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회개하고 믿으라' 2019년 3월 24일 주일 설교

2019-03-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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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4 사순절 세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14~20,  회개하고 믿으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설교 종반부는 생략되었습니다. 원고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강해 7) 본문 15절의 ‘회개하고 믿으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람들과 연합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을 부으사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어 드러내십니다. 이후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된 예수님은, 자발적 금식과 이어지는 사탄의 시험을 포함한 ‘광야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나라 공동체의 새 시작을 준비하시고, 또 선포하셨습니다. 아담과 그 후손을 미혹하던 사탄의 통치가 끝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새 아담이 등장한 거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됨을, 자신의 존귀함을, 내 능력과 힘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데 그 힘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냅니다. 사탄은 그런 새 아담 곁에 더는 머물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그 방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그때 주님은 사탄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는 신명기 말씀(8:3)을 인용하십니다(마 4:4). 떡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그 옛날 광야와 만나를 통해 일깨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떡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임을, 비로소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그 말씀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의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영혼을 가진 육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육체를 가진 영혼’으로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영혼’임을 증언합니다. 육체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이 단지 떡으로 배를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누리며 살아감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시며 전하시는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진 영혼’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거기 반응함으로, 온전히 살아 약동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힘 있게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모든 (객관적, 주관적) 준비가 다 끝났고, 드디어 주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본문은 주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요한이 잡힌 후’이며, 공간적으로는 ‘갈릴리’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주님의 복음 전파가 시작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으로 대표되는 율법과 구약의 시대가 이제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15절의 “때가 찼다.”[카이로스, 플레오로]는 말씀처럼, 세례요한을 통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제 하나님나라의 본 경주가 시작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세례요한 개인을 생각하면, 이 구절은 묘한 울림을 줍니다. 자신이 잡혀야, 죽어야 그리스도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 그 사역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결혼식 신랑의 들러리로 여기며 신랑의 등장을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요 3:29) 했습니다. 또 나는 쇠하고 그리스도께서 흥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요 3:30). 그 말 그대로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룬 후,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어찌 보면, 위대한 예언자의 너무나 허무한 퇴장이었습니다. 본문은 ‘요한이 잡힌 후’라고 되어 있지만, 문자적으로는 ‘요한이 넘겨진 후’입니다. 여기 ‘넘겨주다’라는 동사 ‘파라디도미’는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는 로마서의 말씀(4:25)처럼, ‘넘겨짐’ 혹은 ‘내줌’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의미하는 핵심적인 동사입니다. 체포된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또 빌라도에게, 또 십자가와 죽음에 ‘넘겨진다’는 표현이 복음서에 계속 등장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넘겨지기 전에 먼저 넘겨진 자, 그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길을 스스로 예표하기도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넘겨짐을 이어받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넘겨지는 것 또한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에도 앞으로 제자들이 넘겨질 것에 대한 주님의 직접적인 예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후서 4:1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요한에서 예수로, 다시 예수의 제자들로, 그렇게 ‘넘겨짐’은 이어집니다. 여러분도 그 넘겨짐을 경험하고 계실 것이고, 또 앞으로도 그러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넘겨지는 것,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받는 오해와 외면, 그리고 고난이 저와 여러분의 가장 큰 영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넘겨질 때’, 그래서 예수님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아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의 경험을 통해 예수를 압니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를 온전히 이해합니다. 그 전에 가진 이해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피상적인 것이지요. 예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예수의 길을 뒤따라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본문에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그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가 가신 길로의 부르심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여러분, 부디 그 말씀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런 주님의 길을 지레짐작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게 너무 힘든 것 아닌가. 누가 그 길을 갈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음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를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감당할 만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넘겨짐’의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예수를 부인하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게 뻔하지요. 하나님이 그렇게는 안 하십니다. 그럴만한 사람에게, 감당할 사람에게 허락하십니다. 예수를 위하여 넘겨지는 그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성경 속 인물들의 믿음과 삶을 너무 쉽게 평가하고 또 이야기하지만, 아무나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요구받는 것도 아니며, 아무나 바울처럼 그 삶 전부를 복음 전하는 일에 요구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나 존귀한 부르심인지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그 길 위에 선 그 자체를 가장 큰 영광임을 인정하고 감격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축복일 따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믿음이 생기고, 결단을 내려 가능했던 게 아닙니다. 그 전에 이미 수없는 믿음의 작은 순종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만 믿고 화려하고 안정된 삶을 포기한 채 가나안으로 이주한 게 아브라함입니다. 그 이후에도 많은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합니다. 삶의 소소한 일에 순종하고 충성된 삶이었기에, 그 엄청난 부르심 앞에도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부르심을 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으십니다. (이야기가 조금 멀리 왔습니다만) 오늘 요한의 붙잡힘과 넘겨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할 때, 내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겠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열매가 되고, 내가 영광이 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나의 넘겨짐으로부터, 나의 쇠함과 낮아짐을 통하여 주님의 일이 시작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러한 넘겨짐의 삶 자체가 이미 가장 큰 영광의 부르심임을 믿고 그 길을 감사함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주님이 다시 ‘갈릴리’로 오셨다는 말씀 역시 주목해야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요한은 분봉왕 헤롯에 의해 붙잡혀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일로 인해) 죽습니다. 유다를 다스렸던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고 이스라엘 영토는 그의 세 아들(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에 의해 나뉘어 다스려지게 되는데, 갈릴리 지역은 세례요한을 죽인 바로 그 헤롯이 통치하던 땅이 갈릴리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잡힌 후’와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표현은 사실 모순적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를 잠시 떠나사’가 어울립니다.) 주님은 요한을 잡아 죽인 땅, 그 권세가 여전히 다스리고 있는 곳으로 스스로 들어가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헤롯을 ‘여우’라 칭하셨지만) 호랑이굴을 마다하지 않으신 셈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곳이 헤롯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탄생을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어 피의 살육을 자행했던 그 아버지 헤롯과 마찬가지로, 요한을 잡아 가둔 헤롯 안디바 역시 진정한 왕이 아니라고, 진짜 왕은 여기 있다고, 이제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주님은 사역의 시작부터, 갈릴리로 향하는 그 여정을 통해 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주님의 사역 배경을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당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분문에는 그런 주님이 하신 첫마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첫 번째 음성이자, 첫 명령입니다. 앞으로의 모든 사역은 이것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먼저 말로 복음을 선포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주님도 전도하십니다.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메시아 사역과 함께, 아니 오히려 더 앞서 나타납니다.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 없는, 복음의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은, 입은 꾹 닫고 행동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으로 고백되는 복음이란, 말과 행위가 함께 복음을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입을 열어 복음을 증언하시는 삶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예배 후에 우리가 함께 전도도하기로 되어 있으니,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읽고 외워봅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아멘) 주님이 “나를 믿고 천국가라.” 말씀하지 않으셨음을 다시금 기억합시다. 주님은 훗날 죽어서 가는 나라를 증언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와 있는 나라, 그래서 당장 반응하고, 참여해야 할 그 나라를 증언하심으로, ‘전도’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보다는, 차라리 “예수를 믿고 천국을 사세요!”(혹은 “천국이 바로 앞에 다가왔어요. 얼른 들어가세요.”)가 주님의 전도였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거야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일입니다. 생각만 할 뿐 우리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지요. 나도 모르는 그런 걸로 전도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으니, 그 나라를 당신도 믿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나는 여전히 내가 왕이고, 내가 주인인 삶 살면서, 천국은 맛도 보지 못하면서, 남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한다면 힘이 있을 리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를 살아내며, 그 나라를 기뻐함으로 증언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전도가 아무래도 …) 그렇다면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의 메시지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네,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와 믿음.’(Re)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는 데 머무르는 게 아님을 이제는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회개는 … 가까이 온 그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이 메시지를 읽으면서 문득 어릴 적 공터에 나가 친구들을 향해 외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숨바꼭질(다방구, 말뚝박기 …) 할 사람, 여기 붙어라!” 다른 친구도 옆에서 소리칩니다. 네, 그런 것입니다.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편에 붙을지 결정하는 것,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는 회개입니다. 그럼 여기서 믿음은 왜 필요합니까? 네,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눈에 보이는 현실은 전혀 하나님나라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나라는 어느 정도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완전히 도착했습니까, 아니면 거의 다 왔습니까? 네, 거의 다 왔고, 그래서 믿음의 반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마가복음의 관점입니다(한편 요한복음은 그 나라가 이미 왔다고 선언합니다. 차이가 뭘까요?).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나라는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가까이 온 나라’입니다. 손을 뻗어 잡으면 되고, 내 발을 내딛어 한 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는 결단이 없다면, 그 나라는 항상 가까이에 있지만 완전히 도착하여 내가 누리는 나라가 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나라를 살아가기 원하십니까? 저처럼 다 왔다가 다시 멀어지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십니까?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까이 온 그 나라를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믿음! 믿음은 지금 당장의 100% 현실이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세상이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나라가 아닌 겁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이,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나라임이 믿어지십니까? (SNS, 거지같은 세상, 왕처럼 살아봄세. 마라나타, 마라나타!! 믿음이 없어서.) 어릴 적 부르던 찬송,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 네, 그것이 하나님나라, 맞습니다.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믿어지는 나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보이지 않으니, 찾아 들어갈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보지 않고 믿는 은혜, 보이지 않지만 살아내는 은혜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믿어지지 않는데 믿으라는 명령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어도 안 믿어지는데 무슨 수로 믿습니까? 지금 주님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걸 억지로 믿으라는 게 아니라, 그러면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 기도하면 됩니다, 내 안에서 증언하시고 믿게 하시는 성령의 주권 앞에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을 한갓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정도의 종교적 행위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사람 여기 붙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지금 반응하라는 뜻입니다. 그게 주님이 말씀하는 믿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회개는 그 믿음이 겉으로 드러난 표현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와 있음을 믿기에, 주님이 제시하시는 그 나라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왕이시며, 그가 통치하심을 믿기에,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회개는,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봅니다. 오고 있는 나라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됩니다. 구약의 회개, 요한의 회개와 주님 말씀하는 회개가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요한은 과거와 이별하는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과거와 이별했으니,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같이 가자고 하십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메시지를 전합니다. 거기서 이리 나오라고, 마치 모세가 애굽에서 광야로 나가라고 외치는 것이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가나안으로 가자고, 너의 삶이 있는 그 자리에 하나님나라가 와 있으니, 함께 그 나라로 가자고, 마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살아낼지 아시기에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뭔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그 다음을 모르지 않습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회개 그 다음을 모릅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십니다. 나와 함께 가자고, 그 나라를 함께 누리자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왜 우리가 허무한 일에 빠지고 헛된 쾌락에 빠집니까? 나아갈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고, 비전과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하면 이상한 쾌락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한 쾌락에 넘어집니다. “쾌락을 억제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고 행복해야 쾌락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행복 가운데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믿음과 회개는 결국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삶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들어가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단지 과거의 죄를 고백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주님이 내미는 진리를, 대안을, 미래와 행복을 받아들이고,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어떤 것인지 이제 주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그 소망의 부르심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다시 어딘가에 갇혀 있고, 다시 ‘그리스도인 됨’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빈약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주셨고,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를 얽맨 것들, 그래서 힘껏 주님의 나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회개하고 다시 복음을 믿으십시다! 우화 하나만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한 상인이 먼 나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그는 가족과 점원들을 불러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선물로 사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각자 옷과 장신구 등 갖고 싶은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상인이 운영하는 상점에는 사랑스러운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앵무새는 말을 잘할 뿐 아니라 손님들을 위해 날마다 노래를 불렀으며, 말도 잘 알아들었습니다. 덕분에 가게도 나날이 번창했습니다. 상인은 앵무새에게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가져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앵무새는 선물을 거절하며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했습니다. “주인이 가는 그 나라의 어느 숲에 가면 내 친구 앵무새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숲에서 살다가 새 장수에게 잡혀 이곳에 오게 되었어요. 친구 앵무새들을 만나면 이 말을 전해 주세요. 나는 큰 도시의 멋진 새장 안에서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어. 내 노래를 뽐내면서 최고의 음식을 즐기고 있지. 하지만 너희처럼 하늘을 날진 못해. 나도 너희와 함께 숲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갇힌 신세라서 그럴 수가 없어. 그러니 너희가 싱그러운 나무들 위를 날고 즐겁게 꽃향기를 맡을 때마다 새장 속의 나를 기억해 줘.” 상인은 먼 나라로 떠났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앵무새가 말한 숲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정말로 한 무리의 앵무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상인이 그 새들에게 자신의 집에 있는 앵무새가 한 말을 전하자, 그중 한 마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심하게 몸을 떨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놀란 상인은 친구의 슬픈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그 앵무새가 충격을 받아 죽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앵무새에게 그 숲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앵무새는 새장 안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고개를 꺾고 죽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앵무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상인은 이 모든 것이 슬픈 소식을 전한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고 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죽은 앵무새를 묻어 주기 위해 새장을 들고 뒤뜰로 갔습니다. 땅에 구멍을 판 후 새장에서 죽은 앵무새를 꺼내 내려놓는 순간, 그때까지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앵무새가 휙 날아가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놀란 상인이 소리쳐 물었습니다. “어찌된 일이냐? 넌 조금 전까지도 죽어 있었는데 어떻게 살아난 거지?” 앵무새가 말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먼 나라의 친구 앵무새가 나에게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알려 준 거예요. ‘너의 노래 솜씨와 말하는 재능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때문에 넌 새장에 갇혀 사는 거야. 주인의 칭찬과 좋은 음식이 곧 너의 새장이야. 그것들을 포기해야만 넌 자유로워질 수 있어.’라고.” 그 말과 함께 앵무새는 유유히 창공으로 날아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도 어느 새장 안에서의 안락함으로 인해 푸른 하늘의 기억조차 잊어버린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그 나라를 자유롭게 날아 본 적이 너무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혹시 예수를 믿어도 별로 흥분되는 일도 없고, 소망도 없고,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것이 우리의 일상의 반복된 모습이라면, 우리는 어딘가 갇혀 무언가에 속고 사는 것인지 모릅니다.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나라가 지금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회개와 믿음으로 그 나라를 향해 힘껏 돌이켜, 주님의 뒤를 따라, 다시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단 한 번뿐인 이 소중한 인생, 정말 하나님나라의 백성답게, 존귀한 일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는 복된 삶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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