습한 것이지, 주님 옆에 있다고 매끼니 기적의 잔칫상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주와 함께, 주를 위해 일했고,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의 ‘필요’(needs)를 책임지셨습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불안하지도 않았습니다. 네, 주님이 거기 늘 함께 계셨기에 만찬이든 밀 이삭이든, 동일한 감사로 먹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일상은, 훨씬 더 풍족하지만, 동시에 훨씬 더 불안합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가 곁에 없어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밀 이삭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도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모든 필요를 채우고, 부족함 없이 미래를 준비하려 하는 것 역시, 주님과 제자들이 보여주는 삶과는 거리가 참 멉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할 기회도 없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의 주인처럼 살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더욱 온전해져서, 제자들의 삶이나 오늘 우리의 삶이 같은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음을 믿고, 불필요한 생활의 염려로부터 자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들의 백합화를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욱 존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백합화와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다 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친히 돌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매순간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내일에 대한 염려와 필요 이상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고, 부디 날마다의 삶을 충실히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 좀 잘라 먹은 걸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밀밭 주인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본래 율법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위해 두 번의 추수, 꼼꼼하게 하는 추수를 금하고 있습니다(신 24:19~22). 먹은 것 자체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인 것이 문제였고, 예수님을 고발할 게 뭐 없나 감시의 눈으로 쫓아다니는 바리새인들은, 그것이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그걸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의 행위, 즉 일종의 수확의 행위라고 정죄한 겁니다.
유대인들, 특히나 바리새인처럼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곧 (수요일 말씀의 그) ‘세굴라’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데,) 그 중에서도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에도 포함된, 가장 중요한 규례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들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중요한 특징이었고,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야말로 경건함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아무리 안식일 규례를 정해놓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복잡다단한 일상을 다 커버하기란 처음부터 무리입니다. 율법은 삶의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세밀하게 다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선언적인 기준을 제시한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율법 전체의 내용이라고 해봐야 고작 600여 가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안식일과 관련된 규례는 거기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율법은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해도 개정이 불가능한 특수한 율례와 법도입니다. 당연히 그 내용은 원론적일 수밖에 없고, 구체적인 것들은 개인과 공동체의 몫으로 남습니다. 추후 수많은 세부적인 내용들이 정해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들을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또 다른 율법처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의 율법 해석을 집대성한 책인 ‘미쉬나’의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서른아홉 가지 대표적 행위가 있습니다. 그중 세 번째가 밭에서 수확하는 것입니다. 사실 추수와 같이 밭에서 일하는 걸 멈추는 건 당연한 안식일 규례처럼 보입니다. 그건 아주 대단한 노동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서른아홉 가지 중엔 고개가 갸웃거리게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1,999걸음(약 800m) 이상 걸으면 안 되는데, 그 이상은 여행이며 노동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나라, 어느 마을을 가나 회당부터 짓는 게 이해가 됩니다. 그것도 반경 800m마다 하나씩은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그 이상 걸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이상한 규례도 있는데요, 매듭을 묶고 푸는 것, 한 땀 넘게 바느질하는 것, 한 글자를 초과해 쓰는 것 등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작은 ‘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판단에서입니다. 같은 원리로, 그런데 여기서부터 조금 문제인데요, 팔다리가 빠졌을 때, 그것을 제자리로 맞추는 것도 안 됩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당장 죽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턴 뭔가 좀 애매해지지요. 심지어 지진 같은 걸로 건물이 무너져 아래 사람이 깔렸는데, 그날이 안식일이면, 그 잔해에 깔린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까지만 잔해를 치워볼 수 있습니다. 만약 잔해 속에 사람이 산 채로 발견되었으면 그를 빼내도 되지만, 이미 죽은 상태라면, 시신을 저녁까지 내버려뒀다가 해가 진 다음에 처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또 그러면서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전통까지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하지 못할 일’(24절)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이 정도는 괜찮은 거다, 이런 식도 아니요, 안식일이라도 배고픈 나그네인데 너무 인정머리 없다 말씀하지도 않고, 예수님은 여기서 갑자기 다윗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어떤 노동의 기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시는 다윗의 일화는 이렇습니다. 왕이 되기 한참 전,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목숨이 위태로울 때,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놉이라는 마을로 피신하게 됩니다. 거기엔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막이 있었는데, 너무나 배가 고팠던 다윗과 그 무리가 그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달리 줄 게 마땅치 않았던 당시 제사장은,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다고 율법이 정하고 있는 진설병(陳設餠, the bread of the Presence)을 내와서 다윗 무리를 먹이게 됩니다. 여러분, 진설병 아시지요? 성막 지성소 앞에 놓인 ‘떡 상’ 위에 6개씩 두 줄로 정렬해 놓은 열두 덩어리의 무교병(無酵餠)으로, 각 덩어리가 10분의 2 에바, 약 4.4ℓ 정도 되는 큰 크기의 떡입니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새 떡을 구워 성소로 가져왔고 기존의 묵은 떡은 가져 가 자신들이 먹었습니다. 열두 진설병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이스라엘의 거룩한 열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그런 진설병을 제사장이 아닌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은 겁니다. 사실 대단히 심각한 율법 위반인데, 아무 문제없이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진설병을 먹고 겨우 기력을 찾은 다윗 일행은, 다시 피난길에 올라, ‘아둘람’이라는 굴에 들어가 몸을 숨깁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 왕은 분노하여 그곳의 제사장 85명을 모두 학살하는 엄청난 만행을 저지릅니다. 뿐만 아니라, 놉에 사는 모든 남녀노소와 가축까지 모조리 죽여 성읍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끔직한 일을 저지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다윗의 이 일화를 상기시키면서 바리새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제자들을 방어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방어가 제대로 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처음 바리새인들의 공격에서 뭔가 한참 빗나간 것 같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범한 것은, ‘안식일’에 일(추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례이지, 자신들은 먹을 수 없도록 정한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인자가 안식일에도 ‘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시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유다의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 부음은 사울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여 스스로 왕의 자격이 없음을 드러낸 후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그때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십니다. 물론 당장 정치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일종의 대통령 당선인 같은 상황).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단지 배고픈 나그네도 아니고, 사울의 핍박을 받는 신앙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사울을 대신할 왕이었고, 사울이 이루는 데 실패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의 나라’를 회복할, 새 군주였습니다. 사실 다윗을 유대의 두 번째 왕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혈통은 물론 아예 출신 지파까지 바뀌었으니, 우리로 치면 거의 왕조의 성씨가 바뀐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그런 다윗이 성소에서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한 진설병을 먹고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은, 단지 그가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련한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예비 왕’이자,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다스릴, 하나님의 대리자였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다윗은 훗날 왕위에 올라, 사울이 실패한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냈고, 그래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로까지 높여지지요. 하나님은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은 오직 다윗의 후손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며,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고, 그의 날이 오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아 평안을 누릴 것이라고(렘 23:5~6)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단지 한 사람의 왕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나라의 왕이며, 제사장이며,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서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역으로 다윗에게로 轉移되는 것)
예수님이 말씀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결국 이런 다윗의 위치와 상관이 있습니다. 단지 제자들이 한 일이 안식일에 예외적으로 허용이 되는 정도의 작거나 긴급한 문제라는 것도 아니며, 인도주의적으로 얼마든지 허용 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율법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지금 예수와 그 제자의 무리가 누구이며, 그들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가에 관한 관점의 문제입니다.
인자, 곧 예수는 ‘주’이시며,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이십니다. 본문 28절에 ‘주인’이라는 단어가 바로 ‘주’라는 헬라어 ‘퀴리오스’입니다. 이 단어가 28절의 문장 맨 앞으로 도치되어 강조되어 있는데요, 사실 이 단어는, 예상 밖으로, 마가복음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퀴리오스’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히브리서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왕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마지막 대제사장이십니다(그리고 말씀 그 자체인 예언자, 메시아 삼중직). 본문의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마 12:6) 말씀하시는데, 바로 그 취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과 율법보다도 더 큰 왕이며, 제사장이며, 또한 예언자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 제사장은 안식일에 일할까요, 아니면 일하지 않고 쉴까요? 네, 당연히 일합니다. 일해야만 합니다. 안식일에 더 바쁩니다. 안식일마다 드려야만 하는 번제(상번제)를 드려야 하며, 그 일을 위해 양을 잡고 태워야 합니다. 엄청난 노동입니다. 말씀드린 그 무거운 진설병을 굽고 교체하는 일도 모두 안식일에 이루어집니다. 제사장은 예외여서 율법을 어겨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세상을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하기 위하여, 율법을 이루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거룩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과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제사장들이 그러하듯, 그 일을 위해 안식일에도 일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시나 또한 일하는 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에도 사람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제사장이, 자신이 안식일에 맡은 사명을 위하여 진설병을 먹고, 또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이루기 위한 일을 위해 그 진설병을 함께 먹을 수 있듯, 성전보다 더 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무리는, 안식일에도, 성전의 진설병만이 아니라, 그 밖, 이 땅의 모든 소산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나라를 위한 거룩한 소명을 예수와 함께 감당하는 중입니다. 다윗의 무리가 다윗과 함께 사울을 피해 숨고 있다면, 예수의 무리는 주님과 함께 적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무리가 다윗의 정체성에 의해 진설병을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로 인해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또한 먹어야 합니다. 배고픈데 어쩔 수 없으니까, 율법도 그건 괜찮다고 하니까, 그래서 먹어도 되는 게 아니라, 지금 그들은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그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잘 먹어야 합니다. 그러니 밀 이삭은 실상 또 다른 진설병인 셈입니다.
다윗이 먹은 진설병이 그저 배고픈 나그네의 밥 한 끼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과 그의 통치를 위해 필요한 수라상이었던 것처럼, 예수와 제자들이 먹은 밀 이삭 역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거룩한 왕의 음식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왕을 따르며 왕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주님은 당신의 자격과 권한을 드러내고, 필요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이러한 큰 틀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단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에, 사람을 위한다는 목적이면 다 예외가 가능하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모든 판단의 기준이 개개의 사람에게 속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만,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3장에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요즘 수요일 출애굽기 강해에서 계속 그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율법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그분의 모든 계획이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창조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결국 인간의 만족과 기쁨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또한 당연히 그 사랑의 열매이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율법 그 자체가 우리에겐 복이라 했습니다. 율법은 순종을 전제로 하고, 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지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진 것 자체가 우리에겐 가장 큰 축복입니다. 아무에게나 율법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세굴라’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며,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누리며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하나님을 누릴 수 있게 된 그 자체가 이스라엘의, 저와 여러분의 가장 큰 축복인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런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을 일부러 어기심으로써 논쟁거리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금 주님이 하시는 사역과 제자들의 모든 행위가 생명을 구하는 긴급하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실 뿐입니다.
여러분, 3장에 나오는 이 손 마른 자의 치유에서 주님은 최대한 율법 안에서 그 일을 행하심을 보게 됩니다. 한쪽 손(오른손, 눅 6:6)이 마른[크세라이네인] 사람, 곧 신경의 마비로 인해 손이 오그라들어 그대로 뻣뻣하게 굳은 이 사람을 주님은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네, 어떤 힘을 가하거나, 만지거나 해서가 아니라, 병자가 자기 손을 내미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고치십니다. 최대한 율법의 경계를 지키시면서, 동시에 메시아로서의 구원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그러면서 같은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시기를,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십니다. 여러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습니까? 사실 이것은 애매한 질문입니다. 선의 허용 기준을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예컨대 부모님께 맛있는 걸 해 드리는 것, 선입니까, 악입니까? 당연히 선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안식일에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집에 와서 또 요리하고 하는 것이 허용되겠습니까? 그래서 율법은 그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이 생명을 구하는 것이냐, 살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행하는 선은, 다름 아닌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결정적인 선이며, 지금 당장 그 일을 하지 않을 시, 그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그런 상황의 선이라고 주님은 강조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예수가 무슨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 그것이 그의 생명과는 직결되지 않는 문제라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른손 마비 증상을 해가 진 다음에 고친다고 그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랍비들 역시 생명이 위급한 사람, 당장 고쳐야 하는 사람은 어떤 노동을 해서라도 안식일에도 고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손 마른 사람은 아니지요. 응급 환자는 아닌 겁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는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그를 고치는 일이 선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려내는 선한 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위급한 일임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건이 가지는 다른 차원의 의미, 구원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손이 마른 사람을 의사가 치유하는 일(당시는 불가능했지만)은 분명 당장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는 아니지만, 육체와 영혼, 그 모든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께서 그를 고치신다면, 이제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 됩니다. 그런 일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 나타날 구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주께서 병자를 고치고 죄인을 용서하고, 또 금식하지 않고 세리와 함께 잔치 식사에 참여하고 하는 모든 주님의 일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인도주의적인 행위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가 이제 막 도래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일이자, 죄와 사망의 권세를 결박하는 거룩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의 치유 역시 단지 병을 고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지금 주님이 주시는 것은 단지 육체의 건강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와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 일은 미룰 수 없습니다. 손 마른 자에게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냉담한 율법주의자여서 책망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일들 앞에 그들이 완악한 마음으로 대적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은 결국 사울이 다윗에게 하려했듯, 그들이 예수를 죽임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루신 일을 이 땅에서 이루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과 같이, 천국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을 행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일 가운데 동참하고 있고, 주님의 부활 이후에는,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합니다. 이 예수가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시며, 저와 여러분의 삶이 바로 예수와 제자들의 삶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여기 모여 그저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더 착한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닙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하신 것처럼, 이 땅에서 천국의 일,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며, 이 흘러가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의 일을 행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아도, 누구나 이웃을 사랑하고, 음식을 대접할 수 있으며, 나그네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일들을, 그것이 단지 선행이어서가 아니라, 예수가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일, 예수가 이 땅에 이루신 거룩한 구원의 일이라고 믿으며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단지 그들의 육체적 필요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그들의 삶과 영혼의 모든 필요까지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바로 그 일을 하라고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예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다시 오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그걸 믿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행을 조금 늦춰서 조금 나중에 해도 되고, 내일 해도 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러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손 마른 자를 지금 당장 고치지 않는 것을, 그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곧바로 치유하는 것이 그를 살리는 것이라고 간주하시듯,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하나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거나 죽음을 초래하는 일 둘 중 하나임을 매순간 기억하며,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그것을 가장 시급한 일로 여겨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이 없으며, 천국과 무관한 것이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순종 하나하나가 결국 합력하여 하나님나라의 선을 이루는, 존귀한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분별하며 늘 조심하여 행동하십시오.
어떤 순간에서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선한 결단을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참으로 손 마른 자가 누구인지, 내가 그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오. 손이 안으로 굽어 꼬부라져 있는 채, 나의 삶 밖으로는 아무런 선행도 행하지 못하는 손 마른 자가 정녕 누구입니까? 만약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주님께 꼬부라진 여러분의 손을 내미십시오. 안으로 꼬부라진 그 삶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께서 오늘 우리의 마른 손을 펴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통로 삼으실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제자들의 먹을 것을 주권적으로 택하시며 채우시듯,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보존하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주와 함께, 주를 따르며, 주의 일을 감당하고 사는 우리의 필요를 ‘우리의 주’께서 채우십니다. 우리의 주께서, 우리가 먹어야 할 것을 먹게 하시며, 우리가 누려야 할 것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귀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그냥 밥이 아니라, 거룩한 진설병, 곧 주님의 몸이며, 우리가 마시는 물은 그냥 생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임을 잊지 말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라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 양식과 음료를 매순간 예비하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공급할 것이며, 결단코 누구에게도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돌보는 주님의 손길을 신뢰함으로, 염려와 탐욕 대신, 믿음의 순종으로 삶을 채워가게 되기를, 그래서 하늘에서와 같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도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