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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2. 여호와의 유월절
2019-02-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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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227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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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2장 1~14절, 여호와의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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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굽을 향한 마지막 장자 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바로에게 전달되었고,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장자인 이스라엘을 그 재앙으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을 정하여 모세와 아론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법을 하나의 중요한 절기이자 명절로 정하시는 장면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은 이 마지막 재앙과 유월절 절기를 하나의 새로운 월력(月曆)과 함께 세우신다는 것이 본문 전반부의 내용입니다. 출애굽을 준비하는 마지막 이 순간이 바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 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든 시간표를 리셋(reset)하시는 건데요,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이제 오늘부터 우리 1일!’이라고 선언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해, 새롭고 특별한 관계 가운데로 초청하시는 프러포즈인 것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애굽의 백성이 아니며, 노예도 아니며,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내 나라의 내 백성, 내 장자라는 선언입니다.
새 월력이 주어졌으니, 실상 유월절이 제정되는 바로 지금이 ‘가나안 제1년’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비록 광야에서 긴 시간을 떠돌게 되지만, 이때 제정된 새 월력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시작을 알릴 때 왕이나 황제는 연호를 바꾸지요. 고종께서 대한제국의 연호를 ‘건양’으로, 또 ‘광무’로 바꾸어 국운을 새롭게 하려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 시점을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로서의 첫 출발이 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유월절과 함께 시작된 이 새로운 월력의 영적 의미가 계속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날, 이 시간을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하시는구나, 마치 창조 이전 혼돈의 상황 속에서 빛과 날을 만드시고 기뻐하신 것처럼, 진정 당신의 백성들을 혼돈으로부터 창조의 새로운 세계 가운데로 인도하기 원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날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아가는 것이 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이루어집니다만, 실상 광야에서 나가는 것도, 다시 말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도 바로 이 유월절에 이루어집니다. 정확히 1월 10일에 할례를 받고, 3일의 회복기를 거친 후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때도 정확히 1월 14일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가나안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태를 벗고,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유월절에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갔던 바벨론에서 자유를 얻어 돌아오던 때에도 바로 이때 정한 월력에 따라, 유월절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출애굽이 아니라) ‘출바벨론’의 첫 발을 떼는 역사적인 순간이, 첫째 달 초하루에 시작되었고, 정확히 4개월 만에,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는데요(에스라 7:9), 마치 억지로 짜 맞춘 것처럼, 자유를 향한 두 번째 여정 역시 출애굽, 첫 유월절과 같은 시간표를 따른 것입니다. (세 번째 유월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예와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달력, 새 시간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새 나라,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 그들이 더 이상 과거의 삶을 반복할 수 없음을 드러내십니다. 더 이상 노예도 아니요, 포로도 아닌 겁니다. 본래 노예는 달력이 필요 없습니다. 있어도 별 의미가 없지요. 카이로스가 없기에 크로노스도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들은 시기와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그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루하루 끝마치며 살면 그만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뭘 해야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그런 고민이 필요 없지요. 그건 주인이 다 알아서 합니다. 노예는 시키는 거기까지만 하면 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달력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고, 자기의 삶을 살게 되면, 그때부터는 시간에 주목합니다. 달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의 수고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당장 먹고 사는 문제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소망과 계획 가운데 오늘의 의미를 규정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거기에 맞춰 필요한 행동을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달력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달력은 자유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고, 분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과 함께 주신 새 달력은,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아무 감각 없이, 그저 세상과 시간에 떠밀려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이 어떤 시점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무감각한 상태로 그냥 하루하루를 소모하기 바쁠 때가 있습니다. 달력이 한 장 더 넘어가고, 또 계절이 바뀌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지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자칫 뭔가의 종으로, 포로로 살아가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저희가 곧 암송하게 될 말씀인데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하는 권면 가운데,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1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가 좀 이상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이 없거나, 어떤 때가 임박했을 경우에 하게 되는데, 바울은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 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껴야 하고, 세월을 아끼는 것은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단지 열심히, 부지런히 사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근면하게 사는 것이 나쁠 게 없지요. 그러나 아무 감각 없이 그저 종처럼, 노예처럼, 열심히 사는 건 ‘어리석은 열심’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고 정말 세월을 아끼는 삶이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선택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고 할 때, ‘아끼다’라는 이 동사는 사실 ‘엑사고라조’인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구속하다’, ‘속량하다’입니다. 영어로는 ‘redeem’이지요. 단지 시간을 아껴서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태도와 행동을 선택함으로써, 내 삶의 시간을, 세상의 악한 시간으로부터 구원해내라, 되찾아오라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몸의 출애굽은 시간의 출애굽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도의 이 권면은 일차적으로, 오히려 우리의 분주함을 좀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불필요한 일들을 멈추고, 주의 뜻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내 삶의 시간들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순응해버린 여러 억압과 악한 주인들을 분별하고, 그것들을 섬기는 불필요한 분주함들을 내려놓으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참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뜻을 힘껏 따르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 분별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어떤 시간을 사느냐가 우리가 누구의 백성인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요즘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는데요, 그 중에 여성 독립 운동가였던 김마리아 선생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지요. “그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독립됐을 것이다.” 그런 김마리아 선생이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재판정의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네가 모임을 조직한 것이 대정(大正, 일본 연호) 몇 년이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 김마리아 선생은, 얼굴에 냉소를 띄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서력만 알지 일본 연호는 모른다.” 자신이 일본 백성이 아님을, 지금 이 땅이 일본의 땅도 아님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지 애굽이라는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시간으로부터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새 달력이 필요하고, 또한 유월절이 필요하며, 그 날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삶의 반복적인 쉼표들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이 말씀의 자리, 예배의 자리가, 그런 쉼표인 셈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리의 자유가 무엇을 향해 얻은 자유인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자리이지요. 여러분, 다시금 이 말씀을 통해 악한 세상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의 시간을 구속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유월절은 그렇게 새 달력으로 시작된 새해 1월 10일부터 준비된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날 저녁 각 가정마다 어린 양을 한 마리씩 잡습니다. (3절에, ‘잡을지니’의 ‘잡다’라는 이 동사 ‘샤하트’는 사실 창세기 22:10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 사용된 그 동사입니다. 말 그대로 짐승을 도살하는 것인데요,) 하지만 이 날 바로 양을 잡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어린양을 잡는 건 사흘 후, 그러니까 1월 14일 저녁입니다.
즉 1월 10일에는 여러 마리의 양들 중에서 어린양 한 마리를 미리 선택합니다. 그리고 14일까지 우리에 넣어두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유월절을 준비하는 이 과정 자체가 이미 유월절의 일부입니다. 유월절 당일에 아무 거나 한 마리를 골라서 잡는 게 아닙니다. 미리 한 마리를 택하고, 그것을 우리에 넣어 잘 보호하고 보존해야 합니다(6절, ‘샤마르’, 간직하다). 양이 다른 것들과 함께 있다가 다치거나 상처가 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유월절이 뭔가 긴박한 시간임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준비 과정은 결코 급하게 이루어지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급하게 허둥지둥 선택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여유를 두고 주의를 기울여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일임을, 그래서 하나님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유월절’(11절, 14절)이라고 주장하심을 기억해야 하고, 따라서 거기에 뒤따르는 여러 규례들을 주의를 기울여 준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이기에, 하나님은 어떤 양으로 어떻게 잡고 먹을지를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1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잡는데, 중요한 건 가족 숫자와 잘 맞춰야 합니다. 저녁 한 끼에 온 가족이 다 나눠 먹을 수 있는 적당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보통 어린양 한 마리로 10명 조금 못 되게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대가족이 더 많았을 때이니, 한 마리면 적당했을 겁니다. 가족 수가 너무 적은 경우에는 그 한 마리로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이웃을 찾아서 미리 약속을 하고 나눠 먹어야 합니다. 모든 집의 가장들은 이것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모자라지 않을지, 또 남지 않을지를 미리 생각해서 마릿수를 정하고, 이웃과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준비 때문에라도 시간은 충분해야 합니다. ‘준비된 자의 긴박감’이라고 할까요, 유월절은 그 마음가짐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준비된 어린양을 해가 질 때(6절), 직역하면 ‘두 저녁 사이에’, 그러니까 ‘저녁부터 밤 사이에’ 도살합니다. 그리고 먹기 전에 먼저 그 피를 받아 집 좌우 문설주, 즉 문의 양쪽 기둥과 그 위쪽을 가로지르는 가로대를 칠하게 되는데요, 우슬초에 적셔서 칠합니다. 우슬(牛膝) 곧 ‘소의 무릎’이라는 이름은, 퉁퉁한 마디의 생김새가 마치 소의 무릎과 같다하여 붙여졌고, 가지가 많고 줄기에는 털이 많아 물을 잘 흡수한다고 합니다.
우슬초로 피를 다 발랐으면 이제 가족이 함께 유월절 식사를 시작합니다. 고기를 굽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습니다. 고기는 반드시 구워먹어야 합니다. 날 것으로나 삶으면 안 됩니다. 또 일부분만 먹으면 안 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양 전체를 먹습니다. (10절에 “뼈를 부러뜨려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70인 역’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말씀(9:12)에 보면, 유월절 양의 경우, 잡아서 먹을 때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는 규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을 정말 통째로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기 파티가 아니라,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식사인 겁니다.
사실 이런 방법은 평범한 가정의 조리법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린 양을 그런 식으로 먹기가 너무 불편하고 또 지금의 조리 방식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입니다. 아주 가끔 유월절에 어린 양의 정강이 살을 먹기는 해도,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이 거의 닭으로 먹는다고 하는데요, 오직 사마리아 사람들만 아직도 이 방법 그대로, 가죽도 벗기지 않고 내장도 빼지 않은 어린 양을 그대로 구워 먹는다고 전해집니다.
고기는 날 것으로도 안 되고, 삶아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구워 먹어야 합니다. 누구나 쉽게, 빨리,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구이’이지요. 저희 가정도 결혼하고 처음에는 고기를 많이 구워 먹었습니다. 요리는 할 줄 모르고, 둘 다 피곤하고 힘드니, 주말이면 그냥 고기 사다가 대충 구워서 먹는 게 가장 풍성한 식탁이었습니다. 여기엔 별로 필요한 게 없습니다. 그냥 고기와 채소만 있으면 됩니다. 고기를 삶아서 먹으려면 큰 솥도 있어야 하고, 물이나 양념도 필요한데, 그런 거 준비할 여유와 실력이 없으니 그냥 구워서 먹습니다. 맛은 좀 부족해도 고기를 먹는다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유월절 식사가 그렇습니다. 맛있는 요리가 필요한 식사가 아닙니다. 속도를 내어 급히 먹어야 하는 식사입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냥 밀가루에 물만 섞어 반죽한 빵을 먹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빵을 부풀게 하여 맛있게 먹을 그런 시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고기 굽는 화로에 반죽도 그냥 함께 구워 먹습니다. 그게 무교병입니다. 쓴 나물도 같은 이유인데요, 나물 요리라고 하니까 우리처럼 삶고 볶고 양념하고, 뭐 그런 걸 생각하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쓴 나물은 우리로 따지면 그냥 소스 없는 샐러드 같은 것입니다. 랍비들의 전승에 따르면, 상추나 민들레, 치커리 등이 유대인들의 쓴 나물인데요, 다른 조리 없이 고기와 함께 (싸서) 먹으라, 이런 뜻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식사의 초점은 일차적으로 급히 먹는 것입니다. 비록 저녁부터 밤까지 시간이 충분하니 천천히 먹어도 될 것 같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몸과 마음에 긴장을 두고 먹어야 합니다. 11절 말씀에 ‘급히 먹으라’고 되어 있는데, ‘급히’라고 번역된 이 표현, ‘베힙파존’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황급하게, 가능한 한 빨리 먹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워하며, 마음을 조이면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속도의 문제를 넘어 태도의 문제인 겁니다.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먹는 게 아닙니다. 축하 만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임재를 목전에 둔 거룩한 식사입니다. (그에 비해 성찬식은 훨씬 여유 있고, 풍성한 식탁입니다. 거기엔 포도주가 한몫을 하지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게 아니라, 피를 마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합니다.)
하지만 유월절 식사는 배불리 먹고 좀 남기고 하는 그런 고기 파티가 아닙니다. 최대한 남기지 않아야 하고, 만약 남았으면 불에 태워서 버리고, 절대 남겨둬서 부패하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집밖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과 그 고통에 대해서 그들은 무감각한 채로 식사를 하면 안 됩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구원 역시도 짐승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얻은 것임을 기억하며 먹는 것이니, 마음을 붙잡고 생각을 정돈하며 먹어야 합니다.
11절에 보면, 먹을 때 어떤 차림새를 하고 먹어야 하는지도 나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먹습니다. 결코 편한 모습이 아니지요. 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견습 사역자로 파송하실 때 제자들의 모습과 거의 일치합니다. 파송 받아 떠나는 순례자처럼 전투적으로 먹습니다. 앉아서 편하게 먹는 게 아닙니다. 온 가족이 다 곧 나갈 것처럼, 모든 외출 준비를 마치고 일어선 채로 먹는 겁니다. 말 그대로 탈출을 위한 마지막 식사입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허리에 띠를 띠는 경우는 세 가지입니다. 먼 여행을 떠날 때나, 달리기와 같은 경주를 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터에 나갈 때입니다. 지팡이를 잡으라 했으니, 아마도 먼 여행, 곧 순례(巡禮)를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해외여행을 떠나기 위해 이른 아침 서둘러 식사할 때, 어떻게 먹습니까? 상을 거하게 차리고 이것저것 차리며 거하게 먹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히, 급히 먹거나, 때로는 공항에 가서, 대기하는 줄에 ‘서서’ 먹기 위해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갈 때도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바로 그런 식사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례를 위한 식사이지요.
하나님은 이 유월절 식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고, 어떻게 자유를 되찾게 되었는지를 그들의 몸으로 기억하게 하십니다. 유월(逾越, 지나쳐 넘어가다, Passover), 곧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지나쳐 넘어감으로써 먹는 식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문밖에 있으며, 그 임재는 심판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먹고 있는 어린 양의 죽음이 곧 그들 자신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그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방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싶은 대로, 원하는 조리법대로, 그렇게 이 밤을 보내면 안 됩니다. 이 밤 동안에는 문밖으로 절대 나가서도 안 됩니다. 이제껏 아홉 번의 재앙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겸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구원에 필요한 것은 그 단순한 믿음뿐입니다. 내가 만든 구원의 방식과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신뢰의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아홉 번의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신뢰, 그 신뢰의 믿음으로 출애굽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결국 그 여정입니다. ‘순종하는 신뢰’이지요. 사실 한밤중에 양을 잡아 그 양의 피를 잔뜩 문에다가 바르는 것, 그리고 온 가족이 옷을 차려 입고 빙 둘러선 채 그 고기를 먹고 하는 이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대단히 기이하고, 그 자체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구별되고, 출애굽합니다.
왜 굳이 ‘유월절’이 필요했을까요? 지금까지처럼 그냥 마지막 재앙 이후에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이렇게 어떤 규례들 속에서 하나의 절기를 제정하여 지키게 하심으로 출애굽 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유월절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을 벌이신 사건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 지금까지 아홉 번의 재앙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아무런 조건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을, 재앙으로부터 구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셨고, 떨어지는 우박도 고센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른 재앙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닙니다. 이번에는 고센 땅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문, 그 가정만을 구별하십니다. 땅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시며, 사람이 아닌 그 속의 믿음을 구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어서 구별하는 게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구별합니다. 모세를 보고 이스라엘을 봐서 재앙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를 봐서 재앙이 넘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 안에도 죽음이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죽음. 맏아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 이미 치러진 희생의 죽음, 이미 흘려진 희생의 피가 있음을, 하나님은 기억하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안전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 흘림으로 이루어지고 보장된 안전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러분, 주님의 그 죽음이 언제입니까? 유월절 명절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 기억나시지요? 정확히 언제입니까? 요한복음에 따르면, 유월절 축제의 전날이며, 유월절 준비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역시 유월절에 사용되는 양들이 도살되는 바로 그 시각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유월절 양들의 뼈가 꺾이지 않아야 하듯, 예수님의 죽으심도 그러했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의 몸으로 세워진 새 유월절이며, 새 유월절 식탁입니다. 성찬은 바로 그 식탁의 식사인 것이지요.
14절에 보면,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고 말씀하는데요, 유월절은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여호와의 영원한 유월절’로 세워집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창 22:8) 이야기한 것 그대로 결국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 양 그리스도의 피로,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구원과 안전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그 준비하심과 그것에 반응하는 이스라엘의 모습, 곧 ‘순종하는 신뢰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영원한 절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그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의 백성인지, 누구의 준비와 보호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인지, 이 세상 가운데 삶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몸만 애굽을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간이, 우리의 삶이 온전히 애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주님은 소망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가 악하니 세월을 구원하며 사십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선택하며 사십시다. 그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니, 어리석은 분주함을 내려놓고, 조금 더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나는 일본의 백성이 아니니 일본의 연호는 모른다 하던 김마리아 선생과 같이, 우리가 누구의 백성이며, 누구의 나라를 살고 있는지, 늘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