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출애굽기 강해 23. 누룩을 제하라

2019-03-0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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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6 수요 성경 강해 --------------------------------- 출애굽기 12장 15~28절, 누룩을 제하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음질이 양호하지 못함을, 용량으로 인해 도입부와 종결부가 생략되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체 설교는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난주에 이어 본문에도 계속해서 장자 재앙 직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월절’이 제정되고, 그것을 영원한 규례로 세워 대대로 지키라는 말씀이 있고 난 후, 여기서 하나님은, 또 하나의 절기, 곧 무교절의 규례를 말씀하십니다. 유월절을 지키며 먹으라 하신 것 중에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곧 무교병[맛짜]에 초점이 맞춰진 절기가 무교절이지요. 새 월력의 14일이 유월절이고, 그 다음날인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 이 무교절이 지켜집니다. 유월절의 끝이 곧 무교절의 시작과 연결되어, 이 둘이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진행되는 셈입니다. 오늘은 이 무교절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유월절의 연장선상에서 무교절을 생각한다면, 무교병을 먹는 것의 의미는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누룩 없이 그냥 물과 밀가루만으로 반죽하여 굽는 것이 가장 신속하게 빵을 먹는 방법이기 때문에, 무교절은, 임박한 재앙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긴급한 구원을 경험하고 출애굽의 감격을 맛본 것에 대한 감사의 기억을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이때는 오직 무교병만 먹고, 또한 일상의 움직임을 최대한 절제합니다. 머무는 곳이 어디든 무교병만 먹어야 하기 때문에, 보통은 집안에 머뭅니다. 마치 화재경보기가 갑자기 울렸는데 이것저것 다 챙길 수 없고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하듯, ‘급한 탈출’을 상징하는 음식이 무교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교절은 유월절과 달리 일주일간이나 지속됩니다. 유월절도 그랬지만, 상당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지금 저희는 고난주간이 일주일이지요. 의미도 비슷합니다. 사순절 40일도 그렇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7일의 시작과 끝은 안식일처럼 성회로 모이고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유월절처럼 하루가 아닌 일주일의 시간을 구별하는 건 어떤 목적일까요?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의 내 삶과 일상을 깊이 성찰한다는 의미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아울러 무교절은 적어도 7일 동안의 평안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당장 출애굽을 해야 하거나, 광야의 삶에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25절이지요, 하나님은 이 절기는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부터 지키라고 하시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광야 40년 동안은 무교절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왜요? 무교병을 만들 수 있는 곡식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는 무엇이 주식입니까? 네, 만나입니다. 따로 곡식을 심고 거둘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나라는 특별한 음식을 주셨습니다. 광야의 삶은 빵을 굽는 것조차 불가능한 삶입니다. 어린양을 구워먹는 유월절은 유목민도 지킬 수 있는 절기일 수 있지만, 그러나 무교절은 말씀드린 대로 정착한 농민들의 절기입니다. 여러분 혹시 ‘초실절’[바쿠림]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말 그대로 ‘처음 거둔 곡식을 드리는 절기’입니다. 보리 수확의 첫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인데, 바로 이 초실절이 무교절의 일주일 중간에 있습니다. 무교절이 있는 일주일 중 일요일(안식일 다음날)이 바로 초실절입니다. 그러니까 무교절은, 그 해 새롭게 수확한 곡식을 갈아서 새로 무교병을 빚어 먹는 절기인 셈입니다. 단지 누룩 없는 빵을 급히 구워먹는 의미만이 아니라, 새 곡식, 새 빵, 유월절과 함께 시작된 새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교절은 유월절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러니 초실절과 함께 무교절을 지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의 의미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비단 처음 거둔 곡식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그 땅에 들어와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보다 먼저 애굽에서 자유하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단지 한 해 농사 잘 되었으니 감사하다, 그게 아닙니다. 농사 잘 되고, 돈 많이 벌어서 감사한 건 세상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무교절은 그것만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벌 수 있는 힘과 능력과 건강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내가 번 그것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이 자유와 구원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있어서 출애굽이 있고, 출애굽이 있으니 가나안도 있고 무교절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교절을 유월절과 한 세트로 묶어놓으신 이유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결과를 감사하는 세상의 감사가 아니라, 그 시작과 과정을 기억하며 드리는 감사,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으로의 돌이킴, 그것이 바로 무교절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무교절을 중히 여기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상황은 달라지고, 삶은 안정되고, 환경은 더 좋아졌지만, 구원의 시작과 목적을 기억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교절은 일주일이나 지속되고, 그 첫 날과 마지막 날은 모두 거룩한 예배로 모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상당히 긴 집중을 요합니다. 더구나 그 이틀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무교절 일주일 속에 초실절 전날에 해당하는 안식일까지 하루 더 포함되어 있으니, 실제로 무교절 중에는 사흘이나 안식일이 있는 셈입니다. 이걸 잘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추수가 시작된 농번기에 사흘을 아무 것도 안 하고 예배와 쉼에 집중한다니요. 아마 쉬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겁니다. 무교절은 하나님을 믿고 그 나라를 사는 백성이 아니면 결코 순종하기 어려운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행한 첫 할례도 그랬지만, 정말 중요하고 바쁜 상황에 하나님은 멈추라 하시고, 하나님을 보라 하십니다. 뭔가를 더 하는 것보다는 하던 것을 멈추고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내 열심을 멈추고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것, 하나님은 무교절에 그것을 강조하십니다. 이 무교절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15절)고 엄청난 ‘협박’(?)까지 하시면서 말입니다. 본문에는 ‘회중’([에다], 3, 6, 9, 19절 등)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요,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표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어이지만, 본문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 공동체, 이스라엘의 집단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 공동체에서 끊어질 거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께는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방증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쉬면서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 어떤 것들입니까? 네, 자신의 가정 안에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분명히 아이들이 물어볼 것입니다(26절).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러고 있냐고, 왜 일도 안 하고 쉬고, 맛없는 빵만 구워 먹고, 또 예배는 왜 이렇게 자꾸 드리는 거냐고 질문할 때, 부모는 답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해야 합니다. “왜 이거 먹어야 돼요?”라는 질문에, “그냥 입 다물고 먹기나 해! 하나님이 그러라고 하셨어!”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3월 1일에는 왜 학교를 안 가나요?” 자녀가 물어보는데, 단지 “공휴일이니까!”라는 식은 안 됩니다. 설명을 해 줘야 합니다. 힘들면 설교 원고라도 찾아서 잘 출력해놨다가, 읽어주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와 무교절이라고,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넘어가셨고, 그렇게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다.”(27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장자이며, 그의 백성이며, 그의 통치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그런 백성답게 살기 위해 하나님을 기억하는 거라고, 명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꼭 그렇게 가르치고 교훈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처럼 무교절을 지키지는 않지만,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을 지키며,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 믿음의 절기를 꼭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도 말씀드리겠지만, 무교절은 한 가정의 절기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절기가 아니라, 주로 그 가정 안에서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일주일 동안 누룩이 들어간 빵을 먹지 않는지, 아니면 무시하고 몰래 따로 먹는지, 이웃이며 제사장이며, 누가 알겠습니까? 오직 그 가족들만 압니다. 그래서 별도의 율법적 제약이 없이, 오직 은밀함 가운데 우리를 알고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고백교회 성도들의 가정이 진실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온전히 세워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이 먼 40년 후로 미뤄지면서, 실제로 무교절이 지켜졌다는 이야기는 모세오경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무교절에 먹는 무교병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언제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규례는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실제 무교절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럼 언제, 어디에 기록되어 나오겠습니까? 네, 여호수아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에 처음 무교절을 지키게 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네, 할례입니다. 할례의 회복기가 며칠이라고 했습니까? 네, 사흘입니다. 사흘 동안 회복하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월절을 준비합니다. 흠 없는 어린양 한 마리를 선택하고 그것을 잘 간직하여 준비하지요. 그렇게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곧장 무교절을 지킵니다. 무교절을 지키는 바로 그 날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가 그칩니다. 이제 하늘의 떡이 아니라, 그 땅에서 나는 떡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첫 무교절에 먹은 무교병은, 그 재료가 어디서 난 것이겠습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그들이 심고 길러 거둔 곡식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에 살고 있던 다른 이들이 심고 기른 것을 그들은 은혜로 거두어 무교병을 만들어 먹으며, 그렇게 첫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무척 감사했겠지요? 여러분, 새로 회사에 들어가면 곧바로 월급 줍니까, 아니면 일 먼저 하고 한 달 후에 월급 받습니까? 당연히 일 먼저 해야 돈 주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월급 먼저 받고 일한 셈이 됐습니다. 어디 첫 달 월급만이겠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파종을 하고 그것이 자라 추수할 때까지 약 1년 동안은 내내 그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일도 안 했는데 공짜로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해라,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니 감사하며 먹으라는 것도,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너희가 처음에 나그네로 가나안에 들어왔다는 것, 그럼에도 너희를 먹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들의 노고로 너희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킬 수 있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자유민이고, 처음부터 가진 자이고, 처음부터 노동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종이었고, 나그네였으니, 그걸 기억하여 훗날 나그네와 종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공의라고, 하나님은 무교절을 통해,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교훈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나중에 사장 되시면, 일하기 전에 월급부터 주실 수 있으신지 … ^^)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아서만 감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둔 곡식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그 곡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그 곡식을 허락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십시다. 농사가 잘 된 해에도 그리 하고, 농사가 잘 안 된 해에도 동일하게 그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십시다. 비록 힘든 삶이어도, 그 삶을 허락하시고, 그 삶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무교절 예배임을, 우리 자신이 기억하고, 또한 아이들에게 가르치십시다. 할렐루야. 우리가 무교절에 관해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무교병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시면서 단순히 무교병에만 관심을 두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15절을 보면, 무교병을 먹긴 먹되, 어떤 것을 꼭 행하라고 하십니까? 네, 그 첫날에 집안에 있는 누룩을 모두 다 제거해야 합니다. 누룩을 남겨둔 채로 무교병을 먹는 게 아니라, 누룩이 제거돼서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교절 일주일 동안은 누룩 사용을 완전히 금하겠다는 의지가 첫 날 드러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겠지만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누룩을 다 제거하고 무교절 이후에는 새 곡식으로 만든 새 누룩을 다시 띄워 반죽을 발효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은 과거의 누룩과 단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효제인 누룩은 결국 인공적으로 곡식에 피워 만든 곰팡이이기에, 성경에서는 부패와 죄악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 곡식으로 제사를 드릴 때 지켜야 할 핵심이, 누룩을 넣지 않는 것입니다. 소제나 화목제가 그렇습니다. 나실인이나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을 위한 제사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룩은 정결하지 못한 삶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무교절을 통해 집안의 모든 예전 누룩을 다 제거한다는 것은, 과거의 순전하지 못한 삶의 모습이나 습관들을 멈추고 제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만들어지고 또 퍼져버린 죄의 습관들,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았던 일상들,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바로와 돈의 백성으로 살았던 그 경건하지 못한 삶의 누룩을 버리고 단절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교절의 또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무교절 첫 날 집안 대청소부터 시작합니다. 집을 깨끗하게 하려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라, 집안 구석구석 떨어지고 숨겨진 누룩들을 남김없이 다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무교병도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요즘엔 다들 바쁘고 힘드니까, 유대인들 사이에, 무교절 누룩 제거 대행업체가 생겼다고도 합니다. 무교절에 유대인들이 꼭 하는 가정 게임이 있는데요, 소위 ‘묵은 누룩 버리기 게임’(‘베디캇 하케츠’)입니다. 엄마가 옛 누룩으로 빚은 10개의 작은 떡을 집안 곳곳에 숨겨둡니다. 그러면 날이 저물고 어두워진 저녁 때 아빠와 자녀들이, 작은 기름 등을 들고 온 집 구석구석을, 마치 보물찾기 하듯, 그렇게 그 떡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흰 천에 다 싸서 집밖으로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불에 태우는 방식으로 집안의 모든 옛 누룩을 제거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겠지요. 하나님이 유월절을 통해 이 백성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새 날을 선포하고, 새 피조물 됨을 선언하셨다고. 오늘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부패한 습관들로부터 떠나, 온전히 새로운 삶으로 다시 한 번 힘껏 돌이키자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결단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무교절은 묵은 누룩을 내버리고, 다시금 새 삶을 선택한다는 의미를 담은 상징적 행위이자,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럼 이 무교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네, 우리가 매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며 나누고 있는 성찬의 떡이 무교병인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 삶을 선택하지는 못할지언정, 주님의 날, 주님의 몸 된 무교병의 떡을 먹으며, 다시금 묵은 누룩을 내버리고, 존귀한 자에 어울리는 존귀한 삶으로 힘껏 돌이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묵은 누룩’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강한 어조로 권면한 바 있습니다.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린도전서 5:7~8) 명절을 지키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늘 묵은 누룩은 내버려두고, 종교적 행위만 반복하는 것은 그만 하고, 부패와 죄악을 제거하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 권면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위협하던 음행의 문제였습니다. 화려한 항구도시 특유의 음행의 관습들이 교회 안에도 버젓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엄하게 경고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절대 세상의 누룩, 옛 삶의 누룩을 교회 안으로, 성도의 삶 속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런 누룩은 제거하라고, 그걸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 절기를 지키지 않는 이를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게 하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세상이 그런다고 교회도, 성도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하기야 요즘은 세상이 교회 걱정을 하는 시대이니, 이것도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누룩을 찾고 버려서,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비록 출애굽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애굽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430년의 긴 세월의 습관과 관습이 어디 쉽게 사라지겠습니까? 무교절을 통해 그 묵은 누룩을 찾고 제거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아빠와 자녀들이 등불을 들고 숨은 누룩을 다 찾아내듯, 저와 여러분도 성령의 빛을 비추어, 우리 안에 감춰진 누룩들을 찾아내고 제거해야 합니다. 쉽게 발견되지도 않고, 발견된다 해도 쉽게 제거되지 않는 그 누룩들을 온전히 태워버릴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적은 누룩이어도 금방 온 땅에 퍼져 우리의 삶을 부패하게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간과하지 않는 철저함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날마다 옛 누룩을 버리고, 순전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누룩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누룩을 조금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심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초점을 맞추신 누룩의 문제는, 부패가 아니라 ‘부풀림’이었습니다. 어떤 대목에서 주님이 ‘누룩 이야기’를 하셨는지 기억나시지요? 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는 말씀에서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누룩, 이게 어떤 말씀입니까? 당시는 오병이어 기적이 있고난 직후였지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다시 겉으로 드러나는 표징을 요구하자, 주님이 요나의 표적 외에 보여줄 게 없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방금 그 말씀으로 주의를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우리가 주님 잡수실 떡을 안 챙겨 왔다고 주님이 지금 뭐라고 하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아시고 그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지요. 그 떡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그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이면 무교절을 잘 지키겠습니까, 아니면 적당히 하겠습니까? 네, 당연히 엄격하게 지킵니다. 무교절에 바리새인들의 집안에는 아마 누룩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밖에 있는 누룩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다른 누룩, 곧 그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질타하십니다. 빈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열매 없는 경건, 과장되고 거짓되게 부풀려진 신앙, 말만 번지르르한 헛된 가르침들을 주님은 그 무엇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워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향해, 안에는 썩은 송장이 들어있는데, 겉만 예쁘게 꾸며놓은 무덤 같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건 중심이고 마음이지, 드러난 외적 표현이 아니라 하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위선의 문제에 누구보다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선적이지만, 특별히 성경은 성도에게, 세상과 구별된 삶을 강조하고, 그것을 삶으로 고백하라고 또한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우리는 세상보다 더 외적 경건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술과 담배만 안 하면 좋은 신앙인 것인 양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는 순간, 이 위선의 누룩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진짜 나인 것처럼 착각하고, 아예 그렇게 자신을 속이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이 위선의 누룩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분위기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신앙의 모습만을 그의 실력으로 판단해버리는 한, 그리고 거기에 초점을 둔 교제와 나눔이 이어지는 한, 이 누룩은 온 공동체를 덮어버립니다. 다 겉으로 하는 척만 하기 바쁘게 됩니다. 한 번 핀 곰팡이처럼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드러난 것을 토대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함께 극복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드러난 행위가 마음의 결과인 것도 부정할 수 없지요. 그래서 이 문제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위선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동행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내 일부, 나의 페르소나 같은 것(진정한 내가 아닌 세상에 드러난 나)일지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삶의 진짜 동기를 숨기고 산다.”(소설, ‘설계자들’ 중에서)는 말처럼, 아마 위선이 없어진다면, 우리 자신도 없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위선을 제거하려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자신이 위선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정 속에서, 그런 위선적인 페르소나들을 얼마나 깊이 성찰하고 분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예 나는 위선과 무관하며, 그것을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마치 그럴 수 있을 것처럼 자신과 남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누룩의 포자 같은 존재일 겁니다. 세상 속에서도, 교회 속에서도, 원치 않는 누룩을 퍼뜨리고 말 것입니다. 차라리 바울처럼, 나는 ‘죄인의 괴수’라는(딤전 1:15) 고백을 반복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하는 자라고(롬 7:19) 인정하고, 그러면서도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최후 승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경건의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 할 겁니다. 문제는 시선의 방향입니다. 무교절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의 집 누룩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을 쓸 수도 없습니다. 나 자신과 내 가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절기가 무교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내려다보며 끌끌 혀를 찹니다. 반면 세리는 그 시선의 방향이 ‘자기 자신’입니다. 남과의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을 향한 절대적인 시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친구가 되십니다. 결국 교만과 겸손의 차이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타인의 모습과의 비교로 상대적인 의로움에 시선을 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할 때, 우리는 위선과 완전히 결별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 누룩이 퍼지는 일만은 예방할 수 있을 겁니다. 과거의 누룩을 찾고 제거하는 일이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평생의 숙제임을 무교절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겉으로 드러난 누룩이 아니라, 감춰지고 숨겨진 누룩들을 더욱 조심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무교절은 시작됩니다. 지금 누리는 것들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내 존재와 정체성이 바뀐 그것에 대한 감사가 무교절의 감사입니다. 더불어 내가 받은 은혜가 다른 이들의 노고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나그네와 종들을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함을 잊지 않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삶과 영혼 깊은 곳에 고정시켜, 숨은 누룩들을 제거하고,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선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무교절의 의미와 교훈을 잘 기억하고 반추함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주님 받으실 정결하고 존귀한 예배 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 순전하고 진실한 그 떡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항상 풍성하게 누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