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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2. 이제 내가 알았도다

2019-05-1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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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수요 성경 강해 --------------------------------- 출애굽기 18장 1~12절, 이제 내가 알았도다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음질이 양호하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르비딤에서 벌어진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산 호렙, 곧 시내 산 근처에 도착했고, 거기 진을 쳤습니다(5절).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곧 율법을 받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한편으로는 승리의 기쁨이 충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와 율법의 선포 앞에서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때 뜻하지 않은 반가운 사람들이 모세를 찾아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처자식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의 진영에 찾아온 것이지요. 일찍이 모세가 이드로의 양떼를 몰다 바로 이 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뵈었는데요, 아마도 이드로의 근거지가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식을 듣고 그 가족들과 함께 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약 3개월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면, 당시 모세는 여호와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장인 이드로의 집을 떠나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분명 그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했었는데(4:20~), 어찌 된 일인지 오늘 본문에는, 그 세 사람이 이드로와 함께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절 말씀처럼, 애굽으로 가던 중간에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은 다시 미디안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모세는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지만 가족을 돌려보내고 홀로 애굽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추측건대, 이번 애굽 행이 결코 쉽고 안전한 여정이 될 수 없음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고, 또 자신이 가정에 충실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모세는 오늘 자신의 소명이 시작된 바로 그곳에서 다시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장인 이드로는 이를 위한 큰 수고를 감내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 온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본문은 증언합니까? 네, 물론 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1절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신 여호와의 이야기를 그가 들었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드로는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입니다. 모세도 그렇지만 당시는 종교 지도자가 정치 지도자와 분리되기 전이지요. 다시 말해 이드로는 미디안의 수장이기도 했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라든가 또 아말렉 전쟁과 같은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 놀라움 가운데 모세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드로는 본인이 직접 모세의 가족들과 함께 올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그저 다른 심부름꾼이나 군사들을 통해 딸과 손자들을 모세에게 보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요. 그럼에도 굳이 본인이 직접 찾아온 것은, 본인 눈으로 그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잘 살고 있는가, 또 그들이 아말렉을 무찔렀다는데, 그게 전부 사실인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했을 겁니다. 그런 이드로의 놀람과 관심으로부터 오늘 18장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모세 입장에서 그 반가움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위해, 민족을 위해, 가족의 따뜻한 품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이처럼 헤어진 가족과의 해후는 모세에게 큰 위로가 되었겠지요. 그것도 출애굽과 전쟁 등 엄청난 일들을 겪고 난 후에 가진 만남이니, 그 얼마나 기쁘고 또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본문은 그런 모세의 기쁨과 감격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모세보다도 장인 이드로의 감정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또한 이산가족 상봉의 감격보다는 이드로와의 만남과 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모세와 이드로 두 사람의 대화의 주제는, 8절 이하의 말씀처럼, 그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기서) 구원하신 일을 모세는 전부 다, 이드로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때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합니다. 여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자신이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납니다. 모세의 이야기 속 ‘주어’는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모세 자신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내가 어떤 일을 했으며, 내가 어떤 역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주어로 한 삶의 고백’입니다. 사실 모세 입장에서는 자신을 장인어른에게 어필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습니다. 결혼하신 형제분들은 다 공감하시겠지만, 남자는 누구나 장인장모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아주 큽니다. 다른 누구에게보다 더 그러합니다. 자기 부모보다도 장인장모가 나를 알아줄 때, 그때 정말 큰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반대로 나를 향한 처가의 평가가 박하면, 남자에겐 그보다 더 큰 상처가 없습니다. 본래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데릴사위 같은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자기 양이 없어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마치 종처럼 살기도 했습니다. 서로 아무리 좋은 관계였다고 해도 그런 처가살이가 쉬웠을 리 없습니다. 말하기 힘든 나름의 설움과 아픔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자신이 이제 이드로와 비길 수 있는 대등한 위치가 됐습니다. 아니 그 위치가 역전된 셈입니다. 이제는 별 볼일 없는 목자 모세가 아니라, 수십, 수백만의 백성들을 이끄는 엄청난 지도자입니다. 애굽은 물론 아말렉도 깨뜨린 강력한 리더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척 하며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아예 노골적인 자랑도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그럴 만한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고백에는 철저하게 하나님만 담겨 있습니다. 그가 단지 온유하고 겸손해서가 아니라,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 그토록 놀랍고 크시기 때문이며, 고백할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험이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단 몇 달의 시간이었지만, 지금 모세는 하나님에 대하여 할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야기할 겨를이 없는 겁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고백했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 15:10, …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입니다. 본문 9절에서 이드로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말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모세의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드로가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겁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결국 내가 뭘 했고, 무엇을 이루었고, 그런 이야기를 고백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행하셨으며, 어떤 은혜로 우리에게 함께 하셨는지를 이야기하는 삶이며,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인정하도록 살아내는 삶인 것을 기억하십시다. 출애굽의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이 바로 여기입니다. 단지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고 고백되어,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고 형통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생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늘 모세의 고백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고백 속에는 고난도 있고 어려움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8절을 다시 보면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이라고 나옵니다. 모든 게 다 형통하고 평안했던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위협, 배고픔과 갈증의 고통, 또 관계의 어려움 등등 수많은 어려움이 고난이 있었고,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 고난들이 없었다면 별로 할 이야기도 없었겠지요. 그랬다면 오늘의 이야기들은 지금보다 훨씬 빈약했을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로 이긴 고난’보다 더 큰 복음의 증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놓인 자기 백성을 돌보신 일들은, 세상에 큰 위로와 능력이 되고, 이것은 때로 그러한 어려운 일들 배후에 있는 목적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쉬운 여정이 아닌 광야로, 홍해로, 또 마라의 실망 가운데로, 신 광야의 굶주림과 르비딤의 갈증으로, 또 아말렉과의 싸움으로,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금 세상을 향하여 무슨 할 말이 있으며, 어떤 이야기를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 어느 순간에나, 비록 고난의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의 어떤 시점에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틀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한 하나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 또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까지,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풍성한 것보다, 성도에게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넘치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계시지요? 인생 가운데 자기 자랑밖에 할 게 없는 사람은, 성도로서 실상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무엇이 성도의 삶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지요. 늘 자기 자랑에 하나님은 그냥 양념처럼 끼어드는 이야기에 불과한 삶, 하나님은 언제나 수단일 뿐 한 번도 사랑의 대상이요, 목적이 된 적이 없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과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정이기도 함을 믿으시지요? 누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데는 사랑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공감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에 더하여, 하나님을 보고 누리는 사랑, 하나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에게 항상 마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경험이 풍성한 삶, 하나님을 증언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누군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제 내가 알았도다!’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의 존귀한 삶 되기를 축복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 우리에게 아직 그 고백의 이야기들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모세가 탁월해서 그런 풍성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을 그 자리로 인도하신 것을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그 자리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오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자리까지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인내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러한 모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드로의 반응이 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9절에는 이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다고 기록합니까? 네, 기뻐합니다. 여기 ‘기뻐하다’라는 단어 [하다]는 성경에 단 세 번 등장하는 단어로, ‘rejoice’, 곧 ‘크고 깊이 기뻐함’의 의미합니다. 단지 사위 모세가 잘 된 것을 기뻐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기서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사 구원하신 일을 마음 깊이 기뻐합니다. 이후 10절에서는 어떻습니까? 네,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입술로 표현하는 기쁨입니다. 앞의 기쁨이 단순히 가족이 잘 돼서 가지는 기쁨이 아님을, 하나님을 기뻐하고 인정하는 기쁨이었음을 이 찬송의 모습이 보여줍니다. 사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이드로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미디안의 제사장 아닙니까? 그런 그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아닌 여호와를 기뻐하고 찬송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오늘로 치면 뭐 조계종 종정 스님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요.) 그러면서 11절에도 계속해서 이드로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이야기합니다. 이 역시 대단한 고백이지요. 여호와께서 모든 신보다 크시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가 교만한 이들을 꺾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사실 지금은 이드로의 찬송은, 단지 ‘크고 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신들 가운데 제일 센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크신 능력만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에 대하여는, 지금 당장 알지 못합니다. 그럼 그걸 언제 알게 되겠습니까? 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 곧 의와 공도를 지켜 행할 때(창 18:19),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갈 때, 그때 알게 됩니다. 이제 바로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다름 아닌 율법, 하나님의 의와 공도인 것이 우연은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크심은 물론, 하나님의 거룩함이 선포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찬송한 이드로는 이제 예배자로 섭니다. 12절에 보면, 이드로는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께 번제와 희생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함께 떡을 먹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의 (식탁)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너무 놀라운 장면이지요. 기쁨과 찬송에 이어, 고백(세례)과 예배, 그리고 성도와 나누는 식탁의 교제까지, 요즘으로 치면 회심한 새가족이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 와 그 몸의 일부로 정착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다른 민족, 다른 신앙의 사람이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 인용했던 다니엘 말씀의 그 환상처럼,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다른 언어, 다른 문화의 백성과 나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경배하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그런 미디안을 받아들이고 있고, 그들과 함께 예배하며 먹고 마십니다. 훗날 다시 미디안과는 갈등과 반목의 관계가 되고 말지만, 그러나 적어도 모세의 때만큼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할 수 있는 정도의 연합을 이루어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미디안은 이스라엘 민족과 남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나 미디안이나 아브라함의 후손인 건 마찬가지이지요.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후처 그두라가 낳은 아들이 바로 이 미디안 족속의 시조인 미디안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의 이야기는 저 멀리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과도 이어집니다. 모든 민족이 그로 인하여 복을 얻고,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했다는 언약대로, 오늘 이스라엘과 미디안이 함께 한 식탁에서 화해와 평화를 선포하고, 함께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 친지 안에 하나님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겪고 우리가 누린 하나님의 은혜로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친척들 가운데 하나님나라의 화평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물론 그러려면 내 자랑은 좀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 잘났다’가 아닌,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비해야 합니다. 이드로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경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다시 모세가 자기 잘났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에게 관건은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장인 이드로를 맞이하는 모세의 모습을 기록한 본문 7절은, 우리가 깊이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가 온다는 소식에, 먼저 ‘나가서’ 장인을 맞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절하고 입 맞추어’ 최대한 예를 갖춥니다. 얼핏 보면 이보다 더 낮은 자세가 없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과도한 예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겸비함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증언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비록 십계명과 하나님의 율법은 아직 선포되기 전이지만, 모세의 이런 모습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넘쳐흐릅니다. 결국 하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법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교만하고 목이 곧은 우리의 모습과 태도로 인해 하나님의 겸비함이 담긴 복음이 왜곡되기 십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보통 사람을 향해서도 겸손하고 예의 바릅니다. 그 내면에 하나님의 인정과 존중을 누리며 살기에 누구를 대하든 그를 하나님처럼 존중할 수 있습니다. 외식(外飾)으로 인한 과도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는 만족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겸비함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 가운데 모세가 가장 온유하고 겸손했다고 하는데, 그건 그가 하나님을 가장 풍성히 누렸다는 말과 같은 뜻인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을 누리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늘 겸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출애굽 후 이제 하나님의 산 앞에 당도한 모세와 이스라엘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의 제사장의 입술을 통해 찬양받으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자리는 오랜 갈등과 반목이 끝나고, 화해와 연합이 회복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영광과 평화를 향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으며,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선포하심으로써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을 그들은 또한 알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영광은, 단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라!’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가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요, 선언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기도와 인내로 그 영광의 자리까지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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