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사람을 낚는 어부' 2019년 3월 31일 주일 설교
2019-03-3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0331 사순절 네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16~20, 사람을 낚는 어부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설교 도입부와 종반부는 생략되었습니다. 원고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강해 8) 본문 17절의 ‘사람을 낚는 어부’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에 이어 예수님의 첫 사역이 묘사된 본문입니다. 아시는 대로 평범한 네 명의 어부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이 주님이 하신 첫 번째 사역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그들의 삶의 현장에 찾아가 부르셨고,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그물과 배, 심지어 가족까지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다는 이야기, 아마 모두 잘 아시는 내용일 겁니다.
지난주 말씀을 생각해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는 데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를 보여주시는 주님께 반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 부르심을 보여줍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떻게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낼지, 주님은 직접 보여주시겠다고, 아니 더 정확히는 너희와 함께 그 나라를 살겠다고,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라 하십니다. 네,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나와 같이 그 나라를 살자는 가장 복된 부르심입니다.(*) 네, 주님을 따라가야만, 우리는 그 나라를 누립니다.
본문의 네 사람은 주저 없이 그런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이 제시하는 삶의 길을 받아들였고,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물론 예수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선 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러나 보기만 해도 너무나 아름답고 신나는 놀이동산에 막 들어선 것처럼, 그래서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떨리는 가슴으로 저 앞에 보이는 화려한 세상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처럼, 지금 제자들은 주님의 손을 잡고 하나님나라의 입구에 막 들어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제자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 앞에, 18절 말씀처럼, ‘곧바로’ 자신의 ‘전부’를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걸 보면 어떻습니까? 괜히 기가 죽거나 ‘나는 왜 그런 게 없나,’ ‘왜, 난 그리 못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본문의 초점이 그 부분인 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단호한 부르심과 즉각적이고 완전한 응답이 중요한 건 맞지만, 지금의 이 부르심은, 마가가 상황을 아주 단순화해서 기록한 것이지, 상황 전체가 본문처럼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오늘 여기서 처음 본 그런 사이는 아닌 겁니다.
시간 관계상 자세히 다 그 과정을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한 것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형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소위 전도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오신 주님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오르셔서 복음을 전하시고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지요. 정말 그 낙심과 허무가 어떠했을지 가늠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그는 주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참 감동적인 반응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의 반응보다 더 마음에 와 닿고, 요즘도 제 마음에 계속 머물러 있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나 자신의 한계 너머에 그물을 내리는 것, 믿음의 삶에서 너무나 자주 마주치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주님 말씀대로 가서 그물을 내리니,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지경에, 배가 잠길 정도까지 됐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앞에 엎드려 이야기하지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지요. 너무 밝은 빛 앞에서는 오히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합니다.
네, 상황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 모든 과정들을 다 생략하고 여기 단 다섯 절로 요약하여 주님의 부르심을 묘사합니다. 너무나 심플하지요. 마치 네 사람 모두 뭔가에 홀린 듯,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일사천리로 순종한 것처럼,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마가의 이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겁니다. 오늘은 그 부분을 조금 더 깊이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생각해볼 내용은, 여기 네 명의 제자들이 보여주는 순종의 반응이, 그들의 인격이나 신앙을 강조하려 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부르셨는데, 그들이 주저 없이 주님을 따라나섰다. 그것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따라야한다,’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 부르심과 응답은 그들의 좋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열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가진 주권적인 메시아적 권위로 인해 나타난 결과입니다. 사람의 말이나 무슨 랍비의 가르침과는 다른, 주님의 말씀이 가진 압도적인 능력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주저함과 머뭇거림이 즉각적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같은 부르심을 받았고, 같은 반응이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부르심이 주님의 찾아감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을 찾아가서 주님의 제자가 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그가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 삼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이 말씀을 읽고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제자가 자기 선생, 자기 랍비를 찾아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스승이 제자 될 사람을 찾아가 부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대학원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지도교수를 선택할 때 어떻게 합니까? 혹시 어떤 교수님이 여러분을 찾아와 내 제자가 되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내가 선택합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랍비들 중에서 배울 스승을 내가 선택하고 찾아갑니다. 물론 가서 시험도 봐야하고 면접도 봅니다. 인턴 과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오시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로 찾아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실력으로 주님을 찾고 따른 게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어둡고 냄새 나는 삶의 자리에 찾아오셨고, 거기서 친히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참 이상한 것이 …, 오늘 말씀처럼 주님이 찾아가 부른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따릅니다만, 스스로 주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십중팔구 주님을 따르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서 만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새로운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인간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노력과 열심, 거기엔 필연적으로 인간의 욕심과 생각과 계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끝은 항상 우상으로 귀결됩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 내가 생각한 하나님, 내가 창조한 하나님이 거기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한, 참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며,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그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거기엔 우리의 소망과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과 목적이 제시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 목적을 언급하시지요. 네, 이 모습이 바로 구원이며, 영생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셨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향해 주님의 목적, 주님의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나를 믿고 훗날 천국 가라, 그 말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가까이 온 당신의 나라에 함께 가자고 초청하고 계시며, 그 나라의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제시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며 말씀하는 그 영광스러운 비전이 무엇입니까? 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거라는 것입니다.(Re)
사람을 낚는 게 어떤 건가요, 여러분? 사람을 낚는다고 하니까 요즘엔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겠습니다만, 이건 어부였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로 하시는 은유일 따름입니다. 제자들이 제빵사였다면, 다르게 표현하셨겠지요(사람이라는 빵을 굽는 베이커). 결국 이것은 사람을 건지고, 사람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you will catch men)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네, 사람을 얻고, 취하는 부르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주님이 지금 사람을 낚고 계시지요?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취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관계를 누리는 것,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새 삶의 비전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들이 주님을 따른다면, 앞으로 그들 자신의 삶이 어떻게 더 좋아지고, 윤택해질지에 관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앞으로 너희의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해지고, 얼마나 더 거룩해지는지에 대한 말씀도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처음부터 제자들 자신의 삶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더 넓어질 관계에 대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그 출발점부터 나와 하나님 외의 다른 사람을 향한 꿈을 가지고 시작됐습니다. 구원은, 주님이 원하시는 회개는, 단순히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사람, 곧 다른 사람의 삶과 연관된 부르심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나의 내세를 바꾸기 위한 어떤 부르심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통해 다른 누군가의 존재와 삶에 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처음부터 이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이 주제는, 나중에 우리의 믿음이 깊어진 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는 바로 지금부터의 문제, 그 방향에 관한 문제인 겁니다. 당연히 그것은 우리가 원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삶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나라에서 평범한 삶입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 삶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낚는 삶이 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낚고자 여러분의 삶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낚싯대에는 주로 뭐가 걸려 올라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딱 한 번 제대로 된 낚시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둘째 외삼촌과 함께 밤낚시를 했던, 아주 가슴 아픈 기억인데요, … 온몸에 모기만 물리고, 단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채, 딱 한 번 찾아온 입질의 결과는 ….) 여러분, 충분히 낚지는 못할지라도, 또 당장 낚아 올리지는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낚을 수 있는 그물을 누군가에게로 던지는 삶으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 그리고 관심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가 낚아야 할 ‘사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까?
이것은 몇 명 전도했느냐, 그런 질문이 아닙니다. 물론 전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은 어떤 차원에서든 오늘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고 계시겠습니다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랬으면 주님은 처음부터 전도하자고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셨겠지요. 주님이 전도를 가르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전도법이 탄생했을 겁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런 게 아닙니다. 단순히 전도지를 나눠주고 예수를 믿고 천국 가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그래놓고 자신은 자기만의 삶에 고립되어 하나님나라와는 다른 세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제자들을 찾아와 그들과 함께 새 가족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듯, 그렇게 사람들에게로 찾아가고, 그들을 영접하여, 그들과 함께 천국을 누리며 살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이란, 결국 그것입니다. ‘나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으로 나 자신을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나와 친하지 않은 낯선 누군가에게, 나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나와 잘 맞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을 낚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낚는 삶의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놀랍게도 본문은, 사람을 낚는 삶은 뭔가를 버리는 삶으로부터 시작됨을 말씀합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마가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면 됐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 아버지와 품꾼들, 그리고 배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뒤따릅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주님께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누가복음엔 오늘 읽은 본문의 장면을, “그들이 …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묘사합니다(눅 5:11). 왜 아니겠습니까? 어부에게 배와 그물과 가족이 전부이지요. 정말 상당한 내려놓음입니다. 그들이 가난하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중산층이었던 그들. 갈릴리 물고기가 유명. 훈제 생선 한 수레가 양 100마리 가치. 버리기 힘든 삶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가족에게 가서 작별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청원도 거절하신 바 있습니다(눅 9:57~62). 구약의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삼을 때는, 그 부모에게 가서 작별하고 오라고 이야기했는데, 아마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요한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닙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길은, 기존의 관계에 얽매지 않는 버림의 길을 거쳐야 함을 분명히 언급하십니다. 주님이 제시하는 ‘사람 낚는 어부’의 삶은, 그와 같은 관계적 회심이 없이는 따라나설 수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주의’의 위험)
여러분, 주님을 위해 버리신 것 있으십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버린 그만큼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고 있을 것이고, 또한 새 것을 누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까워하며 버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따름에는, 버림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주님을 위해 버리면 더 받게 되는 경험, 하고 계시지요? 그게 비로 천국의 경험인데, 그 경험이 없다면 안 될 말입니다. 집을 버리면 집이 생기고, 땅을 버리면 땅이 생기고, 관계를 버리면 관계가 생길 겁니다. (제가 무슨 새로 생긴 이단 같이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제자들과의 동거가 거의 끝나가던, 주님의 마지막 3년째 사역에서, 하루는 한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왔다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납니다. 그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께 하는 말이 있지요. 마가복음 10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0:28~31, 28.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베드로가 여기서 어떤 뉘앙스로 말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가시지요? 상당한 자부심과 비장함을 드러내며 한 말입니다. 사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대단히 자기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이라는 대명사가 강조되어 노골적으로 부자 청년과의 대조를 드러냅니다. ‘모든 것’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부자 청년과 다르게, 모든 걸 버리고 주님을 따랐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뭐 그렇게 티를 내느냐고 책망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곧장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말씀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어떤 보상을 받습니까? 내세의 영생을 받습니다. 그런데 현세에도 받는 게 있습니다. 버린 모든 것들을 백배나 받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 혹시 버린 것, 포기한 것, 있는지 잘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보상을 받았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100배가 아니라면 더 요구 …) 혹시 보상은 없고,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하신 그 ‘박해’만 받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너무 억울한데요, …. (어머니, 집 이야기, 더 받아야 할 것에 관한 짧은 간증)
주님은 얼마나 보상으로 받는다고 하십니까? 네, 100배입니다. 주님은 왜 여기서 굳이 100배나 받는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십니까? 사실 ‘백 배’는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열매와 관련이 있는 표현입니다. 말씀이 창출해 내는 종말론적인 복의 표현이 바로 ‘백 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백배가 바로 이 땅에서 받는 보상의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영생 그 자체가 100배의 보상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이지만, 이 땅에서도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박해가 없을 수 없지만, 단지 박해만 있는 삶은 아니라는 것,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영광과 축복이 대가로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그걸 누리고 계십니까?
사람을 낚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이들의 삶이 어떠한지, 그들의 삶이 어떻게 천국이 되고, 하나님나라의 보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인데요, 마가복음 3장입니다.
[마가복음 3:31~35, 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순종이 피보다 진하다는 주님의 이 말씀에, 순간 제자들의 눈가가 촉촉해졌겠지요. 네, 주님도 버리셨다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건져 올렸다는 것을, 주님은 말씀합니다.
주님이 어머니 마리아며, 형제 야고보며, 나 몰라라 했다는 말이 아니지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그 요한에게 부탁하지요. “보라, 네 어머니라.” 그 때부터 요한이 자기 집에 마리아를 모시고 함께 삽니다. 주님의 친 동생 야고보도 결국 주님의 제자가 되어 초대교회의 중요한 리더로 세워집니다. 우리가 버린다고 하는 그 버림이 결코 하나님께는 버림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언제나 버려도 버려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낚는 주님의 발걸음에 우리도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기존의 관계에 대한 우선순위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우리의 삶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 하며, 함께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어머니, 새로운 형제, 자매를 얻고, 하나님나라의 종말론적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 과정을 처음부터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가 단지 십자가와 부활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하신 이 사역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으면서도 힘만 드는 그런 과정일 겁니다. 여러분, 주님 혼자 십자가 지시고, 그냥 부활하실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예수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더러 그냥 거기로 출퇴근해서 배우라고 하셔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제자들과 함께 매순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부르셔서 그 모든 순간을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맨 처음부터 그리 하십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결국 주님을 다 버리고 떠나는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끝끝내 그들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십니다.
주님 혼자 천국을 만들고 다 완성이 되고난 후 제자들을 부르신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처음부터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 일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어쩌면 대단히 비효율적이어서 주님의 나라가 늦어지고 지체될 것 같은데도, 주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제자들이야말로 이 땅에서 주님이 얻은 십자가의 보상, 그 백배의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더러 어떻게든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여 그들의 환심을 사라는 게 아닙니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교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뭔가를 버리고 얻는 보상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의 삶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통해 낚여 올려진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 얻어지고 누려질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걸 깨닫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그 관점으로, 그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때, 거기 천국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지체들을 바로 그 따름과 버림의 보상의 관점으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천국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결국 그 보상, 그 나라를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오해하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나를 짜증나게 만드는 그 사람, 나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매다는 그 사람을, 다름 아닌 내 이웃이요, 내 믿음의 보상이라고 여길 수 있는 존재,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힘으로 누릴 수 있는 천국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한 우리의 인내와 기대감은 지극히 미미할 뿐입니다. 만약 그 관계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그런데 거기 주님이 계십니다. 거기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따름의 보상이요, 천국의 입구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서로 누가 더 높아질까, 누가 더 우월할까, 서로 다투고 갈등하던 그들의 관계 속에 성령께서 머물게 되자, 서로가 진정 그 백배의 보상이라는 걸 깨닫고 또 누리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의 영이 우리의 눈을 일깨워주셔서 우리 서로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되게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조금만 먼저 찾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도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기다림을 공감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들에게 천국의 그물이 되어 함께 주의 나라를 이뤄가는 복 된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고백교회도 사람 낚는 견실한 그물 되기를, 그래서 믿지 않는 이들이 함께 머물고, 쉬며 주님을 누리게 되는 그런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