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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2019년 3월 10일 주일 설교
2019-03-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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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310 사순절 첫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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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1,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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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5) 본문 9절의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에는 요한의 세례(침례)가 가지는 의미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세례요한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왜 그보다 더 크다고 하시는지에 관한,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봤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중심으로, 주님이 받으신 그 세례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이 세상에 등장하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나아갔습니다. 말 그대로 ‘세례요한 신드롬’이라 할 만했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 세례를 받더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온 유대 사람들이 전부 다 요한에게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충분히 그렇게 느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그를 환호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그마치 5백 년 만에 선지자다운 선지자가 나타났(고, 이스라엘의 상황은, 주인만 바벨론에서 로마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너무나 암울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례요한에게 나아오는 무리 가운데 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오십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등장이지요. 주님은 세상에 등장하시자마자 곧장 요한에게로 가셔서 세례를 받는 것으로 메시아로서의 모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 마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회개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또 요한의 제자가 되려는 것으로 오해할 게 뻔 함에도, 주님이 굳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젠 아무리 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해도, 정말 더 어려운 일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가시는 모습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냥 ‘그저 그런 청년’으로 여길 게 뻔했습니다. 사람은 늘 보이는 대로 믿기 마련이지요.. 본문은(9절) 예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를 ‘굳이’ 기록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세례요한에게로 오십니다. 예수님의 고향이자 삶의 근거지를 소개하는 건데, 실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에게로 나아갔던 사람들은, 5절 말씀처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과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 지금의 상황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 이미 그것만으로도 예수는 뭔가 ‘메시아스럽지’ 않다는 걸 이 한 구절이 드러냅니다.
본래 ‘유대(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의 세트와 같습니다. 그것은 곧 전통적인 유대인, 온전한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갈릴리는 그와는 정반대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으로서 뭔가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보통 갈릴리도 결국 이스라엘 영토이고, 유대나 예루살렘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엄연히 유대는 사마리아 남쪽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갈릴리와 유대는 역사적으로나 종교‧문화적으로 그 차이가 매우 큽니다. 굳이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조선족 사람들 쯤 되지 않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와 조선족의 거리보다 유다와 갈릴리가 더 멀면 멀지 가깝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은 혈통으로만 본다면 유대와 거의 일치합니다. 조선족 분들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우리 민족이다, 이렇게 말하기에도 뭔가 애매합니다. 그분들이 우리와 가까운 정도보다 중국과의 가까운 정도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들과의 거리보다 더 북쪽 이방인들과의 거리가 더 가깝습니다. 언어도 히브리어가 아니라 북쪽 특유의 아람어를 주로 사용했고, 문화적으로도 유다와는 매우 이질적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는 서로를 분리시키는 매우 큰 간극이 있었습니다. 네, ‘사마리아’라는 지역입니다. 남한과 조선족 사이에는 북한이라는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서로에게 가려면 북한을 거치지 않고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처럼, 갈릴리와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왕래했습니다. 그만큼 괴리감이 크다는 것입니다. 가까워지고 싶어도, 중간의 사마리아로 인해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사람은 정통 유대들에게는 상당히 외국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조선족 분들을 만날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을 겁니다(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마가복음을 묵상하는 동안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 할 부분 중 하나입니다). 사실 그 감정엔 갈릴리 출신을 향한 신앙적인 비하와 무시가 존재했습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조선족 분들을 그렇게 판단할 때가 많지요. 사마리아인들에게만큼은 아니어도 갈릴리 출신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유대인들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왜 중요합니까? 주님이 갈릴리에서 오셨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모자라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사면, 그는 절대 갈릴리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유대인들은 스스로 단정하고 있었습니다(요 7:40). 그런데 시작부터 성경은, 주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왔다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배경이 되는 고향 ‘나사렛’은 더 심각합니다. 이곳은 구약성경에 아예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으며, 당시 유대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동네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배경 자체가, 전혀 그리스도와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고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등장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에게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출발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더욱 그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요한의 제자가 되기 위한, 정통 유대인으로 신분을 세탁하기 위한 어떤 노력 정도로 오해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날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에 집중하실 따름입니다. 사명에 집중할 때 비로소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하고 불편한 모습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치 주님이 요한보다 더 작은 자인 것처럼, 요한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보면) 세례요한은 차마 세례를 베풀지 못하고 머뭇거리지요. 세례를 받는다면,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께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요한은 강하게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실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례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행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 용서’는 오직 피 흘림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네, 우리의 죄는 오직 생명으로만 용서받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는 순간, 아무리 실제로는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주님도 마치 죄가 있는 것처럼, 그래서 회개해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만약 당시에도 예수님께 제자들이 있었다면,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강하게 만류한 것보다, 더 심하게 세례를 가로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입장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만류하는 요한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산상수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 주님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와 그 의’의 출발점이 세례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남은 자’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연합하라는 초청의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그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남은 자 공동체 안에 주님이 들어가시며, 온전히 그들의 삶 가운데 연합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기 전에 그 나라 백성이 되십니다. 그리고 지금 곤경에 빠진 당신의 백성들의 상황 속으로 당신도 들어가십니다. 출애굽에서와 같이 단지 전능한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지금의 어려움에서 건져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실존 가운데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그 상황의 일부가 되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성육신이며, 세례입니다. 아울러 예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길을 포기했고, 그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로 오실 수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께서 인간과 온전히 연합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구원하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와 연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시고 우리를 응원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의 고통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삶의 고통을 겪습니다. 여러분 중에 힘들지 않은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로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공감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고, 직접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되지 않으면 똑같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苦痛(괴로움의 고통)은 孤痛(외로움의 고통)이 됩니다. ‘누가 내 심정을 알까’ 싶은 게 모든 이의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외로움의 고통을 너도 가지고 있겠구나’, 하는 보편성 때문입니다. ‘나도 그런데, 저 사람도 그러겠지. 나처럼 그 사람도 힘들고 외로울 거야’ 하는 그 헤아림이 있어,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공감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서로 다 알아서, 똑같이 느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 없다는 한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의 그 한계 속으로 깊이 들어오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그 낮아짐과 순종을 통해 말입니다.
얼마 전에 ‘그린 북’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영화 ‘로마’를 누르고 오스카를 가져간 영화라고 해서 보게 됐는데요,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실화로, 흑인과 백인의 우정에 관한 영화입니다.
임시직을 전전하며 살아가던 백인 가장 토니(발레롱가)는, 어느 날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됩니다. 셜리는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등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완전히 다른 설정이지요. 흑인 피아니스트가 고용주이고, 백인이 그의 운전기사입니다. 더구나 흑인은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데다가 박사 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엘리트이고, 백인은 이민자로서 자기 주먹만 믿고 사는, 평범 이하 계층 출신입니다.
영화는 이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가, 운전기사 토니와 함께, 흑인들에게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영화 제목 ‘그린북’은 당시 흑인들이 백인들의 테러와 차별을 피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흑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모텔이나 식당 등을 기록한, 일종의 여행안내서입니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인종과 문화는 물론 생각, 행동, 말투, 취향까지 서로의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계약 관계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둘 다 생각합니다. 마음을 아예 열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흑인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남부로의 긴 투어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존재와 겹쳐지기 시작합니다. 함께 고난을 겪고,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래, 너도 내 마음이겠구나’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친구’가 됩니다.
영화는,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임을 잔잔히 보여줍니다. 정말 타인의 삶 속에 들어가, 그와 경험을 공유하고, 그와 한 편이 되어, 함께 진흙탕을 뒹굴지 않는 이상,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이야기임을 …, 하지만 정반대의 메시지도 전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동떨어진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게 다가가고,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며, 서로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존재임을, 영화는 또한 가장 멀리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차분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가운데 오셨고, 지금도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단순히 우리를 고통에서 빼 내시고, 구원하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와 연합하시기를, 그래서 우리가 당신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시고 응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세례는 그 연합을 위해 하나님께서 내딛는 또 하나의 다가섬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그렇게 주님께서 세례를 받는 과정 가운데, 세 가지의 표적이 나타납니다. 순서대로 보면, 먼저 하늘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로 내려오십니다. 마지막으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먼저 하늘이 갈라진 것부터 살펴보면 …, 10절에 하늘의 갈라졌다는 표현 ‘스키조메누스’는 정확히 말해 ‘(누군가에 의해) 찢어졌다’는 뜻입니다. 수동태로서, 스스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누군가에 의해 찢김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세례로 인해 하늘이 찢김을 당한 겁니다. 찢어진 건 열린다거나 갈라진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지요(예컨대 홍해). 제 양복바지가 찢어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걸 짜깁기하는데 거의 10만원이나 든다고 해서 지금까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 찢어짐은, 다시 과거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하늘을 어떻게 짜깁기 하겠습니까?
복음서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세 가지의 중요한 ‘찢어짐’을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이 찢어지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집니다. 세 가지 모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을 이루는 찢어짐이자,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찢어짐입니다. 다시 복구되지 않는, 다시 가로막히지 않는 완전하고 영원한 열림, 영원한 연합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찢어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언제든 담대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찢어진 하늘 사이로 누가 내려오십니까? 네, 성령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임재하십니다. 10절 끝에,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좀 더 정확히는 ‘자기 안에 내려오심을 보시더니’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임재하셔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십니다. 예수를 완전히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단락, 12절 말씀처럼, 성령께서 예수를 어딘가로 ‘몰아가실’ 수 있는 겁니다. 그만큼 성령이 예수 안에 충만히, 강하게 임재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 계신 성령께서 어떻게 저와 여러분에게 임재하셨습니까?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찢음으로써,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안에 부어진 그 성령을 베푸십니다. 구약 성경은 ‘성령을 베푸시는 자’,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말하기를, 자신은 물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 외쳤습니다(8절). 그것이 예수님과 세례요한 사이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요한도 성령으로 충만했지만, 그는 성령을 베풀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성령을 베푸는 주권이 그에게 있으며, 그가 부어주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가 그를 믿는 성도들의 능력과 권세가 됩니다. 주님의 세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왜 성령이 예수님께, 또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 중요합니까? 바로 이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이제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사탄의 권세와 맞서 승리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깁니다. 마가복음이 기록하는 가장 최초의 기적은, 다름 아닌 귀신들린 자의 치유입니다. 다른 여러 질병이 아닌 귀신들린 자의 치유가 모든 기적보다 앞서 기록된 이유는, 예수 안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이 이 땅을 다스리고 미혹하는 귀신들의 임재를 축출함으로써, 하나님나라가 왔음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있던 자리에 성령이 임재하시며, 다스리십니다. 그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죄와 사망에 의해 끌려 다니던 우리를 존귀한 ‘빛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삶이 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로서 주님이 아버지와 누린 관계를 우리 또한 누리게 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 가득한 예수의 경배와 신뢰를 우리의 마음에도 피어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과 나눈 주님의 그 대화를 우리도 할 수 있게 하십니다.”(마크 매킨토시, 성공회 사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를 이해하시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성령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기에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도, 여전히 그것을 방해하는 실제적인 사탄의 힘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나라에 하나님만 계신 게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뱀이 있었던 것처럼,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있기 전까지는 여전히 사탄의 능력과 미혹이 살아 역사합니다. 그것을 분별하고 대적하는 일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 밤 새벽에 제가 참 이상한 꿈 하나를 꿨습니다. 꿈속에서도 주일 예배를 다 마치고, 성도들을 배웅하고 다시 교회로 들어왔는데, 예배당 장의자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생각하며 제 방에 들어갔는데, 기타 케이스가 놓인 그 구석에 사탄이 앉아 저의 새 구두[꿈에서 신발은 성도에게 믿음을 상징합니다]를 닦아주겠다고 솔에 구두약을 묻히고 있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반짝거리는 제 구두를 들고, 제게 허락을 구합니다. 잘 닦아주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데 솔에 묻히는 구두약이 좀 이상합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더럽고 기쁜 나쁜 거품인데, 지저분한 녹색으로 끈적거리는 뭔가입니다. 저걸로 닦으면 구두가 다 망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 한 견에 두려움이 엄습하며, 꿈에서 깼습니다. 새벽 두세 시쯤 깨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기도도 하며 한 시간 쯤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왜 나가라고 말도 못했을까!) ‘새 믿음에는 반드시 새 시험이 따르는구나, 사탄이 성도를 내버려두는 일은 절대 없구나, 시험이 있고, 싸움이 있는 삶임을 인정하고 그 싸움에 직면하여 살아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아무런 싸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무감각해진 증거이지 사탄이 무기력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성도의 삶엔 반드시 사탄도 역사함을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며, 그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싸워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이제 찢어진 하늘 사이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놓인 인간과의 연합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그 때,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바로 그때,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에 찬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시대를 수백 년 간 지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QT 본문에,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지요.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교훈하셨음에 감격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곧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가 나를 아시며, 나를 지도하시며, 나에게 깊은 관심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음을 드러내는 가장 큰 증거가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언은 그쳤고, 하나님은 멀어졌습니다. 그 긴 소외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바로 그 자리 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이 한 자리에 계십니다. 말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 가운데 처음으로 선포되는 자리가 바로 그 세례였습니다.
여러분, 언제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임하시는가, 언제 기쁨에 찬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터져 나오고, 언제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지는지 보십시오. 주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한에게 오셔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때, 내 계획과 영광을 앞세우고, 나의 존귀해짐을 앞세워서가 아니라, 나는 죽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길을 선택할 때, 오늘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은 사람의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외면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겸비함을 인정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신다는 음성을 의지하며, 여러분이 낮아지고 자아가 죽는 그 시간, 그러나 하나님나라가 선포되는 그 시간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서로를 향해 다가서고, 함께 그 공동체 안에 머무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 잊지 마십시다.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함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성령을 의지하며, 매순간 서로에게 한 발 더 다가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고백교회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기쁨에 찬 음성 듣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